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94화 (94/354)

094. 점검(點檢)

“540야드가 525야드로 바뀐 거네요?”

“미끼를 던진 꼴입니다. 2온을 노리라고.”

“모모코는 이미 2온 시도를 해 봤잖아요.”

“그렇죠.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2온을 시도할 겁니다.”

이 대표는 차마 위험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이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승부다. 다음이 없는데 무얼 고민하겠는가.

그러나 아너로 나선 모모코는 먼저 칼을 빼 들지 않았다. 강한 임팩트로 안전하게 페어웨이를 지켰는데 비거리는 264야드였다.

“어? 참았네요?”

“네. 저보다 한 수 위네요.”

“무슨 의미에요?”

“상대를 먼저 자극한 거죠. 할 테면 해 봐라.”

“걸려들까요?”

두 번째로 나선 전 프로는 걸려들지 않았다. 그녀는 모모코와 동일하게 안전한 선택을 했고 결과도 아주 비슷했다.

하지만 호전적인 안 프로는 참지 않았다.

평소 힘이 부족하지 않지만 무리한 스윙을 하지 않는 그녀가 작정하고 휘두른 드라이브 샷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거리라도 적게 나갔다면 괜찮았을 방향이지만 드로우가 걸린 공은 좌측 헤비 러프로 들어가고 말았다. 조금 더 강했다면 나무가 울창한 숲으로 들어갔을 텐데 불행 중 다행이었다.

“뭐지?”

“남은 거리가 260야드 아닌가요?”

전 프로는 확실하게 잘라 갔다.

본인이 좋아하는 60야드를 남겼는데, 문제는 모모코가 3번 우드를 잡았다는 것이다.

물론 드라이브 못지않은 거리를 보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린 좌우와 앞이 가드 벙커로 둘러져 있고 그린을 향해 개방된 폭은 절반에도 못 미치기에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하지만 말릴 수도 없는 노릇, 이 대표와 필상은 모모코의 우드 샷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럴 것 같으면 진즉에 비거리를 좀 내지.

탕!

총성처럼 울려 퍼진 타구음의 끝에 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힘을 잔뜩 머금은 공이 나타난 지점은 이미 100야드는 나간 후였다. 낮은 탄도지만 그린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모습에 비로소 안도했다.

이젠 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 벙커 앞에서 멈추면 좋을 것 같았으나 모모코가 공에 실은 힘은 그 범위를 벗어났다.

“가! 넘어!”

벙커 한참 앞에서 지면에 닿은 공은 미끄러지듯이 벙커를 향했고 필상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공은 기어코 벙커 턱을 기어올랐다.

-우와! 멋지네요! 모모코.

-본인은 아쉽겠지만 충분히 퍼팅이 가능한 거리입니다. 18번 홀에서 보여 줬던 그런 멋진 스트로크라면 적어도 버디는 보장받았다고 보는 게 합당합니다.

-잘라 갈 것처럼 안전한 티샷을 한 것이 다 작전이었나요?

-그런 것 같습니다. 본인은 260야드를 공략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상대로 하여금 먼저 실수를 유발케 한 것입니다.

-그럼 천하의 안 프로가 거기에 걸려든 거네요?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안 프로도 나름 승리를 위한 승부수를 던진 겁니다. 페어웨이 안착률이 늘 최상인 그녀로서는 충분히 해볼 만한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음……. 일단 러프에서 안전하게 꺼낸 뒤, 서드 샷을 노려야겠군요.

그러나 안 프로의 공은 질긴 풀에 너무 깊이 잠겼다.

그래도 안전하게 꺼내는 것이 중요한데, 숏 아이언이 아닌 6번 아이언을 잡은 것이 문제였다. 러프의 저항을 감안해 160야드 정도를 보내려고 한 것 같은데 결과는 쓰라렸다.

정확한 임팩트가 이뤄지지 않아 100야드도 보내지 못한 그녀는 서드 샷을 벙커에 빠뜨리며 경쟁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하지만 전 프로는 침착하게 로브 샷을 날려 버디 기회를 잡았다. 2.4m, 절대 편한 거리는 아니지만 일단 모모코의 롱 퍼팅부터 지켜봐야만 했다.

지켜보던 이 대표도 한결 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넣을 것 같아요.”

“일단 유리한 고지를 점했으니까 넣지 못하더라도 확실하게 붙이는 게 중요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필상도 느낌이 아주 좋았다.

오늘 모모코의 퍼팅감은 어디에 내놔도 뒤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흥분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모모코의 표정을 확인한 필상은 안도했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모모코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호호호. 연애 못 할까 봐서요?”

“그게 아니라 저 표정 좀 보세요.”

이 대표도 그녀의 표정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는 진지한 느낌만 들었을 뿐,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걸 눈치챈 필상은 사실을 확인시켜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모코는 지금 팬들의 시선을 즐기고 있어요.”

“긴장하지 않고요?”

“그러니까요. 우승이 걸린 퍼팅인데도 오히려 느긋하게 라이를 살피는 걸 보세요. 배포 하나는 정말 세계 최고죠!”

“둘이 겨울에 약혼한다면서요?”

“어?”

“맞죠?”

모모코의 행동을 보고 넘겨짚었는데 긍정의 반응을 보이고 만 것이다. 하기야 가족 외에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최우선 순위여서 알리는 것이 적절하기는 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모모코가 마침 어드레스에 들어갔다. 침착하게 자세를 잡은 그녀는 공이 굴러갈 라이를 따라 홀컵을 확인한 뒤 과감하게 밀었다.

“인 더 홀!”

누군가의 외침대로 되기를 바란 필상도 숨을 죽이고 쳐다봤다. 다소 강한 것 같지만 약한 것보다는 낫다.

그리고 또다시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홀컵 중앙을 파고든 공이 아래로 뚝 떨어진 것이다. 이글, 더 이상 다른 선수들의 퍼팅을 볼 것도 없는 극적인 우승이었다.

홀컵에 떨어진 공이라도 꺼내야 하건만 미사키와 하이파이브를 나눈 모모코는 한 지점을 향해 폴짝 폴짝 뛰어갔다.

볼 것도 없이 바로 필상이 위치한 그곳이다. 뒷줄에 서 있던 필상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와아!”

달려들던 속도 그래도 필상에게 성큼 안긴 모모코는 두 팔을 목에 두르고 뺨을 부비더니 마구 입을 맞췄다.

미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애정 행각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이 없지 않을까 싶었으나 말릴 수가 없었다.

이 시간 주인공은 바로 그녀이기 때문이다.

그 덕에 필상도 동료들이 뿌리는 샴페인과 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써야만 했다. 아니, 모모코보다 더 많이 젖었다.

마지막까지 경쟁했던 전 프로와 안 프로의 작품이었다.

“좋겠다, 넌.”

“축하해요. 필상 씨.”

“아, 네. 고맙습니다.”

시즌 8승에 성공한 모모코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또다시 강력한 한국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한동안 누적된 한이 풀린 것인지 더더욱 칭찬 일색이었다.

그쯤 되자 괜히 부담스럽기는 했다.

자신은 코치로서, 또 연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인데, 그로 인해 우승이 좌절된 이들이 한국 선수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 말린다고 될 것도 아니고 그런 것까지 마음 쓸 겨를도 없어 금방 잊어야만 했다.

***

[퍼펙트 콩, 미쓰이스미토모 비자 클래식 우승!]

모모코가 우승한 다음 주에 벌어진 대회에 출전한 필상은 보란 듯이 시즌 7승을 해냈다.

눈에 띄는 점은 -12라는 낮은 성적이었는데, 내용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공동 2위가 3명이었는데 -2에 불과했다.

또다시 두 자릿수 타수 차를 보이며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자 일본 언론의 반응도 덩달아 달아올랐다.

JGTO 최다승을 확보했고 모든 지표에서 1위를 싹쓸이했기에 그 가치를 저평가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을 뱉는 셈이다.

게다가 나이키가 흘린 정보도 한몫했다.

10억 엔이라는 금액은 일본 투어의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상상 밖의 거금이었기 때문이다.

“나이키가 제 얼굴에 아주 금칠을 하네.”

“근데 정말 10억 엔 맞아요?”

“Golf Nippon Series JT Cup 우승하면.”

“우와! 씨!”

“어? 씨는 왜 붙지?”

“부러워서 그러죠. 부러워서.”

“걱정 마. 이 대표가 네게도 천문학적인 금액을 안겨 줄 테니까.”

“아니요. 오빠가 많이 버는데 전 그냥 선수 생활 접고 오빠 뒷바라지나 할까요?”

“하하하. 그럼 나야 좋지.”

농담인 줄 알았는데 모모코의 진지한 표정을 보자 그냥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왕의 칭호까지 받는 그녀가 골프채를 놓는다면 필상은 당장 일본 열도를 떠나야만 한다. 그녀의 팬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모모코. 난 네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걸 고맙게 생각해.”

“네? 그건 대체 무슨 말이에요? 제가 혹시 여자로서 매력이 없다는 건가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경쟁자가 아니라서 좋다고.”

“흐흐흐. 제가 한 골프 하기는 하죠.”

“우리 나란히 그랜드슬램 달성해 보자.”

“PGA, LPGA 말이죠?”

당연했다.

일본 투어에서의 경쟁력은 이미 증명되었다.

더 큰 무대가 있는데 일본투어 그랜드슬램을 위해 투자할 시간은 아껴야만 한다.

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운동선수는 나이가 들면 모든 기량이 전반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보다 큰 도전을 해야만 한다.

그러다 문득 모모코는 자신과 띠 동갑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자신이 이룩할 수 있는 것보다 적어도 10년 이상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어 부러웠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힘의 원천이 되는 자신이 있지 않던가!

“난 고치 현으로 바로 갈 거야.”

“어차피 그 다음 주도 못 만나잖아요.”

JLPGA는 이제 2개 대회만 남았다.

이번 주 엘리에르 레이디스 오픈과 다음 주에 JLPGA 투어 챔피언십이 마지막 대회라서 시즌 10승을 노리는 모모코의 출전은 이미 확정되었다.

필상도 다음 주에 열리는 카시오 월드 오픈과 시즌 최종전인 니폰 시리즈에 연속 출전하기 때문에 한 주는 겹친다.

그나마 이번 주는 비기 때문에 모모코는 필상이 함께 움직여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2주 연속으로 대회에 참가하는 무리수를 둬야 하기 때문에 그 전에 필히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

“니폰 시리즈가 열리는 요미우리 CC에서 만나면 되잖아.”

“싫어요. 오빠랑 같이 자고 싶다고요.”

“모모코!”

“같이 가요. 응?”

정색을 해도 착 달아 붙어 보채는 통에 필상은 속내를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전에 경기하다 말고 쓰러진 적 있잖아.”

“왜요? 몸이 안 좋아요?”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2주 연속해서 경기를 펼치니까 문제가 좀 생기더라고.”

“컨디션 조절하면 되는 건가요?”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하지만 모모코는 알아들었다. 그녀도 필상의 신비한 능력을 직접 체험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전에는 무사히 넘어갔지만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두 남녀는 각자 다른 곳을 향해 출발했다. 모모코는 에히메 현으로 향했고 필상은 일단 가와사키의 집에 복귀했다.

대략 카시오 월드오픈까지는 일주일 정도 여유가 있어 자신의 문제점을 다시 점검해 보려는 의도였다.

“연습 안 해요?”

“응. 오늘은 무조건 푹 쉬자.”

“정말이죠?”

“그래. 바람 쐬러 나가고 싶으면 가도 돼. 외박도 허락!”

“무슨 일 있어요?”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기뻐하던 성호가 외박까지 허락한다는 필상의 말에 다시 엉덩이를 의자에 기댔다.

아무래도 평소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성호는 필상이 연습 중독자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어떻게 그리도 고집스럽게 한길에만 파고들 수 있는지 의아해 했다.

그런 필상이 아직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푹 쉰다니,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시즌이 끝난 것도 아닌데.

“혼자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제가 도와드릴 건 없나요?”

“응. 그냥 신경 쓰지 않게 해 줘.”

“알았어요.”

순순히 대답했지만 서운한 감정은 어쩔 수 없는지 성호의 표정은 시무룩했다. 그리고 외출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정원으로 나가 벤치에 자리를 잡은 필상이 상념에 잠긴 모습을 보며 성호도 노트북을 열었다.

나가지 않을 바에는 남은 2개 대회 정보를 살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수시로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꼼짝도 하지 않고 무언가 깊이 고심하는 필상을 보며 뭐래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활력이 넘쳐. 언제나!’

중독된 사람처럼 몇 시간을 연이어 연습하고 집중력을 요하는 라운드를 나흘 내내 치러도 피곤하지 않다.

한 번 불타오르면 식을 줄 모르는 모모코와 중노동보다 더한 애정 행각을 벌이고도 아침엔 언제 그랬냐는 듯 거뜬했다.

그런데 왜 2주 연속 대회 출전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그건 육체적인 사안이 아니다. 혼절했을 당시를 돌아보면 정신적인 문제가 육체를 무너뜨렸다.

괜히 머리가 아프고 샷 이미지 메이킹도 되지 않았으며 이런 상태로 더한 집중력을 발휘하면 사달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걸 무시하고 나약한 마음가짐 때문이라고 판단한 채 모든 생각을 샷에 쏟아부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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