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93화 (93/354)

093. 연장 혈투

어차피 중립적인 중계는 어렵다. 한국어로 중계하는 한국 골프 채널 시청자들의 바람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22야드에 52도 웨지를 잡은 모모코의 힘찬 스윙은 필상의 박수까지 이끌어 냈다. 핀 방향으로 정확히 날아간 공이 홀컵을 훌쩍 지났지만 스핀이 걸린 공의 회전이 느껴졌다.

결과는 기대 반 실망 반이었다.

3m을 오버했지만 쭉 빨려 후진한 공이 홀컵을 살짝 스치며 지나갈 때는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1m 남짓 붙인 것보다 마법 같은 백스핀이 모두를 경악케 한 것이다.

여자 선수들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출중한 기량이 검증되는 순간이었고 시즌 8승의 대위업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렇게 신중하게!”

죽어라고 연습했다고, 자신 있다고 마음 편하게 퍼팅을 하면 실수를 하게 된다. 그걸 어제 확실히 깨달은 모모코는 그 짧은 퍼팅도 루틴에 따라 차분하게 스트로크를 시행했다.

집중한 결과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1타를 더 줄인 모모모코는 급기야 선두와 1타 차 턱밑까지 추격했다.

그러나 선두 경쟁을 벌이는 안선주와 송보배 또한 순순히 물러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따라잡으면 도망가고, 위기다 싶으면 지켜 내고, 그야말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고받았다.

첫 번째 승부처는 핸디캡 1번인 15번 홀이었다.

“한 번 도전해 봐!”

자신이 캐디를 맡았다면 과감한 공략을 주문했을 것이다.

406야드의 오르막 파4 홀인데 우측 도그렉이라서 오늘 페이드 샷이 좋은 모모코라면 버디도 노릴 수 있다고 보였다.

하지만 캐디가 아닌 자신이 홀 공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관여할 수는 없어 둘의 호흡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도 한국어로.

“공격적으로 나갈 것 같아요.”

“어? 이 대표님.”

“네. 저 왔어요. 몇 타 차로 앞서고 있다면 모를까, 추격하는 입장이라는 걸 잘 아는 모모코가 이런 상황에 움츠러들 성격은 아니잖아요.”

“하하하. 그렇기는 하죠.”

할 말은 많지만 일단 티샷부터 지켜봤다.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선 모모코의 빈 스윙을 보는 순간, 필상의 가슴은 긴장 모드로 돌입했다.

의도적으로 헤드를 높이 치켜드는 그 스윙은 그녀가 페이드를 구사할 때의 스윙 궤적이기 때문이다.

까앙!

단단하게 고정시킨 하체, 부드러운 테이크백, 잘 꼬인 상체는 거리를 내기에 충분한 스윙을 만들어 냈다.

강한 임팩트가 가해지고 팔로우 스로우까지 완벽하게 이어졌지만 여전히 모모코의 시선은 공이 놓였던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림 같은 드라이브 샷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쭉쭉 뻗어 나가던 공이 도그렉인 홀의 모양을 따라 휘기 시작할 무렵에는 귀가 따가울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필상의 얼굴에도 하얀 미소가 피어올랐음은 물론이다.

비거리 270야드를 넘긴 타구는 그린을 공략하기 가장 좋은 페어웨이 우측에 얌전하게 멈춰 섰다.

“대단해요!”

“저 선수가 바로 이 대표님이 관리해야 할 모모코라는 프로입니다. 하하하.”

“아! 그런가요?”

주고받는 농담에 죽이 잘 맞았다.

우연한 기회에 만나 결국은 굉장히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다. 일찌감치 필상의 가능성을 알아본 그녀의 안목이 대단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바쁜데 연락드린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바쁘긴 하지만 그래도 공 프로님을 만나러 오는 길은 언제나 설레고 기분 좋아요.”

잠시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일단은 정확한 사실부터 알려 줬고 상황에 따른 입장도 밝혔다. 필상은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지만 이 대표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사업이라는 것은 때로 냉철한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아주 예의 바르고 사리에 밝은데, 가끔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하하. 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죠. 하지만 일단 확실하게 경고하고 재발 방지 조항을 문서로 남겨야 할 것 같아요.”

“그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는 엄한 생각하지 못하게.”

회사의 규모나 능력을 떠나 협력하기로 했다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견이 있을 시 합리적인 논의가 우선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미 잡은 고기를 놓친다고 여길 수도 있으나 그건 주인공인 모모코의 의사를 도외시한 무리수다.

그나마 기존 관계를 고려해 아량을 베푼 것이고 일본에서의 사업만 해도 적잖은 규모인데 욕심이 눈을 가린 것이다.

그 문제가 일단락될 무렵, 모모코의 세컨 샷이 이뤄졌다.

남은 거리는 143야드, 9번 아이언을 잡은 그녀는 그린 중앙을 공략했고 경사를 타고 흐른 공이 핀을 향해 구를 때는 또다시 열렬한 응원의 중심에 서 있었다.

-우와! 여필종부인가요?

-그건 적당한 표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두 연인이 모두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고 있지만 모모코는 이미 한 명의 위대한 선수의 족적을 남기고 있는 프로입니다. 굳이 공 프로와 연관 짓지 않아도 말입니다.

-아! 그럼 용호상박이라고 표현하면 되겠네요.

-그것도 적절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 모모코는 공 프로가 아닌 JLPGA의 최강자들과 경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하하. 제가 왜 이러죠? 어쨌든 정말 대단하네요. 이번 홀에 버디를 잡는다면 공동 선두로 올라서게 되죠?

-13번 홀에 들어선 안 프로도 버디 기회입니다. 마지막 홀까지 팽팽한 승부를 이어간다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모모코가 공동 선두로 올라서기 무섭게 안선주 프로도 타수를 줄여 또다시 리더 보드 최상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제 남은 홀은 3개뿐이다. 묘하게도 파3, 파5, 파5가 남은 상태에서 2타 차 우승 경쟁에 뛰어든 선수는 무려 5명이었다.

단독 선두인 안 프로와 1타 차로 따라붙은 모모코는 어느새 줄버디를 기록하며 치고 올라온 전미정 프로와 동타였다.

전 프로의 최근 기세를 알고 있는 필상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송보배와 히가 마미코까지 바짝 따라왔다.

2온이 가능한 파5 홀을 2개나 남겨 둔 상황이라서 누가 우승한다고 감히 장담하기 어려운 안개 정국으로 들어섰다.

-15 안선주

-14 모모코, 전미정

-13 송보배, 히가 마미코

“우승 스코어가 -16은 되어야 할 것 같죠?”

“아니요. -17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럼 3홀에 3타를 줄여야 한다는 건데, 그렇다면 정말 만만치가 않네요.”

“안 프로와 전 프로를 극복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절대 만만하게 물러설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필상의 그 예상은 적중하지 않았다.

파3, 16번 홀에서 5.5m 버디 퍼팅을 놓친 모모코가 17번 홀에서 3온 1퍼팅으로 버디를 잡고 18번 홀에서 2온을 노리다 벙커에 빠져 우승이 멀어지는 듯했다.

들어서면 머리도 보이지 않는 높은 벙커 턱을 넘긴 모모코의 공이 홀컵과 자꾸 멀어져 구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깝네요. 안전한 공략이 더 나았을까요?”

“아닙니다. 모모코의 선택은 옳았고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

공이 멈춰선 프린지에서 홀컵까지의 거리는 9.2야드, 족히 한 클럽은 봐야 하는 심한 슬라이스 경사였고 오르막 뒤에 내리막이 이어진 굉장히 까다로운 퍼팅이다.

하지만 필상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모모코는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라이를 살폈고 과감한 퍼팅을 시도했다.

다들 들어가라고 외쳐 댔지만 설마 그게 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소름이 돋을 만큼 정확하게 홀컵을 향해 굴렀고 홀컵을 빙그르르 돌더니 쏙 사라졌다.

“우와아아아!”

“모모코! 모모코!”

이보다 더 극적인 퍼팅도 없을 것 같았다.

그게 우승 퍼팅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나 17번 홀에서 이글 퍼팅을 아깝게 놓친 대신 버디를 기록한 안 프로도 -16을 찍었다.

또한 18번 홀 서드샷을 핀에 붙여 버린 전 프로도 그걸 집어넣으면 모모코와 동타가 된다. 평균 타수 4.72가 나온 18번 홀에서 안 프로가 버디를 잡을 확률은 상당히 높다.

이미 1, 2라운드에서 버디를 했던 좋은 기억도 있기에 혹시 모를 연장전을 위해 대기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였다.

“역시!”

일단 전 프로가 버디를 성공하며 셋이 나란히 공동 선두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안 프로의 티샷이 페어웨이 정중앙에 떨어지는 순간, 연장전의 가능성은 더 떨어졌다.

게다가 티샷 결과 남은 260야드를 무리하지 않고 유틸리티로 가볍게 때려 50야드의 서드 샷을 남기는 순간, 모모코도 연습을 멈추고 중계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승 경험이 별로 없는 선수라면 일말의 기대라도 할 텐데, 안 프로의 노련함과 탁월한 숏 게임 능력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이 놓인 위치도, 핀을 공략하는 방향도 좋아 그녀의 부드러운 칩샷의 결과는 홀컵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됐어!”

“어? 생각보다 강했네요?”

“시험에 들 겁니다. 하하하.”

2.2m 퍼팅, 평소 안 프로의 퍼팅 실력을 감안하면 성공 확률은 70% 이상이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가 아니다.

자칫 실수하면 두 명의 강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평소와 다른 스트로크가 나올 수도 있다.

남이 실수하기를 바라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입장이었다. 경쟁은 그런 것이니까.

홀컵 주변을 2번이나 둘러볼 때부터 필상의 표정은 살짝 밝아졌다. 이미 파악한 라이일 텐데 굳이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모습은 그녀가 긴장하고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스윽!

역시 안 프로였다.

수천 명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것을 아는데도, 그녀의 퍼팅 스트로크는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라이도 크게 없어 홀컵 우측 안쪽을 보면 된다.

멀리 서 있지만 남다른 시야를 가진 필상은 그녀의 공이 홀컵을 향해 정확히 굴러가는 것을 보고 희망을 내려놨다.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살짝 휘어야 할 지점에서 방향을 틀지 않은 공이 홀컵 우측을 타고 270도를 돌더니 왼쪽에 툭 멈춰선 것이다.

“으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수천의 갤러리들이 낮은 탄식 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은 억울할 안 프로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충분한 우승자의 자격을 갖췄다. 강력한 경쟁자들이 추격했지만 오늘도 5타를 줄이며 당당히 자신만의 플레이를 펼쳤다.

또한 마지막 퍼팅은 누가 봐도 하자를 찾을 수 없다. 왜 라이가 먹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휘어야 할 부근 잔디 결이 역결이었기 때문일 뿐인데, 그것까지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3명이 연장전에 돌입했다.

-안 프로, 굉장히 아쉽겠습니다. 하지만 빨리 잊어야겠죠?

-물론입니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본인이 가장 불리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하튼 3명 모두 누가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미 올해 한 번 이상 우승한 선수들이고 상금 순위도 모두 한 손가락에 드는 선수들이니까요.

-다승이냐 8승의 대위업이냐, 그게 문제지요. 아무래도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응원을 받는 모모코가 가장 유리할 것 같습니다.

-그런 기대가 오히려 부담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성격이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공 프로가 캐디를 봐 줬다면 우승 확률은 조금 더 높아졌을 텐데 그게 좀 아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허 해설위원은 다시 한 번 캐디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이전까지 아마추어 골프팬들에게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투어프로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캐디의 역할을 중시해 왔다.

성적이 부진하면 코치도 교체하지만 자신에게 맞는 캐디를 찾는 것이 보다 자주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런 사실이 필상을 통해서 더 정확히 알려지면서 요즘은 한국 골프장에서도 좋은 캐디를 찾는 내장객들이 많아진 게 사실이다.

“이러다 정말 시즌 10승을 거두는 거 아닐까요?”

“못할 것도 없죠. 하하하.”

“필상 씨는 어때요?”

“저요?”

필상의 성적은 이미 시즌 6승이다.

모모코보다는 한발 느리지만 데뷔 시점과 투어 참가 기간을 고려하면 훨씬 더 대단한 업적을 쌓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이번 시즌 성적은 나이키와의 내년도 계약과 맞물려 있어서 대회 성적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일전에 이 대표는 나이키가 5억 엔을 준비한다는 말을 필상에게 전한 바가 있다. 하지만 필상은 당시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고 말해 크게 웃었는데, 그게 현실화되고 있었다.

“이미 지금 4포인트잖아요.”

“출전이 잡힌 대회가 3개이고 그중에 니폰시리즈 JT컵은 메이저 대회잖습니까.”

“네. 산술적으로 8점까지……. 아니, 유러피언 던힐 챔피언십도 있으니까 9점도 가능하겠네요. 여유가 좀 있네요?”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까마득한 단계를 한두 개 더 잡았어야 했는데, 그게 좀 아쉬울 따름입니다. 하하하.”

연장 승부는 한 마디로 혈투였다. 붉은 피가 튀지 않을 뿐, 세 선수는 서로의 심장에 날카로운 비수를 여러 차례 꽂았다.

안전한 티샷, 날카로운 아이언 샷, 그림 같은 칩샷이 터질 때마다 그건 모두 경쟁자들에게 살기가 담긴 공격이었다.

문제는 그런 공격에도 상처를 입기는커녕 굿 샷이 난무한 가운데 버디가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연장 1차전, 2차전이 모두 버디로 승부가 나지 않은 채 또다시 18번 홀 티 그라운드로 이동하면서 사전에 통지된 규정에 따라 핀의 위치가 그린 앞쪽으로 바뀌었다.

이미 해가 어름어름 지고 있는 시간이라서 해가 지기 전에 우승자를 가리기 위한 적절한 판단으로 보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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