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누구 여잔데!
모모코가 시즌 8승에 도전한 대회는 토토 제팬 클래식이다.
훈련과 연습 라운드까지 함께했던 필상은 막상 대회가 개막하자 때맞춰 건너온 성호와 연습장을 떠나지 않았다.
본인이 경기를 지켜보면 긍정적인 면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모모코는 이미 출중한 기량을 갖췄고 홀로 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늘 가까이 있고 싶어 하고 필상도 미국 진출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속마음까지 그렇지는 않다.
굳이 아프리카까지 건너가 유러피언투어에 참가하는 것도 보다 빠른 PGA 진출에 대한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은 오로지 연습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모모코가 오늘 컨디션이 별로인가 봐요.”
“그럴 리가 없는데……. 지금 성적이 어떻게 되는데?”
“14번 홀 아웃 했는데 -2이에요.”
“괜찮네.”
“문제는 그 성적으로는 톱10에도 들지 못한다는 거죠.”
“걱정하지 말고 영상이나 잘 찍어.”
왜 걱정이 없겠는가.
멀리 떨어져 있다면 차라리 포기할 텐데 대회가 열리는 코스에 함께 와 놓고 연습한다고 경기를 관전하지 않아 삐쳤다.
왜 그러는지 모르지 않지만 필상이 지켜보면 더 잘 칠 수 있다고 보챘는데도 단칼에 거부했기 때문이다.
“왜 안 와?”
“글쎄요. 올 시간이 지났는데…….”
“한 번 둘러 봐.”
경기를 마치고 샤워까지 마쳤을 시간인데, 모모코가 연습장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단히 삐쳐 시위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일본 측 매니지먼트사 담당이사가 직접 찾아와 면담 중이란다.
그 사실을 확인한 필상은 그대로 연습하려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그녀가 있다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만나기 거북한 사람도 함께 있었다. 게다가 그는 물론 모모코도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아! 자네 왔는가?”
“오신 줄 알았으면 제가 인사드리러 왔을 텐데.”
“아닐세. 자네도 거기 앉게.”
모모코의 부친 미야가 와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필상과 모모코의 러브스토리는 일본은 물론 한국까지 알려져 골프팬이 아닌 사람들도 다 안다.
또한 모모코가 필상의 가족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렸던 것을 감안하면 자신이 너무 소홀했다는 반성이 앞섰다. 게다가 모모코의 굳은 표정을 먼저 봐서 그런지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런데 대화 내용이 좀 이상했다.
“모모코가 이번에 계약을 좀 이상하게 했다고 해서.”
“아빠!”
“왜? 내가 못할 말을 한 게냐?”
“전 어엿한 성인이라고요. 그리고 아빠는 이제 제 일에 관여하지 않으시기로 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잘못된 게 있다면 바로잡아야지.”
대충 짐작이 됐다.
아마도 모모코가 J&L과 매니지먼트 계약한 것을 두고 기존 회사에서 모모코의 부친을 들쑤신 것 같았다. 이전에는 부친이 그녀를 대리해 처리했으니 지금도 그런 줄 알고 있는 듯.
미야와 얼굴을 붉히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 필상은 두 부녀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시게루 이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이사님. 제게 잠시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아! 그러시죠.”
뭐 좋은 일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지 필상과 잠시 따로 시간을 가지기로 한 그의 표정은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하지만 둘이 테이블을 맞대고 앉는 순간, 그는 느꼈다. 앞에 앉은 필상이 아직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지금 치미는 분노를 참고 있다는 것을.
아무 표정도 없지만 괜히 잘못한 아이처럼 몸을 단정히 하며 바로 앉는 그에게 던진 필상의 첫마디는 역시 강력했다.
“모모코와의 인연을 끊고 싶습니까?”
“그, 그게 아니라 더 돈독히 하고 싶어서…….”
“지금 결정하십시오. J&L의 파트너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철수하든지.”
“이건 퍼펙트 콩이 간섭할 사안이 아닙니다.”
마냥 물러설 수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나름 강하게 튕겼다.
그러자 필상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지만 그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접니다. 이 대표님.”
‘아! 공 프로님. 그런데 왜 일본어를 하죠?’
“우리의 대화를 들어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무슨 상황인데 그래요.’
필상의 어투가 평소와 달리 딱딱해서인지 이 대표도 곧 진지해졌다. 하지만 통화 상대가 누군지 파악한 시게루는 두 손을 모아 간절한 눈빛으로 필상을 바라봤다.
전화를 끊으라는 제스처라는 것을 확인한 필상은 한국어로 몇 마디 말을 더 전하고 핸드폰을 내려놨다.
“혹시 J&L입니까?”
“네. 이보영 대표가 내일 이곳으로 오겠답니다. 상호 계약에 불만이 있다면 다시 조정을 해야겠지요. 중요한 것은 신뢰를 저버린 당신들을 모모코가 과연 용납할 수 있을지 그건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퍼, 퍼펙트 콩. 잠깐만요.”
할 말을 끝냈다고 판단한 필상은 단호히 일어섰다.
모모코를 위해 일본에서의 매니지먼트는 일본 회사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말했고 기왕이면 의리를 지키라고 권했다.
하지만 과욕을 부리고 계약 당사자를 무시한다면 그냥 두고 볼 사안이 아니다. 그들 말고도 모모코를 원하는 회사는 숱하게 널렸기 때문이다.
“제가 어찌 하면 되겠습니까?”
시게루는 쫓아와 사정했다.
과욕을 부리다 아예 산통이 깨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을 분노케 하는 것은 그들의 과욕만이 아니었다. 모모코가 지금 대회에 임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들 대체 생각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대회 중인 선수에게 이게 도대체 뭐하는 수작입니까!”
선수를 위해 존재하는 본연의 역할마저 망각한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기대를 접는 것이 옳다고 봤다. 재고의 여지가 없지만 일단 중요한 것은 모모코를 편하게 해 주는 것이다.
“미야 씨 모시고 돌아가세요. 일단 모모코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주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본인이 원해서 오신 건데…….”
“저랑 지금 장난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그럼 계약은…….”
“그건 J&L 이 대표와 상의하세요. 이미 모모코는 매니지먼트에 대한 전권을 거기에 줬으니까.”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모모코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곳 분위기도 어느 정도는 정리가 된 것 같았다.
모모코가 절대 만만한 성격이 아님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부친까지 설득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버님. 저랑 한잔하시러 가시겠습니까?”
호칭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으나 모모코를 슬그머니 바라본 미야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모모코와 식사를 해야 하지만 씩 웃어 보인 필상은 그와 함께 시내로 나왔다. 졸졸 쫓아오는 시게루에게는 기다리라고 손짓했는데 꾸벅 인사까지 하면서 밖에서 대기했다.
미야와의 인연은 그리 좋지 못하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도중에 보다 편한 사이가 되기는 했다. 당시 남녀 관계로 발전하지 않기를 바라는 말에 필상은 선선히 대답했었다.
그러나 결국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아닐세. 남녀 문제가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서운하지는 않으십니까?”
“휴우……. 별수 있나. 모모코가 저리도 자네를 좋아하는데.”
필상은 모르고 있지만 그동안 그는 딸에게 많은 얘기를 한 것 같았다. 물론 둘의 관계를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 도중에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한숨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짐작케 했다. 말릴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미 만방에 알려지지 않았던가.
둘이 깊은 관계라는 것도 눈치챈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점은 다행이고 고마웠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정말 그래야 할 거야.”
“네.”
그렇게 시작한 술자리는 거나하게 취할 때까지 이어졌다.
필상도 모처럼 취기가 돌 때까지 술을 마셨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알기에 행동에 조심했다.
결국 미야의 입에서 가슴에 와닿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엄마 없이도 저렇게 잘 자란 우리 모모코, 울리면 내가 정말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저는 도리어 모모코가 저 곁을 떠날까 걱정입니다.”
“그래? 그렇지는 않을 걸세. 제 엄마를 꼭 빼닮았거든.”
“어머님이 굉장한 미인이셨나 봅니다.”
“그럼! 우리 동네 최고였지. 하하하. 나처럼 못난 놈을 만나 호강도 못 해 보고 떠났지만…….”
아내 생각에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진 그를 부축해 숙소로 돌아오려고 했다. 마음까지 터놓아 이젠 정말 허물없이 편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앞으로 낮에 있었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기에 모모코와도 화해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오자 그는 기다리던 시게루와 함께 떠났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에게 필상도 죄송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시게루에게 잘 모시라는 말을 전한 필상은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는 말을 보탰다. 그들의 과욕은 밉지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빠는요?”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미야자키로 돌아가신데.”
“하여간 주책은!”
“그러지 마. 나에게는 어머니만 계시듯 네게는 아버님만 계시잖아. 내가 우리 아버지처럼 잘 모실게.”
“허락하신 거예요? 우리 사이.”
“응.”
“오빠!”
모모코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본인의 뜻은 밝혔지만 끝내 답은 듣지 못했는데 모든 시름이 한 번에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
“미사키. 1m 퍼팅 100개씩 한 세트로 진행해.”
“100개요?”
“응. 하나라도 실패하면 다시 반복하는 거야.”
“오빠!”
“지금은 오빠가 아니고 코치야. 딴소리 하지 마.”
2라운드에서 5타를 줄인 모모코는 선두와 4타 차 공동 7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1m 남짓한 짧은 퍼팅을 2개나 놓쳤다는 경기 내용을 보고받고 과제를 부여했다.
숏 퍼팅 미스는 절대 용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프로에게 가장 안 좋은 것이 바로 입스(Yips -숏 퍼팅 시 손이나 손목의 근육에 영향을 미치는 불안정한 컨디션)이기 때문이다.
모모코도 잘 알고 있어서 더는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고 시킨 과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퍼팅이 되게 좋은데요?”
“그러게. 연습이 효과가 있네.”
“역시 우리 형! 하하하.”
3라운드로 치러지는 대회라서 필상은 조용히 모모코의 최종 라운드를 따라다니며 지켜봤다. 그녀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하려고 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필상을 알아본 팬들이 자꾸 시야 좋은 곳을 양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샷에 집중한 모모코는 전반이 끝나서야 필상의 존재를 확인할 만큼 출중한 경기력을 보여 줬다.
선두와 4타 차로 출발한 모모코는 샷 컨디션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짧은 퍼팅은 물론 확률이 낮은 롱 퍼팅도 쑥쑥 집어넣으며 전반에 4타를 줄였다.
성호가 선견지명이 있다고 말한 것이 괜한 게 아니었다.
“넌 뒤따라오는 2개 조의 성적을 실시간으로 알려 줘.”
“하하. 관심도 없는 것 같더니 이제 애가 타는가 보죠?”
“선두와 2타 차면 이제 우승 경쟁을 한다고 봐도 되니까.”
“알았습니다. 제가 얼른 가서 초를 치겠습니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하하하. 제가 바봅니까!”
“응.”
선두권은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시즌 8승을 노리는 모모코가 추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무 살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이미 JLPGA의 최강자라는 인지도를 쌓았다.
“여왕이라면 군림해야지! 그럼. 누구 여잔데!”
그 말을 중얼거리는 순간, 모모코와 눈이 마주쳤다.
손가락 하트를 지어 날렸는데 카메라가 그걸 놓칠 리가 없다. 그런데도 필상은 두 팔을 들어 큰 하트를 날려 보냈다.
닭살 돋는 행위지만 내로남불이 아니겠는가!
인코스로 접어든 모모코는 우승을 향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391야드로 설정된 10번 홀은 우측으로 휘는 짧지 않은 파4 홀인데, 정확한 페이드 샷을 작렬시킨 것이다.
쭉쭉 뻗어 나간 타구는 무려 271야드를 찍었다.
올 시즌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 252야드를 기록해 투어 4위에 마크됐지만 페이드 샷으로 270야드를 넘긴 것은 처음이다.
-와우! 장타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네요.
-같이 플레이하는 히가 마미코의 인상이 확 구겨지는 것을 보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 같습니다. 하하하.
-참 묘한 기분이 드네요.
-묘하다니요?
-챔피언 조에 우리 선수들이 둘이나 있는데, 자꾸 중계 화면에 비쳐 줘서 그런가요? 저도 모르게 모모코를 응원하게 되어서 말이죠.
-아! 모모코는 일본 선수지만 한국과의 인연도 각별하기 때문일 겁니다. 공 프로 때문에 그녀의 인기는 일본 못지않은 게 사실이니 어쩌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골프는 개인 스포츠라서 국적을 따지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미 한국 여자 프로들이 세계를 주름잡고 있으며 또한 우리 퍼펙트 공도 곧 세계 무대에 데뷔할 것 아닙니까!
-그때를 생각해서 중립적인 중계를 하자고요? 좋은 말씀이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