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91화 (91/354)

091. 엄마의 칙령

“어? 어?”

타구가 위험천만한 방향으로 날아갔기 때문에 갤러리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바람까지 읽은 팬들은 얼마나 휠지 기대 어린 시선으로 쳐다봤지만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본 이들에게는 미스 샷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 타구도 바람을 꿰뚫는 것처럼 보여 시선을 돌린 필상의 마음도 조마조마했다. 바람을 타지 않으면 공이 호수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구의 속도가 줄어들 무렵, 거의 그린 가까이에 도달한 공은 갑자기 휘기 시작했다.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급격히 휜 공은 오히려 홀컵 좌측 앞에 떨어졌다.

“라이 타!”

“좋은데?”

“오케이!”

그린의 경사는 오히려 호수 방향이 낮기 때문에 타구는 다시 홀컵을 향했고 살짝 지나쳐 1.5m 버디 퍼팅을 남겼다.

기대 이상의 결과에 필상만 기뻐한 것은 아니다.

궂은 날씨로 인해 행여 발생할지도 모를 돌발 상황을 걱정하던 팬들은 환상적인 공략에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오빠!’를 외친다는 점이 좀 아쉬웠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것도 다 팬심인 것을.

-기량이 아주 물이 오른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런 실력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연습을 통해 자신의 스윙을 조절하는 능력을 키워 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나저나 오늘 이 쌀쌀한 날씨에도 입장한 관중의 수가 상당하다고 하던데요?

-가집계 결과 6천여 명이 입장했다는데, 이런 추세라면 KPGA도 흥행을 위한 조건이 형성된 것 같아 아주 기쁩니다.

-지난 3일간 14,674명이 집계되었으니까, 그럼 2만 명을 훌쩍 넘긴 거네요? 와아! 정말 대단합니다.

-그래서 스타 마케팅이 중요한 겁니다. 이미 좋은 선수들이 많았지만 화룡점정을 찍어 줄 스타가 절실했는데, 공 프로가 바로 그 역할을 한 것 같아 너무도 좋습니다. 하하하!

실제 한국 골프계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아직 필상이 최고의 무대인 PGA에 진출하지도 않았지만 아시아를 대표하는 투어에서 연승 행진을 이어 가고 있고 진귀한 기록들을 쏟아 내기 때문이다.

거기에 나이키가 후원하면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는 믿음이 생겼다. 물론 결과는 알 수 없지만 그 열망이 대단히 크다는 것이 필상에게도 은근한 부담이 될 정도다.

여하튼 이런 골프 붐이 실질적인 결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결국 PGA 우승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때문에 기회가 생길 때마다 보다 확실한 기량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비까지 내려 난감하네요.”

“이 정도 비야 극복해야지. 천둥번개가 친다면 모를까.”

“그럼 더 좋죠. 중단되면 남은 경기는 내일 할 텐데, 날씨가 지금보다 나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오늘 끝내야지.”

“하기야. 내친 김에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요. 하루 이틀 푹 쉬게.”

“우승하면 휴가 줄게. 3일 정도면 되지?”

“으! 정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다음 주에 시합도 없잖아.”

전반이 끝날 때까지 3타를 줄인 필상은 나 홀로 두 자릿수 언더였다. 그것도 -20, 함께 경기하는 양 프로가 단독 2위인데 그는 겨우 이븐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까지 흩뿌리는 상황에 굳이 공격적인 공략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바람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실전을 통해 소중한 경험을 쌓는다는 느낌으로 경기에 임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꼼꼼한 운영에 동반자인 양 프로가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였다.

“대체 뭘 먹는데 그렇게 힘이 좋아?”

“삼시 세끼요.”

“하하. 여유도 있고 부럽네.”

“전 아직 갈 길이 멀지 않습니까.”

“10월은 다 지나갔고 11월에는 JGTO를 비우기 어려울 테고 12월에는 PGA도 대회가 하나밖에 없잖아.”

“그래서 잠잠한 것 같습니다.”

“염두에 두고 있는 대회라도 있나?”

노련한 양용은 프로는 이미 PGA 스케줄까지 줄줄이 꿰차고 있었다. 때문에 필상이 언제 미국 무대에 데뷔할지 나름 구상을 해 본 것 같았다.

물론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계획은 있다.

이 대표 외에는 모모코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것이지만 양 프로에게 언급했다. 적절한 조언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 가 보려고요.”

“남아공?”

“네.”

“알프레드 던힐 챔피언십이던가?”

그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본인이 뛰는 투어도 아니지만 그 기간은 아시아투어는 폐막한 기간이고 12월에 열리는 대회는 손에 꼽히기 때문이다.

보통 따스한 기후를 찾아 전지훈련을 떠나지만 초청을 받는다면 출전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비록 아프리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직 경기 중이지만 악천후 때문에 앞선 조들의 플레이가 지연되어 대화를 나눌 시간은 충분했다. 이미 둘은 경쟁하고 있는 상황도 아닌지라 더더욱 편했다.

“네. 너무 멀어서 아직 확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초청은 이미 받은 거네?”

그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본인은 원해도 되지 않는 일을 필상은 해내고 있는데, 출전할지 여부를 고심하고 있다지 않은가.

괘심할 테지만 그는 확실하게 밝혔다.

“스윙에 특별한 문제점이 없다면 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아시아투어는 무시해도 유러피언투어는 절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아마 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내년에 상당수의 초청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제 기량이 충분한지가 문제지요.”

“하하하. 에라 이 도둑놈아!”

갑자기 진한 말투를 써 당황했지만 그의 의사는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그런 걱정일랑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좋은 기회라는 말씀이군요.”

“물론이지. 아마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요즘처럼 좋은 플레이를 펼친다면 결과도 나올 거고.”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사실이니까. 서양 애들이라고 다를 게 없어. 막상 같이 쳐 보면 알게 될 거야. 하하하.”

다른 사람도 아닌 천하의 타이거 우즈에게 역전 우승을 거둔 양용은 프로의 말이라서 더 신뢰가 갔다.

하기야 세계적인 선수라고 특별할 것은 없다. 많지는 않지만 호주나 미국 선수들과 경기를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수준의 차이는 나겠지만 자신의 플레이만 꿋꿋하게 펼칠 수 있다면 장소가 어디든, 상대가 누구든 문제가 될 이유는 없다.

텅!

인코스는 그냥 지키는 것에 전념했다.

그래도 한두 타는 줄일 기회가 올 줄 알았는데 파 세이브를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18번 홀에서도 124m 세컨샷을 피칭으로 공략했는데 핀에 붙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8m 롱퍼팅이 들어가면서 응원하던 팬들에게 마지막 서비스를 하게 되어 필상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 어느 때보다 요란한 축하 인사를 받았다.

대략 스무 명도 넘는 선수들이 샴페인을 들고 우르르 몰려나와 마구 퍼부었기 때문이다. 호스트인 최경주 프로가 직접 나서 대회의 흥행 성공을 자축한 의미도 섞여 있었다.

“오빠!”

피날레는 역시 모모코가 찍었다.

비에 젖은 몸이 다시 샴페인에 흠뻑 젖었으나 화끈하게 다가온 그녀는 필상을 꼭 끌어안아 팬들의 비명과 열띤 박수를 이끌어 냈다.

또다시 지난 이틀 내내 이어졌던 환호성이 메아리쳤다.

“결혼해! 결혼해!”

필상은 품에 안긴 모모코를 떼어 내 나란히 옆에 세웠고 손을 꼭 잡은 채로 팬들에게 같이 인사했다. 마치 결혼식 축하연에 온 하객에게 신혼부부가 인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님도 오셨어요.”

“어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모코가 조르르 달려가는 위치에 엄마와 누나들, 그리고 자형들과 조카들도 보였다.

경기에 집중하느라 미처 가족들이 왔을 것이라는 생각도 못했는데 이 대표의 따스한 배려였다. 그녀는 미리 차를 보내 가족들을 몽땅 모셔 왔던 것이다.

다시 한 번 가족들과 함께 우승의 기쁨을 나눴고 궂은 날씨에도 자리를 뜨지 않은 팬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가족들과 함께 모모코도 나란히 팬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는데 영락없는 한 가족처럼 보였다.

“정말 잘했다.”

시상식이 길어져 가족과의 저녁 식사가 늦게 이뤄졌다.

식사를 하면서 필상은 엄마에게 모모코와 약혼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다.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거듭 잘했다고 말씀하시는데 눈가에 물기까지 고였다.

하지만 아들은 뒷전, 모든 칭찬과 격려는 며느리가 될 모모코의 독차지였다. 언제나 필상의 식사부터 챙기던 엄마가 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모코만 부지런히 챙겼다.

물론 서운하지는 않다. 말이 통하지 않는 모모코를 가족들이 반기는 것이 너무도 고맙고 뿌듯했기 때문이다.

낯을 가리는 조카들에게도 모모코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 틈을 타 엄마에게서 비밀스러운 칙령이 떨어졌다.

“필상아. 네 엄마, 꽉 막힌 시골 아줌마 아닌 거 알지?”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요즘 며느리들은 결혼 선물로 손자도 안겨 준다던데, 난 절대 그런 선물 사양하지 않을 거야.”

“으윽!”

***

필상의 시즌 6승 달성 소식은 PGA 홈페이지에서도 다뤘다.

무서운 루키라는 표현까지 써 가며 등장에서부터 이번 대회 우승까지 소요된 시간은 단지 20주에 불과했으며, 6승을 거둔 24라운드 동안 무려 175언더를 기록했다는 부분도 소개했다.

한 라운드당 평균 -7.29를 거뒀다는 기사는 오타라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다. 72타 기준으로 매일 64.71타를 쳤다는 것인데, 누가 봐도 믿기 힘든 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 기사의 파괴력은 상당해 이후 퍼펙트 콩에 대한 관련 기사들이 줄을 이었고 언제 PGA에서 모습을 볼 수 있는지 문의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이제 미국 골프계도 관심을 드러냈으니 출전할 적절한 대회를 잘 고르는 일만 남은 것 같아요.”

“글쎄요. 일단 두고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에 말씀하셨던 던힐 챔피언십에 참가하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먼 길을 가기 위한 전초전이라 생각하고 출전하겠습니다.”

“그럼 사전에 꼼꼼하게 준비할 게요.”

다음 날 아침 필상은 부산에서 공항으로 가기 전에 이 대표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자신의 추후 구상을 밝혔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모모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던힐 챔피언십? 어디서 열리죠?”

“남아공.”

“거기 아프리카 아닌가요?”

“응.”

“우와! 저도 갈래요.”

“당연하지. 오프시즌에 열리거든.”

“정말이죠?”

JLPGA도 12, 1, 2월은 대회가 없다.

때문에 필상은 그녀와 함께 태국 전지훈련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겨울을 함께 보낼 생각을 하면 마냥 즐겁고 대회가 잡히더라도 당연히 그녀와 갈 생각이다.

너무도 당연한 건데, 갑작스럽게 소식을 접해서인지 안 그래도 예쁜 그녀의 얼굴에 꽃이 만발했다.

이 대표와의 식사에 오랜 시간을 쓸 수 없었다.

“일어나야지.”

“벌써요?”

“비행기 시간 다 됐어. 얼른 새로 산 집 구경도 하고 싶고 연습도 해야 하잖아.”

“치! 오빠랑 같이 움직일 텐데, 전 아무 걱정 없어요.”

“여하튼 가자. 이 대표님, 전화 드리겠습니다.”

“네. 저도 이제 일본에 자주 들어가야 해요. 아시잖아요.”

“아! 잘됐네요. 하하하.”

이젠 J&L이 모모코의 매니지먼트를 주관사가 되었다. 필상이 대회를 치르는 동안 이 대표와 모든 계약을 완료했다.

때문에 모모코는 물론 필상까지 일본에 같이 있기 때문에 이 대표는 앞으로 굉장히 바삐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도쿄를 거쳐 새로 구입하고 골프 연습 시설과 실내 인테리어까지 마친 가와사키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였다.

임대를 하려다 아예 사 버렸다. 물론 명의도 실질적인 구매 자금도 모모코가 댔는데도 필상은 자기 집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좋네!”

“수영하고 싶은데 안 되겠죠?”

“어서 옷이나 편하게 갈아입고 나와.”

“왜요?”

“설비가 잘되었는지 확인할 겸, 연습 시작해야지.”

“에이 진짜!”

뭘 기대했는지 몰라도 수영장까지 있는 집에 살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늦가을 추위에 물도 받아 놓지 않은 수영장에서 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성호에게 3일간 휴가를 줬고 미사키와도 내일 저녁 효고 현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둘만 있는 것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래서 더더욱 연습에 집중하고자 했지만 저녁도 굶었다.

***

“이렇게 서로 교대로 대회를 나가면 좋을 것 같아요.”

“좋지. 하지만 일본이 좁아서 가능한 거야. 나중에 미국에 진출하거나 다른 투어를 뛰게 되면 쉽지 않겠지.”

“그건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지금처럼 가능할 때라도 제발 그렇게 해요.”

“그러자.”

흔쾌히 대답은 했지만 쉬운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올 시즌은 몇 대회 남지도 않았을 뿐더러 2주에 한 번 출전하기로 결정하면서 둘 다 남은 대회는 3개뿐이다.

모모코는 11월 1주, 3주, 4주차에 출전하고 필상은 2주, 4주, 5주차에 대회가 잡혀 있다. 하나가 겹치지만 그 정도는 그녀도 충분히 양해할 것 같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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