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90화 (90/354)

090. 결혼해! 결혼해!

“계약은?”

“한국에서 하려고요.”

“윽!”

그녀의 매니지먼트 회사는 강력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많은 정성을 쏟았고 어려운 시기를 함께 넘겼다.

그래서 가급적 재계약을 권했다.

물론 여왕 모드로 돌입한 그녀를 온전히 케어할 능력이 충분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선수와 더불어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뭔가 걸림돌이 있었던 모양이다.

“전 이보영 대표가 좋아요.”

“정말이야?”

“저도 내년까지만 일본 투어에 전념할 거라고요. 오빠가 가는데 저만 남아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녀가 J&L을 선호하는 이유가 밝혀졌다.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선수가 한국 회사와 계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하에 조언했다.

하지만 LPGA 진출을 한다면 그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필상과 함께 있는 것이다.

모모코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수록 더없이 좋겠지만 투어 일정이 다르기 때문에 일본에서보다 더 만나기 힘들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더 재촉했을지도 모른다.

“이 대표와는 얘기가 됐어?”

“네. 다행히 일본에서의 활동은 기존 회사에서 맡기로 했어요. 서로 협력하는 것으로 얘기가 진행되는 것 같아요.”

“두 회사가 공동 매니지먼트를 한다면 나쁠 것도 없겠네.”

물론 메인은 J&L이 맡을 것이다.

여론의 추이를 감안해 일본에서의 활동을 기존 회사가 관할하는 것은 아주 현명한 선택이라고 보였다.

어차피 수많은 스폰서가 붙을 것이고 일본 기업의 그녀에 대한 수요는 차고 넘쳐서 보다 유리한 입장인 것도 사실이다.

“근데 이렇게 한국까지 와도 괜찮겠어?”

“오빠랑 같이 가면 되죠. 저도 이번 주는 좀 쉬고 싶어요.”

“그래.”

이미 온 그녀를 돌려보낼 수는 없다. 그녀의 일본오픈 출전을 직접 돕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더더욱 그랬다.

어차피 그녀는 이번 주를 쉬고 다음 주에 NOBUTA GROUP 마스터스 GC 레이디스에 출전하면 된다.

필상도 이 대회가 끝나면 한 주를 쉰 뒤 Mitsui Sumitomo VISA Taiheiyo Masters에 참가할 예정인데, 이미 집에서 며칠 보냈기 때문에 바로 가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나가요.”

“아! 그래.”

도저히 식사할 분위기가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외곽으로 빠져나오자 모모코의 태도는 더 농밀해졌다. 아예 팔짱을 깊이 끼고 매달리다시피 기대는 그녀의 행동이 싫지 않았다.

이렇게 깜찍하고 예쁜 여인이 자신의 연인인 것이 믿기지 않을 뿐, 그녀와 살이 닿는 것은 필상에게도 힘이 된다.

그녀만큼 컨디션이 급격히 올라오는 것은 아니지만 필상도 그녀와 밤을 함께 보내면 피곤하지 않을뿐더러 컨디션이 리셋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고로 그녀가 대회 기간 내내 자신의 곁에 머무는 것은 필상도 크게 반갑고 고마운 일이었다.

***

“이제 대회 결과는 그다지 관심도 없는 것 같아요.”

“따라다니는 저 많은 팬들은 뭔데?”

“모모코를 보러 온 거 같은데요?”

필상의 경기를 쫓아다니는 갤러리의 수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동에 불편을 느낄 정도로 많은데 특히 모모코의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나마 이 대표가 함께 있어서 다행이야.”

“그러게요. 하기야 인형처럼 깜찍하니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거죠. 신기하기도 할 거고.”

“우린 경기에나 집중하자.”

“아, 네.”

2라운드에서 필상은 다시 6언더를 치며 -15 단독 선두로 나섰다. 공동 2위와는 무려 10타 차가 나는 바람에 필상의 우승을 의심하는 이들이 없었다.

중립을 지켜야 할 중계진도 부지불식간에 그런 언급을 했지만 그걸 문제 삼는 이들은 없었다. 오히려 실시간 방송 댓글에는 모모코의 모습을 더 담아 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이미 그녀와 필상의 다정한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모든 포털을 장식한 까닭에 그녀를 보러 온 이들이 적잖았다.

그러나 3라운드에 나선 필상은 경기에 집중해야만 했다.

추격자들과의 타수 차가 크지만 골프는 어느 한순간 무너질 수도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선 컷이 7오버파였죠?

-그렇습니다. 선두와 결선 진출 데드라인이 무려 22타나 차이가 난 것도 근래 보기 드문 기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공 프로는 인정사정이 없네요. 하하하.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설마 뒤집어질 것이라고는 본인도 생각하지 않겠지만 승부는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봐야 합니다.

-아! 그렇게 보는 것이 옳군요. 어쨌든 이제 그에게 아시아 무대는 너무 좁은 것 아닐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도 동의합니다. 이미 미국과 유럽 언론에서도 공 프로의 실력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그런데 왜 초청이 되지 않는 거죠?

-그 점은 저도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그의 매니지먼트사에 연락이 오는데 신중을 기하는 것인지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문이 제기될 시기가 지났다.

한국과 일본의 메이저 대회 우승자다. 시즌 중반에 합류해 벌써 6승을 거뒀으며 3개의 투어에서 두루 우승했다.

게다가 -14를 치며 꿈의 57타 기록까지 세웠는데, 그 커리어에 비하면 너무 조용했다. 설마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지만 사실은 소식이 없지는 않았다. 이 대표를 통해 초청 의사를 밝힌 대회는 있었다. 하지만 유러피언투어였고 자존심이라도 지키려는 듯 PGA는 조용했다.

필상도 아쉬울 것이 없다고 판단해 먼저 초청 문의를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자신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극적인 데뷔가 아니라면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빠!”

“오빠! 오빠!”

보통 샷을 하면 ‘굿 샷’이라는 응원 구호가 가장 많다. 그 외에도 여러 외침이 들리지만 어느 순간부터 구호가 그 하나로 통일되었다.

“왜들 저러냐?”

“모모코 때문이죠. 하하하.”

“뭐? 팬들이 모모코를 따라 한다는 거야?”

“네. 그녀가 그렇게 외치는 게 재미있나 봐요. 그걸 다 따라 외치네요. 오빠!”

“이게 진짜!”

무빙데이에 날씨가 좀 짓궂었다.

바람과 흩뿌린 비 때문에 순위가 출렁였지만 끄떡없는 자리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최상단의 공필상이라는 이름이었다.

대다수의 선수들이 타수를 잃은 가운데 오히려 2타를 더 줄인 필상의 성적은 -17까지 올라섰다.

단독 2위로 치고 올라온 선수는 뜻밖에도 양용은 프로였다.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 짐작케 하는 선전을 펼쳐 이날 데일리 베스트 -4를 기록했다.

예선 성적이 좋지 못했기에 종합 성적은 -6에 불과해 필상은 단독 2위와의 격차를 다시 더 벌린 셈이다.

18번 홀을 벗어나는 필상에게 모모코가 다가왔다. 진행 요원들이 그녀에게는 길을 터준 것이다.

“멋졌어요!”

“누구 남잔데!”

“크크크. 그러니까요.”

함지박만 한 미소를 얼굴에 담은 모모코가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수많은 시선과 방송 카메라까지 비추고 있는 걸 알 텐데, 보란 듯이 필상의 팔짱을 낀 것이다.

공개된 연인이 다정하게 걷는 게 무슨 대수일까, 하지만 묘한 상황인 만큼 한바탕 술렁이더니 급기야 박수가 쏟아졌다.

마치 우승이 결정된 것 같은 환호를 받으며 스코어 카드를 제출하러 가는 것이 아무래도 좀 쑥스러웠다. 그렇다고 팔짱을 풀 수도 없는 노릇.

이왕 이렇게 된 거 쐐기를 박는다고 생각했는데, 돌연 아주 당황스러운 환호성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혼자 외쳤는데, 그 메아리는 금방 사방을 휘어 감았다.

“결혼해! 결혼해!”

“오빠. 뭐라는 거죠?”

“결혼하래.”

“흐흐흐. 오빠 생각은 어때요?”

뜻하지 않게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스무 살인 그녀에게는 너무도 먼 얘기라고 생각해 감히 입도 벙긋 하지 못했는데,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이미 엄마에게 약속하지 않았던가?

올 겨울에 약혼이라도 하겠다고.

그래서 내친 김에 속내를 살짝 밝혔다.

“약혼하자.”

“…….”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너무 충격을 받은 것인지 불안해 따라서 멈춰 선 필상은 모모코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우와!”

“결혼해! 결혼해!”

사람들이 난리가 난 이유는 모모코가 갑자기 필상에게 매달리다시피 안겨 왔기 때문이다.

파격적인 장면이 당혹스러웠지만 필상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맴을 돌았다. 이게 무슨 황당한 쇼냐고 할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녀가 귓가에 속삭인 말에 필상은 하늘을 나는 기쁨을 맛봤다.

“좋아요! 저 너무 행복해요.”

***

4라운드가 시작되었다.

티 박스에 올라선 필상은 잠시 눈감고 집중하려 노력했다.

멋진 홀이 자신의 샷을 기다리고 있고 열렬한 팬들의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아서 긴장한 것은 아니다. 어젯밤 뜨거웠던 흥분의 여운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약혼이라니?’

분명히 약속했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약혼이란 결혼을 약속하는 의미다. 이미 잡은 고기에 먹이를 줄 필요가 있냐고 말하는 남자들도 있지만 그건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최 이사와 함께 그의 사무실에서 처음 모모코의 경기 장면을 보며 농담처럼 나눴던 말이 떠올랐다.

‘언놈이 델구 살지 부럽네!’

‘그러게요! 저런 깜찍한 여자애를 데리고 사는 놈은 아마 전생에 제 나라를 구했을 겁니다. 하하하.’

‘그렇지. 하하하!’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것이라고 말했던 그 부러운 놈이 바로 자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미 함께 지낸 나날이 짧지 않고 남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그녀의 은밀한 생각과 버릇, 심지어 몸까지 구석구석 안다.

자신 또한 이제는 제법 성공한 사람 축에 속한다. 그런데도 모모코는 자신에게 과분한 축복의 상징과 다름이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노력은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마치 모든 것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예비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마지막 라운드에 나서는 필상은 떨렸다.

까앙!

바람이 심하게 불어 필상은 탄도를 낮췄다.

바람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순응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 평범한 진리마저 무시할 만큼 어리석지도 무지하지도 않다.

다만 탄도를 낮춘 타구는 비거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어 평소와 다른 공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전에서 시험할 수 있는 적당한 라운드라고 판단했다.

앞으로 이보다 더 심한 악천후도 극복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자 마음의 평온이 찾아왔고 비로소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자연은 인간의 의지를 무색케 하는 경우가 허다해 면밀하게 살폈음에도 바람은 종잡기 힘들었다.

“공중에는 뒷바람이 부나 봐요.”

“그니까!”

“오차의 범위를 더 충분하게 잡아야 할 것 같아.”

1번 홀은 545m 파5 홀인데, 그린이 티 그라운드보다 무려 32m가 낮아서 바람의 영향을 생각보다 훨씬 많이 받았다.

그래도 티샷은 무난하게 298m를 날렸다. 경사를 타고 구른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도 세컨샷은 안전한 선택을 했다.

애초 3온을 염두에 두고 좌측 벙커를 피해 호수 앞까지 보내고자 했는데, 맞바람을 감안해 조금 길게 때렸다. 그런데 허공에 부는 바람은 지상과 달랐다.

하마터면 해저드에 빠질 뻔했던 공이 러프에 걸려 멈춰선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정면 맞바람을 고려하면 여기선 드로우라고 봐야겠네요.”

그린이 좌측으로 돌아 나간 위치에 펼쳐져 있어 성호의 판단은 적절해 보였다. 문제는 공이 좌측으로 휠 경우 우측을 봐야 하는데 하필이면 핀이 우측에서 5야드 지점에 꽂혔다는 점이다.

스트레이트 구질로 날려도 공중에서 공이 드로우 바람을 탄다면 결국 호수를 보고 때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말이 쉽지, 뻔히 보이는 호수를 보고 샷을 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굉장한 압박감을 부여했다. 게다가 예상한 대로 바람이 분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지 않던가.

그런데도 판단은 내려야 하고 그걸 실행해야 한다.

“오케이. 피칭.”

“탄도를 최대한 낮추려고요?”

“그래야지. 호수와 그린의 경계만 보려고. 에이밍이 괜찮은지 잘 봐.”

“네.”

캐디가 선수의 에이밍을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평소 필상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에이밍은 스스로 컨트롤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좀처럼 틀어지는 경우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중을 기하기 위해 이번에는 재차 확인하라고 강조했다. 두 손이 한 손보다 넉넉함은 만고의 진리니까.

서드 샷 거리는 98m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평상시에는 샌드웨지나 갭 웨지로 컨트롤 샷을 하지만 필상은 헤드가 보다 무거운 피칭웨지를 선택했다.

쉬익!

테이크 백은 부드럽고 가벼웠지만 펀치 샷을 위한 다운 블로우는 힘차고 강렬했다. 웨지가 가진 장점은 누운 로프트 각도 때문에 공을 띄우기 좋다는 점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바람이 심한 날은 그게 오히려 독이 되기 때문에 탄도를 낮추려면 아이언을 써야 하는데, 평소와 다른 거리를 컨트롤하는 것은 절대 쉽지가 않다.

다양한 요소를 함께 고려해야 하고 바람으로 인해 주변이 어수선하고 의외의 변수도 발생하는 고로, 미스 샷의 확률은 급격히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탁월한 집중력을 발휘한 필상의 펀치 샷은 사전에 그린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하며 정확히 날아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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