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89화 (89/354)

089. 한 편의 드라마

-우우! 퍼펙트라는 닉네임, 정말 잘 지은 것 같습니다!

-공 프로가 아예 단단히 작정을 한 것 같습니다. 코스 공략도 빈틈이 없고 모든 샷이 완벽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날씨가 좋고 준비를 많이 했어도 절대 좋은 스코어가 나올 코스는 아니지 않습니까?

-첫 홀부터 4연속 버디, 공 프로에게는 낯설지가 않죠. 오히려 10번 홀에서 2온 하고도 이글을 놓친 게 아쉽습니다.

-역시 절대 강자의 진면목을 발휘하는 건가요?

-제가 알기로 JGTO의 미나비 ABC 챔피언십 출전을 포기하면서 참가한 대회입니다. 우승이 아니라면 현해탄을 건너올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아!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거군요.

허 해설의 표현은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필상이 ABC 챔피언십에 출전한다고 반드시 우승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최근 기세를 보면 그렇게 말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분석을 들은 대다수의 팬들도 동의했으니까.

필상은 인코스에서 출발했다.

말이 쉬워 4연속 버디지 실제로 11, 13번 홀은 버디가 무척 어려운 홀이다. 그린보다 훨씬 큰 벙커가 가로막은 180m 파3, 호수와 지저분한 벙커 때문에 그린이 굉장히 좁아 보이는 340m 파4, 상당수의 선수들이 거기에서 타수를 잃었다.

그 와중에 필상은 송곳 같은 아이언 샷으로 핀에 쩍 붙여 너무도 쉽게 버디를 잡아냈다. 그렇게 불꽃 샷으로 한껏 분위기를 띄웠지만 맑고 화장한 날만 이어진 것 아니었다.

‘이런!’

너무 분위기를 즐겼던 것일까?

이어진 542m의 파5, 14번 홀에 들어선 필상의 드라이브 티샷이 의도한 바와는 달리 임팩트가 살짝 강했다.

내리막이 심하기 때문에 280야드 샷을 해도 멈추는 지점은 300야드를 훌쩍 넘을 텐데,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필상이 느낀 감각은 290야드 정도였는데, 그 작은 차이는 내리막 경사로 인해 20야드 이상 더 굴러 페어웨이를 놓치고 말았다.

“멈춘 지점이 310야드를 조금 넘은 것 같아요.”

“오버하면 헤비 러프잖아.”

“러프보다는 자칫 나무가 그린을 가릴 것 같아요.”

“되지도 않을 거리야. 잘라 가야지.”

“오케이!”

2온을 노리지 않는다는 말에 성호의 표정이 밝아졌다. 굉장히 도전적인 공략을 해 왔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았던 것이다.

티샷은 좌측 도그렉이고, 세컨샷을 그린에 올리는 상황에서는 우측 도그렉 홀이다. 정상적인 280야드 샷이 이뤄졌다면 경사를 감안해 공은 300야드 페어웨이에 섰을 것이다.

하지만 다소 과했던 의욕은 억울한 느낌이 들만큼 큰 난관을 불러왔다. 우측 러프에 빠진 줄 알았던 공이 막상 내려가 보니 러프가 아닌 크로스 벙커까지 굴러 내려갔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살짝 굴러 내리막 경사에 붙어 있었다.

“많이도 굴렀네.”

“스탠스가 나오겠습니까?”

“잘라 갈 건데 상관이 있겠어?”

절로 인상이 구겨졌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 좋게 받아들였다. 오른발을 벙커 턱에 걸친 까다로운 샷이지만 상관없었다.

연습도 충분했고 150m을 보낸다면 남은 거리는 80m 안팎이라서 넉넉하게 8번 아이언을 잡았다. 연습스 윙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실제 스윙은 어이없게도 뒤땅을 때리고 말았다.

잘라 갈 것이라는 생각에 방심했는지, 티샷 실수가 마음에 남았는지 샷을 하는 순간, 머리가 아래위로 출렁였던 결과다.

워낙 예상치 못한 실수가 나오자 팬들이 술렁였다.

“198m 남았어요.”

필상도 끔찍한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그 어느 때보다 샷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고 결과 또한 좋았는데, 벙커에서의 샷을 고작 57m 보내고 만 것이다.

타구 방향이 헤비 러프를 지나야 했기에 뒤땅을 때려 힘이 실리지 않은 공이 길고 질긴 러프를 헤쳐 나가지 못했다.

실수가 실수를 부른 상황에 흥분은 금물이다. 그래서 길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피칭 줘.”

“네.”

마음 같아서는 4번 아이언을 잡고 그린에 도전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연이은 실수에 몸이 굳었다고 판단한 필상은 또 다시 잘라 가기로 결정했다.

방송 보조 요원들이 필상이 피칭을 잡은 걸 체크했고 그게 화면에 뜨는 순간, 중계하던 이들도 특별한 반응을 보였다.

-아! 4온인가요?

-적절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3온이 가능하지 않나요?

-물론 가능합니다. 정상적인 컨디션이라면. 하지만 연달아 미스 샷을 한 선수가 또 다시 무리수를 두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행여 또 시 벙커에 빠지면 실낱같은 파에 대한 희망도 함께 사라지게 되죠.

다행히 필상은 피칭웨지로 그린 좌측의 페어웨이를 공략해 50m 어프로치를 남겼다. 엄청난 실수처럼 보였지만 이제라도 핀에 붙이면 파를 기록할 수 있다.

숏 게임을 위해 이동하는 필상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의 경솔함에 잔뜩 화가 나 있음이.

-공 프로도 사람이었군요. 샷 머신이 아니라.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게 중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공 프로가 안전한 공략을 선택한 것이 옳다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저는 그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저 상황에서 한 타임 늦추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쉽지가 않거든요. 얼마나 강한 정신력을 지녔는지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골프를 쳐 본 이들은 안다.

한 타임 늦추는 것이 정말 쉽지 않는다는 것을.

상당한 고수라도 아마추어들은 벙커에서 한 번에 나오지 못하면 2번, 3번을 쳐도 그 벙커 턱이 태산처럼 높아 보인다.

때문에 자기 성질을 이기는 것은 프로에게도 중요한 덕목이다. 타수를 줄이기는 어렵지만 잃는 것은 너무도 쉽지 않던가.

“힘내라! 공 필상!”

“그래! 멋지게 넣어 버려!”

“퍼펙트 콩 파이팅!”

사방에서 팬들의 응원이 쏟아졌다.

최악의 상황을 맞았지만 그들은 또다시 필상이 멋진 그림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팬들의 마음이 느껴지자 필상은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경기에 임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았던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월등한 성적을 내겠다고.

그렇다면 핀에 붙이는 것을 넘어 칩인 버디라도 노려는 것이 마땅했다. 다만 무리해서 타수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필상은 어느 때보다 신중한 샷을 선보였다.

공의 위치도 살짝 업힐 라이라서 공을 띄우는 것이 용이했고 마침 잔디도 순결이라 정확히 들어간 클럽 페이스에 공이 긁히는 느낌이 확연했다.

“인 더 홀!”

“칩인!”

칩샷은 아니지만 들어가기를 바라는 팬들의 마음이 전해진 필상은 높게 떠오른 공이 핀발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대로 홀컵에 빨려 들어가면 좋으련만 너무 정화한 것도 문제였다. 공이 정확히 깃대 아랫부분에 맞아 튀어 나왔다.

텅!

조금 길었다면 백스핀이 걸려 버디도 가능할 것 같았는데, 깃대에 맞은 공은 튀어나와 그린 에지까지 굴러 나왔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안 도와주네요!”

“그러게. 퍼팅이라도 잘해야지.”

에이프런에 걸린 공과 핀까지의 거리는 대략 7.5m, 아주 부담스러운 퍼팅이지만 신중하게 라이를 확인한 필상은 과감하게 밀었다.

유리처럼 반질반질한 그린 스피드를 고려하면 너무 강해 보였다. 그러나 홀컵 앞에서 살짝 휜 공은 지면에서 사라졌다.

뒷벽을 꽝 때리며 그 까다로운 퍼팅을 구겨 넣는 순간, 또다시 지축이 흔들리는 엄청난 비명과 환호성이 쏟아졌다.

아무리 잘나가도 이번 홀은 타수를 잃을 줄 알았던 갤러리들은 필상의 환상적인 퍼팅에 격한 감동을 느낀 것이다.

소름이 돋을 만큼.

-우우우우……. 이래도 되나요?

-정말 형언하기 힘든 기가 막힌 리커버리였습니다. 어차피 안 들어가도 2m 안팎의 퍼팅은 자신이 있다는 겁니다!

-누군 죽을힘을 다해도 어려운 퍼팅 아닌가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들어갈 확률은 5%도 채 되지가 않죠. 그런데도 과감하게 극복하는 모습에 전율이 돋았습니다. 돋아난 이 닭살 좀 보세요.

-솔직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싶을 만큼 대범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죠! 한 경기를 다 지켜볼 것도 없이 이번 홀의 반전은 정말 환상 그 자체였다니까요!

2012년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50cm 퍼팅을 넣지 못한 김인경은 한동안 슬럼프를 겪었다. 렉시 톰슨도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에서 비슷한 실수를 저질러 우승을 놓쳤다.

심지어 2016년 마스터스에서 어니 엘스는 1m 거리에서 6퍼팅을 했는데 그 당시 불안해서 백스윙조차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전문가들은 극도의 심리적 불안감이 근육의 긴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필상에게는 그런 모습이 한 번도 없었다.

퍼팅은 자신감이고 자기 확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귀신이 따로 없네요!”

“평균 퍼팅 수 1위잖아!”

“말이 나와서 그런데, 퍼팅할 때 안 떨립니까? 유명한 프로들도 평소엔 쏙쏙 집어넣는 1m 안팎의 퍼팅을 결정적인 순간에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잖아요.”

“난 안 떨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필상을 보며 성호는 입을 닫고 말았다. 그가 보기에 사실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퍼팅이 따라 주지 못하면 우승은 불가능하다.

평균 퍼팅 수가 엉망인 선수가 우승하는 경우라도 그 대회에서만큼은 최 상위권이었다는 사실이 그걸 증명한다.

실제 필상이 우승했던 대회들은 어김없이 퍼팅이 받쳐 줬다. 한 라운드당 2, 3타를 퍼팅으로 버는데 당해 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굿 샷!”

연거푸 실수한 홀에서 파를 적은 필상은 핸디캡 3번인 15번 홀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또 다시 고공 행진을 시작했다.

335m의 짧은 파4, 16번 홀에서 262m 티샷을 페어웨이 정중앙에 보내더니 이어진 73m 세컨샷을 핀 바로 옆에 세워 다시 1타를 줄였다.

앞서서 출발한 선수 중에 가장 좋은 기록이 -2라는 것을 감안하면 군계일학의 성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아웃코스로 접어든 필상은 바람이 거세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4번 홀부터 7번 홀까지 다시 줄버디를 잡아내며 -9로 1라운드를 마쳤다.

[압도적 경기력! 그가 돌아왔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필상이 마지막 홀을 나오는 순간, 곧바로 관련 기사가 떴고 우승 전선에 이상 없다는 전문가의 견해까지 실었다.

그도 그럴 것이 2위와의 타수 차가 6타였다.

오전에는 없던 바람이 오후가 되자 거세져 뒤늦게 출발한 선수들의 성적은 오히려 더 낮아 굳이 따질 사람도 없었다.

스코어 카드를 제출한 필상이 움직이는 곳마다 악수를 청하는 이들이 하나같이 축하 인사를 건네 좀 쑥스럽기는 했다.

여하튼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후딱 씻은 성호가 휴대폰을 들고 다가왔다. 경기 중에 맡겨 놓은 걸 이제야 켠 것 같은데 컬러링만 들어도 필상의 얼굴이 밝아졌다.

“형.”

“알아. 잠깐만.”

아무리 반가워도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많은 라커에서 벌거벗은 채로 통화를 할 수는 없어 성호가 대신 수신 버튼을 누르고 말을 전하는 듯했다.

“아! 오케이.”

인사말을 하자마자 필상에게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벨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모모코였다.

일본여자오픈에서 연장 승부 끝에 메이저 대회 3연승 대기록을 달성한 그녀는 이제 신데렐라에서 여왕 모드로 돌입했다.

한 시즌 7승, 거기에 3승은 메이저 대회였으니 일본 열도가 떠들썩할 신기원을 달성한 것은 분명했다.

후도 유리가 2003년 한 시즌 10승을 달성했지만 당시 메이저 대회는 2번뿐이었다. 때문에 깨지지 않을 것 같던 한 시즌 최다승 기록도 갱신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뭐야?”

‘왔어요.’

“어딜?”

묻는 순간 이미 느낌은 왔다.

그녀가 여기 정산CC에 온 것이다.

분명히 오지 못할 상황인 것으로 아는데.

모모코의 인기는 일본에서만 절정이 아니다. 안 그래도 요정 같은 외모로 인해 진즉부터 팬들이 많은데, 필상과 연애하는 사실이 공개되자 그녀의 인기는 한국에서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마치 한국 남자의 승리처럼 여겨졌던가?

여하튼 여길 왔다면 지금 밖에서는 난리가 났을 것 같아 필상은 서둘러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오빠!”

“아! 진짜 왔네?”

놀랄 틈도 없었다.

그녀를 향한 카메라와 스마트폰이 수백 개는 될 것 같은데, 모모코는 필상을 향해 뛰어왔다.

사뿐사뿐?

아니다.

마치 손흥민의 스프린트를 보는 것처럼 달려와 품에 안기는데, 꽉 끌어안지 않으면 그 힘에 뒤로 넘어질 것 같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셔터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건만 한술 더 떴다.

고개를 쓱 들더니 얼굴을 들이미는 게 아닌가!

“모, 모모코!”

“치! 알아요. 안다고요. 흐흐흐.”

짓궂은 장난이었던 것이다. 어이없게도.

하지만 얼른 사태를 파악한 필상은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일단 저리로 가자.”

서둘러 모모코를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커피숍이 있지만 공개된 공간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데, 그마저도 의미가 없었다.

필상이 모모코를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자 그 많던 빈 테이블이 곧 들어찼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나가기도 애매해 일단 어떻게 왔는지 자초지종부터 확인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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