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최경주 인비테이셔널
“저희 정산 골프 클럽을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반겨 주시니 좀 쑥스럽네요.”
“페럼의 최 이사에게 공 프로님에 대한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아! 최 이사님하고 잘 아시는군요.”
“알다마다요. 하하하.”
클럽하우스에 도착하자 총지배인이 직접 나와 반겼다.
과한 대접이지만 융숭한 대접을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이번 대회에 필상이 출전함으로써 얻어지는 부수적인 효과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환영은 각별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이런 명문 골프장을 책임질 넉넉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허락하에 코스를 둘러볼 기회를 얻었다.
“역시 우리나라 코스도 만만치가 않아요!”
“고저가 심하고 벙커도 많은데 페어웨이 언듈레이션까지. 왜 스코어가 잘 나오지 않는지 알겠네.”
“이번 대회부터는 거리도 작년보다 더 길어진다던데요?”
“세계적인 추세니까. 연습 라운드 때 아예 블랙 티보다 조금 더 뒤에서 쳐 보자.”
“블랙 티가 6732m, 환산하면 7362야드나 되는데 뒤로 많이 빼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기는 하지.”
작년 우승 스코어가 -4였다.
바람이 강하고 비도 내려 플레이를 방해하는 요소가 많았다. 늦가을 추위가 찾아와 컨디션 유지가 힘들었다는데 올해도 일기예보는 심상치 않았다.
“190야드에 맞추죠.”
“그래. 그게 적당한 것 같아.”
다음 날 아침부터 연습을 개시한 필상은 가장 먼저 비거리를 다시 설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더도 말고 정상 스윙을 기준으로 전보다 10야드씩 올렸다.
7번 아이언으로 190야드를 보내는 것은 프로라면 누구나 가능하다. 하지만 정확성을 유지한 상황에서 편하게 컨트롤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70%가량의 힘을 유지하기로 했다.
문제는 우드였는데, 이게 좀 들쑥날쑥했다.
보다 많은 연습이 필요한 이유는 역시 멀리 보내는 샷은 아주 미세한 차이로도 비거리가 갈리기 때문이다.
“5번 유틸 245야드, 7번은 235야드로 세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케이! 그럼 3번 우드는 260야드에 맞춰야겠네.”
“280야드까지 날아가던데요?”
“그러니까 연습이 많이 필요하다는 거야. 일단 드라이버 티샷 비거리를 280야드에 맞출 생각이야.”
“300야드는 무리일까요?”
“욕심은! 일단 한 단계 한 단계씩 올라서자고.”
결정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아 애를 먹었다. 보통 프로라도 우드 샷은 정확한 거리를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드를 잡은 이유는 자신이 잡은 클럽 비거리의 최소치와 최대치를 알고 있어서 그 범위 안에 드는 거리라면 요령껏 조절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255야드요!”
“5야드나 짧아? 다시!”
3번 우드를 50번 이상 연속해서 때리던 중이다.
정확한 거리를 재기 위해 성호는 타석이 아닌 직접 연습장 필드에 나가 소리를 빽빽 질러 댔는데, 지겹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필상은 꿈쩍도 하지 않고 연속해서 샷을 쏴 댔다.
오차의 범위를 5야드 안에 넣는 것이 목표다.
때문에 길거나 짧거나 2.5야드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성호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의 태도가 변했다. 오차가 점점 줄어들더니 급기야 260야드에 근접했기 때문이다.
“이게 정말 되는 겁니까?”
“음료수나 한잔해. 5분 쉬고 드라이버 티샷 시작하자.”
“5분이요? 지금 장난하십니까?”
“공을 줍는 것도 아니고 거리를 재는 건데 때리는 것보다 어려울까?”
“알았다고요!”
툴툴 거렸지만 성호도 이 작업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믿기지 않지만 필상의 각별한 능력은 도무지 자신으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런 선수와 경쟁하느니 차라리 캐디가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드라이버 비거리는 일단 네 단계로 구분하자.”
“1단계가 280야드일 거고, 2단계는 얼마입니까?”
“290. 그 단계를 넘으면 300야드, 그리고 4단계는 320야드로 맞출 거야.”
“각각의 거리의 오차 범위는요?”
“음……. 6야드 어때?”
“날 샐 겁니까?”
“날은 못 새지. 연습장 문 닫을 거 아냐.”
“으으으…….”
드라이버 티샷을 그런 오차 범위 내에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매 홀마다 바람이나 티 박스의 높이, 홀의 모양도 다르기 때문에 같은 샷을 해도 다른 결과가 나온다.
하지만 모든 조건이 동일한 연습장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다만 되는 것 같다가도 들쑥날쑥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때문에 280야드를 맞추는 1단계를 마치는데 무려 2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휘두른 스윙은 몇 번인지 세기도 힘들었다.
웨지도 아니고 드라이버를 들고 그렇게 연속 스윙을 한다면 몸에 무리가 온다. 아마추어라면 필시 몸살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집요하게 한 샷 한 샷 집중하는 필상의 진지한 태도에 성호는 차마 그만하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밥은 먹고 연습하는 건가?”
토요일 저녁이었다.
다들 가족과 혹은 연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시간이기 때문인지 연습장은 한가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할 선수들도 아직은 오지 않아 전세라도 내듯이 연습장을 편히 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굵직한 중저음이 들려왔다.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음성에 고개를 돌린 필상은 클럽을 놓고 정중하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최 프로님. 공필상이라고 합니다.”
“알지. 너무도 반갑고 고마운 자네를 내가 모를 리가 있나.”
“근데 이 늦은 시간에 어찌…….”
“자네의 연습하는 모습을 한참 보고 있었지. 그런데 참으로 내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더군.”
한국 프로 골프의 맏형이라고 할 수 있는 최경주 프로였다.
말할 것도 없는 현역 최고의 선배였고 존경 받아 마땅한 길을 걸어왔다는데 이견을 달 수 없는 존재다.
그는 올해로 8회째를 맞이하는 이번 대회 주최자로 열악한 KPGA를 살리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알려졌다.
그는 대회 흥행을 위해 직접 J&L에 필상의 출전을 부탁할 정도의 열정을 지녔고 필상이 일찌감치 들어와 연습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주말인데도 한걸음에 달려왔던 것이다.
그는 무려 2시간이나 필상의 연습을 지켜봤다.
처음에는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의도였으나 좀처럼 끝나지 않는 연습을 관전하며 무식하리만큼 집중하는 노력이 값진 결실을 이끌어 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선배님께서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하셨는지 제가 익히 알고 있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하. 출출한데 나랑 국밥이나 한 그릇 하러 가겠나?”
“그러고 보니 저도 배가 좀 고프네요.”
“그럼 가자고. 근처에 아주 맛있는 집이 있거든.”
다수의 전문가들은 지금의 필상이 한국 골프의 미래를 짊어질 희망이라고 추켜세우지만 탱크, 최 프로가 이룩한 결과에 근접하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
그가 거둔 PGA 8승을 포함한 프로 통산 22승은 넘으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장담하기도 어려운 금자탑이다.
한국 골프의 살아 있는 전설이지만 아직도 현역 프로로 뛰고 있는 모습도 귀감이 아닐 수 없다. 특히나 재작년 갑상선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다시 필드에 돌아온 그의 나이는 만 49세인데 아직도 은퇴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어떤가? 좀 싱겁지?”
“싱겁게 먹는 게 좋다고 해서 적응 중입니다.”
“하하. 나도 뒤늦게 식이요법이라는 것도 해 봤는데, 자넨 그런 걸 일찍부터 깨달아 행동하고 있군. 아주 좋아.”
“그런데 선배님께서는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셔야지 골프장에는 왜 오셨습니까?”
“자넬 보러 왔지. 참 잘한 결정인 것 같아. 자네의 독한 훈련을 지켜보며 과거의 내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었거든. 초심을 잃지 않겠노라 입으로만 떠들었지, 그게 아니었던 거였어.”
“그럼 저랑 같이 연습하시죠.”
“어이고. 내가 버틸 수 있을까?”
그 말은 엄살이었다.
1970년생인 최 프로는 식사를 마치고 바로 필상과 함께 연습을 시작했는데 탱크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 실감이 났다.
몸이 풀리자 드라이브 티샷 비거리가 300야드에 육박했다. 체중을 파격적으로 줄인 뒤, 비거리는 오히려 늘었지만 샷 정확도가 떨어진 것이 문제였는데 그동안 부단한 연습을 통해 교정에 성공한 듯 보였다.
연습하는 틈틈이 그의 스윙을 보며 거기에 묻어나는 경륜과 가치를 보려고 노력했다. 인간의 집념이 만들어 낸 최고의 걸작을 보는 느낌이 들었고 그중에 장점을 뽑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와 이틀을 함께 훈련하며 연습 라운드도 함께 뛰었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실전을 통한 확인과 교정이 없다면 소용이 없어 연습과 실전을 병행해 나갔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기는요. 얼른 인사부터 드리세요.”
“어. 그래.”
월요일부터 대회 참가 선수들이 속속 도착했다.
국내에는 친한 선수가 없어 별 관심이 없었는데 잠시 쉬는 사이, 누군가 등을 툭 쳐서 돌아봤더니 김경태 프로였다.
그 역시 최대한 KPGA 대회에 많이 참가하려고 노력한다. 같은 기간 JGTO 대회가 열리고 상금 규모도 훨씬 크지만 최근에는 가급적 한국을 찾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도 필상의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 흐뭇했다.
그런 그가 필상의 옆 타석에서 훈련하고 있는 최경주 프로를 보자 화들짝 놀랐던 것이다.
“김 프로도 저 옆에다 백 풀어.”
“아. 네.”
“이거 완전히 좌청룡 우백호인데! 하하하.”
악의 없는 그의 권고를 어느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대회 호스트인 최 프로와 함께 훈련하면 여러 모로 유익했다. 숙소와 식사를 비롯해 연습 라운드까지.
한국 골프계에서 그의 비중과 영향력은 생각보다 훨씬 거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에 걸맞는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었고.
그날 저녁, 두 선배와 함께 식사를 나누다 말고 필상은 마음에 담아 두었던 화제를 꺼내 들었다.
“KPGA가 활성화되려면 어떤 게 우선일까요?”
워낙 뜬금없었는지 김 프로는 눈만 껌뻑거렸다. 그러나 최 프로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대답했다.
“너희들처럼 경쟁력을 갖춘 선수들이 해외 투어에서 좋은 결과를 내야지. 미국에 진출한 후배들도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 건 아는데, 많이 아쉬워.”
“상문이나 승렬이, 그리고 안병훈을 비롯해 올 시즌 주목받고 있는 임성재 같은 후배들이 선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알지. 하지만 임팩트가 너무 약해. 그래서는 온 그린을 시킬 수가 없거든.”
그런 결론을 내린 최 프로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모두들 최고의 무대에서 능력을 인정받고자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지만 그 정도로는 한국 골프계의 붐을 일으키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가였다.
그러더니 필상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봤다.
왜 그러는지 감은 잡았으나 애써 모른 척했다. 아직 자신은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전. 그거 무척 아름다운 것이지만 확신 없이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원한다고 당장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침묵이 길어지면 자신에 대한 얘기가 나올 것 같아 필상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국내 투어 대회를 많이 개최하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요?”
“물론 그렇게만 되면 좋지. 하지만 스폰서가 나서지 않는데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 하기야 공 프로가 나서면 대회 한두 개 정도는 이끌어 낼 수도 있기는 하겠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자네 후원사에 요청해야지. 가장 잘나가는 자네의 출전이 보장된다면 흥행 성공도 어느 정도는 보장될 테니까.”
답은 나왔지만 노력이 필요했다.
최 프로와 김 프로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지를 밝혔기에 추후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경주 인비테이셔널 개막을 축하하는 걸까요? 날씨가 청명하고 따스해 골프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날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거의 빠짐없이 출전해 그 어느 해보다 많은 갤러리들이 찾아와 주셨고 골프팬들의 관심도 상당히 뜨거운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일본오픈우승을 포함해 시즌 6승을 거둔 공필상 프로가 출전해서 더 의미가 깊은 대회가 아닐까요?
-하하. 그건 부정하기 힘듭니다만 호스트인 최경주 프로를 비롯해 해외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이 대거 귀국해 참가한 것도 흥행의 주된 요소인 것 같습니다.
-한국의 최강자가 누군지 가려 보자는 건가요?
-그런 의미도 없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저는 다른 점을 높이 삽니다.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선수들은 고국의 투어가 더 활성화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필상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투어프로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업자다.
보다 큰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길을 간다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 하지만 최 프로의 강권이 없었더라도 기꺼이 찾아와 줬을 해외 투어프로들의 출전은 모처럼 KPGA투어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미 프로암을 통해 증명되었듯, 좋은 일에 쓰라는 각계각층의 후원이 쏟아졌고 유명 인사들이 직접 호응하며 전례 없는 성황을 이뤘다.
“우와! 갤러리들이 꽤 많은데요?”
“중요한 건 결과를 내는 거야. 요란한 관심을 받으면서 성적이 따라 주지 못하면 그보다 큰 망신이 어디 있겠냐!”
“참. 별걱정을 다하십니다.”
“성호야.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다.”
“아, 알았어요.”
수많은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첫 티샷을 했다.
이미 여러 대회를 거치며 나름 경험이 쌓였는데도 이번 대회는 마치 첫 대회 출전처럼 긴장되었다. 그게 싫지는 않다.
적당한 긴장은 집중력을 높이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선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주최 측에서는 필상이 편하게 경기에 임할 수 있도록 특별한 매치를 편성하지는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