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격세지감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인데!’
자신에게 뜻하지 않은 능력이 있음을 확인했다.
앞으로 더 두고 봐야겠지만 필상은 실험을 빙자해 모모코와 다양한 시도를 감행했다. 그런데 달콤한 그 행위들은 농도가 짙으면 짙을수록 더 확실한 효과가 있는 듯, 그녀를 밤의 마녀로 만들었다.
지칠 줄 모르고 무섭게 달려드는 그녀를 감당하는 자신이 믿기지 않을 만큼 둘의 밤은 깊고 길었다. 모모코 스스로 밝히기를 이젠 정말 오빠 곁을 떠날 수 없을 거란다.
이런 걸 속궁합이 맞는다고 해야 하나?
또 다른 사실 하나도 밝혀졌다.
“소이치는 친척 오빠에요.”
“친척?”
“육촌이죠. 어릴 때 몇 번 본 게 다이긴 하지만.”
“아! 그런 거였어?”
그가 왜 그런 사실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는지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하기야 뜬금없이 그런 말을 꺼낸 그의 실수이지, 어차피 경쟁하는 선수 간에 많은 것을 공유할 겨를이 없었다.
호감이 짜증으로 바뀐 덕에 호된 상황을 맞이했지만 그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이라고 자위했다. 다만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기면 좀 더 잘해 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과 일본은 정말 가깝다. 이륙 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노라면 도착하는 거리다.
그런데 왜 멀게 느껴지는 걸까?
일본어에 능통하고 이미 일본 투어에서 활약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한국에 도착하자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모모코와 함께 장래를 설계하는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보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려 해도 그게 잘되지 않았다.
그녀는 은퇴하면 한국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일본인이 한국에서 사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공 프로님!”
“오랜만입니다. 대표님. 그런데 뭐 하러 나오셨어요. 제가 택시 타고 사무실로 가면 되는데.”
“그럴 수는 없죠. 금의환향하는 제 최고의 고객인데.”
“요즘 바쁘다면서요?”
“아무리 바빠도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죠.”
“혹시 인터뷰라도 잡혔나요?”
“아뇨. 그건 제가 다 조치했어요.”
일본오픈을 우승한 필상의 인기는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다. 게다가 모모코를 추월해 우승한 선수도 전미정 프로였다.
일본 투어 남녀 동반 우승 때문에 안 그래도 골프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 필상의 귀국 소식이 알려지면 공항에 기자들이 몰려 입국에 난항을 겪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입국을 비밀에 붙였는데도 어찌 알았는지 연락 온 기자들에게는 곧 좋은 기사 거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단다.
덕분에 편하게 대기하던 승용차에 올랐다.
“포인트 3점 달성 축하해요!”
“일본오픈 우승 축하가 아니고요?”
“선수끼리 왜 이래요. 나이키도 마냥 싫지는 않을 거예요. 팬 사인회까지 정성을 보여 줘 아주 흐뭇한 것 같더군요.”
“다행이네요. 말이 나와서 그런데 메인 스폰서에 대해서는 제가 따로 논의할 게 좀 있습니다.”
“음……. 감이 오는데 그건 쉽지 않을 거예요.”
일전에 나이키가 후원하는 KPGA 대회 개최 가능성에 대해 문의한 적이 있다. 어차피 골프 사업에 대규모 광고 후원을 한다면 선수가 아닌 대회 개최도 가능하리라고 봤다.
하지만 나이키는 직접 투어 대회를 주최한 적은 없다. 간접 지원하거나 아마추어 대회는 후원한 적은 있으나 광고 사업의 방향이 아예 다른 것이다.
“내일부터 모모코가 일본여자오픈에 출전하는데 이렇게 한국에 와도 괜찮아요?”
“괜찮지 않으면요?”
“무척 서운해할 것 같아서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지난 이틀 동안 힘을 팍팍 넣어 주고 왔으니까.”
“어머! 너무 야하다. 그 말.”
“그, 그게 그런 뜻이 아닌데…….”
그런 의미로 했던 말이 아닌데 해석을 달리한 이 대표가 싱긋 웃어 보이자 괜히 뜨끔한 필상은 순간 말까지 더듬었다.
묘한 반응에 이 대표는 허리를 잡고 웃더니 그와 관련해 짓궂게 계속 놀려 댔다. 잘됐다는 둥, 곧 축의금이 나가겠다는 둥, 당황스러우면서도 썩 불쾌하지는 않았다.
이보영 대표가 남다른 존재라는 게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퍼펙트 콩. 개인적으로 열렬한 팬입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많은 부분에서 부족한 저를 후원해 주시겠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감사는 제가 드려야지요. 일본 기업에게 뺏기는 줄 알고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스포츠웨어는 저희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일본 투어를 뛰고 있는 좋은 선수들도 앨버트로스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게 아니라 서브 스폰서 계약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 첫 번째가 바로 의류였고 이 대표는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한국 기업을 선택했다.
아디다스를 비롯해 언더 아머, 앤퍼세이와 같은 고급 골프웨어 기업들이 워낙 큰손으로 움직이고 있던 터라 필상도 당연히 글로벌 기업과 계약할 줄 알았던 것이다.
“여자 친구가 혹시 저희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적극적으로 협의하겠습니다.”
“하하하. 그건 좀 너무 많이 나가셨고요. 잘 찾아보면 투자 대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아!”
모모코를 염두에 뒀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 어떤 대가도 치르겠다고 하지만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필상의 계약도 한국 남자 선수 중에 최고액이락 들었지만 모모코가 일본에서 차지하는 인지도를 고려하면 내년 계약은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자 프로들도 일본 의류를 입는 마당에 과도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계약서부터 볼까요?”
필상은 사실 서브 스폰서 계약을 모두 이 대표에게 일임했다. 본인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잘해 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필상이 한국에 들어오는 시점에 맞춰 몇몇 회사와의 계약에 직접 참여하도록 권했다. 아무래도 당사자를 직접 만나는 것이 낫고 필상이 이런 일에 굉장히 능숙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필상은 기존에 서로 협의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어냈다. 그래 봐야 전체 금액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사시사철 가족들이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배려 받은 것은 필상에게는 소중한 일이었다.
의류를 제외하면 직접적인 후원이 아닌 광고 스폰서였다.
항공사, 자동차, 시계, 전자, 금융까지도 이해가 되는데 골프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분야도 스폰서에 참여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
“어?”
“저 왔어요.”
“아이고 우리 아들!”
온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은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였는데 혼자 적적한 저녁을 들고 계실 줄 알았다. 그런데 다행히 큰 누나 식구들이 집에 와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필상의 모습에 엄마는 음식을 만드시다 말고 뛰어 나오셨다. 필상도 엄마를 덥석 안아 드렸는데, 코끝이 찡했다.
갑자기 힘들게 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기 때문이다.
“배고파요.”
“어. 어. 얼른 밥해 줄게.”
“자형. 오랜만에 뵙습니다.”
“신수가 훤해졌는데? 우리 처남.”
“다들 염려해 주신 덕분이죠.”
“삼촌!”
누나와는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었다.
조카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바쁜 와중에도 조카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풀어놓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어수선하고 정신없었지만 이제야 집에 왔다는 게 실감났다.
“바쁠 텐데 뭐 하러 애들 선물까지 챙겼어?”
“누나 것도 사 왔는데 거부하는 거야?”
“야!”
언제 이렇게 가족들에게 선심을 써 봤던가.
직장 생활을 하는 내내 쪼개고 쪼개 썼다. 성희의 학비도 대고 조금이나마 엄마 용돈도 드리고, 또한 작은 아파트라도 사기 위해 저금하고 나면 매달 쪼들렸다.
그래서 조카들 용돈조차 시원하게 줘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젠 자랑스러운 외삼촌이 되었고 비싼 선물도 부담 없이 사 줄 수 있는 현실이 너무도 감사했다.
“한국투어 나가려고?”
“응.”
“최경주 인비테이셔널?”
“약속했거든. 그리고 우리 엄마도 보고 싶고.”
음식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으나 필상의 말은 한 마디로 흘려듣지 않으셨던 엄마가 흐뭇한 표정을 짓는 걸 보자 더 뿌듯했다.
수고하고 노력한 모든 고생이 일시에 다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아 너무 행복했다. 진즉에 이런 아들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제 밥그릇 챙기기도 버거웠던 나날들이 물밀 듯이 떠오르며 다시 한 번 골프를 하게 된 것에 감사했다.
“엄마. 내일 저랑 바람 쐬러 가요.”
“난?”
“삼촌. 우리도 데려가요.”
“할머니가 오케이 하시면.”
“안 돼. 너희들은 내일 학교 가야지.”
엄마의 대답도 나오지 않았는데 난리가 났다.
필상은 적어도 이틀은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필상이 대답을 하지 않자 누나와 조카들은 엄마에게로 몰려가 보챘다.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고.
그리고 마침내 허락이 떨어졌다.
“다 데려가지 뭐. 난희랑 소희네도 연락해.”
“와! 버스 대절해야겠네. 하하하.”
다음 날 아침, 필상의 집 앞에는 정말 버스가 대기했다.
온 가족이 다 모여 13명이 25인승 중형 버스에 올랐고 버스는 설악산을 향해 출발했다. 일전에 엄마와 약속하고 지키지 못했던 나들이를 이번에는 꼭 가고 싶었다.
평일이라 한가해 더 좋았다.
조카들도 그 유명한 외삼촌 ‘퍼펙트 콩’이 귀국해 함께 가족 여행을 간다는 말에 학교에서 야외 수업으로 처리해 줬다.
그도 그럴 것이 조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가장 유명한 졸업생이 바로 필상이었기 때문이다.
타 학교와는 달리 장래 희망란에 ‘프로 골프 선수’라고 쓴 애들이 태반이 넘는다는 말에 기회가 되면 모교에 후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
“속초를 왔다 갔다고요?”
“응.”
“그런데 저한테 전화도 안 하셨습니까?”
“꼬마 애들만 다섯이었어. 너 왔으면 걔들 뒤치다꺼리 하느라 정신없었을 걸?”
“에이. 핑계는!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속초에 나타나 저랑 같이 다니면 폼도 났을 텐데.”
“너 이미 유명해졌다면서?”
“그건 그렇지만 형이랑 다니면 또 다르죠. 애들 재우고 밤에 한잔할 만한 멋진 데가 얼마나 많은데요.”
“엄마를 모시는 게 포인트였어. 군소리하지 말고 운전이나 신경 써.”
수요일에 입국해 이틀 밤을 집에서 쉰 필상은 금요일 오후에 성호를 만나 함께 김해로 향했다.
대회가 열리는 정산CC는 접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고 스윙도 전반적으로 점검할 계획이었다.
부산도 한 번밖에 가 보지 않은 필상은 김해는 난생 처음이었는데, 중부 내륙 고속도로를 타니 생각만큼 멀지 않았다.
2005년에 개장한 정산CC는 27홀 회원제 골프장으로 부산 인근의 명문 코스로 손꼽힌다. 그래서인지 정문을 통과해서 클럽하우스로 향하는데 느낌이 아주 편안하고 좋았다.
“너도 여긴 처음이지?”
“네. 골프장 아주 좋네요. 모기업이 든든하다더니 투자를 많이 한 것 같네요.”
“코스가 꽤 어렵다던데, 공부는 좀 했냐?”
“윽!”
필상도 이 코스에 대해 상세히 선행 학습을 하지는 못했다.
모처럼 집에서 쉬는 동안에는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가족들과 어울려 푹 쉬고 싶었고 그리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모모코랑 같이 오지 않은 것이 무척 서운하신 것 같았으나 그녀가 일본여자오픈에 출전했다고 말하자, 그 중계방송을 틀어 놓고 하루 종일 보셨다.
올 겨울에 둘이 약혼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름 자신은 있었으나 그녀가 너무 어리다는 생각에 아직 입도 벙긋하지 못한 상태였다.
모모코는 어제 치러진 첫 라운드를 -4를 쳐 공동 3위에 올랐다.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싶었는데 수시로 확인한 오늘 성적은 펄펄 날고 있었다.
전반에만 4파를 줄이며 단독 선두에 나서면서 메이저 3연패 가능성을 한층 높여 일본 언론은 난리가 아니었다.
“KPGA 홈피에 들어가 봤는데요. 작년도 이 대회 기록도 제대로 확인이 되지 않더라고요.”
“내가 봐도 관리가 너무 엉성하더라. 협회가 그 정도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어떻게 투어를 관리하겠다는 건지.”
“죽어라, 죽어라 하는 거죠.”
“J&L에서 자료는 다 보내 주지 않았어?”
“네. 어제 받았어요. 아직 검토를 끝내지는 못했지만.”
“어허! 정신 안 차리네?”
“오늘부터 바짝 집중할게요.”
“두고 보면 알겠지. 그리고 협회 얘기는 언급하지 마. 아직은 그럴 처지가 아니니까.”
“네.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필상도 전년도 기록이라도 살펴보려고 홈페이지를 접속했는데 크게 실망했다.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진다는 느낌이랄까.
KLPGA는 날로 번성해 홈페이지 관리도 체계적인데 반해 코리안 투어는 기본적인 정보만 제공할 뿐, 애초에 구성된 카테고리의 정보조차 채우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라운드별 선수 기록과 홀별 난이도조차 텅 빈 것을 보며 경험이 전무한 필상으로서는 연습 라운드가 한층 더 중요해졌다.
KPGA가 성장 동력을 잃은 것은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가장 두드러진 것이 스타의 부재에 따른 흥행 실패라고 판단했다.
분명 매년 좋은 자원들이 배출되는데, 그들이 국내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것이 문제다.
운동에만 몰두하면 부수적인 것들은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외 투어에 눈을 돌리게 된다.
여자 프로들은 국내에서 결과가 없는 선수는 아예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다. 잠재력은 높지만 대외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해외 진출은 선수 생명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