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본능에 충실한 밤
“한국 가시게요?”
“응.”
“일본투어 출전 약속을 어기지 않을 거라면서요?”
“약속은 한국 팬들에게도 했어.”
“아!”
“이제 겨우 3개 대회 남았는데 그대로 뒀다가는 올해 우리나라 투어는 참가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잘하셨네요. 그럼요! 뭐니 뭐니 해도 조국을 버릴 수는 없지요.”
“자식, 오버하기는!!”
투어에 출전하지 않는다고 조국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프로인 필상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국가를 대표하는 대회에 참가하는 것도 아닌 상업적인 투어 대회에 의무 출전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KPGA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골프를 치지 않았다면 모를까, 아직 남 걱정할 때는 아니지만 한국 남자투어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여자 대회는 무려 30여 개가 개최된다. 날씨가 최악인 여름과 겨울 시즌을 제외하면 거의 쉬는 주간이 없이 매주 열린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상금 규모도 작지 않고.
하지만 KPGA는 기껏 17개가 개최되는데 그중에 상금 규모가 10억도 되지 않는 대회가 8개나 된다. 매년 대회를 유치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최선을 다하는 게 옳지!’
쓸데없는 오지랖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더라도 고국에서 환영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프로는 결과로 말하기 때문에 보다 큰 무대에서 성공을 거두면 한국 팬들은 노력과 상관없이 환호할 것이다.
이미 여러 스포츠 스타들이 그런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자신은 늦게 운동을 시작한 터라 국가대표가 되어 국위 선양할 일은 없을 것 같고, 스타의 생명력이 팬들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보다 먼 장래를 생각하면 지금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고 모양새도 좋다고 판단했다.
거금을 틀어쥐고 큰 명예를 얻어도 결국 선수 생명은 짧고 인생은 길다는 진리를 망각하며 안 된다. 노후를 고향에서 보내고 싶기에 더더욱.
***
“오빠!”
“아이고 이런!”
공항에 마중 나오지 말라고 했다.
어딜 가나 팬들이 시선이 과도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자 했지만 출구 앞에 장사진을 이룬 군중들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필상이 이곳으로 온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눈치 빠른 기자들이나 알 법한 일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몰린 이유는 모모코가 한참 전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풀나풀 달려와 품에 안기는 장면은 아찔했다. 어쩔 수 없이 뜨거운 포옹 장면을 연출했지만 아마도 잠시 후부터 기사가 뜸은 물론 SNS가 뜨거워질 것이다.
“죄송해요. 공 프로님이 경기가 끝나고 바로 이곳으로 와서 너무 피곤해요. 인터뷰는 할 수 없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미사키가 나서서 길을 열었다.
성호도 함께 도와 공항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나마 일본 팬들은 스타를 성가시게 하지 않아 다행이다.
차에 오르자 모모코는 아예 필상의 가슴에 기댔다. 무슨 말이고 종알댈 줄 알았는데, 활짝 웃는 표정은 사라지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몹시 힘들었는지.
그걸 보는 필상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숙소에 도착하면 내가 라면 끓여 줄게.”
“라면이요?”
“응. 성호가 한국 라면은 꼭 챙겨서 다니거든.”
“형님!”
조수석에 타고 있던 성호가 발끈했지만 필상은 쳐다보지도 않고 모모코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뭐라고 얘기했는지 몰라도 모모코가 까르르 웃으며 본색을 되찾아 성호는 이내 포기하고 제 자세를 잡았다.
마지막 날 역전패, 프로에게는 아주 치명상이다.
하지만 필상은 경기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모코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 기다릴 요량이었다.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11시가 다 된 늦은 밤이었다. 하지만 필상은 정성껏 라면을 끓였다. 계란까지 풀어.
“어때?”
“좀 맵지만 맛있어요.”
밤에 먹는 라면은 좋지 않다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풀이 죽은 모모코의 생기를 되찾아 준 보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면을 다 먹자 모모코가 제 방으로 조르르 들어가더니 뭔가를 들고 나왔다.
“와인?”
“네. 오빠 우승 축하 파티는 해야죠.”
“애들 불러올까?”
“싫어요. 둘만 오붓하게.”
“좋지!”
와인을 마시고 취기가 돌 줄은 몰랐다.
모모코도 필상도 모든 심력을 쏟아부은 경기를 마치고 쉬지 못한 뒤라서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그녀가 너무도 예쁘게 보였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엉킨 둘은 뜨거운 입김을 토하며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언제 침실로 자리를 옮겼는지, 옷은 어떻게 벗었는지 모른다.
그날 밤은 본능에 충실한 젊은 남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 정말 오래도 잘 참았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와인이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감정이 봇물처럼 터지게 만들었다.
피곤하다더니…….
***
‘응?’
눈을 뜨기도 전에 떠올랐다. 지난밤의 뜨거운 열기가.
슬며시 옆으로 손을 디뎌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직도 그녀의 체취가 이불 안에 가득한데 말이다.
그래서 얼른 눈을 뜨고 살펴봤지만 밤새 품에 안고 잤던 그녀는 지금 곁에 없었다.
어색함이 부끄러웠을까?
하지만 먼저 침대를 떠난 모모코를 생각하자 자신이 너무 생각이 없었다는 느낌이 들어 얼른 일어나 그녀의 방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거기에도 없다. 시계는 아침 7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어? 오빠 일어났어요?”
“모모코?”
그녀의 음성이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심장이 쿵 울려 버린 필상은 시선 둘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샤워를 마친 그녀의 촉촉한 벗은 몸은 절대 작은 수건 한 장으로 가려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 귀여워!”
쪽!
당황한 필상의 모습이 정말 귀여웠는지 훅 다가와 두 팔을 목에 두른 모모코가 필상의 입에 뽀뽀를 했다.
그리고 필상은 다시 용감해졌다.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로 향한 것이다. 자지러지게 웃으며 거부의 몸짓을 취하는 모모코도 이 아침이 너무나 행복한 것 같았다.
딩동! 딩동!
“으!”
“형. 성호에요. 문 좀 열어 봐요.”
진짜 확 때려 주고 싶었다. 죽을 만큼.
하필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초인종을 누르다니.
“아직 안 일어났어요? 문 좀 열어 봐요. 모모코!”
눈치도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잠깐 기다려!”
필상이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자 모모코는 제 방으로 쏙 사라졌다. 들어가기 전에 입술을 삐죽 내민 모습은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분명한 것은 이제 그녀와 몸을 텄다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생각만 해도 몸이 뜨거워지고 날아갈 것만 같았다.
디리링!
“어?”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서던 성호는 불쑥 날아오는 주먹에 기겁하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물론 정말로 때릴 생각이었다면 그렇게 피할 수 없다. 그냥 너무도 얄미워 위협한 것에 불과하지만 진심이 없었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들어오긴 어딜 들어와!”
“왜요? 아침부터.”
“됐고. 좀 있다 나갈 테니까 로비에서 기다려.”
“알았어요…….”
뭔가 눈치를 챘나?
대답하는 성호의 말꼬리가 야릇했다.
하지만 필상이 인상을 확 긁자 얼른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러나 뜨겁게 달아올랐던 아침의 역사는 이미 끝났다.
얼른 모모코의 방문을 열며 야한 상상의 나래를 폈지만 이미 옷을 걸친 모모코는 부지런히 위장 중이었다.
“오빠. 얼른 샤워해요.”
“……응. 알았어.”
뭔가 선수를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샤워하는 내내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수컷의 정복욕이라면 너무 진부한 표현일까?
“배고픈데.”
“한 바퀴 뛰고 나면 아침 식사가 더 맛있을 거야.”
“좋아요!”
아침을 맞이한 코코파 리조트클럽은 야자수가 사방에 우거진 정경이 마치 하와이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일게 했다.
일본여자오픈이 이곳의 하쿠산 빌리지 골프 코스에서 열리기 때문에 각자 대회를 마치고는 서둘러 이곳으로 이동했다.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키며 잔디 위를 달리는 기분은 쌓였던 피로를 모두 날려 버릴 만큼 상쾌하고 좋았다.
그런데 나란히 뛰고 있는 모모코는 필상과 비할 바가 아닌 듯, 아주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잠도 많이 못 잤는데 피곤하지 않아?”
“아뇨. 날아갈 듯 몸이 가벼운데요.”
“다행이네.”
“오빠의 사랑이 제게는 무엇보다 큰 힘인가 봐요.‘
낯간지러운 그 말에는 대꾸하지 못했다.
생선 맛을 아는 고양이가 무섭다고, 그냥 확 으스러지게 안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게 쉽지 않을 뿐이었다.
뒤따라 뛰던 성호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아무렴 어때,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인데.
아침도 맛있게 먹었고 연습에 임하는 분위기도 좋았는데,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진 상황이 발생했다.
“한국 간다고요?”
“응. 대회가 잡혔어.”
“언제요?”
“내일 가려고.”
“…….”
모모코는 이후 말없이 연습만 했다.
필상이 지적하는 부분은 신경을 썼지만 언제나 그녀의 얼굴을 떠나지 않는 깜찍한 미소는 찾기 어려웠다.
혹시 이번 대회에 필상이 캐디를 봐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에 대한 얘기는 진즉에 끝냈다.
서로를 위해 무엇이 현명한 선택인지 합의했고 미사키도 좋은 캐디였기에 서로 호흡을 잘 맞춰 나가기로 결정했다.
점심 식사를 할 때가 되어서야 모모코의 입이 열렸다.
“나도 가고 싶어요.”
“모모코.”
“일본여자오픈 중요한 거 알아요. 그래도 오빠랑 같이 가고 싶단 말이에요.”
“그럼 대회 끝나고 오면 되잖아.”
“정말 가도 돼요?”
“그럼. 네가 응원해 주면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엄마도 누나들도 반가워할 거고.”
“히히히……. 알았어요.”
“그럼 얼른 맛있게 먹어.”
어차피 그녀는 2주 연속 출전하기 때문에 이 대회가 끝나면 한 주는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필상이 무거운 과제를 주고 연습을 지시할 것 같아 선수를 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는 삐친 것이 맞다. 설사 캐디를 봐 주지는 못해도 중요한 시기에 곁을 지켜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뜨겁게 좋아하지만 대회 일정 때문에 서로 헤어져 있는 시간이 필상에게도 힘이 드는데, 감성적인 그녀는 더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결정한 것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 가기 전에 그녀의 스윙을 전반적으로 점검해 최고의 컨디션으로 일본 여자오픈을 치르게 하는 게 중요했다.
“왼팔이 구부러져!”
“어디 봐요!”
누구든 볼 수 있지만 자신의 스윙을 정작 자신은 볼 수 없다는 것이 골프라는 운동이 어려운 이유다. 모모코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녹화된 연습 영상을 보며 확인했다.
그녀의 스윙은 여자답지 않게 아크가 상당히 크다.
스탠스를 넓게 벌리고 힘차게 휘두르는 편인데, 크고 강한 스윙은 장점도 확연하지만 반대급부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자잘한 실수가 많아진다는 것인데 왼발이 구부러지기 때문에 오버 스윙이 되는 단점은 이미 필상과 교정했던 내용이다.
이후 문제가 없었는데 어느 한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옛날 버릇이 슬그머니 기어 나왔고 날카로운 필상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그래! 쭉 뻗어 주니까 스윙 궤적이 훨씬 일관되잖아.”
“스탠스는 괜찮아요?”
“왜?”
“점점 더 넓어지는 것 같아서요.”
“그건 자꾸 장타를 날리겠다는 욕심이 생겨서 그런 거지. 지금은 괜찮은데?”
원인을 짚어 줬기에 스탠스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쉬던 모모코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저 이제 핫팬츠는 안 입으려고요.”
“네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을 왜?”
“임자 있는 몸이니까요.”
“그럼 지난 몇 달 동안은 내 여자가 아니었던 거야?”
“그거랑은 또 다르죠. 흐흐흐.”
그 말을 던지며 슬쩍 흘겨보는 이유가 뭔지 깨달은 필상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걸 덮으려고 타석에 들어서야 했다.
그런데 피곤할 줄 알았던 몸이 상당히 가벼웠다.
그저 기분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다른 이유를 곰곰이 따지던 필상은 모모코에게 손짓해 잠시 산책하며 몇 가지 내용을 확인했다.
“모모코 일전에 내가 마사지를 해 준 적이 있잖아.”
“네. 너무 좋았죠.”
“내 마사지가 치료 효과가 있는 것 같아?”
“물론이죠. 그게 좀 신기한 일인데, 솔직히 말하면…….”
갑자기 음성이 기어들어 가 더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모모코의 증언은 심증이 확증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는 처음에 제가 오빠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오빠의 손길이 닿기만 해도 몸이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았거든요.”
“흐물흐물?”
“심하게 흥분한 상태라고 해야 하나? 어머! 내가 지금…….”
“괜찮아. 지금 확인하는 건 우리 둘에게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 있는 그대로 얘기해 줘.”
부끄러운 듯 더듬더듬 고백하는 그녀의 말을 종합하자면 필상의 몸이 그녀에게는 치유의 효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마사지를 받은 뒤 정말로 아프지 않았고 굉장히 피곤했던 어제도 격렬한 사랑을 나눴는데 아침에 눈을 뜨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당장 18홀을 뛰어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단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