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85화 (85/354)

085. 경쟁자는 오직 자신뿐!

“모모코는 잘 지내죠?”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한 순간, 불쑥 들어온 소이치의 질문에 필상은 당혹스러웠다. 모모코를 잘 아는 듯 자연스러운 호칭이 왠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 자식이 날 시험하나?’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빙긋 웃은 필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설사 그가 모모코와 잘 안다고 해도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괘씸죄는 적용시켜야 한다는 것이 필상의 생각이었다.

덕분에 팬들은 인코스에 접어든 필상의 화려한 스윙 쇼를 지켜보는 기쁨을 만끽하게 되었다.

-와우! 팬 서비스라도 하는 건가요?

-전반 내내 차분한 경기를 펼쳐 이븐파를 유지한 지금도 2위인 소이치와 12타나 차이가 나서 공 프로 스스로 좀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최저타 기록에 대한 기대를 해 봐도 되겠군요?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2타만 더 줄이면 JGTO의 역사를 새로 쓴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 제가 그 점을 간과했군요. 그런데 JGTO 72홀 최저타 기록이 30언더파나 됩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투어니까요. KPGA는 2016년 이형준 선수가 카이도 오픈에서 -26을 기록한 것이 최저타 기록입니다.

-공 프로가 지난 동해오픈에서 그걸 깨지는 못했군요. 그렇다면 일본오픈에서 -31을 찍고 국내에 돌아와 그 기록도 갱신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캐스터는 좋은 소재를 찾은 게 무척 기분 좋은 것 같았다.

하기야 우승이 결정된 듯 무료한 중계를 하노라니 일본오픈 최종 라운드임에도 별로 흥이 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필상이 갑자기 장타를 때리고 공격적인 샷을 날리자 중계 분위기는 물론 따라다니던 팬들의 호응도 갑자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오로지 한 사람, 소이치만이 홀로 소외된 듯 의기소침했다.

그러게 왜 역린을 건드린 것인지?

10번 홀의 모양은 기형적이다. 그린을 좌측 구석에 만들어 놔 티샷이 우측에 떨어지지 않으면 그린 공략이 무척 어렵다.

게다가 오늘은 핀을 왼쪽 3야드 지점에 바짝 붙여 놔서 드로우가 심하게 걸리면 공은 여지없이 숲으로 기어들어 가 타수를 잃게 된다.

“우와아아아!”

“버디! 버디!”

“진짜 미치겠다! 오빠!”

오빠라는 단어에 필상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홱 돌아갔다. 누군지 모르지만 소리가 난 근처에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여인은 결단코 한 명도 없었다.

본인도 쑥스러워 씩 웃어 준 것에 다시 난리가 났다.

그리고 범인을 색출할 수 있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하트를 그리고 있는 중년의 여인들, 오빠라는 한국어를 배울 정도로 열성적인 팬클럽 회원들이었다.

평균 타수 4.65의 핸디캡 1위인 파4, 11번 홀은 파로 만족했다. 그러나 414야드 12번 홀은 다시 필상의 사냥터가 되고 말았다.

-드디어 30언더에 진입했습니다! 우리 공필상 프로가 JGTO 최저타 기록과 타이를 이룬 순간입니다.

-감개무량하군요. 기왕이면 몇 타 더 줄이면 좋겠네요. 기록 갱신은 물론 아무도 깰 엄두를 내지 못하게.

-저는 더도 말고 1타만 딱 더 줄이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하지만 기쁨도 잠시, 13번 홀에서 필상은 보기 드문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514야드의 긴 파4 홀이지만 내리막이 심해 어제는 아이언으로 공략한 홀이다.

하지만 필상은 내친 김에 드라이버 비거리 기록도 갱신할 수 있다는 생각에 힘차게 스윙했다. 정확도에도 자신 있었다.

임팩트도 제대로 이뤄졌기에 스윙을 마친 필상도 서서히 자세를 풀고 날아가는 공을 바라봤다.

“어?”

“서! 서라고!”

곁에 있던 성호의 외침이 다급했다.

가파른 경사 때문에 캐리가 300야드를 훌쩍 넘긴 것까지는 나무랄 게 없었다. 그런데 미친 듯이 구르던 공이 돌연 호수 방향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호수의 초입은 무려 400야드에 달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워터해저드에 빠지지 않는다. 장타를 쳐도 그 앞을 가로 막은 제법 폭이 넓은 러프에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필상은 탄력을 받은 공이 러프를 뚫고 물가에 빠지는 광경을 확인했다. 잘 보이지 않을 거리지만 수면에 퍼지는 여러 겹의 동심원이 필상의 좋은 시력에는 잡혔다.

“걸렸을 겁니다. 경사에.”

“빠졌어. 경사에 걸리나 빠지나 마찬가지겠지만.”

이동하던 필상은 앞장서 걷는 소이치의 얼굴에 걸린 옅은 미소를 봤다. 자신이 오해를 했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의심이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말끔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얍삽한 놈인가?’

차라리 능력이 모자란 것은 흠이 되지 않는다. 불가능한 것을 바라는 것이야말로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놈은 필상의 호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았다. 외모는 단정하고 태도도 진중해 보이지만 지나치게 잔머리를 굴리는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는 노릇, 그런 감정을 품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한다. 평정심을 잃을 가능성이 높아 샷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필히 파를 해야 하나?’

가장 좋은 보복은 역시 실력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놈과 모모코의 관계가 어떤지, 어떻게 하면 골탕을 먹일 수 있을지, 그런 잡생각은 말끔하게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모모코에 대한 신뢰는 굳건했고 무엇이 놈을 흔들 최적의 무기인지 확연히 인지한 필상은 드롭을 하면서도 담담했다.

어차피 남은 거리는 130야드 안팎에 불과하다.

러프에 드롭을 하는 것이 찜찜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서드 샷을 핀에 쩍 붙인다면 그야말로 효과 만점이 될 것이다.

멋진 샷이 최선의 보복이라는 상념마저도 지워 버린 필상은 샌드웨지를 잡았다. 클럽 페이스와 공 사이에 풀이 낄 경우 스핀이 걸리지 않아 공을 세우기 어렵다.

그래서 아예 확실하게 띄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쉬익!

느리디 느린 테이크백이었으나 다운 블로우는 무시무시했다. 다만 웨지 샷인 탓에 그 강력함은 한 움큼 떨어져 나간 뗏장만이 증명할 뿐, 사람들의 시선은 까마득히 치솟은 공에 쏠렸다.

“인 더 홀!”

“나이스 샷!”

대략 그린에 떨어진다는 정도만 감이 올 뿐인데도 팬들의 환호성이 얼마나 드높은지 허공에 뜬 공이 그 여파에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퍽!

거의 일직선으로 하강한 탓에 그린을 꽉 찍은 공은 다시 그 자리에서 그대로 튀어 올랐고 겨우 10cm 앞에 떨어졌다.

그러고는 빙판 위의 차바퀴처럼 힘차게 헛도는가 싶더니 한순간 뒤로 쭉 빨려 오며 강력한 백스핀이 작렬했다.

러프에서 때린 샷인데도 구르기는커녕 생생한 스핀이 걸리는 모습에 다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

“아주 주문을 걸어라, 걸어!”

“으으으……. 무슨 스핀이 저렇게 많이 걸리느냐고요!”

“그러게. 너무 많이 먹였나 보다. 하하하.”

공이 떨어진 지점이 홀컵보다 2m가량 뒤라서 스핀이 걸리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놈의 스핀이 미쳤는지 너무도 많이 빨려 와 되레 홀컵을 훌쩍 지나 4m 앞에 서고 만 것이다.

필상도 적잖이 놀랐다.

마치 끌어치기(히끼)를 한 당구공처럼 이렇게 많이 끌어올 줄은 미처 몰랐다. 골프의 기술이라는 것이 인간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체감한 사건이었다.

“다행히 평지라서 버디, 아니 파는 가능할 것 같아요.”

“왼쪽으로 휘는 라이를 볼 하나 정도는 봐야 할 거야. 가서 확인해 보자고.”

“해저드에 빠지고도 이거 파하면 정말 끝장인데!”

필상의 시선은 이미 그린 좌측 러프로 세컨샷을 보낸 소이치의 어프로치에 닿아 있었다. 회심에 찬 표정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애초에 역전이라도 바랐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뜻하는 대로 한껏 물을 먹이고 싶었던 것일까?

가장 숏 게임이 편한 위치를 골라 비교적 안전한 선택을 했지만 필상의 예기치 못한 백스핀에 충격을 받은 건 분명해 보였다.

틱…… 틱!

신중한 칩샷이었으나 지나치게 느렸던 스윙에 미처 날아가지 못한 공은 다시 클럽 페이스에 맞아 엉뚱하게 날아갔다.

투 터치. 의도성이 없었으므로 새로 바뀐 규정에 의해 벌타는 없다. 하지만 웅성거리는 갤러리의 반응에 소이치의 얼굴은 홍시보다도 더 벌게졌다.

“모모코는 잘 지내.”

엄한 데로 날아가 그린 뒤쪽의 프린지에 멈춰선 공을 향하던 소이치에게 모처럼 필상이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없어도 그는 똑똑히 알아들을 톤이었다. 그러나 당황한 놈은 대꾸도 하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머리 위에서 화를 참지 못해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러게 왜 불필요한 도발을 하냐고?

하기야 그 덕에 필상은 2타를 줄이며 녀석과의 격차를 다시 14타 차로 벌렸으며 잘하면 1타 더 벌어질 것 같았다.

물론 앞 조에서 플레이한 김경태와 송영한이 더 잘 치고 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경쟁의 상대는 아니었다.

-참 보기 드문 장면이 나왔네요. 아마추어들도 저런 실수는 거의 하지 않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요?

-급하게 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앞서 공 프로가 묘기에 가까운 샷을 보여 준 터라 자신도 최소한 붙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끼지 않았나 싶네요.

-그래도 명색이 디펜딩 챔피언이고 챔피언 조에서 플레이하는 선수인데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날고 기는 프로들도 가끔 심하게 긴장하거나 긴장이 완전히 풀리면 저런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아! 그렇기는 하더군요. 텍사스오픈에서 나상욱 프로가 한 홀에서 16타를 치는 걸 본 적이 있거든요.

-잊고 싶은 기억일 겁니다. 누구에게든 그런 기억 한두 개는 다 있지 않을까요?

사실이다.

몇 년씩 투어를 뛰다 보면 프로들도 감추고 싶은 흑역사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필상도 ISPS 매치 플레이에서 졸도를 하며 기권패를 하지 않았던가.

소이치의 이번 샷도 그에게는 오랫동안 남을 악몽일 것이다. 투어프로가 어프로치를 하다가 투 터치를 범하다니!

그 충격은 생각보다 오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11m 퍼팅이 턱없이 짧아 4m를 남긴 그는 또 다시 퍼팅을 해야 했고 겨우 붙여 보기를 하고 말았다.

비슷한 거리였던 필상은 뜨거운 박수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이후 경기는 볼 것도 없었다.

아쉬운 점은 이후 필상이 공격적인 플레이를 자제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17번 홀에서 1타를 더 줄인 최종 스코어는 -31, JGTO 72홀 최저타 기록을 갈아치웠다.

마지막 퍼팅을 마친 필상이 담담하게 공을 집어 사방에서 샴페인 세례가 쏟아졌다. 한국 동료들뿐만 아니라 일본 선수들도 축하 향연에 참가한 모습은 보기 좋았다.

[퍼펙트 콩, 일본오픈의 우승!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31, 최저타 기록 갱신. 퍼펙트 콩의 전성시대 도래!]

[또다시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 퍼펙트 콩의 투어 4승(통산 6승)에 걸린 시간은 단 18주!]

[2위와 13타 차 우승, 탑 10에 일본 선수는 단 2명 뿐!]

[여자보다 못한 일본 남자 골프계, 이대로 괜찮은가?]

[모두를 압도한 월등한 기량과 성숙한 태도, 세계 골프계가 주목한 JGTO 루키 퍼펙트 콩. 그의 질주에 박수를 보낸다.]

[그의 경쟁자는 오로지 자신뿐! 절대자의 권좌에 앉은 퍼펙트 콩, 그의 골프를 정밀 분석하다.]

[JGTO의 즐거운 비명, 유료 입장객 3만 명 돌파!]

경기 후 팬들과의 만남을 가지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워낙 많은 팬들이 몰린 터라 주최 측에서 오히려 자제를 권했다. 분명한 것은 일본 열도에 또다시 골프 붐이 불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일본 골프계는 최근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있었다. LPGA는 물론 JLPGA마저도 한국 여자 선수들이 장악하며 타 스포츠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기가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황금 세대의 대표주자 모모코가 연승을 거두며 한국 투어 우승까지 거머쥐자 골프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늘었다.

스타 마케팅이 먹힌 이유는 미모마저 출중한 모모코가 일본 팬들이 기대했던 기량을 선보이며 한국 선수들을 압도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었던 JGTO에 돌연변이가 나타났다. 아마추어 신분으로 우승하고 각종 신기록을 세우는 것을 보면서도 애써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일본 선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나이키가 거금을 안겨 준 것이 크나큰 실수라고 생각하던 이들도 이제는 필상이 대세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이 대표님한테 전화 좀 넣어 봐.”

“안 그래도 경기 끝나고 시간 되면 연락 좀 달라고 하셨어요.”

“그래?”

시상식이 지나치게 길었다.

무슨 부상이 그리도 많은지, 그걸 다 챙기면 트럭이 필요할 정도로 갖가지 부상이 주어지는 것이 일본 투어의 특징이다.

그렇다고 우승자가 도중에 빠져나올 수도 없어 자리를 지키는 것이 시합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늦어진 탓에 겨우 비행기 시간에 맞춰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처리한 것은 이 대표와의 통화였다.

“잘됐네요.”

‘그럼 미나비 ABC챔피언십은 접는 건가요?’

“네. 다다음주에 열리는 최경주 인비테이셔널 출전이 가능한지 알아봐 주세요.”

‘그건 어렵지 않아요. 귀찮다 싶을 만큼 연락이 오니까.’

“그럼 잘됐네요. 내일 모레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기분 좋은 날이다.

하지만 마지막 날 역전을 허락해 1타 차로 우승을 놓친 모모코는 크게 상심했다. 특히나 다음 주에 일본여자오픈이 열리기 때문에 그녀를 다독이러 미에 현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필상은 파격적인 행보를 결정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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