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84화 (84/354)

084. 홀로 빛나는 존재

-우리나라도 이제는 유료 입장객의 수가 적지 않은데, 역시 일본 최고의 대회인가요?

-여자 대회는 활성화되었지만 KPGA의 관중 동원 성적은 저조합니다. 골프인의 한 사람으로서 아주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공 프로가 한국 투어에 참가한다고 공언을 했으니 앞으로는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저도 그런 기대를 해 봅니다.

-부럽게도 일본오픈은 첫날부터 5천여 명이 입장했고 어제는 무려 8,312명이 집계되었다던데, 벌써 2만 명을 훌쩍 넘어선 거지요?

-경기를 직관하는 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아는 분들이 많은 겁니다. 또한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평생의 자랑이 될 만한 좋은 추억을 만들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오늘 관중 수 집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대략 화면에 비친 군중의 수만 헤아려 봐도 만 명은 훨씬 넘을 것 같아요.

정말 갤러리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주최 측은 대회를 위해 임시 주차장까지 설치했는데 그곳까지 꽉 들어차 교통이 통제되는 기현상이 빚어졌다.

게다가 대부분의 갤러리들은 이미 2인 1조를 이룬 30 팀이 출발했음에도 클럽하우스 인근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챔피언 조를 기다리는 것이 분명했다.

-이게 다 퍼펙트 콩 효과입니다.

-안 그래도 그런 분석 기사가 있던데,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공 프로가 우승한 다이아몬드 컵에서 23,000명을 넘어섰지만 지난주에 열린 TOP CUP 토카이 클래식은 다시 12,000명으로 떨어져 평년과 다르지 않았거든요.

일본오픈 관중 입장료는 예선 기간에는 4000엔, 결선 기간에는 6000엔이다. 한국과 비교하면 상당한 고액인데, 단순 계산만 해도 3만 명이면 우승 상금에 버금가는 수입이 발생한다.

분석 기사에 따르면 필상을 보러 오는 팬들이 만 명일 경우, 자신이 가져간 상금은 이미 벌어 줬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아직은 공론화되지 않았지만 필상이 계획한 대로 2주에 한 번 꼴로 대회에 출전하면서 그 분석이 사실로 증명된다면 묘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대회에 참가해 달라는 주최 측의 요청이 몇 마디 말로만 이뤄질 수 없었던 사례는 일찍이 타이거 우즈가 잘 보여 줬다.

그는 한때 우승 상금보다 많은 초청료를 제안해도 가려 가면서 대회에 출전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시장 논리는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즌 3승의 JGTO 강자, 퍼펙트 콩을 소개합니다!

“와아아아!”

“퍼펙트 콩! 퍼펙트 콩!”

“멋지다!”

“홀인원을 보여 주세요!”

우레와 같은 박수는 배경음악이었다.

얼마나 많은 성원이 이어지는지 티 그라운드에 올라선 필상은 모자를 벗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보통 선수들은 그저 씩 웃거나 손을 흔드는 정도인데 너무도 정중해 오히려 무게감이 느껴지는 인사였다.

하지만 인사를 마치자 얼굴에 서리가 내려앉은 듯 포커페이스로 돌변했다. 그마저도 멋들어지게 느껴졌던가, 비명을 지르는 아줌마 부대는 자지러졌다.

“정숙해 주세요!”

“…….”

진행 요원의 요청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 시끄럽던 1번 홀 주변에 짙은 침묵이 가라앉았다.

몇 겹씩 둘러싼 뒷줄에는 떠드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신기할 정도로 완벽한 매너가 지켜지는 게 놀라웠다.

그들은 대부분 필상의 팬이거나 좋은 플레이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이 그대로 드러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빈 스윙을 하며 홀의 전경을 바라보는 필상은 행복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푸르른 잔디를 밟고 서 있는 자신의 오늘이 너무도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만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도 사람들은 기적이라 칭한다.

하지만 그걸 바탕으로 더 큰 역사를 써 내려갈 것이다.

만족하거나 자만할 수 없다.

혹자는 이미 많은 것을 이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필상의 꿈은 이곳 일본에 머물지도 않을 것이며 쉽게 예측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어선다.

골프 역사가 기억하는 수많은 별들이 있지만 필상은 그 밝음을 모두 지워 버릴 태양이 되고자 한다. 오로지 홀로 빛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편견도,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도 필요치 않으며 한계를 미리 한정지을 이유도 없다.

오늘로 6승째를 거두고 KPGA에 이어 JGTO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거머쥐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희망일지 모르나 필상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깡!

힘찬 티샷이 창공을 가르고 날았다.

마치 자신의 우승을 선포라도 하듯이 자신감이 가득 찬 스윙은 한 치의 휨도 없는 완벽한 직선 궤도를 그리며 페어웨이에 떨어졌다.

스트레이트 구질인데도 비거리는 295야드, 굳이 드로우를 치지 않아도 충분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음을 만방에 알리는 것만 같았다.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장타를 칠 수 있는데 왜 그걸 자꾸 아끼는 거죠?

-사실은 그가 어떻게 장타를 치게 됐는지부터 확인해 봐야 합니다. 투어 선수들 중에 최하위 수준에 머물던 평균 비거리가 확연하게 늘었는데 그걸 묻는 기자들이 없더라고요.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었다.

한두 대회도 아니고 무려 4승을 거둘 때까지 필상의 스윙은 기형적이리만큼 정확성에 주안점을 뒀고 장타가 필요한 경우에도 잘라 가는 대신 기가 막힌 아이언 샷으로 대치했다.

그러고도 파죽지세로 우승을 거뒀으니 장타가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어느 날 갑자기 비거리가 늘었다면 확인이 필요했다.

원래 장타가 가능했는데 아낀 것인지, 아니면 각별한 훈련을 통해 각성했는지, 사실 확인은 해야 하건만 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일본 기자들의 편향적인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 그래도 허 해설이 그 점을 정확하게 짚었다. 물론 확인할 방법은 그다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무력시위 하시는 겁니까?”

“하하. 시위라고 할 것까지나 있을까?”

“가끔 시원하게 터지는 장타에 다들 혼이 쏙 빠지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너무 소란스러운데?”

“일본 선수인데 알아서 통제하겠죠.”

염려한 까닭은 동반자인 유키 소이치가 어드레스를 할 때까지도 필상에 대한 열띤 환호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94년생인 소이치는 투어 7년차이며 지난해 이 대회에서 혜성처럼 나타나 첫 승을 신고하며 존재감을 알린 젊은 선수다.

메이저 대회를 우승했지만 이후 성적은 좀처럼 눈에 띄지 못했는데, 차곡차곡 올라서더니 급기야 공동 2위까지 치고 올라와 필상과 마주하게 되었다.

“디펜딩 챔피언 자격이 있는데?”

“자신의 존재감은 확실히 알린 셈이지만 우승 경쟁자라고 보기에는 좀 쑥스러운 스코어죠.”

“커리어를 살펴봤는데 상당히 좋은 기량을 지녔더라고.”

아쉽게도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가 273야드로 투어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확실한 장점을 가졌다.

작년도 페어웨이 안착률이 74%로 1위였고 그린 적중률은 70%로 3위, 평균 타수도 70.27타로 3위라는 사실에 놀랐다.

굉장히 정교한 플레이를 하는데도 겨우 통산 1승이라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굿 샷!”

“감사합니다.”

“소이치. 우리 오늘 즐겁게 라운드를 합시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야 더 바랄 것이 없지요.”

2인 플레이의 동반자인데도 가볍게 눈인사만 나눴다.

그가 건방지거나 필상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워낙 주변 상황이 혼란스럽고 챔피언 조에 속했다는 부담이 큰 것 같았다.

특히 필상은 동반자를 잡아먹는 플레이에 능하다는 소문이 자자해 그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다가 아너로 나선 필상이 장타를 날렸으니 그가 느낄 감정은 아마도 두려움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차분하게 자신의 스윙을 구사한 그에게 필상은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웬일로 먼저 말을 다 거세요?”

“귀엽잖아!”

당사자가 들으면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소이치가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어 솔직하게 표현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체구지만 169cm 단신이다. 필상보다 무려 20cm나 작고 나이도 어려 동생처럼 편하게 대했다.

그의 정확함이 보장된 270야드 안팎의 티샷은 엄청난 노력의 산물일 것이다. 필상의 호쾌한 장타를 보고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샷을 한 걸 보면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1번 홀은 478야드의 비교적 긴 파4 홀로 276야드를 날린 그에게 남은 세컨 샷 거리는 205야드였다.

“오우! 아이언을 잡는데요?”

“티샷 비거리가 짧다고 다른 샷도 동일하지는 않아. 어차피 임팩트만 좋으면 공은 충분히 날아가잖아!”

“두고 보죠.”

성호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의 4번 아이언이 불을 뿜었다. 제대로 찍어 쳐 커다란 뗏장을 만들어 냈다.

거리를 내기 위한 드로우 샷이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긴 거리가 남는 그로서는 롱 아이언이야말로 필생의 무기이기 때문에 벼리고 벼렸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공을 그린에 올렸다. 비록 홀컵과는 한참 떨어져 있지만 파를 잡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렇게 아이언 샷도 정확하다면 그가 가진 문제는 아마도 경기 운영이 아닐까 싶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기로 했다.

“185야드네요.”

“7번 아이언.”

빈 스윙을 통해 그려진 샷 이미지를 완성하기 위해 필상은 신중한 루틴을 밟아 나갔고 공을 때리는 순간, 감이 왔다.

원하는 만큼 스위트 스팟에 맞추지는 못했으나 그린에 올리기에는 충분하다는 것을. 탄도가 생각보다 높았던 탓에 그린에 떨어진 공은 스핀이 걸려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조금 더 보낼 생각이었으나 붙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본인의 생각일 뿐, 홀컵 앞 3m 지점에 멈춘 공을 확인한 팬들은 버디로 연결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퍼팅 감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라이는 정확히 읽었으나 힘 조절에 실패한 듯, 공은 홀컵 바로 앞에 멈춰 서 팬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아깝습니다.”

소이치는 탭인 파로 홀 아웃 하는 필상에게 아쉬움을 표했다. 선수들끼리는 좀처럼 그런 말을 하지 않는데, 그 역시 호감을 가진 게 분명했다.

그래서 퍼팅 팁을 하나 건넸다.

“홀컵 주변의 라이가 정상이 아니야.”

“아! 어쩐지 구르던 공이 조금 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과감하게 밀려고요.”

“그래야 할 거야.”

홀컵 주변에 앞선 선수들의 흔적이 역력했다.

자신이 만든 마크 자국, 스파이크 자국, 퍼터를 눌러 기댄 흔적 등은 말끔하게 정돈하고 홀 아웃 해야 하는데 눈에 잘 띄지 않는 흠결이 있었던 것이다.

수리할 수 있지만 자칫 퍼팅 라인을 잘못 건드리면 오해의 소지가 있어 그냥 무시했던 대가는 확연했다.

“나이스 터치!”

“감사합니다. 팁을 주신 덕분에 겨우 파를 지켰습니다.”

애매한 1m 남짓 파 퍼팅을 놓칠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필상의 조언까지 받은 소이치는 과감하게 밀었고 깔끔한 파 세이브에 성공했다.

경기 중에 동반자와 나란히 걷는 모습은 흔치 않다. 평소 친한 선수라도 대화가 서로의 플레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먼저 한참 앞서 가는 모습이 목격되곤 하는데 둘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느긋하게 걸었다. 코스 세팅이 어려워서인지 오늘 진행은 대체로 밀리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샷의 일관성을 유지하시는지 전 도무지 믿기지 않습니다.”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실례겠지?”

“아닙니다. 대회 중에도 늘 밤늦게까지 연습한다는 것은 저도 듣고 직접 봐서 잘 압니다. 다만, 그래도 될 체력이 된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하하하. 그게 정답일지도 모르겠군.”

노력하지 않는 프로는 없다.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으르고도 성적을 유지하는 선수가 있다면 당장은 몰라도 머잖아 도태되는 것이 프로의 세계다.

그래서 노력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말은 공개 인터뷰에서나 가능하지, 같은 프로 선수에 건네기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이치가 지적한 부분, 놀라운 체력이야말로 필상이 지닌 최고의 자산이었다. 지나친 연습이 오히려 체력 저하와 컨디션 난조로 이어지기 때문에 조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첫 티샷을 제외하면 공 프로가 오늘은 아주 안전한 플레이를 이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요. 몇몇 홀은 실수에 대한 대가를 확실하게 묻기 때문에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팬들로서는 좀 아쉬울 것 같아요. 너무 앞서간 것이 오히려 경기의 재미를 덜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어떤 플레이를 펼쳐야 스코어를 지킬 수 있는지 지켜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방금 전 4번 홀에서 공 프로의 공략은 아마추어들에게 큰 지향점을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263야드를 잘라 간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보통 아마추어 골퍼들은 220야드 안팎이 남으면 무조건 우드나 유틸리티를 잡고 온 그린을 노립니다.

-파5 홀에서 언제 2온을 해 보겠습니까! 이글도 가능한 거리가 남는다면 도전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필상에게 263야드는 아마추어들에게 220야드 수준이다.

굳이 우드가 아니더라도 유틸리티를 잡으면 얼마든지 온 그린을 노릴 수 있다. 하지만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

절박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어서 멋진 그림이 그려질 가능성은 낮고, 뜻하지 않은 실수가 유발될 수도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린을 놓쳐 벙커나 러프에서 샷을 하면 차라리 원하는 거리와 라이로 잘라 가는 공략보다 버디 확률이 낮다는 것이 필상의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하물며 기량이 들쑥날쑥한 아마추어라면 자신이 그린 최상의 시나리오가 완성될 가능성은 극히 낮은 게 현실이다.

잘하면 가능할 것도 같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참을 줄 안다면 ‘내기를 해도 잃지 않을 것’이라는 허 해설의 조언은 귀에 쏙 박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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