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JGTO의 절대 강자
나이키와의 계약은 골프 용품 사용에 관한 것이다.
의류를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용품 못지않게 중요해 그것만으로도 큰 계약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키가 크고 체격이 호리호리한 필상은 무얼 입어도 핏이 살아 미계약인 의류 서브 스폰서를 원하는 회사가 줄을 섰다.
특히나 일본,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골퍼들은 복장에 많은 돈을 투자하기 때문에 아무 것이나 입는 필상의 복장을 따라 하는 이들까지 생겨 여러 회사에서 그냥 막 보내 줄 정도다.
하지만 기왕이면 필상은 한국 의류를 입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이 대표가 지금도 적당한 대상을 고르는 중이었다.
“가와사키에 집을 샀다고?”
“네. 아무래도 근거지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이야! 역시 최고의 선수답네. 근데 빈방 없나?”
필상이 근사한 별장을 샀다는 말에 다들 부러워했다.
특히나 양 프로는 은근 슬쩍 발을 걸치기 원했는데 필상은 흔쾌히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원하던 바였기 때문이다.
그가 머문다면 함께 연습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마침 큰 집을 얻었고 연습 타석도 5개나 만든 이유가 바로 이런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마음에 맞는 프로들이 온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다. 필상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 그리고 프로가 갖춰야 할 자세와 처세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간접경험을 통해 PGA를 접할 수 있다면 그건 자신의 큰 자산이 되리라 믿었다.
내일도 대회는 이어지는 터라 식사와 더불어 안면을 익히는 정도로 마무리된 회식은 나름 의미가 있었다.
이미 잘 아는 김경태 프로와 양용은 프로 외에 낚시꾼 스윙으로 유명한 최호성 프로와 안면을 튼 것도 큰 소득이었다.
“나도 가면 빈방 줄 거지?”
식사 후 연습장에 돌아온 필상은 김 프로와 같이 연습했다. 그는 오늘 -5를 기록해 공동 7위에 오르며 건재를 증명했다.
교과서적인 스윙을 구사하는 그와의 연습은 언제나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잣대와 같아 언제나 반가웠다. 때문에 그가 합류한다면 열렬히 환영할 일이다.
이미 JGTO 12년 차인 그는 이미 도쿄에 집이 있어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뜻밖의 말이 너무도 기뻤다.
그런데도 순순히 그냥 넘길 필상이 아니다. 상대가 빈틈만 보이면 푹 치고 들어가는 습관, 골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습관이 된 것 같았다.
“최 프로님을 모시고 온다면 오케이입니다.”
“최호성 선배님?”
“네. 젊은 선수들도 좋지만 전 세 분이면 충분합니다.”
“형님들 노하우를 쏙쏙 빼먹겠다는 건가?”
“잘 알면서 왜 이러십니까!”
“알았어. 일단 말씀드려 볼게.”
각기 스윙이 다르다.
김경태 프로가 정석이라면 양 프로는 조금, 그리고 최 프로는 극단적인 자기만의 스윙을 터득한 프로다.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정답에 가깝다는 판단은 내릴 수 있어도 오랜 시간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변형시킨 독특한 스윙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 자격이 있고 믿기 힘든 결과도 만들지 않았던가!
***
-와아! 마치 골프 레슨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좀 특별한 실전 레슨이라고 한다면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모든 샷을 다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얼핏 보면 근육형은 아니잖습니까?
-프로필에는 189cm에 80kg으로 나와 있는데 실제 체중은 그보다 좀 더 나간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파워풀한 샷을 날릴 때 보면 공 프로의 근육은 골퍼로서 부족하지 않아 보입니다.
-벗겨 보면 근육형이라는 말인가요?
-있는 힘껏 때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장타를 날릴 수 있고 대회 내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걸 보면 그의 근육은 프로 골퍼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봐야겠죠.
-아! 그렇겠군요.
2라운드는 본선 진출자를 가리기 때문에 다들 신경을 바짝 쓰고 경기에 임한다. 하지만 짓궂게도 코스 세팅은 어려웠다.
과욕을 부린 대가는 처절했고 한 번 무너진 선수는 좀처럼 복구하기 힘든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홀로 빛나는 별이 있었으니 전반에 4타를 줄인 필상은 후반에 2타를 줄여 2라운드 데일리 베스트를 기록했다.
어제 -12로 단독 선두에 올랐던 그는 -18로 올라서며 공동 2위와의 타수 차를 무려 8타 차로 벌렸다.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의심하는 자가 없다는 것도 특이했다. 보통은 경쟁자들과 비교하며 최악의 스토리를 써 팬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건만 그런 기사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독주! 감히 누구도 쫓아오질 못하네요.
-골프는 참으로 어려운 스포츠입니다. 한 번 무너지면 하염없이 추락하기도 하죠. 천하의 우즈도 전성기에 컷 탈락을 했던 기록이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데, 6번의 대회에 참가해 5번을 우승한 선수는 공 프로가 유일무이합니다.
-유일무이요? 하하하. 한 대회 한 대회가 모두 전설을 써내려 간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혹자는 아시아 국가의 투어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평가절하 할지 모르지만 그건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번 대회만 해도 120명이 참가해 우승은 오로지 1명에게만 허락됩니다. 1%도 되지 않는 확률을 뚫는다는 겁니다.
-8타 차가 뒤집힐 것이라는 예측 기사조차 없다는 점은 그야말로 퍼펙트 콩의 전성시대라는 것을 의미하는 거겠죠?
-그가 아직 루키 신분이라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6월말에 데뷔했다.
그런데 이미 JGTO 3승을 거둔 필상은 대부분 지표의 최상위를 차지했다. 만약 일본오픈마저 우승한다면 연말에 시상하는 모든 부문을 홀로 차지할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왔다.
유일무이를 넘어 전무후무할 것이라는 예측이 현실화되면서 동료들이 느낀 감정은 부러움을 넘어 공포에 더 가까웠다.
필상이 연습하는 타석 근처는 아무리 빈자리가 없어도 좀처럼 다가오는 이들이 없었다. 비교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러나 팬들의 반응은 그와 반비례하여 극렬한 성향마저 보였다. 마침 그날 저녁에 펼쳐진 팬 사인회는 필상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길게 늘어선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꾸불꾸불한 대기 줄이 복도를 넘어 건물 밖에까지 늘어졌지만 포기하고 돌아가는 이들은 없었다.
사인 한 장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너무 길어질 것 같은데, 그만 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려보낼까요?”
“아니야. 시간이 오래 걸려도 지금 줄을 서신 분들은 모두 사인해 드린다고 말씀드려.”
“그래도 될까요?”
“안내나 똑바로 해. 모리.”
“아, 네!”
이미 팬 사인회는 2시간이 흘렀다.
내일 경기를 위해서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곳에 줄을 선 팬들은 오늘 자신을 응원했던 이들이다.
게다가 사인회에 참가하면서 나이키 제품을 구입했다. 그들이 투자한 시간을 고려하면 절대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퍼펙트 콩.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는 다음에 사인을 받아도 되니까 그만 들어가 쉬세요.”
“네. 괜찮습니다. 이미 충분한 성의를 봐서 만족합니다.”
“그래요. 들어가 쉬세요. 내일도 멋진 경기 보여 줘야 해요!”
6시에 시작한 팬 사인회가 어느새 10시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리에 앉아 정성껏 팬들과 인사하고 사인해 주는 모습에 기다리던 팬들이 먼저 끝내자는 말을 꺼냈다.
그들은 이미 스마트폰으로 필상이 팬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찍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은 활짝 웃으며 괜찮다고 계속 사인을 해 줬고 결국 11시가 되어서야 길었던 사인회가 끝을 맺었다. 사인을 받고도 기다리다가 떠나는 필상에게 박수를 보낸 팬들은 오늘 일화를 SNS에 올렸고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지금 포털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프로라면 팬들에게 이 정도 서비스는 해야 한다고!”
“그래. 당연한 걸 가지고 뭘!”
“무려 4시간이나 걸렸다고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나이키가 챙기는 것 같아 은근히 짜증이 났다니까요!”
“내가 곰이 된 거냐? 하하하.”
필상이 왜 모르겠는가!
나이키는 의도한 것 이상의 효과를 거뒀다.
오늘 판매한 상품의 매출이 문제가 아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프로가 나이키를 쓰기 때문에 팬으로 남아 있는 동안 그들의 선택은 다른 방향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 점은 필상으로서도 나쁘지 않다.
자신의 존재감과 가치를 극명하게 보여 준 계기였기에.
“피곤하지 않으세요?”
“피곤은 무슨. 기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한 것뿐이야.”
“하여간 체력 하나는 타고 난 거 같아요.”
솔직히 힘들지 않았다.
자신이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 봤던가!
상사의 눈치나 보면서 직장 생활에 찌들다 못해 명퇴를 가장한 강퇴까지 당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 자신을 아끼는 팬들은 그 누구라도 소중한 존재다.
그들이 있기에 프로는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한 필상은 그제야 곤도 지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극구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는 그에게 자신도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멀리 본 것이다.
‘JGTO의 절대 강자!’
결선의 첫날 경기 내용은 그걸 증명하는 무대였다.
챔피언 조에서 필상과 맞대결을 펼친 선수는 하필 18승을 거둔 일본투어 관록의 강자인 히로유키 후지타였다.
-10을 기록한 공동 2위가 4명인데, 기왕이면 일본 선수와 매치를 시켜 흥행을 돋우고자 한 주최 측의 구상이었다.
그러나 그건 크나큰 패착이었다. 비교적 쉬운 세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지타는 타수를 줄이지 못했다. 정교함에 기가 질렸고 가끔 터지는 장타에 샷이 흔들리며 실수를 연발한 나머지 아예 톱 10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필상은 착실하게 타수를 줄였다. 이글 하나, 버디 8개를 잡는 기염을 토하며 갤러리들을 몰고 다녔다.
-28 공필상
-14 김경태/ 송영한/ 유키 소이치
-13 양용은/ 이원준/ 히로시 이와타
-12 김형성/ 최호성/ 안젤로 큐/ 신고 가타야마
탑 10에 포함된 11명 중에 일본 선수는 단 3명, 이건 마치 KPGA의 리더 보드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마저도 무색케 하는 무시무시한 스코어가 보였다. 그건 바로 필상의 28언더, 3라운드에 또다시 화력을 가동하며 공동 2위와의 격차를 더 확실하게 벌렸다.
14타 차는 최종 라운드에 임하는 최다 타수 차로 JGTO의 기록을 새로 갈아치웠다. 필상이 최종일에 이븐파를 쳐도 공동 2위가 -15언더를 쳐야만 역전되는데, 그건 필상이 세운 18홀 최저타 기록을 갱신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차라리 필상이 90타를 기록할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오빠.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넌 어떻고?”
‘저야 아슬아슬한 선두지만 오빠는 14타 차이잖아요.’
“보고 싶다.”
‘…….’
모모코는 설마 필상에게서 그런 말이 흘러나올 줄은 몰랐는지 미처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훌쩍이기까지 했다.
이미 필상도 인터뷰를 통해 둘의 교제를 인정했다. 그 뒤로 모모코는 이전보다 한결 편해진 것 같아 필상도 좋았다.
그래도 무뚝뚝한 필상이 그런 달콤한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나 보다. 덕분에 긴 수다를 피해 잠자리에 일찍 들 수 있었다.
‘다음 주가 문제인데!’
모모코가 지금 출전한 대회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대회다. 우승하면 7승의 고지를 밟는 거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음 주에 개최되는 메이저 대회인 일본 여자오픈이다.
이미 메이저 대회 2연승을 거둬 하나를 더 추가하면 그건 JLPGA에서 아무도 이루지 못한 금자탑을 쌓는 것이다.
게다가 필상은 다음 주에 한 대회를 거를 계획이라서 그녀를 돕기 위해 지바 현으로 날아가야 하는지 고민스러웠다.
그녀의 진기록에 힘을 보태고 싶지만 언제까지 캐디 일을 할 수는 없다. 비록 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강렬하지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소홀히 할 수는 없지 않겠나.
-오늘처럼 편안하게 경기를 중계한 적도 없지요?
-그렇습니다. 이제 곧 시청자 여러분이 학수고대하시던 공 프로가 티오프를 할 텐데, 진정한 경기 중계는 지금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손흥민 선수가 벤치에 앉아 교체를 기다릴 때보다 더 지루했던 것 같아요. 저만 그랬나요? 하하하.
-오늘 코스 세팅이 만만치 않습니다. 대다수의 선수들이 타수를 잃은 가운데 과연 퍼펙트 공의 경기 운영은 어떨지 정말 궁금합니다.
-본인이 갱신했던 72홀 최저타 기록을 다시 갈아치울지, 그것도 아주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33을 넘어서려면 6타를 줄여야 하는데……. 신기록 작성이 JGTO의 흥행을 위해서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코스를 어렵게 세팅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못할 것도 없다. 일본 선수가 아닌 필상이 신기록을 세우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중계방송에서 그걸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때 아름답지, 국가나 이념을 결부시키면 오히려 필상에게 득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일본오픈은 JGTO를 대표하는 단 4개뿐인 메이저 대회다. 하지만 지난해 입장 관중의 수는 4일 합계 21,142명에 불과했다.
최종일은 8,011명의 유료 관중이 입장해 주최 측은 상당히 고무되었다는데, 올해는 관중 수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타 대회보다는 월등히 많지만 2주 전에 열렸던 아시아퍼시픽 다이아몬드 컵의 갤러리가 역대 최다 관중수를 갈아치웠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