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82화 (82/354)

082. 공짜는 없는 법

염두에 둬야 할 부분이다.

한일 간의 풀리지 않는 숙원은 그 원인이 분명한데도 일부 몰지각한 자들의 선동과 왜곡으로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간혹 양식 있는 자들의 일침이 나오지만 쉽게 확산되지 않으며 오히려 한일 관계는 국가주의적인 경향으로 흘러 서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 한국 선수가 일본 투어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고 있는 것에 대한 양국 골프팬들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실력을 인정하고 응원하는 일본 팬들도 적지 않지만 한국 팬들이 과도하게 몰아붙이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팬들이 많아지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사실은…….”

성호는 필상에 대한 기사를 탐독하는 걸 제 일인 양 즐긴다. 그런데 인기가 높아짐과 동시에 안티 팬들도 극성인 것을 확인한 것이다.

입에 담지 못할 말도 서슴지 않는 안티 팬의 입장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외국 선수들이 상금을 많이 버는 것부터 시작해 모모코와의 연애에 대한 불만이 정도를 넘었다.

특히나 지극히 사적인 부분을 건드리며 억지를 부리는 자들의 행태는 위험한 혐한 인식과 맥을 같이 했다.

“그러니까 너무 SNS에 집착하지 마.”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난 프로 선수야. 오로지 필드에서 실력으로 보여 주면 그만, 그리고 모모코와의 일은 시간이 필요할 거야.”

“그럴 것 같아요.”

“야디지 북은 완성됐어?”

“네. J&L에서 보내 준 자료들이 워낙 정확해서 크게 수정할 게 없었어요.”

2번의 연습 라운드를 통해 정리를 끝낸 야디지 북을 다시 살펴보며 필상은 1라운드 티오프 시간을 기다렸다.

다행히 이번 대회에서 필상은 주최 측의 배려를 받았다. 지난 대회의 흥행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1라운드부터 치고 나가자.”

“제 생각도 그래요. 통계를 보니까 첫날과 셋째 날은 쉽게, 둘째 날과 마지막 라운드는 어렵게 세팅을 하더라고요.”

“전반에는 6번 홀, 후반에는 11, 13, 16번 홀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아.”

“4개 홀 빼면 또다시 -14 치는 건가요?”

“그랬으면 좋겠다.”

필상은 지난 대회 마지막 라운드에서 장타를 선보이며 대 역전 우승을 거뒀다.

그날 14번의 드라이버 티샷의 평균 비거리는 298.5야드, 함께 라운드를 했던 63명 중에 2위를 기록하며 정교함에 장타까지 장착해 추후 성적이 기대된다는 기사가 많았다.

하지만 필상은 다시 조정했다. 평균 비거리를 280야드로 낮추기로. 260야드에 비하면 20야드나 늘인 것인데,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지난번처럼 빵빵 날리지는 않는군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478야드의 비교적 길었던 첫 홀에서 공 프로가 어떤 공략을 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89야드를 보내 191야드를 남겼군요.

-7번 아이언으로 그린에 올려 오르막 3m 버디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8번 홀과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330야드의 짧은 파4 홀인데요?

-그렇습니다. 300야드까지 날릴 수도 있지만 공 프로는 265야드를 보냈습니다. 아예 위험한 벙커나 러프는 배제하겠다는 의도였지요. 그리고 남은 67야드 샷을 이글로 연결하는 줄 알고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10, 20야드를 더 보내도 결코 유리할 것이 없다는 것을 필상이 직접 확인시켜 준 셈이다.

3번 홀에서 버디를 놓치고 이어진 파5 홀에서 이글을 위한 2온 시도를 하지 않아서 티가 나지 않았지만 필상은 8번 홀까지 무려 6타를 줄였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매홀 버디를 해도 별다른 반응이 쏟아진다는 느낌은 없었다. 늘 비명에 익숙한 터라.

그러나 애초에 상상했던 타수에서 하나 부족할 뿐, 이대로 나간다면 첫날 두 자릿수 언더도 가능한 흐름이었다.

그런데 9번 홀에 들어선 필상은 모처럼 강한 티샷을 선보였다. 좌측으로 휜 도그렉 홀이지만 앞선 티샷과는 달리 당당하게 297야드를 찍었다.

“드로우 샷을 할 거면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세요.”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실전이 연습이군요!”

“비슷한 샷을 계속하면 거기에 적응이 될 것 같지만 아니더라고. 알게 모르게 자꾸 위축이 돼.”

“대회라서 그런가요?”

“그럴지도.”

확실한 답은 주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자제하고 억누르는 시간이 길어지면 뜻하지 않은 실수도 나오고 컨디션의 변화도 생겨 가끔 기회가 되면 풀어 줘야겠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마침 적당한 홀이 나타났던 것이다.

-와우! 정말 자로 잰 것 같은 샷이네요.

남은 거리 121야드를 정확히 공략한 필상의 웨지 샷에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중계하던 캐스터도 감탄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이번 홀도 버디를 잡는다면 전반에만 -7입니다. 완전히 기선을 제압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겠군요. 하지만 인코스가 더 어렵다는데 두 자릿수 언더를 기록할지는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건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 조건이죠. 이미 공 프로는 공동 선두에 나섰습니다. 앞으로 줄이는 만큼 격차가 날 텐데 그걸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한국 채널의 중계방송은 느긋하게 즐기는 반면, 일본 중계방송은 꽤나 시끄러웠다. 일본 선수들 위주로 화면을 잡더니 필상이 5타를 줄이는 순간부터 모든 샷을 비췄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 잡은 버디는 없었다.

슬로우 모션으로 분석하면 할수록 그 하나하나가 그림 같은 멋진 스윙이었고 아무리 뜯어봐도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어떤 선수가 완벽할 수 있겠냐마는 트집을 잡지 못하고 결과마저 훌륭하기 때문에 입에 올릴 말은 칭찬뿐이었다.

10번 홀에서도 가볍게 온 그린을 했지만 4m 버디 퍼팅을 놓치며 한풀 꺾이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필상은 어렵다던 11번 홀에서 12m 롱퍼팅을 구겨 넣더니 연속 버디를 그리며 모두를 흥분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다.

“4번 아이언 줘.”

“아무리 내리막이 심하다지만 514야드 파4 홀인데요?”

“왜 이 홀에서 타수를 잃는 것 같아?”

“그야 우측의 호수 때문이죠.”

“아니야. 그것도 영향을 미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페어웨이를 놓치기 때문이지.”

“아!”

514야드라는 거리가 주는 부담감은 프로라고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내리막이 심해 250야드를 날리는 단타자들도 경사만 잘 태우면 300야드를 넘길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작정하면 300야드를 무조건 넘길 수 있다고 봐야 하는데 문제는 그 지점부터 페어웨이의 폭이 확 줄어든다.

게다가 좌우의 러프가 좁아 삐끗하면 공이 나무 사이로 들어가고 워낙 가지가 울창해서 레이 업 말고는 대안이 없다.

따악!

아이언 헤드가 공을 때리는 소리만 들어도 잘 맞았다는 느낌이 왔다. 내리막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탄도가 높아 보였다.

하지만 특별히 세게 때리지도 않았다.

필상이 원한 거리는 260야드 안팎이기 때문이다.

팬들은 의아했다. 정확한 샷이라면 필상보다 나은 선수가 드문데 왜 굳이 아이언을 잡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이 멈춘 지점을 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내리막 경사가 심하지만 그 부근은 다운힐 라이가 아닌 평지였던 것이다.

그래도 남은 거리는 250야드, 호수에 붙은 그린을 생각하면 다시 모험적인 샷을 날려야 한다. 차라리 티샷을 조금 더 보내고 아이언을 잡으면 될 것 같은데.

“6번 아이언.”

“설마 3온 작전입니까?”

“응. 파 목표인데 무리할 필요가 없잖아.”

아이언을 바꿔 주면서도 성호는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오늘 샷이 나쁜 것도 아닌데 너무 지나치게 안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 6번 아이언으로 가볍게 190야드를 날린 필상은 세 번째 샷을 핀에 붙여 파를 기록하기는 했다.

평균 타수가 4.53이 나온 홀이라서 버디나 다름이 없지만 구태여 그렇게 잘라 갈 수밖에 없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런데 그 대답은 허 해설이 대신했다.

-갑자기 샷의 난조라도 있는 걸까요?

-이런 공략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정됩니다. 우선은 이 홀에 대한 느낌이 아주 좋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고 그게 아니라면 어렵게 줄인 타수를 잃고 싶지 않아 가장 확실한 선택을 한 걸 겁니다.

-무려 9타나 벌어 놓았는데 갑자기 부자 몸조심인가요?

-나중에 한 번 물어봐야겠습니다. 저로서도 좀 지나친 플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사실은 그가 맞췄다.

필상은 더없이 기분 좋게 13번 홀에 들어섰다. 그런데 돌연 홀의 전경을 바라보던 필상은 아주 싸한 느낌을 받았다.

호수가 위협적으로 느껴졌고 좌측의 나무숲이 유난히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너무 잘나가다가 보니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 느낌을 따르기로 했다.

벌어 놓은 스코어가 넉넉하기에 모험을 걸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안전한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굿 샷!”

필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홀 티샷을 멋지게 날렸지만 본인도 과연 그 느낌을 따른 것이 옳았는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여유가 생긴다면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얼른 잊었다. 그 결과 남은 홀들의 공략은 무난했다.

아니, 본인은 무난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날카로운 아이언 샷은 매번 그린에 꽂혔고 그 중에 버디를 3개나 솎아 냈다.

1라운드 최종 스코어 -12.

말할 것도 없는 5타 차 단독 선두로 나섰다. 경기를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이동하던 내내 필상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건네는 축하 인사에 쑥스러운 미소로 답했다.

이제 겨우 1라운드를 마쳤을 뿐인데, 마치 우승을 예약한 것처럼 대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출중한 기량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 선배님.”

“오늘 아주 무섭던데?”

“하하. 그냥 좀 잘 맞더라고요.”

양용은 프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일본 투어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들도 여러 명이 기다리다가 축하 인사를 건넸는데, 웬일인가 싶었다.

“오늘 계모임이라도 하는 겁니까?”

“맞아. 이렇게 모이기도 쉽지 않은 것 같아서 오늘 저녁에 조촐하게 회식이나 하려고. 한국 선수들끼리.”

“아. 좋죠.”

나쁘지 않은 생각과 제안이라 흔쾌히 동의했지만 시기가 적절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8명가량 참석한다는데 각기 성적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일은 더 애매할 것이다. 보따리를 싸는 선수들이 나올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화요일이 좋았는데, 당시에는 여의치 않았던 듯.

여하튼 타지에서 고생하는 선수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속내를 털어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바람직했다. 양 프로의 제안을 거절할 간 큰 선수가 있을 리도 만무했고.

약속 시간과 장소를 통보받은 필상은 샤워하기 전에 자신을 기다리던 나이키 직원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팬 사인회?”

“네. 마지막 날 우승한 뒤가 좋다는 계획을 잡았는데, 그날은 아무래도 너무 바쁠 것 같아서요.”

“당신들이 구상하면 난 무조건 해야 되는 건가?”

“네?”

모리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보통 후원사가 요청하면 선수는 응한다.

그들에게 받는 후원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약서 그 어디에도 불시에 팬 사인회를 요구할 수 있다는 조항은 없다.

이미 지난 대회 우승으로 포인트도 쌓았고 우승 보너스도 듬뿍 챙겼다. 하지만 그들이 얻은 광고 효과도 적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기여하지 않은 건 아니기에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처음부터 이런 태도를 묵과하면 추후 피곤해질 게 자명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모리.”

“그럼 어떡하죠? 일단 사인회는 접을까요?”

“아니야. 내일 계획대로 진행해. 하지만 곤도 사장에게 확실하게 전해. 추후 사전 논의 없이 또 이러면 곤란하다고.”

“아. 네. 지사장님께 프로님께 연락드리라고 전하겠습니다.”

“오케이!”

“고맙습니다.”

이런 관계가 적절했다.

선수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광고도 찍어야 하고 나이키가 주최하는 행사에도 참가하기로 명시되어 있지만 횟수와 조건을 무시한다면 응할 이유가 없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곤도 지사장에게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더 있었다. 하지만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넌 사업하는 사람들이 손해 볼 일을 할 것 같아?”

“할 것 같은데요?”

“하하하. 열 배 스무 배를 뽑아 먹는 자들이야. 설사 내가 10억 엔을 받아도 그건 다 그만한 값어치를 했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그런 걱정일랑 하덜 마!”

“그런가?”

성호는 이미 올해 후원금 1억 엔을 일시불로 지급받았고 지난 대회에 우승으로 상금 3000만 엔 외에 보너스로 다시 같은 금액을 받은 필상이 돈방석에 앉았다는 생각만 했다.

자신도 필상이 우승해서 300만 엔의 보너스를 받았지만 그 금액이 워낙 커서 과연 그만한 역할을 했는지 의문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필상에게도 적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상은 돌아가는 상황을 명확히 보고 있었다. 자신이 버는 그 이상 나이키도 효과를 걷어 들이고 있으며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팬 사인회도 구상한 것이다.

“내일 저녁 팬 사인회 할 때, 옆의 부스에서 나이키 골프 용품을 판매할 거야.”

“아! 그래요?”

“너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마음껏 골라.”

“다 사 주시는 겁니까?”

“공짜는 없는 법이거든. 왕창 고르고 그 리스트를 모리한테 줘. 보내 주지 않을 수 없을 거야.”

“크크크.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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