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최고의 라운드
“드디어 -13입니다. 공동 선두.”
“아닐 걸?”
“네?”
성호는 필상의 시선이 닿은 곳에 멈춰 선 이동식 리더 보드를 쳐다봤다. 때마침 숫자가 바뀌고 있었다.
필상의 성적은 -13으로 수정되었고 단독 선두 김경태의 스코어가 -14로 변경된 것을 확인한 성호는 경쟁 상대가 그라는 것을 깜빡한 걸 후회하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 프로가 드디어 버디 사냥을 개시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 홀로 걸어가는 성호의 발걸음은 힘이 넘쳤다. 아줌마 부대의 열렬한 응원에 휩싸여 개선장군인 양 의기양양한 모습에 필상도 기분이 좋았다.
-엄청 멀리 날아가네요. 대체 비거리가 얼마죠?
-306야드입니다. 오늘 6번 홀이 552야드로 세팅이 되어서 남은 거리는 250야드가 조금 넘을 것 같습니다.
-아! 지금 251야드로 떴습니다. 그러면 우드를 잡겠군요?
-글쎄요…….
오늘 필상의 비거리는 투어 장타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도 워낙 안전하게 잘라 가는 이미지가 굳어서인지 유틸리티를 잡을 것 같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필상이 직접 꺼내든 클럽은 역시 우드가 아닌 유틸리티였다. 그것도 7번 유틸리티.
“형 251야드인데요?”
“못 올려도 해저드나 벙커는 피하려고.”
“어떻게요?”
“펀치 샷!”
6번 홀은 아마추어들에게는 상당히 어렵다. 좌측으로 긴 호수를 끼고 있으며 우측에는 깊은 벙커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 선수는 타수를 줄이는 홀이다.
파5 홀의 평균 타수가 4.79가 나왔다는 것은 3온 1퍼팅을 노려 버디를 기록한 선수가 많다는 의미이고, 미스 샷을 해도 웬만큼 리커버리가 가능해 과감한 시도가 빈번했다.
그런데도 이전의 필상이라면 여지없이 안전하게 버디를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유틸리티를 잡고 기술적인 샷을 구상하는 것은 이글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의미였다.
“좋습니다!”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성호의 표정에는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마치 이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공략해도 얼마든지 우승 경쟁력이 있는데, 왜 전략을 수정했는지 정확한 속내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제 느닷없이 강한 스윙을 시작해 오늘 아침에 클럽별 비거리를 새로 설정했는데 그러고도 연속 버디를 낚고 있으니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실제 시원한 스윙을 개시한 필상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원하는 샷이 제대로 구사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거리의 숙제는 추후 진로와도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까앙!
유틸리티 특유의 경쾌한 타격음이 터지자 사람들의 시선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쏘아진 공의 궤적을 쫓았다.
남은 거리를 생각하면 탄도가 너무 낮지 않나 싶었지만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눈 깜빡일 사이에 그린 가까이까지 무섭게 날아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짧기는 했다.
-런! 런! 런이 무시무시하네요!
-피니시를 낮고 길게 끌고 간 스윙 동작을 보면 의도적으로 탄도를 낮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방향성에 중점을 둔 것 같은데…….
허 해설위원은 말을 다 맺지 못했다.
길어 봐야 그린 앞 러프에 설 것 같았던 공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그린에 휙 올라섰기 때문이다.
-오르막인데도 긴가요?
-우우우……. 섰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저는 온 그린은 안 될 줄 알았는데.
-스윙 스피드가 얼마였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이 대회에서는 그런 자료가 제공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방금 전에 공 프로가 보여 준 펀치 샷은 분명 드라이버 샷 헤드 스피드에 버금갔을 겁니다.
-7번 유틸리티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그를 ‘짤순이’라고 부를 사람은 없겠네요.
-정교한 샷에 장타까지 장착한다면 무서울 것이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한국이 낳은 최고의 골퍼를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허 해설의 그 말을 과도한 칭찬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방금 전에 보여 준 펀치 샷은 의도한다고 아무나 펼칠 수 있는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르막 라이를 타고 올라선 공이 홀컵을 지나 6m의 슬라이스 내리막 퍼팅을 남겨 이글을 기록할 확률은 무척 낮다.
하지만 상상하기 어려운 절묘한 기술 샷으로 2온에 성공한 순간, 부정적인 생각을 하던 전문가들도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아! 진짜 미치겠네요.”
“나도 올라갈 줄은 몰랐어. 하지만 확실하게 배웠네.”
“뭘요?”
“굴릴 수만 있다면 굳이 띄울 필요가 없다는 것.”
“굴려서는 비거리가 확보되지 않으니까 그러죠.”
“난 돼!”
된다는데 뭐라고 대꾸할 수 있겠는가.
통상적으로 비거리를 늘이기 위해서는 탄도를 띄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실제 장타자들 타구의 탄도는 까마득하게 치솟아 감탄을 자아내는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비거리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역시 헤드 스피드였다. 필상은 자신이 받은 축복 중에 강력한 힘은 없다고 미뤄 짐작했었다.
풀스윙이 되지 않아 정교한 샷에 초점을 뒀고 그것으로도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강한 스윙에 대한 갈증이 심해졌는데 애써 눌렀던 힘을 개방하자 스스로도 놀랄 헤드 스피드가 나왔다.
‘제어되지 않는다면 함부로 쓸 수는 없지.’
다행히 불행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으나 이렇게 강력한 결과가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더 강하게 때릴 수도 있다는 점은 두렵기까지 했다. 때문에 마음 내키는 대로 힘을 개방하는 것은 자제하기로 결정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최고의 결과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보다 완벽한 대비가 될 때까지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3컵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다시 봐.”
새로운 규정은 그린 위의 플레이가 지체되는 것을 줄이기 위해 캐디의 역할을 최소화시켰다. 선수의 뒤에 서서 라인을 살피는 것이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라이를 상의하는 것까지 제한하지는 않는다.
“홀컵 앞에서 역결이네요.”
“그래서 마지막에는 어떻게 될까?”
“스피드가 줄어들 거고……. 그럼 2컵 반만 봐도 되겠네요.”
“그렇지.”
그린 잔디의 결을 살피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골프를 했던 성호는 결에 따라 공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 상세히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점까지 고려해야 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지금처럼 경사가 심할 때는 잔디의 결도 경사와 함께 고려해야만 한다.
경사를 태우되 홀컵 앞의 숨겨진 함정을 가려내지 못한다면 애당초 의미가 없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필상은 일부러 그런 상황을 직접 확인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겟 인 더 홀!”
“이글! 이글!”
“들어가!”
내리막 퍼팅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그러나 충분하게 밀지 못해 멈추면 다시 내리막 경사에 놓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조금 더 밀어주는 것이 포인트다.
그것을 충분히 감안한 퍼팅은 생각보다 강해 보였다. 염려가 현실이 된다면 이글은커녕 버디도 어려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팬들의 응원 소리는 더욱 뜨거웠다.
필상의 시선도 경사를 타고 내려가는 공에 닿았다. 내리막을 타는 짧은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어? 어?
-됐습니다. 이글!
-그냥 빠질 것 같더니 쑥 들어가 버리네요. 그럼 이제 역전이 된 건가요?
-아닙니다. 김경태 프로도 지금 버디 기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번 대회가 우리나라 선수들의 독무대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좋아집니다. 하하하.
졸지에 -15에 나선 필상의 괴력에 압박감을 느꼈는지 김 프로는 3m 남짓한 버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게 승부의 분수령이 되었다는 것은 경기 결과가 말해 줬다. 필상의 버디 행진은 6에서 멎었지만 이글을 포함해 7언더를 몰아친 것은 경쟁자들의 의욕을 삼켜 버렸다.
[기적의 -11, 60타를 기록한 퍼펙트 콩 시즌 3승 달성.]
[이글 1개, 버디 9개, 올 시즌 JGTO 18홀 최저타 갱신.]
[5타 차를 뒤집고 3타 차 우승, 또 하나의 기적을 쓰다.]
[국내외 통산 5승, 퍼펙트 콩의 거침없는 우승행보! 나이키의 선택은 정확했다.]
[PGA 매거진, 퍼펙트 콩의 최종 라운드를 올해 최고의 라운드라고 극찬!]
이번 대회 우승 후에는 확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아마추어 신분으로 참가해 우승할 때는 ‘이런 일도 있구나!’ 그런 평가였다. 하지만 로열 컵에서 진기록을 2개나 달성했을 때는 아시안 투어라고 평가절하 했다.
그러더니 세가새미 컵에서 -31로 우승하자 오히려 심한 견제가 들어온다는 느낌이었다. 신한동해오픈 우승 소식을 다룬 방송도 별로 없었다.
“기권했다고 혹평했던 자들이 뭐라고 떠들지 궁금하네요.”
“그럼 일본어를 배워.”
“요즘 번역 어플이 얼마나 좋은데요. 크크크.”
“내년까지는 일본 투어를 중점적으로 뛸 거야.”
“PGA에 도전하지 않고요?”
“일단 실속을 먼저 챙기려고. 또한 만반의 준비도 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회는 찾아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연승을 거듭하며 인지도가 상종가를 쳤고 후원사인 나이키에서도 적절한 대회 초청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노라 전해 왔다.
때문에 기회가 찾아온다면 놓치지 않고 잡을 것이다.
그러나 성호에게 한 말이 빈말은 아니다.
‘일본은 기회의 땅이거든!’
일본을 그렇게 좋아한다거나 모모코 때문에 눌러 살 생각도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상금 규모가 크고 한국과의 거리가 가까워 임도 보고 뽕도 따는 무대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도전?
그거 좋은 거지만 자신의 달라진 환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JGTO에서 경쟁력이 확인되었기에 보다 완벽한 기반을 닦은 후에 가장 큰 무대로 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자신의 골프를 그동안 완성하고픈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경기 후 인터뷰에서 팬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먼저 우승 축하드립니다. 벌써 투어 3승이신데, 그런 고공 행진을 하는 비결부터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를 아껴 주시는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고자 한 샷 한 샷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너무 상투적인 발언이시네요. 그럼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드릴 텐데, 퍼펙트 콩에게는 JGTO가 쉬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제 샷이 미쳐서 그렇지 이타와, 이케다, 기타야마 같은 선수들을 보며 저는 아직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PGA 진출 계획은 없으신가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속한 투어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아직 준비가 턱없이 부족하고 일본 투어를 보다 열심히 뛰며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몸을 바짝 낮춘 것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공격적인 질문은 잦아들었다. 일본 사람들의 특성이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에 관대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나이키와의 계약, 앞으로의 계획 등 다양한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하던 필상은 결국 마지막 관문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던 화두다.
-모모코와의 공개 연애를 시작하셨는데, 인정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서로 호감을 느껴 진지하게 교제 중입니다.”
-나이 차도 적지 않고 국적도 다른 것에 대해 걱정하는 분들이 많은데, 또한 두 선수 모두 그럴 겨를도 없이 바쁜데, 그게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 좋아하는데 나이, 국적, 그리고 형편을 따질 수는 없지 않을까요?”
너무 길어질 것 같아 그 말을 던진 필상은 왼손을 들어 보였다. 뜬금없이 무슨 행동인가 싶었지만 곧 다들 알아봤다.
왼손 약지에 누가 봐도 의미가 담긴 것 같은 반지가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상은 질문이 나오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커플링 맞습니다. 팬 여러분의 우려와 염려를 잘 알고 있어서 더욱 많은 생각과 시간을 들이고 있습니다. 부디 예쁘게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성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필상은 일어섰다.
모모코는 우승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의미한 공동 3위를 기록하며 제 기량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또 다시 증명했다.
비록 우승자는 아니었지만 그녀도 같은 시간,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다. 흥미롭게도 필상과 사전에 말을 맞춘 것도 아닌데 내용이 동일했고 커플링을 보여 준 것도 똑같았다.
***
더위가 시작될 무렵에 시작된 필상의 기적은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10월 셋째 주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했다.
JGTO 최고의 대회, 일본 오픈이 바로 그 무대였다.
모모코와 나란히 한 주를 쉬며 샷을 더욱 날카롭게 벼렸고 한 가지 중요한 일을 처리했다. 둘이 거점으로 삼을 집을 가와사키에 마련한 것이다.
모모코의 성화에 그녀의 후원사가 만사를 제쳐놓고 그 일부터 처리한 것 같다. 인테리어와 골프 연습 시설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도쿄 인근에 머물며 연습에 전념했고 각자 참가할 대회에서의 선전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일본 오픈, 올해로 무려 84회를 맞이하는군요.
-그렇습니다. 아시아권에서는 가장 먼저 골프를 시작했고 활성화되어 이런 유구한 대회가 열리는 점은 한국 골프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러울 뿐입니다.
-하지만 그 일본 투어를 휩쓸고 있는 주인공이 바로 한국 선수라는 점을 생각하면 저는 아주 뿌듯합니다. 하하하.
-혜성처럼 나타나 일본 열도를 열광시키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정복이니, 휩쓸었다느니, 그런 표현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본 골프팬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 그런가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