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괴물 대 괴물
-퍼펙트 콩. 무빙데이에 너무 긴장한 건가요? 오늘 플레이는 확실히 팬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죠?
-날마다 짱짱하게 잘 맞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프로들도 4일 내내 좋은 샷 감각을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다들 타수를 줄였는데, 천하의 퍼펙트 콩이 -1은 좀 뜬금없지 않나요? 하하하.
-혹시 유우키 캐스터는 언더파를 쳐 본 적이 있습니까?
-저요? 저야 겨우 보기 플레이죠. 하하하.
-그런 분이 -1이라는 스코어를 그리 무시하십니까! 얼마나 간절한 집중력의 결과인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진지한 자세를 보고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아! 제가 좀 과했나요?
중계하는 콤비는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건 경기 내용에 대한 평가여야지, 편견을 가지고 아무 근거도 없이 누군가를 비방하는 어조는 삼가야 한다.
캐스터 유우키는 본인이 편견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필상의 플레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귀에는 상당히 거슬리는 표현과 태도였다.
그나마 해설자 카즈히로가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균형 잡힌 발언을 아끼지 않은 부분은 고무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이다. 처음에는 유우키의 말에 동조하는 이들의 낄낄대는 동조 글이 올라왔지만 이내 파묻혔다.
최선을 다한 플레이는 성적과 상관없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어?”
“제가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서요.”
“무슨 역할?”
“샷이 흔들릴 때 제가 힘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잖아요. 익숙하지가 않았거든요.”
“난 또 뭐라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인생 다 산 사람처럼 기가 죽은 성호를 데리고 좋은 음식을 먹으러 시내까지 나갔다. 흔들린 샷을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필요한 것은 심리적 안정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때는 늘 좋지 못했던 경기 내용을 복기했지만 필상은 일부러 우스갯소리도 하며 기분을 전환시키려 애썼다.
연습장으로 돌아온 시간은 어두컴컴할 때였다.
“성호야. 스윙 크기를 면밀하게 확인해 봐.”
“스윙 크기요?”
“응.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좀 더 강한 샷을 때려 보려고.”
“그럼 녹화할게요.”
자신이 미처 잡지 못한 부분은 영상을 통해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성호는 필상의 스윙을 영상에 담았다.
필상은 변화를 꾀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성적을 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성이라고 믿었기에 늘 통제 가능한 힘만 써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답답했다.
분명 조금 더 강한 스윙을 해도 될 것 같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자제해 왔다. 하지만 힘겨운 3라운드를 겪으며 필상의 마음을 두드린 게 있었다.
‘시원하게 때리고 싶어!’
강한 타구에 대한 욕망이었다.
정확한 샷이 더 중요한 것은 틀리지 않지만, 억지로 잡아 둔 힘을 분출하지 못하는 휴화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회 중에 바람직하지 않은 시도인 것은 알지만 적어도 오늘은 마음껏 날려 보고 싶었다.
따악!
피칭부터 잡았는데 힘을 아끼지 않고 강한 임팩트를 가했더니 필상이 봐도 믿기지 않는 거리가 나왔다.
헤드업을 하지 않아 정확한 캐리를 확인할 수 없었던 필상은 성호에게 캐리를 확인해 부르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강한 샷을 날렸다.
“162야드요.”
그것도 기대 이상의 캐리였지만 이어진 타구는 더 길었다. 165, 167, 169야드까지 가더니 급기야 170야드 안팎에서 탄착군이 형성되었다.
“170야드라는 말이지?”
“네. 170야드. 중요한 건 런이 없는 순수 캐리라는 겁니다.”
“알아.”
피칭 샷은 탄도가 높아 거의 그린에 세울 때 사용했다. 굳이 스핀을 걸지 않는다면 190야드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컨트롤을 할 경우 140야드 안팎을 날렸고 150야드 이상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필상에게는 낯설지만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스윙 크기는?”
“아! 맞다. 그건 영상을 보고 확인하시죠. 갑자기 늘어난 거리에 놀라 미처 스윙 크기를 확인하지 못했거든요.”
“집중해.”
“네.”
녹화된 영상을 확인한 필상의 표정은 아주 묘했다.
반면 성호는 거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평상시 쓰리쿼터 스윙을 비롯한 컨트롤 샷의 정확성이 워낙 뛰어나 굳이 스윙에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상은 정확히 느꼈다.
미세하지만 확실히 어깨가 더 돌아갔고 그에 따라 스윙 아크가 커졌다. 너무도 자연스러워 그 차이를 알아낼 사람이 드물 것이라는 판단은 섰지만 고무적인 변화에 가슴이 떨렸다.
“성호야. 거리를 다시 설정하자.”
“지금 스윙을 바꾸시겠다고요?”
“일단 내가 부르는 대로 적어.”
성호는 어리둥절했다.
스윙의 크기를 바꾸는 시도는 시즌 중에 금물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몇 주가량 연습만 하면서 조정하면 모를까.
하지만 필상이 단계별로 채를 바꿔 가며 시원하게 터트리는 아이언 샷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렸다.
왜 진즉에 이렇게 치지 않았나 싶을 만큼 빠르게 탄착점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향성도 나쁘지 않았다.
아쉬운 점은 4번 아이언을 끝으로 연습장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성호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떠오르는 의문을 쏟아 냈다.
“다 좋은데, 정말 거리 조정을 할 겁니까?”
“응.”
“괜찮을까요?”
“응.”
너무도 간단한 대답에 더는 묻지 못했다.
자신이 가진 의문을 필상이라고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샤워를 마친 필상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새벽 4시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정말로 동이 트지도 않은 시간에 일어나 조깅으로 하루를 열더니 간단한 요기를 한 다음, 5시부터 연습을 시작했다.
-아시아퍼시픽 다이아몬드 컵 최종 라운드 중계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해설 허덕호, 저는 임한석입니다.
-저희 SBC 골프 채널의 시청률이 확 올라간 거 아십니까?
-그럼요. 그게 다 공필상 프로 덕분이죠. 하하하.
-저는 우리가 중계를 잘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하하하.
필상의 경기에 대한 한국 골프팬들의 기대와 관심도 거대했다. 하지만 성적과 인기가 좋은 JLPGA와는 달리 JGTO 실시간 중계 방송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눈에 띄는 결과를 내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번에 SBC가 단독 중계권 계약을 맺었다. 필상의 경기를 직관하고 싶은 팬들의 바람에 부응한 것인데, 사실 반대 의견도 적지 않았다.
과연 루키인 필상이 시청자들을 TV앞에 붙잡아 둘 성적을 낼 수 있는지 그에 대한 확신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뒀음에도 집계되고 있는 시청률은 스포츠 방송 중에 단연 1위였다.
-오늘 우리 한국 선수들에 대한 전망부터 궁금해지는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공동 선두인 김경태 프로의 샷 감이 워낙 좋아 경쟁자인 이와타를 따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3, -5, -5로 날이 갈수록 살아나고 있으니까요.
-양용은 프로도 공동 6위까지 올라섰더군요.
-그렇습니다. 올 시즌 출발이 좋았고 언제든 3타 차는 따라잡을 저력을 지닌 양 프로의 성적도 기대해 볼 만합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팬들은 -8, 공동 16위까지 내려선 공 프로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 같던데요?
-실제 5타 차를 뒤집고 우승한 적이 있어서 아무래도 대역전 드라마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3일 내내 필상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던 허 해설도 필상의 우승 가능성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예측을 내놓지 못했다.
3라운드에서 필상의 스윙이 전반적으로 흔들렸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해설하던 그가 필상이 3번 홀을 지나자 해설의 방향을 선회했다.
-3연속 버디! 오늘 선수들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한 가운데, 정말 대단한 힘을 보여 주네요!
-그렇습니다. 1, 3번 홀은 그렇다 쳐도 제가 주목한 부분은 바로 2번 홀입니다.
-2번 홀 경기 장면은 나오지 않았는데요?
-샷을 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제공된 기록은 그가 어떤 경기 운영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적나라하게요? 하하.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어서 궁금증을 풀어 주시죠.
2번 홀은 평상시 파5 홀로 운용된다.
하지만 512야드의 화이트 티를 사용하며 파4로 조정했기 때문에 장타자들에게도 결코 쉬운 홀이 아니다.
평균 타수 4.57이 증명하듯 파를 기록하면 버디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편안하게 지날 수 있는 홀이었다.
그런데 필상의 드라이브 비거리가 무려 309야드를 찍었다. 평상시보다 무려 40야드 이상이 더 날아갔는데, 그것도 페어웨이 정중앙이었다.
기록상 구질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드로우 샷을 구사하기에는 우측의 나무숲이 부담이 되었을 텐데 의아했다.
더 관심이 가는 부분은 207야드나 남은 세컨샷을 홀컵 4m에 붙였는데, 잡았던 클럽이 6번 아이언으로 적혔다는 것이다.
-6번 아이언 비거리가 평소 얼마인데 그러죠?
-지금까지 공개된 통계치는 6번 아이언으로 180야드를 조정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무려 두 클럽이나 짧게 잡고도 버디 찬스를 맞이했다는 것이 아주 특별하죠.
-설마 기록이 틀린 것은 아니겠죠?
-하하하. 그럴 리가요. 하기야 PGA 정상급 장타자들은 7번 아이언으로도 가능한 거리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방금 전 175야드 파3 홀에서 9번 아이언을 잡고 부드러운 컨트롤 샷을 구사한 걸 보면 그에게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해결된 같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정확성에 거리까지 확보가 되었다는 건가요?
-일단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은 그렇습니다. 하하하.
-13인 공동 선두 이와타 히로시와 김경태가 이제 막 1번 홀을 끝마쳤다. 서로를 의식했는지 가볍게 둘 다 파를 적어 냈다.
하지만 그들이 필상의 호조를 확인하면 아무래도 찜찜할 결과를 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4번 홀에서도 필상은 세컨샷을 핀에 바짝 붙였다. 드라이버 티샷은 285야드, 평소보다는 길지만 나름 안전한 공략을 한 이유는 371야드의 파4 홀이기 때문이었다.
2m 버디 퍼팅을 성공하는 순간, 팬들의 환호성은 마지막 조가 플레이하는 2번 홀에도 들릴 것처럼 드높았다.
마의 2번 홀에서 1타를 잃은 이와타가 3번 홀로 들어설 때, 저 멀리 이동식 리더 보드가 보였다.
자신이 졸지에 필상과 동타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고 그 순간 김 프로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아마 정신이 번쩍 들지 않았을까?
-이러다 줄버디 기록을 다시 세우는 건 아니겠죠?
-11홀 연속 버디는 제 평생 다시 보지 못할 진기록입니다. 물론 5번 홀은 일단 버디가 가능하죠. 445야드가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오늘 공 프로의 티샷이라면 숏 아이언 거리가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와우!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필상의 티샷이 불을 뿜었다.
이번에도 역시 풀스윙은 불가능했지만 임팩트가 이뤄지는 순간 느껴진 무시무시한 헤드 스피드는 마치 도끼로 내리찍는 것만 같았다.
-런이 많군요. 심한 드로우 구질도 아닌데 저렇게 많이 구를 수도 있나요?
-잔디의 결을 제대로 탄 것 같습니다. 하하하.
잔디는 햇빛과 물이 있는 방향으로 자란다.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서는 나무나 잔디가 바람 부는 쪽으로 휘어 자라고.
하지만 페어웨이 잔디는 기계를 이용해 왔다 갔다 하며 깎기 때문에 진한 색과 보다 밝은 두 가지 빛을 띠는데, 통상 밝으면 순결이고 어두우면 역결이라고 보면 된다.
밝은 빛깔을 따라 굴러서 더 많이 나갔다는 허 해설의 가벼운 말에도 사실은 아마추어들이 배울 게 있었다. 특히나 퍼팅을 할 때는 라이와 함께 잔디의 결도 봐야 한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여하튼 필상의 타구는 신기하게 많이 굴러 289야드 지점에 멈췄다. 공의 위치를 확인한 필상의 입가에 희미하나마 미소가 맺힌 것은 만족감의 표시였다.
“290야드나 나갔어요. 운이 따르는 것 같아요.”
“운? 글쎄…….”
기분은 좋지만 거기에 취하면 안 된다.
멋진 티샷을 한 뒤에 남들보다 짧은 거리가 남으면 괜히 어깨가 으쓱한 사람의 심리는 아마추어나 프로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이미 수없이 봐 왔다. 스스로 만든 세컨샷 미스가 낳은 깊은 절망에 빠져 몇 홀이나 해매는 골퍼들을.
남은 거리는 157야드, 필상은 갭 웨지를 잡았다. 전에는 피칭으로 컨트롤을 했으나 지금은 52도 웨지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침착하게 샷 이미지를 완성한 필상은 또다시 비명을 부르는 환상적인 백스핀을 작렬시켜 깃대를 맞춰 버렸다.
티잉!
-으아! 진짜 아깝네요!
-샷 이글이 나왔다면 단숨에 역전인데……. 대체 저런 무지막지한 괴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우린 괴물 대 괴물의 대결을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거군요. 하하하.
괴물이라는 별명의 원조는 김경태 프로다.
아마추어 시절 투어 대회에 초청받아 2승을 거뒀고 데뷔전 우승에 이어 연승, 20세인 2007년 3승을 거둬 KPGA 대상, 상금왕, 최저타수상, 신인왕의 4관왕을 차지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런데 그런 괴물과 비견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대형 신인이 나타나 한국 남자 골프계가 오랜만에 신바람을 냈다.
루키라기에는 나이가 좀 많지만 그의 경기를 지켜보노라면 괴물이라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올 진기명기를 마구 뿌려 대 반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