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장타 vs 정확성
‘이게 되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은 상정해 본 적이 없다.
그 또한 경험이 일천한 것과 연관이 될지도 모르지만 빈 스윙을 시도하던 필상은 그 상태로도 이미지가 정확하게 맺힌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신중하게 칩샷을 시도했다.
핀과의 거리는 8m, 오르막이기 때문에 5.5m 지점까지 살짝 띄우고 남은 거리는 굴려서 홀컵에 들어가는 이미지를 연상했는데, 헤드업을 하지 않아 떨어진 지점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 어려운 칩샷이 들어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는 순간, 정확히 홀컵으로 빨려 들어가는 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텅!
“오케이!”
칩인 버디를 넣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짜릿한 만족감!
게다가 이건 연습이 아닌 실전이다.
필상은 자신도 모르게 어퍼컷 세리머니를 취하며 기세를 바짝 끌어올렸다. 바람 없는 날씨에 코스 세팅도 어렵지 않아 전반에 4타를 줄인 필상은 최종 스코어 -7로 경기를 마쳤다.
두고 봐야겠지만 선두로 나설 가능성도 점쳐졌다. 그런데 시작할 때는 미처 집계되지 않았던 또 다른 기록이 탄생했다.
경기를 보기 위해 입장한 관객 수다.
최종 라운드도 아닌 첫날 6,500명이 입장한 것은 도쿄에서 열리는 메이저 대회에서나 가능한 수치였다. 이 대회 하루 최다 관중 동원 기록을 갱신했는데, 70%가 여성이었고 대부분 새벽에 출발한 1조에 몰렸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제가 뭐라 그랬어요!”
“나쁘지는 않더군.”
“은근히 즐겨 놓고 너무 빼는 거 아닙니까?”
“에라 인간아!”
움직일 때마다 구름처럼 몰려다닌 여성 팬들의 응원은 뜨겁다 못해 격렬했다. 일본 갤러리들은 굉장히 매너가 좋고 조용한 편이지만 필상이 나이스 샷을 날릴 때마다 난리가 났다.
다른 조의 선수들까지 플레이에 영향을 받을 만큼 고음의 오랜 환호가 이어져 필상의 인기를 극명하게 보여 줬다.
지난 대회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드디어 본격적인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찍 경기를 마친 터라 점심을 먹고 다시 연습장으로 향한 필상은 숏 게임 필드로 나가 다양한 트러블 샷을 점검했다.
그런데 라운드 결과가 나왔는지 성호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8언더를 친 인간이 있더라고요.”
첫 마디부터 의외였다.
하지만 필상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었기 때문이다.
“누군데?”
“작년에 첫 승을 신고한 이즈미다라는 선수인데, 6번 홀에서 이글을 했더라고요!”
“이글?”
별 관심이 없던 필상이 이글이라는 말에 기록을 살펴봤다. 그린 좌측으로 길게 호수가 자리한 파5 홀이라서 2온이 상당히 어려운 551야드의 롱 홀이었기 때문이다.
티샷을 300야드 이상 날리고 우드를 잡으면 모를까, 서드 샷이 샷 이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드라이버 티샷을 308야드나 날렸네!”
“페어가 넓은 홀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248야드 세컨샷은 3번 아이언으로 올렸어.”
“신이 내렸나 보네요.”
“오늘의 샷으로 뽑혔을 거야. 그 영상을 좀 찾아봐.”
“네.”
다른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훌륭한 공략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행여 자신이 미처 생각 못한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인데, 다른 것은 없었다.
우직하게 장타를 날렸는데 정확한 결과가 나왔을 뿐이었다. 물론 필상도 그와 같은 공략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수할 경우 대가가 너무 혹독한 홀이라서 피했던 것이다. 피치 못할 상황이라면 모를까, 1라운드부터 그런 무리수를 두는 것은 패망의 지름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경태 -3 공동 15위/ 양용은 -2 공동 22위]
기왕 기록을 살피던 터라 필상은 관심을 가진 두 프로의 성적도 확인했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경계할 대상이라고 봤는데 결과는 기대와 좀 달랐다.
“경태 형이나 양 프로님은 안전한 플레이를 하셨네.”
“오늘은 공격적으로 공략해도 될 세팅이었는데, 왜 그랬을까요?”
“낸들 아나! 이제 겨우 1라운드가 끝났을 뿐이잖아.”
“그래도 선두와 너무 벌어지면 힘들 텐데요.”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첫날은 가장 앞 조에 배정하더니 필상의 2라운드의 조 편성은 하필이면 인코스 마지막 조였다.
기다리던 팬들은 어제와 달리 느긋하게 기다리다 관전할 수 있어 좋았으나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구름은 많아도 비 소식은 없었는데 문제는 바람이었다. 어제와 달리 코스 세팅도 어려워 부담되는데, 6번째 홀부터 거세진 바람은 방향을 종잡기 힘들어 플레이에 악영향을 미쳤다.
“이놈의 바람 때문에 하마터면 오버파를 기록할 뻔했네요.”
“첫 다섯 홀에서 2타를 줄인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이 쓰린 것은 사실이었다.
이 대회와 궁합이 맞지 않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찌 되었든 하루에 보기를 3개나 기록한 것은 처음이라서 적잖이 짜증이 났다.
-9 이와타 히로시/ 장이근
-8 김경태/ 이케다 유타/ 이나모리 유키/ 기타야마 커트
-7 공필상/ 호시노 리쿠야/ 브렌단 존스 외 3명
예선 컷이 +2로 결정된 걸 보면 결선에 오른 선수들의 역량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선두권에 나선 선수들이 하나같이 바람이 없는 앞 조에 편성되었다는 사실은 상대적 박탈감을 선사했다.
아직 안면이 없는 장 프로와 빈틈없는 준비를 마친 김 프로가 선두권에 나선 것은 필상으로서도 부담스러웠다.
어제 8타를 줄인 이즈미다도 늦게 출발한 조에 편성된 영향을 받았는지, 오늘 5타를 잃어 한참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어제 이글을 기록한 6번 홀에서 트리플 보기로 자멸했다. 안전한 선택이 필요한 여건인데도 어제의 좋았던 생각만 하다가 말짱 도루묵이 된 셈이다.
-오빠! 저 오늘 6언더 쳤어요!
모모코가 참가한 토카이 클래식은 54홀 대회라서 금요일인 오늘 첫 라운드가 진행되었다.
미처 기록을 챙기지 못했는데 먼저 연락이 왔다. 얼른 성호에게 눈짓해 토카이 클래식 홈페이지를 띄우고 그녀의 오늘 경기 내용을 확인했다.
이글 1개, 버디 6개를 기록했다. 눈부신 성적이지만 보기를 2개 적어 낸 것이 아쉬웠다. 그래도 단독 3위로 선두와는 1타 차라서 우승 가시권이라고 봐도 될 호성적이었다.
하필이면 어제의 자신의 순위와 같다는 점도 이채로웠지만 밝은 음성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고생했네. 손목은 괜찮아?
-네. 멀쩡해요. 그런데 오빠는 공동 7위던데요?
-응. 오늘 보기를 3개나 했지.
-갑자기 바람이 거세진 탓이잖아요. 저도 속상했는데 댓글들 보고 기분이 좋아졌어요.
-무슨 댓글?
알고 보니 대회 홈페이지와 관련 기사들마다 테러에 가까운 항의성 댓글이 스크롤 압박을 줄 만큼 긴 줄을 이었단다.
내일도 최선을 다해 기분 좋게 분발하자는 말을 던진 필상은 얼른 전화를 끊고 모모코가 전한 내용을 확인했다.
그런데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들, 아니 그보다 훨씬 강한 어조로 주최 측을 규탄했다. 왜 공평하지 않은 조 편성을 했느냐고.
“하하하. 이럴 줄 알았어요. 경기 중에도 원망 어린 목소리들이 많았거든요.”
“그 일본말을 네가 알아들었다고?”
“척 하면 척이죠! 하하하.”
편향적인 조 편성에 대한 언급을 외면한 기사들도 도마에 올랐다. 언론의 책무를 저버렸다는 둥, 심지어 기자의 자격 논란까지 꼬집으며 필상의 억울함을 대신 토로했다.
주최 측에 대한 서운함이 일거에 날아갈 정도로 속이 시원했다. 가장 마음에 와닿은 댓글은 ‘공정하지 않으면 스포츠가 아니다’라는 지극히 본질적인 지적이었고 상당한 지지를 받아 포털 상위권을 차지하기도 했다.
“너무 많아서 도저히 다 읽을 수가 없네.”
“제가 끝까지 읽어 드릴게요. 형은 연습이나 하세요.”
필상은 팬들의 사랑이 가득한 댓글 낭독을 들으며 연습을 재개했다. 그 못 말릴 모습을 지켜보던 김 프로가 크게 웃으며 다가와 성호와 장단을 맞췄다.
“일본 최고의 미녀를 애인으로 둔 것도 모자라 이제 일본 아줌마들한테도 공공의 연인이 되는 건가?”
“필상 형이 아줌마들한테 먹히는 외모인가 봐요.”
“나도 한때는 잘나갔는데, 결혼을 괜히 일찍 했나?”
“결혼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같은 총각이 겪은 상실감, 그거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
-다이아몬드 컵, 본선이 시작되었습니다. 화창한 날씨에 오늘은 바람도 없어 무빙데이가 더욱 뜨거워질 것 같습니다.
-66명이 성적에 따라 22개조로 편성되어 7:40부터 결전을 벌이고 있는데, 분위기가 정말 심상치 않네요.
-10:55에 출발하는 20조가 가장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아! 퍼펙트 콩이 뒤에서 3번째 조에 편성된 것은 저도 아는데, 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아이언 샷의 대가인 공 프로가 JGTO를 대표하는 장타자들과 맞대결을 벌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호시노와 존스는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가 거의 300야드에 육박하는 장타자들이군요!
-그렇습니다. 장타자들 틈에서 어떤 경기를 펼칠지, 아니면 공 프로의 정교한 샷에 장타자들이 먼저 무너질지 그걸 지켜보는 것도 아주 재미있을 겁니다.
예선전과는 달리 본선은 성적 역순으로 조 편성이 된다.
그런데 공동 7위인 필상은 묘하게도 장타자들과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정작 본인은 아무런 부담이 없는데, 오히려 전문가들이 더 흥미로워 했다.
장타와 정확성, 이 두 난제는 좀처럼 접점을 찾기 힘든 골프의 오랜 숙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대회 홈페이지가 다운된 사건 들으셨나요?
-아! 들었습니다. 제가 염려하던 일이 현실화된 거죠. 만약 제가 그런 섭섭한 일을 당했다면 앞으로 이 대회는 나오기 싫을 것 같습니다.
-행여 퍼펙트 콩이 우승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주최 측이 반성할까요? 여하튼 더 잘 치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해설가 겐지로와는 달리 캐스터는 아직 필상의 기량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를 슬쩍 돌아본 해설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맞불을 놓을 수는 없어 그저 멋쩍게 웃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급기야 20조가 티오프 되었고 존스와 호시노는 290야드를 날려 아예 양쪽에 도사린 벙커를 넘겨 버렸다.
넘치는 자신감에 스윙 리듬도 아주 좋아 보였다.
그러나 필상의 티샷은 지난 이틀과 다르지 않았다. 부드러운 스윙으로 다시 페어웨이 정중앙에 공을 보내며 마이 웨이를 외쳤다.
문제는 세컨 샷이었다.
“와아아아! 나이스 샷!”
“멋지다. 퍼펙트!”
어제보다 오늘은 더 많은 갤러리들이 몰려와 1번 홀을 완전히 포위한 형국이었다. 단지 티샷 하나를 날린 것에 불과한데 뜨거운 환호성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핍박 받는 자에 대한 측은지심의 발로인가?
언더독 효과가 아니기를 바라며 담담하게 세컨샷 지점으로 이동했다. 마음 같아서는 팬들의 성원에 손이라도 흔들어 주고 싶지만 오히려 교만하게 비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기에 임한 선수라면 모든 집중력을 동원해 좋은 플레이로 보답하는 것이 최선일 테고.
“137야드 남았어요.”
“부드럽게 친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힘이 좀 들어간 거네.”
“거의 일직선으로 274야드 정도 날아왔는데요?”
“그러니까.”
미세한 차이다. 265야드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리막도 아닌 홀에서 9야드가 더 나간 것도 장타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판단해 더욱 신중하게 세컨 샷에 임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핀을 향한 공은 생각보다 길었다. 피칭으로 컨트롤 해 떨어진 지점에 그냥 세울 요량이었는데, 아예 홀컵을 훌쩍 지나 내리막 5m 퍼팅을 남겼다.
“조금 길었네요.”
“바람이 없는 거 맞지?”
“네. 탄도가 높긴 했지만 비거리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단 2번의 샷을 했는데, 감이 좋지 않았다. 멀리 나가는 것이 짧은 샷 결과보다 오히려 나쁠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자신의 샷에 대한 의구심 때문인지 버디를 놓쳤다. 그렇다고 비거리가 늘었다는 전제하에 거리를 수정하기에는 섣부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홀을 거듭하며 더도 말고 의도한 거리의 대략 5% 정도가 더 날아가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 확신이 6번 홀 서드 샷을 한 뒤에 섰다는 것이 억울할 뿐.
“형. 반 클럽 정도 짧게 잡아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대략 5, 6% 거리의 수정이 불가피한 것 같아.”
평상시에 설정한 거리를 경기 도중에 수정하는 것은 위험할뿐더러 심리적인 불안감을 낳는다. 그래서 최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데,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동반자들은 나란히 2타를 줄이며 달아나는데, 비교적 쉬운 3, 4번 홀에 이어 첫 롱홀인 6번 홀에서도 타수를 줄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거리를 조정한 것은 들어맞았지만, 진한 아쉬움의 흔적에 샷의 방향성이 흔들리는 문제가 생겼다.
한 번 열려 맞은 뒤로 살짝 살짝 좌우로 비켜 가는 방향성 때문에 타수를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야만 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