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그 입 닥치지 못할까!
“서른둘이라고?”
“네. 한국 나이로는 서른셋입니다.”
“적지는 않군. 그래도 힘을 그렇게 아낄 만큼 많은 나이는 아니잖아?”
양 프로의 지적에 김 프로는 물론 필상도 놀랐다.
대부분의 프로들은 있는 힘껏 스윙하지 않는다. 미스 샷을 줄이기 위해 가용한 힘의 80% 수준으로 정확성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스윙을 즐겨 한다.
그건 누구든 대동소이한데, 굳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저 필상이 쓰리쿼터 스윙을 고집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필상의 대답이 있기 전, 김 프로도 관심을 드러냈다.
“맞아. 너 가끔 폭발적인 티샷을 구사하기도 하잖아. 정확성도 상당히 높던데?”
“그건 누구나 다 가능한 거잖습니까.”
“풀스윙이 아닌데도 300야드 이상을 날린다는 게 문제지!”
“문제랄 건 없고. 누구에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사실 전 어깨 회전이 남들처럼 다 돌아가지가 않아요.”
“풀스윙 자체를 못 한다고?”
정말 깜짝 놀랄 발언이었다.
풀스윙을 못 하는 프로 골퍼,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귀한 기록들을 써내려 가지 않았던가!
프로 선수가 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같은 엄청난 핸디캡을 지니고도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밝혔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누구에게나 각자의 한계가 있는 법이지. 어깨에 문제가 있지만 그게 자네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는 게 중요하지.”
“그럼요. 거리 몇 야드 더 보내는 게 능사는 아니더라고요.”
“하하하. 맞아, 맞아!”
양 프로는 필상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줬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격려라는 것을 느낀 필상은 상당히 고무되었고 이후 남은 두 홀을 모두 버디로 연결했다.
563야드 파5, 17번 홀의 공략은 필상의 정확한 샷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사례였다. 260야드 티샷, 195야드 아이언 샷으로 110야드를 남긴 필상은 샌드웨지로 샷 이글을 노렸고 핀 바로 앞에서 튄 공은 홀컵을 지나 1m 안에 멈췄다.
오버파는 용납할 수 없다는 집중력이 발휘된 마지막 홀에서는 265야드의 티샷을 페어웨이 한가운데 보냈고, 185야드를 7번 아이언으로 핀에 쩍 붙여 동반자들의 스윙이 흔들리게 만들었다.
“한 조가 아닌 게 다행이로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코스는 핀의 위치에 따라 난이도가 확 갈릴 것 같습니다.”
“맞아. 한 번 쳐 보고 그게 다 파악이 된 거야?”
“제가 캐디 일을 오래 했잖습니까.”
“1년도 채 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기간이 중요한 게 아니죠. 얼마나 충실하게 본연의 일에 집중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야 그렇지. 진즉에 자넬 알았다면 소니 오픈 때 캐디로 쓰는 건데! 그때는 프로가 아니었잖아.”
“하하하. 그랬죠.”
양용은 프로와의 연습 라운드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
경기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는 끊임없는 도전이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느낌을 선사했다.
다들 필상의 데뷔가 늦었다고 말하지만 15년 선배인 그의 도전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앞으로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한 보다 명확한 목표가 생겼다.
하루 종일 야디지 북과 씨름하던 성호도 무사시 골프 코스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지난해 우승자 이케다만 -15를 쳤고 2위부터는 한 자릿수 언더였던 게 이해가 됩니다.”
“아마 매 라운드마다 난이도가 달라질 거야. 어쩌면 중간에 함정을 파 놓을 수도 있어서 꼼꼼하게 체크할 필요가 있지.”
대회 준비는 여러 측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마음가짐이고 그 다음은 스윙을 가다듬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면 그건 바로 코스 적응이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 플레이의 격차가 큰 코스에서는 한 번 흔들리면 그 여파는 스코어에 영향을 미친다.
분명히 원하는 대로 잘 쳤는데도 결과가 배신하면 심리적인 위축과 더불어 욱하고 치미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스윙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실수, 그 외의 오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철저한 대비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아시아퍼시픽 다이아몬드 컵, 결전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6시 35분 티오프는 아침이 아니라 새벽이죠! 경기 전에 몸을 풀어야 하는 것까지 고려하면 1조 선수들은 5시 전에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게다가 잔디에 내린 서리도 채 날아가지 않아 무척 불리할 것 같습니다.
-최대한 공평하게 티타임을 조절하지만 경기 운용상 피치 못할 부분도 있습니다. 10분 간격으로 출발한 44개 조가 모두 일몰 전에 경기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올 시즌 JGTO 2승을 거둔 퍼펙트 콩을 1조에 배정한 것은 팬들의 기대와 다른 것 같아 의아하네요.
-아! 그 점은 저로서도 좀 아쉽게 생각합니다. 보통 인기가 많은 선수들의 매치 업은 대회의 흥행을 고려해 넉넉한 시간에 배정하는데 주최 측이 그 점이 불공평하다고 본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불공평한 배정을 바로잡는 걸 탓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상을 제외한 올 시즌 우승자들과 전통의 강자들은 대부분 티타임의 배려를 받았다. 그 와중에 필상을 하필 1조에 배정한 것이 워낙 눈길을 잡아 중계가 그와 관련된 언급으로 시작되었다.
어찌 되었든 필상이 이번 대회에서도 주목받는 선수인 것은 부정하기 힘들었다.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모모코와의 연애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세간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지난 대회에서 한풀 꺾였다고 여기는 자들이 혹시 수작을 부린 건 아닌지 의심하는 팬들도 없지 않았다.
그중에 한 명이 필상의 캐디, 성호였다.
“이 새끼들 진짜 심하네!”
“워 워! 진정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시즌 다승자를 팬들도 없는 시간에 배정하는 경우는 본 적도 없거든요.”
“침착해. 이미 뒤집을 수 없는 결정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만 손해를 볼뿐이야.”
“네.”
예선 조 편성은 주최 측의 권한이라고 대회 요강에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통상적인 관례라는 것이 있다.
그걸 어긴다고 따질 수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필상을 1조에 편성한 주최 측에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다.
대회 출전을 포기하고 그냥 가는 것.
물론 필상은 그럴 의사가 없다. 아쉬운 사람은 아직 자신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51회를 맞이하는 전통의 대회다 이거지.”
“형. 반드시 우승하자고요. 그리고 보란 듯이 내년에 불참을 선언하는 겁니다.”
“그럴까?”
이런 푸대접을 잊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가장 좋은 대처는 역시 결과로 보여 주는 것뿐, 성호의 말처럼 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티 그라운드로 올라섰다.
이른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소개 멘트가 나오자 적잖은 팬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특이하게도 여성 팬들이 많았는데,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깡!
1번 홀은 409야드 파4 홀인데 핸디캡 7번이다.
양옆으로 울창한 나무들이 벽을 치고 있지만 특히 왼쪽은 OB로 지정된 곳이라 절대 당겨 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우측은 편한가?
그것도 아니다. 자칫 밀리면 듬성듬성한 나무 사이에 들어가는데 레이 업 말고는 답이 없다.
게다가 티샷 IP 지점에는 좌우로 벙커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좌측 벙커는 252야드, 우측 벙커는 257야드 지점에 놓여 애매한 선택을 강요한다.
아예 잘라 가든지 아니면 290야드를 넘겨야 하는데 장타자들은 유혹을 이기지 못해 첫 홀부터 망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귀신이 따로 없네요.”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이냐?”
“하하하. 어떻게 저 좁은 페어웨이 한가운데로 보낼 수가 있습니까? 너무 감탄해서 그러죠. 하하하.”
필상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티샷을 했다.
좌우의 나무든, 크로스 벙커든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듯 부드럽게 때렸고 벙커로 인해 좁아진 8m 폭의 페어웨이 한복판으로 공을 보냈다.
말이 쉬워 8m지, 티 그라운드에서 느껴지는 그 폭은 아찔한 위협을 주건만 잘라 갈 생각도 넘길 생각도 없이 정확하게 공략하는 모습에 동반자들의 인상은 동시에 일그러졌다.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하건만 믿음이 부족했던 한 선수는 우측 벙커에 빠뜨렸고, 무리하게 벙커를 넘기려던 남아공 출신의 하딩은 잠정구를 쳐야만 했다.
“그냥 들어간 지점에서 3번째 샷을 하지!”
“그러게요. 바뀐 규정이 이런 경우는 오히려 유리한 건데!”
공이 OB지역으로 들어가면 잠정구를 칠 수도 있지만 경기의 빠른 진행을 위해 타구가 들어간 지점에서 1벌타를 먹고 서드 샷으로 그린을 공략할 수 있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특히나 티샷이 어려운 코스라면 그런 전략적인 접근도 가능한데 하딩은 잠정구를 때렸고 이번에는 겨우 좌측 벙커에 걸려 OB가 되지는 않았다.
차라리 135야드 지점에서 드롭을 한 것보다 나쁜 결과에 그의 오늘 하루는 고생문이 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147야드를 9번 아이언으로 컨트롤을 한 필상이 3m 버디 퍼팅을 남기자 동반자들은 벙커샷을 그린에 올리지 못했다.
“그린이 서리에 젖어서 공이 구르지 않은 것 같아요.”
“응. 그걸 감안했는데도 한참 짧았네.”
“그럼 퍼팅은 지나가게 치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겠지.”
동반자들이 숏 게임을 하는 동안 필상은 라이를 꼼꼼하게 살폈고 실제로 과감한 퍼팅 스트로크를 감행했다. 그런데도 공은 홀컵 앞에 멈출 듯 까딱거리다 겨우 들어갔다.
“와아아! 퍼펙트 콩, 파이팅!”
“버디! 버디! 버디!”
동반자들이 타수를 잃은 가운데 홀로 버디를 기록해서인지 아줌마 특유의 높은 옥타브 응원이 고요한 새벽을 갈랐다.
“역시 아줌마 부대!”
“좀 쑥스럽네.”
“손 좀 흔들어 주세요. 저렇게 열성적으로 환호하는데.”
“성호야. 그 입 닥치지 못할까!”
“윽!”
“불필요한 농담이나 할 때가 아니잖아.”
버디를 기록했다고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수는 없다.
이제 겨우 한 홀이 지났을 뿐, 설사 마지막 홀이라고 하더라도 진지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었다.
오히려 선수를 부추기는 성호의 어설픈 행동은 자제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농담조였지만 확실한 선을 그었다.
즉시 분위기 파악을 마친 성호가 집중하기 시작하며 필상의 1라운드는 그렇게 긴장을 유지한 채로 이어졌다.
-역시 대단하군요!
-퍼펙트라는 닉네임이 괜히 붙은 게 아닙니다. 말이 56타지, -14는 절대 운으로 만들 수 있는 스코어가 아닙니다.
-그 당시 태국의 골프 코스가 쉬워서 가능했다는 평가가 많던데, 그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그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직접 가서 쳐 보라고 하십시오. 입만 살아서 타인의 열정과 노력을 함부로 평가하는 그런 발언은 전문가로서 자질을 의심케 하는 겁니다.
-아! 오늘 굉장히 공격적이시네요.
-오늘 퍼펙트 콩의 눈부신 플레이를 보며 제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편견 없이 정말 한 선수의 능력을 순수하게 평가했는지 돌아보면 저도 부끄럽습니다.
해설위원이 중계방송 중에 그런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이채로운 상황이다. 모모코의 팬임을 자처한 겐지로는 이전 중계에서도 가급적 필상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 왔다.
선입견과 자기 판단의 경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것인데, 오늘 전반에만 4타를 줄인 필상의 놀라운 경기력을 보며 그 높은 벽이 허물어진 것이다.
첫 조로 출발한 것이 마음에 걸릴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한 홀 한 홀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 그에 어울리는 정교한 플레이는 아무리 봐도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지난번 매치 플레이에서 너무 허무하게 혼절하는 장면을 보고 루키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봤는데, 그것마저도 편견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느낀 감동의 절정은 240야드의 상당히 긴 파3 홀, 13번 홀에서 극에 달했다.
“어? 왜 좌측으로 튀지?”
성호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다.
분명히 필상의 유틸리티 티샷은 원하는 지점에 떨어졌다. 그린 앞 오르막 러프, 거기에 떨어진 공이 적당히 튀어 홀컵으로 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미 연습 라운드에서 같은 공략으로 온 그린을 한 적이 있고 지금은 방향도 아주 정확해 핀에 붙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공은 기이하게도 가드 벙커가 있는 좌측으로 튀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벙커에 들어갔거나 애매한 위치에 걸렸을 것 같아 서둘러 그린을 향하고 싶었다.
동반자들의 티샷을 기다리는 동안 그린 주변에 있던 팬들 중에 한 사람이 공이 살아 있다는 신호를 보내 왔다.
“벙커에 빠지지는 않았나 봐요!”
“그 사람 표정은 못 봤구나.”
“표정이요?”
“아마도 이상한 위치에 놓인 것 같아.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잖아.”
아니나 다를까, 벙커 턱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공의 위치는 스탠스가 나오지 않았다. 턱이 낮으면 한 발을 아래에 둘 수도 있지만 어림도 없는 높이였다.
겨우 잡을 수 있는 자세는 오른발보다도 25cm가량 뒤에 놓인 공을 클럽 페이스를 닫은 채로 쳐야만 했다.
그것도 까닥 중심을 잃으면 벙커로 떨어질지 모르는 가파른 경사여서, 자세를 취해 보는 필상을 바라보는 팬들의 표정에는 걱정이 한 가득 차올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