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77화 (77/354)

077. 호랑이 사냥꾼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가 아들을 그렇게 무책임하게 키우지 않으셨잖아요.”

‘그럼 올 겨울에 한가해지면 조촐하게라도 약혼식을 하는 거로 알고 있으마.’

“네. 그럴게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모모코가 아직 어리고 약혼에 동의할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도 그게 또 다른 해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며느리를 얻고 싶으신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도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했기에 일단 부딪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모모코한테 내 안부 전해 주고 늘 잘해 줘.’

“네. 잠깐만요. 모모코가 바꿔 달래요.”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모르는 엄마의 당황한 숨결이 느껴졌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냥 모모코의 목소리라도 듣는 것이 기쁘셨는지도 모르겠다.

놀라운 것은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모모코가 엄마와 무슨 내용으로 통화를 하는지 대략 감을 잡았다는 것이다.

히쭉히쭉 웃으며 좋아하던 모모코는 전화기를 건네받더니 여우같은 목소리로 인사부터 했다.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한국어도 구사하는 걸 보며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사랑해요. 어머니.”

“보고 싶어요. 어머니.”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몰라도 한참 깔깔대던 모모코가 휴대폰을 건네줘 마무리 인사를 했는데, 엄마의 음성에는 걱정이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모모코가 가족들과도 잘 지낼 것 같아 안심이 됐다. 누나들은 다들 가정을 꾸렸고 티격태격 대지만 그래도 무난히 살고 있어서 엄마의 남은 숙원은 오로지 하나다.

바로 아들의 결혼, 물론 결혼하면 손자를 원하실 테고 점점 더 큰 소망을 가지실지 모르지만 그게 다 우리네 사람 사는 모습이라는 생각에 긴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환상은 오래 갈 수 없었다. 엄마가 대체 무슨 말을 하셨는지 꼬치꼬치 묻는 모모코가 성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현재 분위기는 더 없이 좋지만 성급한 고백이 가져올 여파를 고려하면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좋네!”

“그쵸?”

가와사키는 도쿄 남쪽에 인접한 도시로 모모코가 봐 둔 별장은 도쿄만에 접한 고급 주택단지의 예쁜 2층 집이었다.

도로 접근성이 좋아 공항까지 30분도 걸리지 않고 인근에 큰 공원도 있어 조용할 뿐만 아니라 운동하기에도 적합했다.

1층은 거실과 식당, 서재를 비롯한 공유 공간이고 2층에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테라스를 갖춘 침실도 3개나 있었다.

하지만 필상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바로 넓은 정원이었다.

꽃이 만발한 화원, 가지런히 정돈된 잔디밭은 마구 뛰어다녀도 좋을 만큼 넓어 엉뚱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연습장을 만들어도 되겠어.”

“집에서도 연습을 하게요?”

“할 수만 있다면.”

모모코는 혀를 삐죽 내밀며 어림도 없다는 행동을 취했지만 필상의 머리는 이미 빠르게 회전했다.

그물망을 치면 거리는 적당하지만 타석을 적어도 3개는 만들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좀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아!”

“우리 둘이 살 건데 좁다고요?”

“응. 공간이 좀 더 넓은 데는 없을까?”

“그건 알아봐야죠. 어차피 이 지역은 대부분 비슷비슷한 별장식 주택이라서 더 큰 것도 있기는 할 거에요. 근데 정말 연습장을 만들려고요?”

막상 모모코가 되묻자 필상도 고심에 빠졌다.

집을 구입할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임대한 집을 자신의 필요에 맞게 함부로 변경할 수도 없지 않겠나.

머리가 복잡했지만 무슨 일이든 서둘러서 좋을 건 없다는 판단하에 일단 물러섰다. 모모코는 입맛을 다셨지만 중개인에게 더 큰 집을 알아봐 달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더니 차에 올라타서는 엉뚱한 말을 뱉었다.

“아이들이 뛰어놀려면 좀 작기는 해요.”

“무슨 아이들?”

“전 많이 낳고 싶어요.”

“윽!”

신혼집을 구할 작정이었던가?

아니, 그걸 넘어 아이들을 많이 낳아 기르고 싶다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외동으로 커서 필상처럼 형제가 많은 것이 부럽다는 말을 하는데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뭔가 기회다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집을 사도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계좌에 이미 엄청난 거금이 꽂혔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푼이라도 헤프게 쓸 생각은 없으며 부동산 중개인이 이 지역의 투자가치에 대해 언급했는데, 더 상세히 알아봐야겠지만 필상이 봐도 괜찮았다.

자신보다는 모모코의 명의로 살 가능성이 높지만 더 큰집을 바라면서 뒷짐만 쥐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힘들 텐데 괜찮겠어?”

“치! 그럼 저도 이루마로 따라갈까요?”

“그러든지!”

그건 진심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힘든 우승을 거뒀는지 알기에 쉬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모모코는 이번 주말에 아이치 현에서 개최되는 토카이 클래식에 이미 출전을 약속했다.

그러라고 했지만 불가하다는 것을 알기에 더 아쉬웠다. 그렇다고 한 주를 쉰 필상이 대회 출전을 포기할 수도 없고.

이루마에서 열리는 아시아퍼시픽 다이아몬드 컵 대회는 ISPS 매치 플레이에서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해야 할 무대다.

결국 둘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는데, 처음도 아니건만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는 그녀를 떠나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워 진한 포옹을 나눴다.

남들이 보든 말든.

“이젠 아예 내놓고 사귀는 겁니까?”

“그래야지. 헤어질 수는 없잖아.”

“그야 당연하죠. 돈을 못 벌어, 얼굴이 못 생겼어, 거기다 형이라면 꼬빡 죽는데…….”

“흑돈! 너 맷집 좋은가 보구나!”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데 뭘 그렇게 생색을 내십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다들 형을 도둑이라고 생각해요!”

“고마 해라! 마이 무거따!”

남자들이 보는 시각은 성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록 필상이 나이키도 인정한 전도유망한 골퍼지만 아직 모모코의 인기에 비할 수는 없다.

그녀는 일본 여자 골프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열두 살이나 어린 일본 최고의 미녀 골퍼를 서른두 살의 한국 남자가 꽃도 피기 전에 채 간다는 인식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역전될 거라고 믿어요.”

“뭐가?”

“남자 팬들의 열정은 결코 여자 팬들의 극성을 넘어설 수가 없거든요.”

“그거 다 부질없어. 한두 해 비실거리면 다 거품처럼 사라진다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팬들 때문에 좌지우지되지는 않을 거다. 그래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어? 벌써 진도가 그렇게 나간 겁니까?”

“아니야. 하지만 이왕 이렇게 공개된 마당에 질질 끄는 것도 성미에 차지 않아서.”

“좀 애매하기는 하네요. 모모코나 형이나 이제 팍팍 치고 올라갈 땐데!”

공항을 벗어나던 필상은 자신을 알아본 팬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 줬다. 한 명 한 명이 다 소중한 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모코와 잘되기를 바란다는 인사말을 꺼낸 이가 있었다. 그게 모모코를 위해서도 낫다는 말을 한 노신사는 진정한 골프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턱없이 어린 나이지만 빨리 정착하는 것이 오히려 그녀의 골프 인생을 위해서는 바람직하다고 말할 정도면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분 같아 통성명을 나눴다.

“명심하겠습니다. 전 공필상이라고 합니다.”

“허허허……. 알지. 난 사토시라고 하네. 일본말을 정말 잘하는군. 그 정도 자세는 되어야 투어를 뛸 수 있지, 그럼!”

명함이라도 받아 두고 싶었지만 악수를 나눈 그는 휘적휘적 입국장으로 향했다. 족히 여든은 되어 보이지만 걸음걸이는 중년처럼 단단해 보였다.

아마도 과거에 골프를 했던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공항을 벗어난 필상은 서둘러 이마루 시로 향했다. 2주 전의 악몽이 떠오르는 사이타마 현에 속한 도시지만 도쿄에서 훨씬 가까워 클럽하우스에 도착해 식사를 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형은 식사하셨어요?”

“벌써 먹었지. 연습하고 있는데 네가 왔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지. 하하하.”

그런데 김경태 프로의 뒤로 한 사람의 얼굴이 더 드러났다.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필상은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제일 잘나가는 후배랑 얼굴 트러 왔지.”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식사하고 음료수나 한잔하세.”

“다 먹었습니다. 커피숍으로 가시죠.”

“좋은데 놔두고 커피숍은 왜?”

클럽하우스를 벗어나 골프 코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은 선수는 다름 아닌 양용은 프로였다.

2009년 아시아인 최초로 PGA챔피언십을 거머쥘 때, 골프 황제 우즈에게 역전승을 거둬 ‘호랑이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자네 이력이 아주 특이하더군.”

“프로님의 이력과 닮은 점이 꽤 있습니다.”

“나야 맨바닥에 헤딩을 하면서 시작했고 자네는 캐디로 일하기 전에 회사원이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만년 샐러리맨이었지요. 그나마 해고당해 한때는 알코올 의존증까지 있었습니다. 다 지난 이야기지만.”

“그래. 고생해 봤으니 그렇게 독한 골프를 치지.”

잠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그는 돌연 일어서더니 어서 골프백을 가져오라고 했다. 잠시 후에 연습 라운드가 잡혀 있는데 같이 돌자는 제안이었다.

오늘은 미처 라운드 할 계획은 없었으나 한 번이라도 더 필드를 경험하는 것이 소중한 필상이 마다할 리 없었다.

그렇게 김경태 프로, 대선배인 양용은 프로와 함께 무사시 골프 클럽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살벌하네요.”

“한 샷 한 샷이 모두 전투인 거지.”

양용은 프로의 진지함에 필상은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72년생인 그의 나이는 만 47세다. 그러나 힘이나 호흡이 젊은 선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필상보다 드라이브 티샷 비거리가 20야드 이상 더 나오는 장타력에 은근히 기가 죽을 정도였다.

JGTO에서 활약하면서도 PGA 월요 예선에 꾸준히 참가하는 그의 지난해 일본 투어 상금 랭킹은 13위였다. 평균 타수 70.53은 투어 7위였고 대부분의 지표가 상위권을 유지했다.

작년 ‘더 크라운’ 대회 우승은 그가 아직도 쟁쟁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을 대변하는 증거였다. 그린 적중률 69.02%로 투어 5위에 해당하는 정교함까지 갖췄음에도 그의 입에서 필상에 대한 묘한 칭찬이 쏟아졌다.

“경태야. 우리 올해는 모든 순위가 한 단계씩 떨어지겠다.”

“그러니까요. 얼른 미국으로 보내야지요.”

“하하하. 보내지 않아도 곧 가겠어. 자력으로.”

“가지 않으면 제가 PGA 사무국에 편지를 쓸 겁니다. 얼른 이 괴물을 좀 데려가라고요.”

“내 사인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만해. 기꺼이 동참할 테니.”

“아! 왜들 그러십니까? 스코어가 말해 주고 있는데!”

필상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만히 뒀다가는 밧줄로 결박해 미국 밀항선에라도 태울 것 같은 기세였기 때문이다.

둘은 이 코스의 경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가볍게 공략하는 것 같았지만 2홀을 남긴 지금, 나란히 -2를 기록했다.

필상의 스코어는 +2, 성적보다는 코스 파악에 전념했지만 그렇다고 대충 친 것도 아닌데 스코어가 쉬 나오지 않았다.

“첫 라운드에서 2오버면 잘 친 거야. 이 코스를 밟은 내 첫날 성적이 어땠는지 알아?”

“알고 싶지 않아요.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김 프로의 의도는 위로나 격려일지 몰라도 그렇게 들리지 않은 필상은 바로 맞받아쳤다. 남들이 어쨌든 자신은 결코 오버파를 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람 부는 오거스타도 아니고, 한낱 일본의 골프 코스에도 적응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꿈은 한여름 밤의 망상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으으으! 난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이건가?”

“뭘 또 그렇게 자기 비하를 하십니까. 지난주에 한 주 쉬면서 칼을 날카롭게 벼렸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래. 김 프로의 엄살은 나도 잘 알지. 성인군자 같은 저 얼굴을 하고는 살벌하게 치고 나간다니까. 그나저나 이제 난 은퇴를 고려해야 하나?”

양용은 프로의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보통 골프는 나이가 상관없다고들 한다. 실제로 과거의 기록을 보면 패기보다는 노련한 선수들의 성적이 더 좋았다.

힘을 앞세운 젊은 장타자들의 경기는 시원시원하지만 우승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물어 그 자체로 큰 화제가 됐다.

그러나 최근의 추세는 그렇지가 않다.

겁 없는 20대의 돌풍이 무섭다. 훌륭한 기량은 물론 나이를 무색케 하는 정신력과 경기 운영 능력을 보이며 오히려 투어를 앞에서 리드한다.

필상도 루키라서 그런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은 중견 선수 연배이기 때문에 양 프로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지난해 더 크라운 우승 때의 경기 장면을 봤습니다.”

“아! 그래?”

“농염한 기량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선배님이야말로 엄살 부리지 마십시오. 우리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더 오래오래 좋은 경기 보여 주셔야 합니다.”

“하하하! 농염하다고? 그거 참 야한 표현이로군!”

양 프로는 필상의 말이 기분 좋게 들린 모양이다.

만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지만 빈말이나 흘리는 가벼운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고 본인 스스로도 아직은 은퇴라는 말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때 높은 꿈을 꾸며 모든 것을 취할 수 있으리라 믿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하지만 심한 침체기를 겪으며 많은 것을 내려놓은 순간, 오히려 더 편한 스윙이 가능했다.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며 기다린 결과 급기야 지난해 우승의 기쁨도 맛보지 않았던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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