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76화 (76/354)

076. 구리 반지면 어때요

까앙!

모모코의 힘찬 드라이버 샷이 폭발했다.

10번 홀은 364야드의 파4, 티 그라운드에서 보면 우측은 나무 군락이 우거져 홀이 좌측으로 경사가 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좌측의 숲은 벼랑이다.

때문에 우측 나무를 넘기는 티샷을 해야 하는 것이 심리적인 부담을 준다. 그런데도 모모코는 과감히 휘둘렀다.

쭉쭉 뻗어 나간 공이 숲을 지나 크로스 벙커를 넘기는 순간, 가슴 졸이던 필상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순위를 확인한 뒤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모코의 배포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티샷 비거리는 258야드로 그녀가 좋아하는 110야드 남짓을 남겼다.

“109야드야. 앞에서 7야드, 좌측에서 4야드야.”

“바로 볼게요.”

“당겨지지 않게 충분하게 밀어.”

“네.”

그린 주변의 하나뿐인 커다란 벙커는 그린 입구의 좌측 일부를 막아섰고 그린 경사는 우측으로 심한 내리막이다.

공을 그린 중앙에 올려도 완벽하게 세우지 못하면 옆 라이를 타고 그린 뒤나 우측으로 굴러 내려가고 만다. 때문에 세컨샷에 스핀을 먹일 수 있는 거리까지 보내는 것이 중요했다.

티샷 비거리가 확보되지 않는 선수는 미들아이언으로 공략하다가 심하게 굴러 그린을 놓치는 장면에 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벙커에 빠지거나 그린 뒤의 러프로 들어가는 것이다. 거기서 숏 게임은 여유 공간이 좁아 여지없이 내리막을 타기 때문이다.

쉬익!

모모코의 갭 웨지가 적당한 크기의 뗏장을 떼어 내며 깔끔하게 공간을 갈랐다. 모모코는 물론 필상도 느낌이 왔다.

원하는 만큼 정확히 컨트롤이 되었다는.

우승 경쟁에 뛰어들어서인지 팬들의 환호성은 더 커졌다.

모모코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도 있고 샷 이글을 외치는 자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겐지로 해설도 포함되었다.

-모모코! 모모코! 아휴……!

-진짜 아깝네요. 지난 홀의 벙커샷도 그랬지만 이 웨지 샷도 정말 흠 잡을 데가 없네요.

-대단합니다. 전 그린 중앙을 보고 때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드로우 샷이었습니다. 까닥하다 당겨지면 어쩌려고요!

-하하하. 두려움이 없는 용감한 샷, 모모코의 장점이죠!

필상도 좀 놀라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이 주문한 대로 충분하게 밀어 친 결과였다. 인아웃 스윙 궤도가 자연스럽게 만든 드로우 구질에 공은 생각보다 조금 길었다.

그러나 그린에 박힐 듯 큰 흔적을 남긴 공은 곧바로 백스핀을 먹고 쭉 빨려 왔다. 홀컵과는 방향이 틀렸지만 거리감은 아주 정확했다.

핸디캡 10번으로 오늘 평균 타수 4.18을 기록했고 앞선 선수 50여 명 중에서 한 명밖에 나오지 않은 버디 찬스를 우승 경쟁을 하고 있는 모모코가 만든 것이다.

동반자들이 둘 다 온 그린도 하지 못한 상황이기에 더 눈부신 결과였다.

-잘하면 역전되겠는데요?

-핸디캡 1번인 7번 홀은 어제 오늘 평균 타수가 무려 4.73이 나왔습니다. 거의 쉬운 파5 홀의 기록이라고 봐야 합니다.

-관록의 전 프로도 어쩔 수 없나 보군요.

-모모코는 그 홀을 파로 막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 프로가 6번 홀에서도 보기를 기록했는데 이번 홀마저 파를 놓치면 분위기는 모모코에게 넘어간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대역전승을 기대해도 되나요?

-오늘처럼 코스 세팅이 어려운 날은 뒤따라오는 선수가 더 큰 압박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역전까지 시켜 버렸으니 우승 가능성은 한결 높아졌다고 생각됩니다.

겐지로의 판단은 정확했다.

모모코는 버디를 기록하며 -11로 올라섰지만 전 프로는 3온 2퍼팅으로 보기를 기록해 -10으로 내려앉았다.

게다가 이어진 475야드 파5 홀에서 또다시 모모코가 3온 1퍼팅에 성공하며 달아나자 승부의 추는 기울고 말았다.

필상도 승부처라고 판단했던 14번 홀에서 안전한 공략을 주문했다. 앞선 자의 여유가 아니라 지키는 것이 더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 프로는 8번 홀에서 타수를 줄였지만 9번 홀에서 2m 파 퍼팅을 놓치면서 심한 심리적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그래도 반격의 기회를 노린 그녀는 파5, 11번 홀에서 3번 우드로 2온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이글은커녕 1.5m 버디 퍼팅이 홀컵을 돌아 나오며 추격의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

“이제 이 홀에서 버디만 잡으면 이후에는 편할 것 같아.”

“도그렉만 아니면 그냥 2온을 노려 보는 건데, 아쉽네요.”

“어허! 또 오버하는 건 아니지?”

“그럼요. 흐흐흐…….”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우승 자격이 없는 것이다.

2타 차로 벌어졌지만 아무리 대가 센 선수라도 보통 이런 팽팽한 승부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엉뚱한 샷을 남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모코는 추격할 때보다 훨씬 여유가 넘쳤다. 아주 극히 드문 성격으로 그녀가 될 성싶은 나무라는 것을 증명하는 타고난 자질이었다.

-오늘 언더파를 친 선수가 몇 명이나 되죠?

-5명이군요. -1이 2명, -2가 2명.

-그 와중에 나 홀로 -6, 이만하면 우승 자격이 있는 거죠?

-물론입니다. 하하하! 모모코의 단점이라면 경험이 부족하고 어리다는 것인데, 오늘 플레이를 보면 염려했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캐디 덕분이라고 봐야 하나요?

-음……. 부정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매 홀마다 최적의 공략을 했고 그 결과 또한 나쁘지 않았으며 몇 차례 위기를 극복한 점도 모모코의 혼자만의 힘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 캐디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대두된 대회가 아니었나 싶네요.

JLPGA 챔피언십은 1968년에 시작해 올해로 52회를 맞이하는 일본여자골프투어를 대표하는 전통의 메이저 대회다.

첫 외국인 우승자는 1984년 대만의 황단금이고 1985년에 역시 대만의 아다마가 우승한 이후 1992, 2002년 한국 여자 골프의 전설인 구옥희 프로가 우승컵을 2차례 들어올렸다.

2007년까지 41번을 치르는 동안 중에 외국 선수 우승은 그렇게 단 4번뿐이었다. 그러나 2008년 신현주가 우승하고 2013년 이보미가 우승하면서 판세가 급격히 바뀌었다.

재작년에는 이지희, 작년에는 신지애가 우승하며 JLPGA 챔피언십은 한국 프로들을 위한 대회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다.

하지만 18번 홀에서 버디를 기록하며 -13을 만든 모모코는 무서운 한국 선수들을 모두 따돌리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미야 모모코, 시즌 6승, 메이저 대회 2연승 달성!]

정말 위대한 업적을 만들어 냈다.

벌써부터 한 시즌 최다승 기록 갱신에 대한 말이 나올 정도였지만 후도 유리가 기록한 2003년 10승을 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경쟁이 극심한 최근 투어 상황을 고려하면 6승도 기적 같은 기록이다. 아직 대회가 많이 남았다는 것 때문에 힘들더라도 꾸준히 대회에 출전하라는 압력 같은 조언까지 쏟아졌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은 화젯거리가 일본열도를 뒤덮었는데, 다름 아닌 한 장의 사진이었다.

“빨리 가요!”

“우승 인터뷰를 그렇게 얼렁뚱땅하는 게 어디 있어.”

“어차피 이번 주에 골프매거진 단독 인터뷰가 잡혀 있어요. 예쁘게 차려입고 화보도 찍고 많은 얘기를 할 거라서 상관없어요.”

많은 얘기라는 말에 뜨끔했지만 유난히 서두르는 모모코와 서둘러 저녁을 먹으러 시내로 나왔다.

서둘러 식사하던 모모코가 성호와 미사키도 따돌리고 둘만 갈 데가 있다고 양해를 구했는데, 식당을 나서기 전에 그녀의 매니저 미오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모모코. 큰일 났어!”

“미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그것보다 이것 좀 봐.”

얼마나 다급했는지 필상에게는 그냥 어색한 미소만 보인 그녀는 태블릿 PC를 열고 기사 하나를 화면에 띄웠다.

그런데 화면을 장식한 사진을 보는 순간, 전율이 돋았다. 모모코가 까치발로 선 채 필상에게 입을 맞추는 사진이었다.

그것도 붉은 노을이 드리워진 아름다운 골프 코스에서 마치 광고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작품 사진 같았다.

[모모코의 숨겨진 연인, 그는 누구인가?]

누구긴?

골프 팬이라면 모를 리 없는 퍼펙트 콩, 필상이다.

사진이나 기사 제목이나 악의적인 냄새를 확 풍겼다.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자 다른 사진들도 몇 장 더 나왔는데, 그 하나하나가 다 자극적인 포즈였다.

몸이 닿을 정도로 깊이 팔짱을 낀 모습, 마주 보고 활짝 웃으며 장난치는 모습, 필상이 모모코의 어깨를 주무르는 모습, 연인이라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하지만 기사의 내용과 맞물리면 마치 위험한 불륜을 저지른 남녀처럼 비친다는 것이 문제였다.

ISPS 한다 매치 플레이가 열렸던 하토야마CC에서 산책 중에 뽀뽀했던 장면부터 이번 주 내내 도촬을 당한 것 같았다.

“파파라치인가?”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아요. 회장님이 이 기사를 보고 얼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무슨 대책?”

갑자기 모모코의 음성이 매서워졌다.

필상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모모코는 뜻밖에도 첫 반응부터 단호했다. 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는데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여기 오빠랑 내 관계를 모르는 사람 있어요?”

“알지만 그건 사적인 관계…….”

“미오. 사적이지 않은 연인도 있나요!”

“…….”

미오의 말문이 막히자 모모코는 필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가 다른 생각이 있다면 전 그 뜻대로 따를 게요.”

“네 생각은 어떤데?”

“우리 커플링 하러 갈 거잖아요.”

“응.”

“저는 팬들의 성화보다 오빠가 더 소중해요. 남자 친구가 있다고 응원하지 않을 팬이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하하하. 나가자.”

필상도 더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런 기사가 나온 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남자인 자신보다 훨씬 부담이 클 텐데 전혀 굴복하지 않는 모모코를 보고도 물러선다면 그건 남자가 할 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떳떳하게 행동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우리 조금 늦을지도 몰라. 먼저 들어가.”

“네. 재밌게 놀다 오세요.”

성호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식당을 나선 필상은 왼팔을 내밀었다. 팔짱을 끼라고.

천사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얼굴 가득 피운 모모코는 얼른 필상의 곁에 붙었다. 찰거머리처럼 착!

이젠 당당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남들의 시선 따위는 구애받지 않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고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녀와 둘이 시내를 걸어가는데 역시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몰렸다. 더러 스마트폰을 켜고 사진을 찍는 이들도 있었으나 손까지 흔들어 보이며 커플링을 사러 다녔다.

“마음에 들어?”

“네. 구리 반지면 어때요. 흐흐흐.”

기념이 될 반지를 고르는 일에 여자들은 까다롭다. 당연한 일인데, 모모코는 선택하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가격이나 모양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안에 담긴 의미인 것을 너무도 잘 아는 것 같아 필상도 기분이 좋았다.

“그 기사를 쓴 기자에게 밥이라도 사야겠네.”

“왜요?”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이제 마음껏 만져도 되잖아!”

“뭐라고요?”

“왜? 그러면 안 되나?”

“흥! 어림도 없어요! 약혼반지를 끼기 전에는!”

“윽!”

언제나 모모코는 한발 빨랐다.

연애를 해 본들 스무 살 그녀의 경험이 얼마나 많겠나!

하지만 필상과의 관계는 늘 모모코가 주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싫지 않은 것도 다행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동안 인내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기에 그 어떤 편견이나 관문도 용감하게 돌파할 의지를 다졌다.

그런데 아쉬운 것이 하나 생겼다.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마음을 열면 그녀가 늘 손에 닿을 줄 알았다. 하지만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것이 여자라는 말이 새삼 느껴지게 그날 필상은 그녀의 방에서 쫓겨났다.

진한 키스에 만족하기에는 가슴이 너무 뜨거웠는데.

***

흥분과 영광이 함께했던 도야마 현을 떠나 도쿄로 향했다.

갈 때는 자동차로 천천히 여행을 즐겼지만 볼일이 생긴 둘은 아침 일찍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약속했듯이 둘이 함께 거할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런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엄마?”

‘응. 기사 봤어.’

“무슨 기사요?”

‘모모코랑 약혼이라도 해!’

뜬금없는 강한 어조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사연을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어제 둘의 관계를 폭로한 기사를 한국 언론도 다룬 것이다.

자신도 마음을 굳혔지만 약혼은 너무 빠른 진도였다. 그러나 엄마가 느낄 감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 마세요. 할 거예요.”

‘네게 말은 하지 않았다만 난 네가 네 아빠를 따라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 무엇인지 궁금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입을 떼기 힘드셨을 텐데 꿋꿋하게 얘기하신 엄마는 부친의 전철을 밟을까 염려스러웠던 것 같다.

아버지가 큰누나를 낳은 뒤에야 혼인 신고를 하고 결혼식도 미루다 뒤늦게 올렸다는 말은 필상에게 큰 충격이었다.

과거에는 그런 일이 잦았나 싶으면서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이유가 없다. 필상이 알기로 아버지는 꽤 부유한 집안의 장손이어서 형편이 어려워 혼사를 미룬 것이 아니다.

돌아가신 분의 과거를 좋지 않은 추억으로 남기고 싶지는 않지만 살아 계실 적에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나뿐인 아들 필상은 늘 예외였지만 엄마는 물론 누나들도 부친의 무책임한 생활 방식 때문에 적잖은 아픔을 겪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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