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사랑해요!
-남은 거리가 260야드라서 2온이 좀 어렵지만 3번 우드를 잡으면 올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어렵겠지요?
-2온은 고사하고 좋아하는 거리에 보내는 것도 힘들 것 같습니다. 제발 모모코가 이 억울한 상황 때문에 나쁜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할 텐데, 그게 더 걱정입니다.
-아! 그렇군요.
필상도 빠른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과연 그대로 때릴 경우 뗏장이 아닌 잔디가 미칠 저항은 얼마나 될지 계산할 수가 없어 허리를 굽혀 공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7번 아이언으로 정확하게만 보내자.”
“괜찮을까요?”
“응. 다행히 떨어지지 않고 이어진 부분이 약해. 그냥 쉽게 떨어져 나갈 거야.”
모모코는 신중하게 스윙했다. 포인트는 이전의 샷이 긁어 낸 딱딱한 뒤땅을 때리지 않고 깔끔하게 공만 걷어 내는 것이다.
필상의 판단은 틀리지 않아 비거리는 170야드, 저항을 거의 받지 않은 훌륭한 결과다. 이 정도라면 우드나 유틸리티로 공략해도 괜찮았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기에 더 아쉬웠다.
“요즘은 초등학교 꼬마들도 청소를 안 한다던데!”
“네?”
“아니야. 92야드 샷 이미지부터 그려봐.”
느닷없는 말이 튀어나온 이유는 국회에서 벌어진 예산 심의 과정의 화젯거리를 다룬 기사가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청소용역비 예산을 둘러싼 논쟁에서 편성을 주장한 이들은 요즘 청소를 기피하는 학생들의 현실을 꼬집었다.
예산 삭제를 주장한 측에서는 청소하는 것도 교육의 일환이라고 역설했다는데, 옳은 말이지만 골프장에 와서 디봇을 메우지 않거나 목욕하고 샤워 타월도 정리하지 않는 골퍼들이 과연 제 자식이 청소하는 것을 반길까?
공공의 질서를 무시하는 세태가 만연한다면 신사의 운동이라는 골프도 그에 맞는 규정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디봇이 난 잔디가 회복되는 데 보름이나 걸린대요.”
“그걸 어떻게 알아?”
“흥! 나도 골퍼라고요!”
모모코는 절대 철딱서니 없는 선수가 아니었다. 그런 지식을 습득한 것이 흥미로웠는데, 하기야 프로 선수라면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필수 지식이다.
잔디의 생장 습성과 디봇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디봇의 회복 기간은 보름이다. 회복 속도를 높이기 위해 디봇을 메우는 모래에 소량의 비료를 혼합하기도 한다.
골퍼이기 전에 캐디였던 필상은 관련 지식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캐디들은 때로 코스 관리에 동원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유념할 것이 있다면 디봇에서 떨어져 나온 뗏장을 원위치로 가져다 올려놓고 발로 꾹 밟아 주면 대부분 뿌리가 빠르게 내린다는 사실이다.
회복 기간이 절반 이상 짧아지게 되기 때문에 프로든 아마추어든 매너를 지켜야 모두가 좋은 컨디션에서 골프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비싼 내 돈 내고 치는데 뭐 어때!’
이런 자들은 입장 금지를 시켜야 하건만 ‘손님은 왕’이라는 자들을 숱하게 봐 온 필상은 요원한 일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골프로 먹고사는 프로 선수라면 지켜야만 한다. 에티켓을 중시하는 골프의 규정에 ‘플레이어는 자기가 만든 페어웨이의 디봇과 퍼팅그린의 볼 마크를 반드시 고쳐 놓아야 하며 골프화에 의한 퍼팅그린의 손상은 동반자의 플레이가 모두 끝난 뒤 곧 수리해 놓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에티켓을 중시하지 않는 이기적인 골퍼들이 있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관련된 행위에 대한 벌타 규정이다.
1타에 목숨을 거는 운동이기에 스코어와 연관을 지으면 아마도 디봇이 보이지 않는 골프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좋아!”
좀 길다 싶었지만 홀컵 뒤에 떨어진 공은 백스핀을 먹고 쭉 딸려 왔다. 홀컵과는 다른 방향인 것이 아쉬웠지만 1m 안쪽으로 붙는 웨지 샷에 팬들의 열렬한 응원이 끊이질 않았다.
-오르막 라이였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내리막이 살짝 있었던 홀인데, 모모코의 기술이 그 정도 경사는 감당이 된다는 겁니다. 여자 프로들에게는 좀처럼 보기 힘든 멋진 샷이었습니다.
-버디를 한다면 이제 2타 차로 줄어드는 건가요?
-아닙니다. 전미정 프로가 지금 어려운 라이의 애매한 퍼팅을 남기고 있어 그 결과에 따라 1타 차로 좁혀질 수도 있습니다. 대체 누가 5타 차를 좁힐 수 없다고 한 겁니까?
-어? 켄지로 해설께서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큰 실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굳이 핑계를 대자면 오늘 퍼펙트 콩이 모모코와 환상적인 호흡을 맞출 줄 몰랐다는 겁니다. 하하하.
다들 타수를 지키는 데 급급했다.
하라 에리카가 -10으로 떨어져 버디를 기록한 모모코와 공동 2위가 되었고, 테레사 루와 오지현도 -9로 내려앉아 안선주와 함께 공동 4위에 랭크되었다.
-7에서 시작한 모모코의 동반자들도 순위는 크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모모코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아래로 쳐졌다.
그 와중에도 놀라운 사람이 있었으니 해설위원도 어렵다고 지적했던 롱 퍼팅마저 파 세이브에 성공한 전미정 프로였다.
5번 홀까지 그녀는 줄줄이 파를 기록하며 추격자들을 따돌렸다. 그러나 모모코의 이름이 바로 아래에 보이기 시작하자 동요를 느꼈는지 6번 홀 티샷이 가드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으윽!”
전미정에게 위기가 찾아올 걸 알았다면 더 침착한 샷이 가능했을까?
9번 홀은 지금까지 평균 타수 4.17을 기록한 핸디캡 8번이라서 그다지 긴장할 필요도, 과도하게 때릴 이유도 없다.
그러나 지난 홀의 버디 값이라도 하려는지 모모코의 티샷은 터무니없이 우측으로 밀렸다. 페이드를 의도했다면 모를까 아예 처음부터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 공이 깎여 맞았다.
395야드를 1온할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무모한 샷을 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긋나긋하던 필상의 입에서 오늘 처음으로 딱딱한 어투가 튀어나왔다.
“뭐지?”
“홀의 폭이 넓어서 마음껏 때려 봤어요.”
“러프도 네게는 홀인 건가? 들어가도 상관없는?”
“라이가 좋을지도 모르잖아요.”
“어이가 없네. 일단 가서 보자고.”
필상도 행운을 바랐다.
러프에 들어가도 무난한 세컨샷이 가능할 수도 있으니까.
지나친 긴장이 전혀 엉뚱한 생각으로 발현되는 것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용기를 주고 격려하는 것도 좋지만 불필요한 위험을 자초하는 생각마저 용납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공의 위치가 괜찮기를 바라며 묵묵히 이동했지만 결과는 다시 최악이었다. 공이 러프에 깊이 잠겨 경기위원이 위치를 가르쳐 줬는데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안전하게 가자.”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요?”
“136야드.”
“9번으로 때리면 가지 않을까요?”
“가겠지. 하지만 입구만 괜찮고 나머지 삼 면은 벙커야.”
“탄도를 높여 그린에 세울게요.”
“……오케이.”
기꺼운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본인이 하겠다는데 그걸 말리는 것도 적절치는 않았다. 이미 무리수를 뒀지만 필상의 굳은 표정을 보고도 흥분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모코의 입장을 고려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 결과로 드러났다.
-어……. 그냥 굴러서 넘어가 버리네요!
-거리는 적당했지만 스핀이 전혀 걸리지 않았습니다. 러프에서는 그 점을 고려해야 하는데, 왜 퍼펙트 콩이 말리지를 않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미스 샷도 캐디의 책임이라는 말인가요?
-평범한 캐디라면 그렇지 않지만 현재 모모코의 캐디는 나이키가 인정한 스타플레이어가 아닙니까! 적어도 9번 아이언을 잡는 걸 말렸어야 한다고 봅니다.
-특수 관계인 것이 오히려 이럴 때는 문제가 되는군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언급하는 적절치 않고 이미 나온 결과도 잊어야 합니다. 그린 뒤의 벙커는 턱이 높아 핀이 보이지도 않을 텐데, 걱정입니다!
솔직히 필상도 화가 났다.
하지만 클럽을 받아 골프백에 챙긴 필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모모코의 손목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정성껏 주물러 주면서 그린을 향해 천천히 이동했다.
별말은 없었으나 팬들의 따가운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는 필상의 행동을 슬쩍슬쩍 곁눈질하던 모모코의 얼굴에 포근한 미소가 얹혔다.
본인도 모르지 않는다.
자신이 크게 오버했음을, 그것도 팽팽한 승부처에서.
한바탕 혼이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꾸짖기는커녕 따스하게 자신을 감싸주는 필상을 보며 미안했다. 진심으로.
“벙커 턱이 너무 높아. 일단 핀에 붙일 생각은 하지 말고 탈출을 목표로 하자.”
“네. 욕심 버릴게요.”
“하하. 욕심 없이 어떻게 프로라고 하겠어. 자신 있다면 욕심을 내도 괜찮아!”
샌드웨지를 건네받은 모모코는 벙커에 들어가기 전에 몇 번의 빈 스윙을 했다. 이미지가 맺혔나 싶은 순간, 갑자기 훅 필상에게 다가와 귓가에 뭔가 속삭였다.
느닷없이 뺨에 뽀뽀라도 하려는 줄 알았던 갤러리들의 비명 소리가 필상을 기겁하게 만들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녀가 건넨 속삭임은 그 어떤 비난도 감내할 수 있을 만큼 달콤했기 때문이다.
-부럽네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좀 전에 못 보셨습니까? 모모코가 퍼펙트 콩에게…….
-하하하. 경기 중인 선수가 그럴 리가 있나요? 아마도 벙커 샷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걸 겁니다.
-그렇겠죠?
-저도 부럽기는 합니다. 골프 실력이 탁월한 선수가 저렇게 출중한 외모까지 갖췄으니……. 모르긴 몰라도 퍼펙트 콩을 향한 여성 팬들의 극성은 곧 한류 스타를 넘어설 것 같습니다.
-몇몇 커뮤니티에는 이미 불이 붙었죠. 각종 기사를 스크랩하고 잘 나온 사진을 서로 공유하는 일이 빈번하더라고요.
-어? 드디어 모모코가 벙커샷을 합니다.
더없이 신중했다.
두 발을 모래에 깊이 파묻어 스탠스를 굳건히 잡은 모모코는 벙커샷이란 무엇인지 표본을 구현하는 것 같았다.
얼리 코킹에 두려움 없는 과감한 다운 블로우, 클럽 페이스가 다시 자신을 바라보는 V자 스윙은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와아아!”
“인 더 홀!”
-드, 들어가나요?
-정말, 정말 아깝습니다. 저게 왜 안 들어가죠?
-그러게요! 저런 환상적인 샷을 날렸으면 들어가 줘야죠!
-하여튼 기가 막힌 리커버리입니다. 모모코가 어렵게 1타 차까지 추격한 순간, 우승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했는데, 허망하게 타수를 잃는 줄 알고 마음을 졸였습니다. 하하하.
지나친 편파 방송이지만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모모코의 국적이나 인기도 작용하지만 드라마틱한 승부는 누구든 열광시키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모르고 있지만 중계진은 조금 전부터 전미정 프로와 모모코의 일대일 구도로 방송의 묘를 살리던 중이었다.
관록과 패기의 대결, 거기에 국적까지 영향을 미쳤으니 만약 모모코가 5타를 뒤집고 우승한다면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벙커에서 나오는 모모코의 손을 잡아 줬다. 얼마나 예쁘고 깜찍한지 으스러지게 안아 주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나이스 벙커샷!”
“다 오빠 덕분이에요.”
“왜 내 덕이야? 네가 마음을 비우고 기본에 충실한 샷을 했기 때문이지.”
너무 상투적인 대답이었나?
또다시 곁에 바짝 다가온 모모코는 필상의 귓가에 대고 아까와 똑같은 말을 다시 속삭였다.
‘사랑해요! 오빠!’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지만 필상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그녀의 숨결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뜻하지 않은 장소와 시점에서 그런 고백을 들으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도 표현해야 할 것 같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11 전미정/ -10 모모코/ -8 하라 에리카/ 오지현…….]
샌드 세이브에 성공한 모모코와 인코스로 접어드는 순간, 저 멀리 걸린 리더 보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모모코에게 남은 홀은 9홀, 전 프로는 3개나 많은 12홀을 남기고 있어 타수 차이는 없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했다. 타수를 줄이기는커녕 잃을 가능성이 높은 세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지금 모모코가 자신의 순위를 확인하게 된 것은 반갑지 않았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경기에 집중하기 좋기 때문이다.
슬쩍 모모코를 바라봤는데 눈이 딱 마주쳤다. 긴장하지 않았는지 염려됐지만 그녀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필상의 예상을 너무 자주 벗어나는 존재였다.
“오빠! 나 우승하면 뭐 해 줄 거예요?”
“음……. 지난번에 못 해 준 거.”
“흐흐흐……. 좋아요.”
필상이 우승하면 커플링을 맞추기로 했었다.
물론 불의의 사고로 기권하는 바람에 까맣게 잊었지만 눈빛을 반짝인 모모코가 우승 선물을 말하는 순간, 떠올랐다.
무얼 원하는지.
꼬집어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금방 음흉한 웃음소리를 내는 걸 보면 기억하지 못하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인코스는 2개의 파5 홀이 쉽다. 하지만 그건 전 프로에게도 똑같은 조건이기 때문에 필상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승부처는 3곳이 있어.”
“어디요?”
“10, 14, 17번 홀.”
“파5 버디는 당연한 건가요?”
“그렇지는 않겠지. 하지만 파5는 서로 같을 것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기 때문에 내가 말한 3개 홀을 어떻게 공략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거야.”
“그럼 길게 생각할 게 뭐 있어요. 그냥 주문하세요!”
나머지 4개 홀은 아예 파를 목표로 공략해야 할 홀이라서 필상이 언급한 승부처의 성적이 우승을 가늠할 확률이 높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모모코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목적의식을 부여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커플링에 대한 의지는 산도 뒤엎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