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74화 (74/354)

074. 한 박자 빠른 승부

“어떻게 됐어요?”

필상이 중요한 계약을 맺고 온 것을 아는 모모코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중요한 라운드를 앞두고 지나친 흥분은 자제하는 게 좋지만 감출 내용은 아니었다.

어차피 내일 아침 관련 소식이 언론을 탈 가능성이 높다.

“잘됐어.”

“그건 정해진 거고요. 나이키가 대체 얼마나 쏜 거죠?”

“올해는 일단 1억 엔을 보장받았어.”

“우와! 1억 엔이요?”

금액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올 시즌은 이미 저물고 있기 때문이다. 첫 우승을 거두고 2달 반가량을 허무하게 소모한 것이 아쉬웠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 대표가 적절히 값을 올려놓은 게 주효했던 것 같아.”

“나도 갈아 탈 때가 됐나 봐요!”

“당연히 올 시즌 성적을 기준으로 재계약을 해야지. 하지만 J&L은 아직 아니지.”

“왜요?”

“일본 여자 투어에서 차지하고 있는 네 비중을 고려해 봐. 후원사를 바꾸는 것은 상관없지만 매니지먼트는 일본 회사가 더 나을 거야. 미국 진출이라도 할 때라면 모를까!”

“알았어요. 그건 당장의 문제는 아니고 오빠 내년에는 대체 얼마를 받는 거죠? 2억 엔?”

필상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상세한 옵션은 공개하지 않기로 협의했고 외부적으로 발표될 금액은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키나 필상이나 거대 계약을 맺은 것만으로도 광고 효과를 거둘 것이고 다른 부수적 효과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나이키는 전 세계 수많은 선수들을 후원하지만 필상의 경우는 유망주 지원이나 나라별 배분과는 구분되는 초대형 계약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이런 수준의 계약을 맺었던 선수는 한국에서는 최경주, 양용은 정도이고, 일본에서도 손에 꼽는다. 이시카와 료나 마쓰야마 히데키 정도라고 보는 것이 합당했다.

“지난해 JGTO 상금왕 자격으로 마스터스에 초청되었던 이마히라 슈고보다 더 많이 받는 거네요!”

“그런가? 그건 그렇고 연습해야지!”

“치! 알았다고요! 제가 선물 사 달라는 것도 아닌데 너무해!”

“5타 차 따라잡아야 하잖아.”

“우승할 수 있을까요?”

“왜 못 해?”

모모코를 지지하는 전문가들도 어렵다고 봤던 우승 얘기를 꺼내자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필상의 말은 큰 용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모모코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른쪽 손목이 부어올라 완벽한 스윙이 어려웠다.

“이리 와 봐.”

“왜요?”

“얼마나 부었는지 좀 보자.”

그저 부상 정도를 체크하는 행동이건만 모모코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엉큼하기는!

연습장에 적지 않은 선수와 캐디들이 모여 있고 모모코와 필상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두는 탓에 이해는 됐다.

그러나 잠시 어루만지던 필상은 아예 모모코와 나란히 자리에 앉더니 손목 마사지를 시작했다.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전에도 마사지 효과를 본 적이 있고 주무르자 모모코가 편안해한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느껴져요.”

“뭐가?”

“오빠의 사랑이.”

“하하. 사랑은 둘째 치고 네 손목 인대나 나으면 좋겠다.”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사랑은 뭐든 이겨 낼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기껏 좋은 기운이 둘을 감싼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굳이 그걸 깨뜨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녀가 치유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10여 분 마사지를 하자 정말로 붓기가 가라앉았다. 신기해하며 연습을 시작했고 무리하자 다시 부어올랐지만 그래도 상태가 악화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날 밤 잠들기 전에 필상은 모모코의 방을 찾았다. 곁을 지키며 마사지를 해 주기 위해서.

“조금만 해 줘도 되요.”

“아니야. 잠들 때까지 해 줄 거니까 편하게 자.”

“그럼 저 안 잘 거예요. 지금 저 너무 행복하거든요.”

운동을 시작하며 마사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필상의 솜씨는 제법 괜찮았는지 20여 분이 흐르자 모모코는 말과는 달리 고른 숨소리를 내며 곯아떨어졌다.

대회가 시작되면 대부분의 출전 선수들은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 육체적으로 무척 고단하지만 경기에 대한 압박감이 지나쳐 불면을 겪는 선수도 있다.

모모코도 이번 주 내내 힘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커다란 기대와 응원이 그녀에게는 다 짐이기 때문이다.

“예쁜 다리가 이렇게 퉁퉁 부었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손목의 붓기가 가라앉자 필상은 모모코의 가장 피곤할 발과 다리를 주무르려고 잠옷을 조금 걷어 올렸다.

그런데 낮에 보던 것과는 달리 퉁퉁 부어 있었다.

아침에 피곤이 풀리면 좀 나아지겠지만 하루 종일 걸으며 경기를 펼쳤고 또다시 내내 서서 연습했으니 그럴 수밖에.

다 자신의 책임인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언제나 용감무쌍, 천진난만해 보이지만 고고한 백조가 물아래의 발은 열심히 젓듯이 그녀의 발과 다리는 화려함의 뒤에 숨어 고생한 흔적이 너무나 생생했다.

“으! 깜짝이야!”

발을 주무르자 잠이 들었던 모모코가 몸을 뒤척였다.

필상이 놀란 것은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여자 운동 선수들처럼 프로 골퍼들도 가장 보여주기 싫은 신체 부위가 발이다.

훈련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지만 꾸밀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못생기게 변한 발이야말로 프로 선수의 훈장과 같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필상은 굳은살이 박힌 모모코의 발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정성껏 주무르다 말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춘 것은 그녀에 대한 진심이었다.

***

-굿 샷!

-모모코가 오늘 최고의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퍼펙트 콩이 캐디로 나선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아! 그렇게 봐야 하나요?

-제 생각에 오늘은 어제보다도 코스 세팅이 더 어렵습니다. 본선에 진출한 63명 중에 모모코 말고 언더파를 기록한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오늘 아침 대단한 소식이 전해지기는 했죠. 퍼펙트 콩이 그 정도의 평가를 받는 선수라는 것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계약 규모는 정말 믿기지 않더군요.

나이키의 발표는 일본 골프팬들을 패닉에 빠뜨렸다.

2년 반 동안 옵션 포함 최대 30억 엔이라는 거액은 눈을 의심케 했다. 상세한 자료를 제공하지 않아 허울만 좋은 엉터리 계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이키가 그렇게 허술한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필상에 대해 다른 시각도 조명되었다.

또한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희박하지만 필상이 최고 옵션을 달성하면 연간 10억 엔을 받고 각종 보너스까지 합하면 그 이상도 가능하다는 것이 필상의 판단이었다.

남들은 비웃을지 모르지만 그런 발표에 동의한 것은 그 금액을 자신의 개인적인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퍼펙트 콩이 지금까지 보여 줬던 기량을 유지한다면 그는 물론 나이키도 대박을 터트릴 수 있다고 봅니다.

-하하하. 2달에 4승 페이스는 말이 안 되죠. 또한 그런 무서운 기록을 낸 선수는 여럿 있었지만 그중에 이렇다 할 성적을 낸 선수가 있었던가요?

-왜 없습니까! 타이거 우즈.

-지금 퍼펙트 콩을 감히 골프 황제와 비교하시는 건가요? 그건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 싶은데요.

-저도 그 정도까지 잘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보여 준 성과와 기량은 많은 기대를 낳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보수적인 일본 언론들이 애써 외면하지만 그래서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식 대회 중계에서 이런 표현이 나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엄청난 기록을 작성했지만 애써 의미를 축소하던 차에 나이키와의 초대형 계약은 많은 시사점을 제시한 것이다.

기업의 후원은 거액이 오가기 때문에 아주 냉철하고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부터 객관적인 의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모난 정이 돌을 맞는 상황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던 일부 전문가들의 의견이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우측으로 2컵은 봐야 할 거야.”

“오르막인데도 2컵이나 봐야 하나요?”

“응. 엄밀하게 말하면 오르막 뒤에 옆 라이야. 홀컵 앞에서 심하게 돌 거니까 힘 조절에 유념하고.”

“알았어요.”

파5인 2번 홀과 파4인 5번 홀에서 버디를 잡았다.

1번 홀에서 샌드 세이브에 성공했고 파3인 4번 홀에서 공이 질긴 러프에 푹 잠기는 위기를 맞았지만 환상적인 칩샷에 이은 파 퍼팅을 성공한 것이 언더를 유지하는 동력이 되었다.

숏 홀인 6번 홀도 호수를 넘어 가드 벙커가 도사리는 그린 앞쪽에 핀을 바짝 붙인 세팅이라서 대부분의 선수들은 안전하게 그린 중앙을 공략했다.

하지만 그 공략의 결과는 내리막 퍼팅을 남기기 때문에 실제로 3퍼팅을 한 선수들이 부지기수였다. 위험했지만 필상은 핀을 바로 공략하라고 주문했고 모모코는 공을 에이프런에 떨어뜨리는 묘기를 연출시켰다.

“으으으!”

3.5m 버디 퍼팅이 들어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급격하게 좌측으로 돌던 공은 홀컵 왼쪽을 스치며 떨어지지 않았다. 필상의 주문이 정확했지만 모모코는 너무 과하게 우측을 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필상의 말을 들으려고 했지만 어드레스를 한 모모코는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아 스트로크 순간에 퍼터 페이스를 살짝 닫았는데, 그 미세한 차이가 1타를 날려 버렸다.

파 퍼팅을 마무리한 모모코가 필상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린을 내려왔다. 자신의 실수를 필상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오히려 미안하다며 격려했다.

“조금 더 봤어야 하는데, 내가 실수했네.”

“미안해요…….”

“왜 이래.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다고. 손목은 괜찮아?”

“네.”

“어디 봐.”

동반자들이 퍼팅할 때도, 7번 홀로 이동해서도 필상은 모모코의 손목을 주물러 줬다. 모모코의 실수를 모르지 않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모든 부정적인 생각은 버리고 앞으로 나가기에도 벅찬데 어느 세월에 반성까지 한단 말인가!

필상의 손길을 느낀 모모코가 다시 차분하게 진정하고 의욕을 불태우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었다.

필상과 시선이 마주친 성호에게서 사인이 왔다.

‘공동 5위?’

‘3타 차면 아직도 선두가 타수를 잃지 않았다는 건데!’

사전에 약속한 사인에 의하면 -9로 올라선 모모코의 순위는 공동 5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지만 섣불리 모모코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아직은 갈 길이 멀기 때문인데, 뒤에서 출발한 팀은 4개 조 12명이고 그들의 성적이 중요해 매홀 체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3번 홀을 마친 공동 선두 중에 한 명은 아직도 -12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인이 왔다. 필상은 전미정 프로라고 판단했고 그건 사실이었다.

오늘도 확인한 그녀의 스윙은 관록이라는 쉴드까지 동원되어 아무리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치열한 선두권의 선수를 8명이나 제키고 우승 경쟁에 뛰어든 것은 고무적이었다.

“535야드 파5, 네 생각은 어때?”

“안전하게 가죠.”

“그렇다면 힘차게 한 번 가 보자.”

“그래도 돼요?”

“세게 가자고 했으면 말렸을 거야. 하지만 안전하게 가겠다는 마음가짐이라면 실수할 것 같지는 않아서.”

“좋아요!”

401야드 파4, 살벌한 세팅의 7번 홀을 파로 넘긴 필상은 기회의 홀에 도착했다. 기록은 핸디캡 5번이라고 경고하지만 필상의 생각은 달랐다.

완만한 오르막에 좌측 OB만 조심한다면 우측으로는 여유가 많고 경사도 유리해 마음껏 때려 볼 수 있는 홀이다.

러프에 빠지면 3온 1퍼팅 작전으로 수정하고 페어웨이를 잘 지키고 거리가 나온다면 2온을 노려 볼 생각이다.

‘후반에 승부를 거는 것은 너무 위험해!’

우승 경쟁에 뛰어들었다는 것이 확인되면 아무리 배짱 좋은 모모코라도 도전적인 샷을 구사하는 것은 어렵다.

의지와 상관없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몸이 컨트롤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필상은 그녀가 의식하지 않은 타이밍에 승부를 한 박자 빨리 걸려고 결정한 것이다.

사전에 조율한 대로 우측의 크로스 벙커를 에이밍한 모모코의 드라이버 티샷은 강력했을 뿐더러 드로우가 제대로 걸렸다.

충분한 비거리는 이미 보장된 것이나 다름이 없을 만큼 쭉쭉 뻗어 나간 공은 멋지게 휘어 페어웨이 정중앙에 떨어졌다.

필상의 눈대중으로는 무려 270야드는 나온 것 같아 티 박스를 내려온 모모코와 격한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이런! 대체 어떤 인간이야?”

세컨샷 지점에 도착한 필상의 입에서 불만이 가득 찬 고함소리가 튀어나왔다. 마침 중계 카메라도 모모코의 티샷한 공이 놓인 지점을 비추고 있었다.

잘 구르던 공이 우뚝 멈춰선 자리는 디봇이었다. 그것도 찢겨 일어선 잔디를 누르지 않고 그냥 가 버려 그 속으로 파고든 공을 과연 정확히 임팩트 할 수 있을지 장담키 어려웠다.

-어? 저게 뭐죠?

-디봇을 수리하지 않고 그냥 간 선수가 있는 모양입니다. 이건 정말 기본이 안 된 행동인데,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겁니까!

해설위원 켄지로도 필상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열렬한 모모코의 팬임을 자처한 그는 올해 새로 바뀐 골프 규정에도 디봇의 구제가 빠진 것에 대해 한참 규탄했다.

디봇을 수리지로 간주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지만 규칙을 입안한 자들은 라운드를 하다 보면 행운과 불운을 모두 만나게 되기에 그건 골프의 신들이 결정할 일이라고 피력했다.

하지만 그건 책임을 회피한 비겁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디봇은 자연이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니라 엄연히 인간의 잘못된 매너가 빚어낸 산물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매너를 지킨다면 공평하지만 세상사는 그렇지가 않다. 민폐를 끼치는 자들은 항상 남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번 디봇을 정성껏 수리했던 선수가 이런 일을 당하면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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