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73화 (73/354)

073. 메인 스폰서

“굿 샷!”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모모코가 좋은 스윙을 할 때마다 필상의 응원 소리는 갤러리들의 함성을 뚫고 튀어나올 만큼 우렁찼다. 그럴 때마다 활짝 웃는 모모코의 얼굴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2라운드는 성적 또한 나쁘지 않았다.

보기 없이 안정적인 플레이로 버디 5개를 잡은 모모코는 예선 성적 -9를 기록하며 드디어 톱10에 진입했다.

공동 선두는 -12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한 하라 에리카와 오지현이었고 이날 -8로 데일리 베스트를 작성한 전미정 프로가 공동 2위로 올라선 것이 가장 눈에 띄었다.

“내일부터가 문제네!”

“전 자신 있어요.”

“네 샷이 문제가 아니라 주최 측에서 제동을 걸 것 같아. 컷이 이븐파까지 올라온 것이 신경 쓰이나 봐.”

“그럼 더 좋죠.”

역대 이 대회 예선 통과 성적 중에 가장 높은 기록이 나온 게 왜 문제가 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출전 선수들이 멋진 샷으로 버디나 이글을 잡아 팬들을 열광시키는 것이 뭐 그리 속 아플 일이라고, 아예 대놓고 코스 세팅을 어렵게 하겠노라 선언까지 한단 말인가!

때문에 무빙데이가 더 중요해졌다.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코스가 어려울수록 유리한 사람은 베테랑이야.”

“오빠가 전략을 잘 짜 주면 되잖아요?”

“물론 그래야지.”

아침 일찍 3라운드 코스 정보를 취득한 필상은 곧바로 전략적인 공략을 위한 답안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직접 잔디를 밟으며 확인하는 과정이 생략된 전략은 생각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미사키가 최선을 다했지만 필상이 봐도 안타까운 장면이 수차례 연출되는 것을 보며 지난 밤 미사키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행여 모모코의 사기를 꺾을까 염려해 은밀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상당히 힘들어했다. 필상과 비교하면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고 설득했다.

“어? 미사키가 왜 저러죠?”

“아까 갤러리들을 피하다가 다리를 접질린 것 같아.”

“아! 그럼 어떡하죠?”

“일단 상태부터 확인해 보자.”

경기를 마치고 들어오는 미사키가 다리를 절뚝거렸다. 그녀의 심리를 이해하는 필상은 곧이곧대로 믿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제 그녀의 왼쪽 발목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런 상태로 경기를 마친 것이 오히려 미안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미사키는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보다 못한 모모코가 거들고 나선 모습은 필상의 마음도 움직였다.

“미안하기는 언니가 왜 미안해. 오늘 얼마나 고마웠는데!”

“그나저나 어쩌죠?”

“걱정 마. 스페어가 있잖아.”

“누구요?”

스페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뜬 두 여자가 필상의 얼굴을 쳐다봤다. 행여 성호를 염두에 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일본어가 서툰 성호를 모모코의 캐디로 쓸 수는 없다. 캐디는 때때로 다양한 역할도 수행하기 때문에 언어 소통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자신의 캐디라면 모를까, 모모코와 의사소통이 어려운 성호를 갑자기 캐디로 쓸 수는 없다.

“내가 할게.”

“고맙습니다.”

은근한 미소를 짓는 모모코와는 달리, 미사키는 큰 짐을 던 듯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최종일 대회에 나서지만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모모코와 미사키도 적극 공감하는 것을 보면 뜻밖에도 둘은 이미 이와 관련된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지만 둘이 호흡을 맞추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봐야 했다.

문제는 3라운드에서 2오버파를 기록한 모모코의 순위가 공동 9위에서 다시 톱 10밖으로 밀려났다는 것 말고도 선두와 5타로 우승 가능성이 희박해졌다는 것이다.

-12 전미정/ 하라 에리카

-10 테레사 루/ 오지현/ 안선주

-9 스즈키 아이/ 김하늘/ 이지희

-8 히가 마미코/ 나리타 미스즈/ 키쿠치 에리카/ 이보미

-7 미야 모모코 외 5명

공동 13위, 순위보다 더 부담스러운 것은 타수 차였다.

만약 3라운드처럼 어렵게 코스 세팅을 한다면 격차를 줄이는 것은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3라운드를 마친 뒤, 상위권을 점령한 한국 선수들에 대한 부담을 표현한 전문가들이 꽤나 많았다. 모모코에 대한 신뢰가 지나쳤다는 섣부른 의견을 낸 자들도 있었다.

실제 초청 선수 중에는 오지현 한 명만 톱 10에 들었지만 더 무서운 관록의 한국 프로들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한창 바쁜 사람의 시간을 빼앗아 미안해요.”

“아닙니다. 이곳까지 직접 와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이 대표가 대회가 열리는 골프장에 도착했다.

그녀의 말처럼 아주 중요한 날이지만 이미 약속된 만남이었다. 이 대표와 인사를 나눈 필상은 그녀와 함께 온 나이키 본사 홍보 담당자, 그리고 일본지사장과 인사를 나눴다.

“먼 길을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꼭 보고 싶었던 대회여서 내일은 모모코 양의 경기를 관전할 생각입니다. 기왕이면 같이 보시죠?”

“아! 모모코의 캐디가 부상을 입어 내일은 제가 하루 백을 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웠는데 더 흥미진진하겠군요.”

본사에서 나온 외국인은 인사를 나눈 뒤 조용히 지켜봤지만, 일본지사장인 곤도 준페이가 주로 대화를 주도했다.

그런데 필상은 물론 모모코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듯, 필상이 내일 캐디로 나선다고 하자 아주 반색을 했다.

그는 모모코의 월등한 성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잘 알고 있다며 보통의 일본 골프 전문가들과는 다른 말을 했다.

그러나 긴 대화를 나눌 겨를은 없었다. 이곳에 모인 이유는 필상의 메인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필상 씨. 긴 얘기보다 계약서를 직접 읽어 보는 게 어때요?”

“그게 좋겠습니다.”

이보영 대표가 어련히 알아서 잘했을까.

그래도 차분하게 읽어 내려가던 필상은 숫자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연간 2억 엔, 깜짝 놀랄 금액이었다.

나이키 골프 용품을 사용하는 대가이다. 메인 스폰서임을 상징하는 모자 정면 로고를 붙이는 것을 포함한 금액이고.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20억 원인데, 필상이 기대했던 금액을 훨씬 넘어서는 거금인 것은 분명했다.

우즈나 맥길로이처럼 세계 정상급 선수인 경우 2000만 달러를 넘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아직 PGA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자신에게 이런 거금을 안겨 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차분하게 계약서를 다 읽었다.

“혹시 이상한 부분이 있나요?”

“계약 기간을 명시하지 않았네요? 아마도 이 금액은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가요?”

“네. 나이키 측에서는 올해를 빼고 2년 계약을 원해요.”

“2년이요?”

의외였다.

더 길게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것도 나이키 입장에서는 모험인 것이다. 현재 한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서의 지명도는 꽤나 높지만 그래도 아직 검증된 선수는 아니다.

지금 한창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일시적인 그 효과를 노릴 테고 잠재력이 폭발하기를 바랄 뿐, 장기적으로 투자하기에는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음……. 그렇다면 조건부로 바꾸죠.”

“생각해 둔 게 있습니까?”

예상치 못한 언급이었는지 잠시 고심하는 이 대표와는 달리 곤도 지사장이 나섰다.

하지만 필상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졌다.

“제게 기대하는 성적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음……. 2억 엔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 해 5승은 거둬야지요.”

“5승이라? 그것도 좀 애매하군요.”

“애매하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지요?”

“평범한 대회와 메이저 대회가 다르고, 또한 PGA 대회는 더 다르잖습니까!”

“그야 그렇죠.”

필상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들 연상되지 않는지 잠시 침묵이 흘렀고 모두들 필상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합리적인 대안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마 5승의 기준은 한국과 일본, 아시안 투어의 평범한 대회일 겁니다. 그걸 1점으로 잡는다면 메이저 대회는 2점, PGA 대회도 2점, PGA메이저 대회는 4승으로 잡고 다시 조건을 따져 보죠.”

“하하하. 일단 올해는 계약금 포함 1억 엔으로 시작하고 올해 결과로 내년을, 내년 결과로 후년을 명시하면 될까요?”

“그렇습니다. 서로 남는 장사가 되는 게 바람직하니까요.”

“듣던 중 반가운 말씀입니다. 하하하.”

쉽지 않은 말이지만 곤도는 금방 알아들었다.

그야말로 철저한 조건부 계약이기 때문인데, 그 역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올해 더 이상 우승을 추가하지 못하면 내년에 5천만 엔만 받겠습니다.”

이미 2억 엔을 보장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4분의 1로 팍 깎아 내리자 이 대표의 표정이 굳어졌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일단 2억 엔으로 시작하고 일정 점수 이상을 올리면 보너스를 받는 것이 훨씬 낫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곤도는 왜 필상이 스스로 최소 금액을 낮췄는지 금방 알아챈 것 같았다. 씩 웃으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우승만 점수로 잡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요. 우승이 1점이라면 톱 5에 들면 0.5점, 톱 10에 들면 0.2점으로 합시다.”

“그러시죠.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1점, 2점, 3점……. 각각에 대한 금액을 결정하는 것만 남았군요.”

“음……. 이제야 협상다운 협상을 시작하게 됐군요. 하하하.”

곤도는 백지를 하나 꺼내 거기에 점수를 적기 시작했다.

0점 - 1점 미만: 50,000,000엔

1점 - 2점 미만: 100,000,000엔

2점 - 3점 미만: 200,000,000엔

일단 거기까지 적었다.

괘씸하지만 2승 이상은 무리라고 본 것이다. 어쩌면 귀여운 도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그 종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긴 필상은 세 번째 줄에 긴 줄을 2개 그어 삭제하고 다시 썼다.

2점 - 3점 미만: 150,000,000엔

그 행동에 다들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필상은 2점을 기준으로 잡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1승에 톱 5에 2번만 들어도 되니까. 물론 손해를 자초할 의사는 전혀 없다. 스스로 낮춘 대신 더 큰 것을 원했다.

그 의도를 고스란히 드러낸 다음 줄을 써내려 가자 사람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3점 - 4점 미만: 300,000,000엔

4점 - 5점 미만: 400,000,000엔

5점 - 6점 미만: 500,000,000엔

6점 - 7점 미만; 600,000,000엔

7점 이상: 1,000,000,000엔

“JGTO의 올 시즌 남은 대회가 13개입니다. 저는 2주에 한 번 꼴로 출전할 계획이라서 아무리 많이 참가해도 7개 이상은 힘들겠죠.”

“하하하! 이미 올 시즌 4승을 거뒀는데 개인적인 목표가 궁금해지는군요.”

“6승입니다.”

“그러면 최소한 3점 이상은 가능하다고 보는 거군요?”

“그 이상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이상의 성적을 낸다면 이 금액이 아깝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갑자기 담배가 그립군요. 잠시 덱스와 바람 좀 쐬고 와도 될까요?”

“기꺼이!”

아랫줄로 내려갈수록 커진 금액에 대한 부담감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을 앞에 두고 논의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기에 잠시 따로 시간을 가지려는 행동이었다.

두 남자가 밖으로 나가자 이 대표도 곧바로 닦달했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하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정도도 못할 것 같으면 이 자리에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건 그렇죠.”

“미끼를 물 겁니다. 지난 대회에서 기권한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더도 말고 2승만 더 하면 좋겠네요.”

이 대표도 3점 구간에 들어 3억 엔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게 현실적인 판단일지 필상은 가장 밑줄을 보고 있었다.

10억 엔. 무려 100억 원이다.

힘들겠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JGTO 메이저 대회 중에 아직 3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거 하나만 우승해도 3점 구간에 들어가는 것은 무난하고 남은 대회들도 참가에 의의를 둔다는 ‘올림픽 정신’으로 만족할 뜻은 전혀 없었다.

이들이 필상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는 충분했다. 만약 필상이 메이저 대회를 포함해 2승만 추가해도 누가 뭐래도 최고의 상품성을 지닌 선수로 거듭날 것이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이 계약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겠습니다.”

“저 또한 퍼펙트 콩이 일본 최고의 후원을 받는 선수가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일단 주 계약은 성사되었고 세세한 논의를 이어갔다.

확정된 지원금에 비하면 소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성적에 따른 보너스다. JGTO는 우승 상금이 통상 2천만 엔에서 3천만 엔이기 때문에 성적에 따른 인센티브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라서 통상적인 예를 따르기로 했다.

우승 시에는 우승 금액과 동일한 금액을 받고, 톱 10에 들거나 컷을 통과했을 때에도 받은 상금에 비례해 후원사가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계약서에 사인한 뒤, 서로 밝은 얼굴로 헤어졌다. 필상의 건승을 기원한다는 곤도의 말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필상 씨. 전에 무역 회사 다녔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일 정말 잘했을 것 같아요.”

“하하하. 잘했지요. 하지만 실직했습니다. 권고사직.”

“대체 어떤 바보 같은 회사였는지 궁금하네요.”

“고마울 따름이죠. 자르지 않았다면 저는 아직도 갑질에 지친 매우 소모적인 삶을 살았을 테니까요.”

“그도 그러네요. 호호호.”

말은 편하게 했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생각만 해도 우울증이 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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