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72화 (72/354)

072. Don’t worry

“어때요?”

“몇 번만 더 보여 주시겠습니까?”

전 프로는 군소리 없이 5번의 스윙을 더 했다.

그러고는 다시 필상의 얼굴을 쳐다봤는데, 잠시 뜸을 들인 필상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배우고 싶습니다.”

“말썽이라니까요?”

“이미 교정이 되신 것 같습니다. 롱 아이언 샷을 배우고 싶다면 전 프로님의 스윙을 참조하라던 동영상에서 봤던 그대로입니다.”

부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지만 그녀는 픽 웃었다. 그러더니 가방 안에서 보온병을 꺼내 한 컵 가득 따랐다.

“몸에 좋은 차에요.”

“아, 네. 감사합니다.”

필상은 그녀가 권한 자리에 나란히 앉아 기분이 맑아지는 느낌을 주는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허브 차인 듯.

그리고 전 프로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맞아요. 지난주에 교정을 끝냈어요. 다른 건 아니고 한참 경기력이 좋았을 때의 제 영상들을 보고 따라 했죠.”

“그런데 왜 시험을 하신 겁니까?”

“나도 공 프로의 스윙을 봤거든요. 내 스윙이 너무 부자연스러운 것 같아 흉내 내다가 리듬이 깨진 거 알아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고 해야 하나?

샷 정확도 부분에서 늘 최상위권인 전 프로가 따라 하고 싶을 만큼 자신이 좋은 스윙을 했다는 것이 뿌듯했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스윙을 할 수는 없다. 각자 서로 다른 신체 조건을 지녔기 때문에 좋다는 스윙을 고집한다고 똑같이 좋은 결과가 얻을 수는 없다.

기본은 지켜야 하지만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스윙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때로는 기본마저도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대안을 찾아야 하는데, 남의 것이 좋아 보인다고 흉내를 내는 것은 쉽게 빠지곤 하는 함정이다.

베테랑인 그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발을 굳건하게 디딘 채, 몸통 위주의 스윙을 하는 것은 프로님의 장점이잖습니까!”

“난 남자들처럼 보다 강력한 샷을 하고 싶었거든요.”

“이미 강력하신데요?”

“그런가요? 하지만 남자 프로들의 스윙을 보면 다르잖아요.”

“글쎄요……. 남자들처럼 치고 싶다면 남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되지도 않는 말처럼 들렸지만 전 프로는 크게 웃었다.

남자가 아닌 그녀가 남자 프로들의 스윙을 고집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아니면 남자 선수들처럼 칠 수는 없다. 175cm의 훌륭한 신장을 지녔지만 기본적인 근력과 골격의 차이는 간과할 수 없는 벽이기 때문이다.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네요.”

“다른 곳을 보지 말고 자신이 가장 좋았던 때를 돌아보는 것이 정답인 것 같습니다. 이미 정상을 밟아 보셨잖습니까?”

“끊임없는 도전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도전의 한계를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간과했어요.”

“작년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가 239야드 정도였죠? 그 정도면 투어에서 상위권 아닌가요?”

“35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 입장이 되면 자꾸 장점보다는 단점이 크게 보이더라고요.”

“그게 문제였군요. 장점으로 단점을 커버해야지, 단점을 없애려고 다른 걸 시도하면 그나마 있던 장점도 빛이 바래죠.”

“맞아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이다.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보다 나은 위치로 오를 수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비거리가 늘고 보다 파워풀한 스윙으로 교정해 얻은 것이 있는 반면, 교과서 같다던 숏 아이언 정확성이 무너졌다.

최고의 장점을 잃는 순간, 우승도 함께 멀어진 것이다.

올 시즌 출발이 아주 좋았고 그 리듬을 타기 시작했지만 자신이 봐도 너무 아름다운 컨트롤 샷을 터트리는 필상을 보며 자극을 받은 것이 오히려 실이 된 것이다.

자신과는 무관했으나 그 얘기를 듣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한참 동안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골프 이야기들을 나눴다. 더 많은 것을 얻은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필상이었다.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고 베테랑의 고민을 간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중심축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군!’

제법 친해진 필상은 전 프로의 연습을 지켜봤다.

군더더기 없는 스윙, 그녀의 위상을 고려하면 너무도 당연했지만 눈썰미가 좋은 필상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요동치 않는 중심축, 기본에 해당하지만 지나칠 만큼 오래 유지되어 체중 이동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다못해 드라이버나 우드를 칠 때도 중심축인 등은 상하 좌우로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체중 이동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남들보다 적을 뿐, 그녀는 의식적으로 오른발 뒤꿈치를 왼발 안쪽으로 꾹 눌러 준 뒤에야 중심 이동이 이뤄진다.

그런 스윙의 장단점은 확연하다. 미스 샷이 없는 방향성이 보장된 정확한 샷을 구사할 수가 있다. 안선주 프로도 비슷한 스윙을 구사하는데, 그녀들을 전설로 만들고 있는 최고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파워의 손실은 어쩔 수 없지!’

작은 체구를 지닌 선수들은 원하는 비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체중을 과도하게 이동시킬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발생되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 남들보다 곱절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좋은 체격 조건을 갖춘 전 프로는 심플한 몸통 스윙을 하면서도 거리에 대한 염려는 커버되었다.

하지만 그건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의 생각일 뿐, 오랫동안 정제된 스윙을 구사하던 당사자는 정작 파워에 대한 심한 갈증을 느꼈던 것이다.

이미 적잖은 성취를 이뤘지만 본시 많이 가진 이들이 더 많은 욕심을 내는 법, 그녀도 단점을 보완해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의도와 노력은 오히려 역효과를 냈고 2014년부터 주춤하더니 작년에도 무승의 쓰라린 아픔을 겪었다.

“이 대회의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시네요.”

“빈말을 자주 하는 성격인가요?”

“아닙니다.”

“기분 좋네. 그래도 원 포인트 레슨은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무엇보다 소중한 자신감을 드렸잖습니까.”

“그런가? 좋은 결과 나오면 밥 한 번 살게요.”

“그럼 저는 미리 먹고 싶은 메뉴 골라 두겠습니다. 하하하.”

사실 그동안 만났던 프로들과도 이렇게 교류하고 싶었다.

성공한 이들에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직접 스윙을 살피면 무엇이든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동안은 모모코의 시선이 따가워 자제했지만 이젠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말린다고 듣지도 않겠지만 그만한 신뢰는 구축되었다고 생각했다.

“형!”

“흑돈. 며칠 새에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하하하.”

급기야 성호가 마중 나간 미사키와 함께 도착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새로운 도전에 대한 포부는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모모코와도 인사를 나눈 성호와 함께 필상은 곧바로 연습을 시작했다.

어차피 자신이 출전하는 대회가 아니라서 부담이 없지만 뭇사람들의 시선은 뜨거웠다. 어찌됐든 퍼펙트 콩이라는 프로는 이제 일본 골프계에 적잖은 지명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특히나 모모코와 나란히 연습하는 모습은 한 장의 그림 같아 골프매거진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번에 한국 선수들이 대거 초청을 받았던데요?”

“진검 승부도 이제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아마도 모모코가 하이원 오픈에서 우승한 것이 영향을 미친 것 같아.”

“그래도 최혜진이나 오지현, 김아림 같은 어린 프로들은 정말 무서운 기량을 가졌는데, 너무 과한 자신감 아닐까요?”

“그러게. 하지만 일본 투어도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야. 적응이 필요하지.”

“형이 그런 말을 하는 건 말이 좀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성호는 필상이 데뷔전부터 우승한 것을 언급했다.

같은 맥락으로 본다면 한국의 신예들도 우승하지 말란 법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객관적인 입장일 수 있으나 모모코의 기세를 뒤엎을 만큼 대단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연습하는 걸 보니까 기존 선수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아.”

“일본 애들이 한국 선수들과 막상막하라고요?”

“아니. 모모코의 경쟁 상대는 이미 이곳에 적응해 결과를 냈던 한국 선수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야.”

필상은 이번 대회를 준비하는 다양한 선수들의 기량을 점검했다. 아무래도 미사키가 전담 캐디로 나서고 모모코의 기량은 나무랄 데가 없어 한결 편하게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런데 초청받은 한국 선수들보다는 전미정, 안선주, 이보미를 비롯한 한국 출신 투어프로들의 기량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일본의 젊은 여자 선수들의 실력도 절대 녹록하지가 않았다.

“성호야. 리더 보드 좀 확인해 봐.”

“네.”

필상은 당연히 늦게 출발한 모모코의 경기를 따라붙었다.

전반에 버디 4개, 보기 1개로 -3을 기록하며 비교적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함께 플레이를 하고 있는 오지현이 -4를 기록하고 있어 왠지 불안했다.

그런데 확인된 1라운드 결과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였다.

이미 경기를 끝낸 선수 중에 하타오카 나사와 하라 에리카가 -7언더였고 김하늘, 이보미가 -6, 오히려 컨디션이 좋아 보이던 전미정과 안선주는 -3로 경기를 마쳤다.

물론 모모코도 컨디션이 좋아 더 줄일 수는 있을 것 같았지만 최종 결과는 -4, 아쉽게도 톱 10에 들지 못했다.

“수고했어.”

“보기를 3개나 했는데 수고는 뭘요!”

“하하하. 일단 씻고 나와.”

“싫어요. 연습장으로 가요.”

-7로 공동 선두에 나선 선수가 나란히 일본 선수라는 게 독특했고 -6은 오지현 외에도 4명이며 -5는 무려 7명이나 됐다.

-4를 기록한 모모코의 순위는 공동 14위였다. 무난한 성적이지만 모모코가 발끈한 것은 순위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경기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밀한 플레이가 필요한 순간에 어정쩡한 플레이가 나왔다. 차마 말은 안 했지만 필상이 백을 멨다면 실수는 더 줄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힌 것 같았다.

필상도 대충 눈치는 챘지만 그에 대한 말은 아꼈다. 어차피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참 씩씩대며 연습하던 모모코의 첫 마디는 아주 엉뚱했다.

“오지현?”

“응. 왜?”

“예쁜 애가 공은 왜 그렇게 잘 치는 거죠?”

“하하하. 너보다 3살이나 많은 언니인데.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심한데?”

“자꾸 신경이 쓰였어요.”

“무슨 신경? 매너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도 한 거야?”

“아뇨. 그건 아닌데, 은근히 오빠를 자꾸 쳐다보더라고요.”

“난 또 뭐라고!”

어이가 없었다.

실제 그럴 리도 없지만 경기에 집중하는 선수가, 그것도 -6을 기록해 공동 3위에 오른 선수가 갤러리를 쳐다볼 겨를이 어디 있겠나.

아마 한두 번 스치듯 쳐다볼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모모코의 과민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필상은 이럴 때 쓰는 특효 처방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모모코. 오늘 이 대회에 출전한 152명의 선수 중에 외모는 네가 단연 독보적이야.”

“정말이죠?”

“그건 말할 것도 없지. 팬의 수로 따져도 비교 불가일 걸?”

“난 다른 사람은 상관없어요. 왜 오빠가 걔를 자꾸만 쳐다보느냐고요!”

“내가?”

“다 봤어요! 탄성까지 터트리며 박수치는 거.”

알고 보니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다른 동반자 한 명은 초반부터 무너졌기에 필상은 모모코와 경쟁하는 오지현의 스윙을 유심히 살폈다. 지난해 한국여자오픈을 우승한 그녀의 아낌없이 내리꽂는 다운스윙은 폭발적일뿐더러 아름다울 지경이었다.

“내가 본 것은 오 프로의 스윙이야. 사람을 본 게 아니고.”

“그래도 싫어요.”

“모모코!”

이건 정말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경기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갤러리들 사이에 있던 필상을 의식하고 있었다니!

특히나 묘한 감정까지 거기에 섞는다면 추후 많은 시간을 떨어져 지내야 할 텐데, 이어질 그녀의 집착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단단히 못을 박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나 그냥 다음 스케줄 소화하러 갈까?”

“아니요!”

“네 행동은 내가 없는 게 더 낫다고 말하는 거잖아.”

“…….”

그녀의 눈에 이슬이 맺혔지만 필상은 과감히 돌아섰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프로가 자신의 일과 개인적인 감정을 분간하지 못한다면 성적은 물론 그녀와의 관계마저 흔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필상이 연습장을 벗어나는 걸 쳐다보는 모모코의 뺨에 급기야 굵은 물방울이 맺혀 뚝뚝 흘러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멀어지던 필상에게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김성호. 안 따라오고 뭐해!”

하지만 성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본말을 몰라도 지금 따라가면 정말로 필상이 이곳을 떠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관계를 떠나 눈물까지 보이게 만든 필상이 무조건 너무했다고 판단한 성호의 선택은 아주 단순하게 표현되었다.

“모모코. Don't worry. Your man don't go.”

“정말이죠?”

“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냥 갈 필상은 아니다. 다만 확실하게 경고할 필요가 있기에 독하게 마음먹고 시위한 것에 불과했다.

한동안 앉아서 훌쩍거리던 모모코가 마음을 진정하고 연습을 시작하자 슬그머니 음료수를 들고 나타난 필상은 오늘 모모코의 실수를 하나하나 지적하며 잔소리를 잔뜩 해 댔다.

불필요한 설레발 같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속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그 후로 모모코는 최소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경기 중에 나타난 양상을 보면 그 일로 인한 태도의 변화는 모모코보다 필상이 더 컸던 것 같다.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