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71화 (71/354)

071. 선택과 집중

“선택과 집중!”

수많은 생각들이 휘몰아쳤지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투어에 참가하는 프로 선수들은 절대 평범하지가 않다. 그야말로 신의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자신만의 스윙을 찾으려고 고련을 거듭했고 시기와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자들만이 우승이라는 값진 결실을 수확할 수 있다.

날고 기는 샷을 하며 한 해에 몇 승을 거두던 최고의 선수도 한 순간 리듬을 잃어 몇 년씩 우승을 못하지 않던가!

“준비되지 않은 도전, 그건 패착의 지름길인 거야!”

컨디션이 좋지 못했을 때도 극복한 경험은 있다.

하지만 극단적인 경험을 통해 확실히 깨달았다. 극복할 수 없는 한계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컨디션 난조를 더욱 부추긴 것이 있다. 코스 파악이 불가한 대회 개막 이틀 전에 도착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믿었던 어리석은 자만심이 바로 그것이다.

차라리 경기 중에 쓰러져 패한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핑계는 될 수 있으며, 생생한 기록은 남겠지만 패배의 기억은 없을 테니까.

“다시 천천히 시작하자. 서두르지 말고!”

“오빠!”

고개를 돌리니 모모코가 달려오고 있었다.

잠이 깼을 때 필상이 없자 굉장히 놀란 것 같았다. 벤치에서 일어난 필상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그녀를 맞이했다.

으스러지게, 뜨겁게 안았다. 안겨서도 계속 훌쩍이는 걸 보면 그녀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빠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미안해.”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네?”

“알았어. 절대 무리하지 않을게.”

***

퇴원 수속을 밟은 필상은 바로 도야마 현으로 향했다.

비행기를 타면 더 빠르지만 미사키가 운전하는 차를 함께 타고 느긋하게 지나가는 도시들의 풍광을 즐겼다.

늘 바쁘다는 이유로 여행다운 여행은 해 보지 못했던 터라 모모코나 미사키도 아주 좋아했다. 여유를 가지고 마음을 편히 먹자 컨디션이 점점 더 좋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야마 현으로 가는 이유는 모모코가 출전할 JLPGA 챔피언십이 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 전역으로 투어를 다니기 때문에 정착할 집이 필요 없다고 여겼지만 그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이번 대회 마치면 도쿄 외곽에 집을 구해야할 것 같아.”

“집이요?”

“응. 안정된 본거지를 마련하고 그곳을 기점으로 움직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그야 당연하죠. 흐흐흐.”

“어디 마음에 드는 곳 있어?”

“네. 가와사키에 봐둔 별장이 있어요.”

“별장?”

“도쿄공항에서 가깝고 바다도 보이고 바로 옆에 공원도 있거든요.”

“대회 마치면 같이 가서 한 번 보자.”

“와아! 좋아요, 좋아요!”

필상은 이제야 깨달았지만 모모코는 오래전부터 생각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대회 개최는 골프 인구가 많은 도쿄 인근이 빈번해서 그 주변이 적당하다는 것에 동의했다.

필상이 전혀 그럴 의사가 없어 보여 말도 꺼내지 못했을 뿐, 언젠가는 졸라서라도 집을 구할 생각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먼저 언급한 것이 너무도 행복한 듯 보였다.

게다가 그 얘기를 꺼낸 전제가 중요했다. 같이 가서 보자는 것은 곧 같이 지낼 집을 구하자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굉장히 달콤하게 들렸던 것이다.

그 와중에 큰누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다행히 엄마는 필상의 불행했던 소식을 모르셨다.

필상도 하지 않는 연락을 모모코와 가끔 나누는 모양인데, 이미 쾌차했다는 보고를 받았다는 증언에 할 말을 잃었다.

“모모코. 이번 대회는 미사키가 캐디를 보면 어떨까?”

“왜요? 혹시 몸이 다시 안 좋아요?”

“그건 아니고. 앞으로 미사키를 네 전담 캐디로 호흡을 맞추는 게 어떨까 해서.”

“오빠는요?”

“성호 알지?”

“아. 흑돈 오빠요?”

“응. 성호가 곧 일본으로 올 거야. 나를 좀 도와 달라고 부탁했거든.”

“좋아요.”

너무도 쉽게 승낙했다.

아직은 성호가 믿음직해서라기보다는 미사키와 늘 붙어 다니는 것을 못내 불안해하던 차였기에 그런 것 같았다.

[퍼펙트 콩, 경기 중 혼절!]

[충격적인 기권패! 퍼펙트라던 닉네임에 금이 가나?]

필상이 쓰러진 날, 일본 스포츠 언론들은 일제히 필상의 기권패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논조가 아주 미묘했다.

무리한 대회 출전으로 인한 건강 악화를 짚은 전문가도 있지만, 패배에 대한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기절 쇼를 했다는 어이없는 멘트를 날린 해설자도 있었다.

선수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차리지 않는 평가에 악플 폭탄이 터졌지만 사과나 정정보도 따위는 없었다.

한국 선수가 일본 투어를 점령한다는 피해망상에 젖은 이들의 사고방식은 웬만해서는 바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토요일 4강전이 끝나자 또 다른 괴물이 나타났다.

[가타야마 신고 VS 김경태. 운명의 한일전 끝장 승부!]

[가타야마, 퍼펙트 콩을 시작으로 한국 선수 3명을 연거푸 녹다운! 4번째 제물, 김경태에 대한 승리 장담!]

필상에게 기권승을 거둔 가타야마가 기세를 몰아 결승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강자들을 2명이나 더 꺾은 것이 자극적인 기사를 작성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승전의 상대는 다름 아닌 김경태 프로였다.

내친김에 자신감을 피력한 것은 좋지만 상대 선수를 제물(祭物)이라고 표현한 것은 정치인들이나 입에 올리는 망발이 아닐 수 없었다.

일부 극소수의 열렬한 응원을 받을지는 몰라도 패한다면 필상은 그가 스스로 판 무덤에 들어가는 꼴이라고 생각했다.

‘네 복수전은 내가 확실하게 해 주마.’

“확실하게 묻어 버리십시오.”

토요일 저녁 김 프로와 통화했다. 병문안까지 왔는데 미처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떠나왔기에 먼저 연락했다.

필상은 그의 밝은 음성을 듣고 승리를 확신했다. 전혀 긴장하거나 걱정하지 않았고 승부를 즐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표와도 통화했다.

기절한 그날 그녀는 미국에 있어 오지 못했다. 모모코가 곧바로 필상의 상태를 전해 줬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단다.

그리고 기분 좋은 소식을 알려 왔다.

필상의 요청대로 나이키와의 계약은 사양했는데, 한국지사가 아닌 본사에게 직접 연락이 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계약은 일본지사와 진행하기로 했어요.”

“좀 이상하게 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거금만 쥐어 주신다면. 하하하.”

“저는 다음 주에 건너가 계약 진행할 거고요 김성호 프로는 언제든 호출하면 일본으로 넘어갈 거라는 연락이 왔어요.”

“그럼 내일이라도 당장, 아니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그밖에도 중요한 논의가 이뤄졌는데, 대회 출전 일정의 재조정이 그것이다. 포인트는 선택과 집중, 연속 출전을 없애고 가급적 상금 규모가 큰 대회를 중심으로 출전키로 했다.

도야마 고수기CC에 도착한 필상은 일단 연습과 실전 라운드를 병행하며 서서히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모모코를 위해 코스 파악에 집중한 것은 물론이다.

“여기서 -16을 치는 것은 절대 쉽지가 않을 텐데!”

연습 라운드를 마친 필상의 판단은 냉정했다.

세팅에 따라 다르겠지만 하루에 -5이상은 절대 불가능해 보였다. 어렵게 설정하면 언더를 기록하는 것도 버거울 듯.

실제로 작년에 이 대회에 출전했던 모모코는 +2, +3을 기록해 컷 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그런 부담 때문인지 연습 라운드 기록도 2오버파에 머물렀다.

“-16을 친 사람은 인간도 아니에요!”

“하하하. 그렇게 간단히 매도할 게 아니라 그 이상을 칠 생각을 해야지. 신지애 프로도 사람이잖아.”

“아! 신지애 프로였어요?”

알면서도 모른 척, 시치미 떼는 솜씨는 가히 무림지존이다.

작년 이 대회 우승자, 신지애 프로는 2위와 9타 차의 압도적인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거뒀다. 예선 이틀 동안 -5, -6을 기록하며 일찌감치 경쟁자들을 따돌려 ‘지존’이라는 별명이 왜 지어졌는지 실감케 하는 경기력을 보였다.

모모코에게는 아픈 기억일 테지만 그걸 극복하지 못하면 메이저 대회 연승은 거둘 수 없기에 준비한 멘트를 쏟아 냈다.

“난 개인적으로 그녀가 보유한 기록들을 따라잡고 싶어.”

“무슨 기록이요?”

“2009년 신지애 프로는 세계 4대 투어를 모두 우승한 세계 최초의 기록 보유자거든.”

“LPGA, JLPGA, KLPGA, 유러피언 투어를 모두 우승했다고요? 그것도 한 해에?”

“믿기지 않지?”

그뿐이 아니다. 그녀는 4대 투어의 시드권을 Q스쿨 없이 획득한 세계 최초의 선수다. 2009년 LPGA 신인상, 상금왕을 동시 석권해 낸시 로페즈 이후 31년만의 진기록을 달성했다.

2010년, 아시아인 최초로 여자 골프 세계 랭킹 1위에 등극한 주인공도 바로 신지애 프로다. 그 뒤로 많은 한국 여자 프로들이 그 자리에 올랐지만 선구자는 바로 그녀였다.

필상의 증언을 듣는 모모코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하이원 오픈을 포함, 시즌 5승을 달성한 그녀는 더 오를 곳이 보이지 않을 만큼 대단한 성과를 이뤘다고 자의반타의반 추켜세워지지만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목표 정했어요.”

“무슨 목표?”

“일단 17언더를 기록할 거예요. 먼 곳은 나중에 천천히 보고 일단 이 대회부터 잡을 거예요.”

“정말 마음에 드네.”

“예쁘기까지 하잖아요. 흐흐흐.”

필상은 정말 감탄했다.

신 프로의 빛나는 기록들을 언급하면 그 모든 것을 깨겠다고 달려들 줄 알았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허황된 것을 보지 않고 눈앞의 목표에 집중하겠다는 말은 너무도 바람직한 자세였기 때문이다.

늘 가까이 있어 그녀의 진면목을 오히려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

필상은 이제 모모코의 캐디가 아니다.

그로 인해 수입은 줄어들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이 코칭 수입이라는 것을 확인했기에 일거양득이었다.

또한 모모코는 이미 샷을 일일이 점검해야 할 어린 선수가 아니다. 워낙 샷 감이 좋아 가끔 한 마디만 건네도 알아서 연습하고 그걸 확인할 전담 캐디도 있어서 필상은 자신의 연습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도 아주 흡족했다.

그런데 연습하던 필상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비쳤다.

JLPGA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는 많지만 올 시즌 유난히 빛나는 ‘별 중의 별’이 연습장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모모코. 스윙이 너무 커!”

“어딜 가려고요?”

“하하. 눈치는 정말!”

“어? 전미정 프로님이시네요?”

“인사하고 올 테니까 연습에 집중해.”

여자 선수라면 질색하는 모모코도 이번에는 입을 삐죽 내밀고 말았다. 그만한 신뢰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전 프로의 단아한 이미지와 실력에 대한 존중이 밑바탕에 깔린 것 같았다.

작년에 안선주가 26승을 거두기 전까지 일본 투어 최다승 기록은 그녀의 것이었다. 하지만 올 시즌 KLPGA 대만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전 프로는 그 기세를 몰아 5월에 1승을 추가해 다시 승부의 추를 원점으로 돌려놨다.

‘소리 없이 강한 베테랑!’

최근 전 프로의 기록과 경기 영상, 관련 기사들을 본 적이 있는데, 기자의 그 표현이 굉장히 인상 깊게 남았다.

JLPGA 14년차라는데, 정말 기나긴 시간이다.

세월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일본 투어에 발을 디딘 루키로서 살아 있는 전설과 같은 그녀와 인사를 나누러 가는 발걸음이 즐거웠다.

일전에 대회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여유가 없었고 솔직히 관심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모모코가 꾸준한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어떤 선수를 닮아야 할지 고심하던 차에 그녀의 골프를 접하게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아! 반가워요.”

1982년생인 그녀는 큰누나와 동갑이며 인상도 비슷했다.

이른바 맏며느리 같다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지만, 필상은 친근감을 느끼는 편안한 인상을 지닌 선수였다.

다행히 그녀는 필상을 알아봤다. 하지만 쑥스러운 듯 어색한 미소를 지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단 철판을 깔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뵀을 때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몸은 괜찮은가요?”

“아! 네.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심까지는 아닌데…….”

‘윽!’

너무 속을 보였나 싶었지만 필상이 당황하자 빙긋이 웃은 전 프로는 기대하지 못했던 엉뚱한 말을 꺼냈다.

“공 프로님. 제 샷 좀 봐 주실래요?”

“제가요?”

“모모코의 코치라면서요?”

“그렇기는 하지만 제가 어디 감히…….”

“싫다는 거죠?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그녀는 묘하게 사람을 흔드는 재주가 있었다.

평소 경기할 때의 모습은 조용하고 진지해 쉽게 말을 붙이기도 힘든 스타일이라고 알려졌는데, 가까이 대하면 또 다른 모습이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요즘 롱 아이언이 좀 말썽이거든요.”

“아. 네.”

전 프로는 5번 아이언을 들어 보인 뒤, 묵묵하게 5번의 스윙을 연속해서 보여 줬다. 그런데 그걸 지켜보는 필상은 마치 시험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자신이 모모코의 스윙코치를 하는 것을 혹자는 주제 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눈부신 결과로 능력을 증명하고 있지만 경험이 일천한 선수인 것은 부정하기 힘들고 일본 최고의 선수를 가르칠 자격이 있느냐고 지적한다면 할 말은 없다.

시작부터 독특한 관계였으며 좋은 스윙을 하는 것과 프로 선수를 가르치는 일은 또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있다. 누구보다 눈썰미가 좋고 스윙의 원리에 대해 깊은 성찰과 이해를 하고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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