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몸을 함부로 굴린 대가
“아리가또 고자이마시따(수고하셨습니다)!”
“하하하. 커쿤 막 캅(정말 고맙습니다)!”
“우리말을 아십니까?”
“제가 치망마이를 좋아합니다. 얼마간 머물며 배웠지요.”
“아!”
크롱파는 11번 홀에서 가방을 싸야 했다.
8&7. 치욕적인 스코어였다. 하지만 그는 일본어로 깍듯하게 인사를 했고 필상은 짧은 태국어지만 감사를 표했다.
크게 걱정했으나 그가 무리한 공략을 고집해 생각보다 수월한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주 볼 텐데, 친구처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패한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특히나 너무 형편없이 졌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원한이 사무칠 수도 있는 것이 매치 플레이다.
그러나 필상이 알던 태국 사람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그도 갖추고 있어 친구가 되자는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만나면 나이부터 묻는 한국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태국인들은 상당한 나이 차가 나도 그냥 친구라고 부르고 서로 존중하는 문화를 지녔다.
밥을 사겠다는 말에 흔쾌히 동의한 그와 저녁을 먹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연습하던 필상은 어제와 똑같은 상황을 겪었다. 급격한 컨디션 난조, 환하게 밝힌 전등이 깜빡이는 것처럼 시야가 흐렸다 맑아졌다 그 증상이 더 심해졌다.
“그만 들어가자.”
“정말이요?”
“응. 영 몸이 안 좋아.”
일찍 들어가자는 말에 눈빛을 반짝이던 모모코는 필상의 안색을 보더니 안절부절못했다.
창백한 낯빛이 환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모모코는 온천이라도 다녀오자고 했지만 필상은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열이 있거나 드러난 증상은 없어 병원을 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느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오빠…….”
모모코는 또다시 일찍 기상하지 못한 필상의 침대 옆에 앉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제도 늦잠을 잤지만 결과는 좋았다. 하지만 오늘의 상황은 달랐다. 어젯밤에 연습마저 접고 일찍 취침한 필상이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심각하게 느껴졌다.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이 있거나 호흡이 불규칙한 것은 아니었다. 의사가 아니라 진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진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도대체 하루라도 편히 쉰 적이 없지 않던가!
잠시 곁을 지키던 모모코는 결국 필상을 흔들어 깨웠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으음……. 몇 시야?”
“7시에요.”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자.”
잠이 깨자마자 필상은 자신의 컨디션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어제와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밥을 먹으면 행여 달라질까 생각했으나 입맛이 없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식사를 마쳤는데, 소화가 되지 않는지 속이 더부룩했다.
몸을 풀러 연습장으로 향했지만 몇 번 스윙을 해 본 필상은 클럽을 놓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가려고요?”
“화장실.”
속이 안 좋은 것은 문제가 아니다.
스윙 대신 러닝을 하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접고 한적한 곳을 찾은 필상은 벤치에 앉아 고심에 빠졌다.
이런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따져 본 것이다. 하지만 이내 일어섰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졌음에도 웨지만 들고 숏 게임 연습에만 골몰했다.
7번 아이언을 잡았으나 정확한 임팩트가 이뤄지지 않는 스윙을 연거푸 하자 되레 자신감마저 떨어질 것 같았던 것이다.
-역시 가타야마인가요?
-퍼펙트 콩이 드디어 임자를 만난 것 같습니다. 하하하.
-94%에 육박하던 페어웨이 안착률이 어딜 간 거죠? 5번 홀까지 4번의 드라이버 티샷을 했는데 한 번도 페어웨이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통계치가 너무 작았던 것 아닐까요?
-스트로크 플레이로 환산하면 2오버,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매치 플레이가 원래 이런 겁니다. 한 번 엇나가면 좀처럼 기량을 발휘할 수가 없지요.
-음……. 그래도 좀 이상하기는 하네요.
지독한 편파 방송을 하면서도 의아하다는 말은 감추지 못했다. 누가 봐도 필상의 플레이는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받은 충격은 그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드라이버 비거리가 250야드밖에 나오지 않았다.
조금 더 세게 치다 보니 거리는 270야드까지 늘었지만 방향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언 샷도 번번이 짧았다.
한 클럽을 더 길게 잡아도 그린에 올리지 못했다. 그나마 숏 게임은 정확했지만 그래도 파를 지키는 것은 버거웠다.
그러나 드러난 양상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었다.
균형 감각의 상실, 어지러워 자꾸 눈을 깜빡여야 했다. 그러니 어찌 스윙에 집중할 수 있겠는가!
“5번 유틸리티.”
“괜찮으세요?”
“걱정 마.”
티샷을 뭐로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사키는 느낄 수 있었다. 필상이 가끔 헛발을 디딘다는 것을.
하지만 드라이버 대신 유틸리티를 잡은 필상은 입술을 깨물며 티 그라운드에 올라섰다.
진한 고통이 정신을 일깨우고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데, 모처럼 힘찬 스윙이 이뤄졌고 타구는 페어웨이 정중앙을 갈랐다.
6번 홀은 379야드 파4 홀, 좌측 그린에 핀을 꽂아 비교적 쉬운 내리막 홀이었다. 5번 유틸리티가 만든 비거리는 243야드, 내리막을 탔음에도 여전히 만족할 거리는 아니었다.
“프로님!”
“왜?”
“입술에 피가 나요.”
미사키는 깜짝 놀라 손수건을 건넸다.
정신을 차리려고 입술을 깨물었는데 터진 모양이다.
하지만 필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냥 쓱 문질러 닦았다. 피를 한 바가지 쏟더라도 지금 필요한 것은 굿 샷이었기 때문이다.
남은 거리는 134야드, 필상은 9번 아이언을 들었다.
그리고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린 테이크 백, 다운스윙도 평소보다는 훨씬 정확성에 포인트를 맞췄다.
따악!
맞는 순간, 오늘 처음으로 필상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제대로 맞았다는 느낌이 손바닥에서부터 올라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들의 반응 소리는 기대와 한참 멀었다.
‘와아아!’ 함성이 아닌 웅성거림이 들려와 고개를 돌려 날아가는 공을 바라봤다. 뜨기는 잘 떴지만 그린과는 전혀 다른 방향, 마치 생크(Shank- 볼이 클럽샤프트의 목 부분에 맞는 미스 샷)가 난 것처럼 우측으로 휘어져 나갔던 것이다.
‘이런 씨부랄!’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것은 눈이 감긴 필상이 갑자기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기 때문이다.
“프로님!”
“오빠!”
미사키의 음성에 이어 모모코의 음성도 얼핏 들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필상이 쓰러지자 미사키가 다가왔고 갤러리들의 비명이 쏟아지는 가운데 인파를 헤치고 달려 나온 사람은 모모코였다.
그녀는 가까이 서서 필상의 정상적이지 않은 모든 샷을 지켜보고 있었다. 진즉에 달려와 포기하라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필상의 의지와 고집을 알기 때문이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 6번 홀까지 따라오는 것도 힘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혼절한 필상을 보자 사람들의 시선이고 뭐고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의사! 의사를 불러 줘요!”
당연히 메디컬 팀이 대기 중이다.
하지만 조금은 기다려야 할 거리였는데, 갤러리들 사이에서 자신을 의사라고 외친 사람이 인파를 헤치고 다가왔다.
놀라운 것은 그가 바로 심폐 소생술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호흡이 없다는 의미였기에 경기위원은 즉시 경기 중단을 선언했고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분명히 외부적인 충격은 없었다.
오늘 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은 느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기절하고 호흡까지 막힌 것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하지만 제 진단은 과로입니다.”
“과로요?”
“심장 박동이 멈췄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밀 진단 결과에서는 별다른 증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 상태도 사실은 수면 중이라고 판단되고요.”
“선생님. 설마 농담은 아니시죠?”
“모모코. 제가 두 분의 팬입니다. 농담이라니요! 일단 기력 회복을 위해 영양 만점 링거를 처방했으니까 깨어날 때까지 병실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죠?”
“그럼요. 혹시 이상한 점이 있으면 간호사에게, 아니 제게 달려오십시오. 어차피 오늘 당직이니까.”
“정말 고마워요. 선생님.”
믿기지 않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모모코는 담당 의사의 손을 꼭 잡고는 놓아주지 않다가 병실로 향했다.
급기야 사라지는 모모코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본 의사는 간호사에게 자신을 손을 들어 보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 당분간 손 씻지 않을 거야.”
“수술 들어가실 때는 어쩌시려고요?”
“수술?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해야지. 으음……. 이 냄새, 정말 좋다.”
담당의는 모모코의 광팬이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잡았던 손을 코에 대며 향기가 난다고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늘 맡던 손 세척제 냄새일 뿐.
“미사키. 오빠 괜찮대요!”
“정말인가요?”
“그렇데요. 근데 왜 아무 이유도 없이 쓰러진 걸까요?”
“사실 프로님 오늘 많이 이상했어요.”
“어떻게요?”
미사키는 자세히 설명했다.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몸이 흔들렸다는 것, 원하는 거리를 내지 못한 뒤에는 아주 살벌한 기운이 뻗쳤다는 것도 말했다.
곁에서 지켜본 자신도 오늘은 경기를 포기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하고 아쉬웠단다.
모모코도 내내 불안했지만 의사의 진단을 믿고 두 여자는 침대 옆에 나란히 앉아 때 아닌 수다에 여념이 없었다.
“킁! 그르르릉!”
마치 주변이 시끄럽다는 듯 괴상한 소리가 터졌다.
필상에게서.
깜짝 놀란 둘의 시선이 꽂힌 필상의 코에서 나는 소리였다.
“설마 코를 고시는 건가요?”
“흐흐흐. 의사 선생님이 자는 거라고 하셨어요. 맞나 봐요!”
경기를 마친 끝난 김경태 프로가 다녀갔다.
1시간가량 곁을 지키며 필상의 건강을 염려하는 대화를 나눴지만 필상은 곤히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다.
결국 모모코와 미사키는 소파를 침대 옆으로 끌고 와 앉은 채 재잘대다가 꾸뻑꾸뻑 졸기 시작했다.
“으음…….”
필상이 깨어난 시간은 새벽 5시였다.
무려 18시간을 잔 것이다.
곁을 지키던 두 여자는 비좁은 소파 위에 서로 꼭 껴안은 채로 잠들어 있었고 병실의 전등도 꺼져 있었다.
눈을 뜬 필상은 과거의 한 기억과 오버랩이 된다는 생각을 하며 서서히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두 여인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확인한 필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마 둘이 많이 친해진 계기가 된 듯.
하지만 이내 끊어진 기억들을 되짚어 보며 왜 이런 상황에 이르렀는지 유추해 봤다. 경기 중에 기절했음을 깨달았다.
기절한 것보다 경기를 기권하게 된 것이 더 아쉬웠지만 이제는 스스로 자신의 컨디션을 확인해 볼 차례였다.
“괜찮은데?”
좀처럼 믿기 어려워 조용히 침대에서 벗어난 필상은 병실을 나섰다. 새벽이라서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병원 밖으로 나서는 순간 신선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 싱그러운 느낌은 마치 숙면을 취한 뒤의 뻐근한 만족감처럼 느껴져 일단 정원의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았다.
확인한 몸 상태는 당장이라도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을 만큼 활력이 넘쳤다. 그래서 더 경기를 포기한 것이 아쉬웠지만 지금은 떠난 배를 그리워할 때가 아니었다.
벼락을 맞았을 때도 모두의 예상을 깨고 금방 건강을 회복했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자 전반적인 상황을 복기해 볼 필요를 느꼈다.
“몸을 너무 함부로 굴린 대가인가?”
벼락을 맞은 그날 이후, 자신의 건강은 굳이 살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주 좋았다.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 더 강한 집중력을 발휘해도 힘들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머리를 베개에 대면 곧 잠이 들었고, 숙면을 취하지 못한 건 아니다. 그러나 그걸 믿고 지나치게 무리한 일정을 소화한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나마 시드가 없어 연속 출전은 없었는데, 신한동해오픈을 우승하고 일본에 바로 건너올 때는 불길한 느낌을 감지했다.
자주 피곤했으며 집중력이 흩어져 샷 이미지 메이킹에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이번 대회 들어서 증상이 극심했는데, 어제 좋은 경기를 펼친 뒤 방심했다.
“마냥 퍼 주는 축복은 아니라는 건가?”
벼락을 맞은 뒤, 달라진 자신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결과가 노력의 산물이라고 자부했다.
어려서부터 운동신경이 좋았고 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공부에 전념했었다. 불행하게도 결과는 좋지 못했고 골프에 인생을 걸겠다는 결심한 뒤로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기적처럼 빛나는 결과를 쑥쑥 만들어 냈고 그것이 노력에 대한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하며 멈추지 못했다.
희박한 확률을 연거푸 4번이나 뚫으며 우승한 것이 온전한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기인했고, 언제까지고 그 페이스를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어리석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