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69화 (69/354)

069. 짜이 옌옌

“그림 같네!”

“너무 예뻐요.”

1986년에 개장한 이래 6번의 JGTO대회를 주최했던 코스답게 멋들어진 사진엽서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분명히 인공이 가해졌을 텐데 마치 태고(太古)부터 이래 왔던 듯 고고한 자태를 간직한 풍광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으며 찾아간 하얗게 칠해진 클럽하우스는 유럽의 고성이 아니라 기숙학교처럼 느껴졌다.

교통 입지가 좋은 장점을 지녔음에도 완만한 구릉지에 천혜의 자연환경을 활용한 아름다운 코스는 왜 스스로 명문이라고 자부하는지 이해하게 만들었다.

“잔디가 아주 푹신푹신해요!”

“발바닥이 아플 일은 없겠네. 하하하.”

신이 난 모모코는 페어웨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 함께 있는 것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여 기분이 좋아진 필상도 클럽하우스에 들어가기 전에 잔디를 먼저 밟아 봤다.

느긋한 듯 완만한 페어웨이는 은근한 잔디의 물결이 구비 쳤고 적재적소에 자리한 호수, 발갛게 익어 가는 나무와 더불어 판타스틱한 느낌까지 선사했다.

뛰어도 지칠 것 같지 않고 플레이어의 힘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심오한 설계가 가해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사키가 숙소 체크인을 하는 동안 필상은 모모코와 같이 코스를 둘러봤다. 팔짱 낀 두 선남선녀의 산책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연습 라운드가 한 번뿐이어서 어떡해요?”

“하는 수 없지. 최대한 안정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수밖에.”

“잘할 거에요. 우승 상금이 5200만 엔이죠?”

“그럴 걸?”

“우승하면 선물 사 줘요.”

“선물? 어떤 거?”

너무 멀리 가는 것 같았지만 이제 자신이 그녀에게 뭘 사 줄 수도 있는 형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분 좋았다.

그래서 뭐든 해 주고 싶었다.

통이 큰 모모코가 엄청난 것을 요구할지도 모르지만 까짓 거, 뭐가 아까우랴!

그런데 모모코의 입에서는 크기나 가격보다 의미가 깃든 내용이 튀어 나왔다.

“커플링이요!”

“좋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가 너무 급작스럽게 진도를 뺀다는 생각에 먼저 일본에 보낸 뒤,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면서까지 성공에 집착한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마저 컨트롤하지 못하면 급속도로 진전될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적지 않았다.

비겁하다는 고백이 필요하지만 스무 살인 모모코의 무한한 가능성을 자신이 가로막는다는 생각도 없지 않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사랑을 싹틔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정말이죠?”

“응.”

왈칵 달려들어 입술을 맞추는 모모코, 아찔한 그 순간에도 누군가 보면 어쩌나 당황했는데 다행히 뽀뽀였다.

천방지축 같지만 서서히 지켜야 할 적절한 선을 깨달아 간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녀가 더더욱 사랑스러웠다.

적절한 선?

존재하지도 않는 그것을 지키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설레고 기대되고.

***

“별로 반갑지 않아. 밥은 좀 따로 먹자.”

“왜 이러십니까. 선수끼리.”

“네게 시드를 준 협회에 항의서를 제출할 거야.”

“하하. 그런 사람이 하루 종일 그렇게 수다를 떠셨습니까?”

“그야 네가 한국 망신을 시킬까 봐 그랬지.”

김경태 프로였다.

그는 1번뿐인 연습 라운드를 필상과 함께하며 코스에 대한 다양한 설명과 더불어 세밀한 부분까지 열심히 코치했다.

작년에 이 코스를 경험했던 터라 필상이 미처 코스를 파악하지 못한 허점을 채워 주려는 커다란 배려였다.

그걸 잘 아는데 괜히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는 모습을 보며 속정이 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 우리 결승에서 만나요.”

“결승에만 올라도 2500만 엔이 보장되니까 나쁘지는 않네.”

“우승할 생각을 하셔야지 뭔 소리입니까?”

“혹시 네가 결승에 오르지 못한다면 모를까. 너랑 붙는 건 이제 너무 부담스러워.”

“엄살은!”

엄살이라고 치부했지만 그건 필상의 생각일 뿐, 실제로 필상과 동반 라운드를 해 본 선수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기이한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는데, 패배의 기억은 너무도 또렷하게 남아 더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김 프로가 그걸 에둘러 표현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알지 못했다.

“왜 잠이 오질 않지?”

저녁 식사 후 늦게까지 스윙을 점검했다.

연습 라운드에서 파를 잡는 것도 버거울 만큼 산만했다. 김 프로는 필상이 코스 파악을 하느라 다양한 상황과 샷을 점검한다고 판단했지만 그건 전혀 아니었다.

스윙 이미지가 잘 맺히지 않았고 몸이 전체적으로 무거웠다. 게다가 도중에 컨디션 난조까지 찾아와 힘들었다.

그래도 내일 32강전을 앞두고 숙면을 취해야 하건만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어, 필상은 급기야 일어나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상태를 한 번 체크해 볼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벼락을 맞은 뒤에 생긴 변화는 크게 두 가지다.

샷의 일관성이 월등하게 좋아졌는데 그건 스윙 이미지가 얼마나 잘 그려지는지, 그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신한동해오픈 예선에서 해맨 것도 그게 발단이었다.

“내일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이 생기는 건가?”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관점이 하나 생겼다. 몸이 피곤하거나 심력을 지나치게 허비하면 이미지가 잘 맺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이은 대회 출전과 장거리 이동, 도중에 모모코의 캐디까지 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신이 무척 지쳤던 것이다. 때문에 어쩌면 내일 경기는 자신과의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또 다른 변화는 경기 중에 갑자기 컨디션이 변하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기준에 근거하는지 파악하지 못해 답답했는데, 드러난 양상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도 답답한 부분이다.

“업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완전 다운이었어!”

클럽을 하나 더 길게 잡아도 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차마 묻지 않았지만 필상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미사키의 표정이 붉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전에서 그런 상황에 닥치면 어쩔 것인지 그게 불면의 원인 같았다.

모든 것이 기대와 계획 이상의 성과를 거뒀으나 드디어 벽에 부딪쳤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답답함이 너무도 강해 집에서 며칠 더 쉴 걸, 왜 무리해서 일본에 넘어왔는지 후회가 될 정도였다.

잠들기 전에 확인한 마지막 시간은 02:46분이었다.

“오빠!”

“…….”

“오빠!”

불러도 대답 없이 자는 필상을 모모코는 조심스럽게 살폈다. 한 번도 이렇게 늦잠 자는 것을 본 적이 없기에 놀랐다.

하지만 침대로 다가가자 가늘게 으르렁대는 코골이 소리가 들렸다.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비로소 모모코의 표정이 밝아졌다.

따스한 손길이 닿고 특유의 향기가 느껴진 필상은 잠에서 깨어났다. 배시시 웃으며 정신을 차린 필상의 첫 반응은 모모코를 와락 침대로 끌어당긴 것이다.

“오빠!”

“가만히 있어. 딱 1분만.”

파닥대던 모모코는 아기 새처럼 필상의 품에 폭 안긴 채 눈을 감았다. 정면이 아닌 백허그인데도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잔뜩 구부렸지만 등과 엉덩이에 필상의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뛰노는 심장 박동이 천둥처럼 들렸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데 돌연 어이없는 소리가 들렸다.

‘그르릉……. 그르릉…….’

자신을 껴안은 필상이 다시 코를 골고 있는 것이다.

삽시간에 표정이 새침해졌지만 모모코는 꿈쩍하지 않았다. 시계가 7시를 넘어가고 있는데도 깨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피곤하지 않으면 인간도 아니지.’

15번째 매치에 배정되어 32강전 티오프 시간이 9:30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아침 식사도 하고 몸도 풀어야 했기에 모모코는 7시 반에 필상을 깨웠다.

무려 30분이나 필상의 품에 안겨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운 이기적인 행동이지만 그게 전혀 다른 작용을 했다는 것을 모모코는 알지 못했다. 4시간 남짓 자고 일어난 필상은 컨디션이 의외로 나쁘지 않은 것에 놀랐다.

“나 꿈 꿨어!”

“무슨 꿈이요?”

“널 꼭 안고 잔 꿈!”

가만히 있으라며 1분만 더 자겠다는 말은 잠꼬대였던가?

꿈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은 모모코, 시치미를 뚝 떼고 필상의 뺨에 입을 맞추며 자극적인 말을 던졌다.

“그건 저도 늘 꾸는 꿈이에요.”

“뭐?”

“꿈이 아니라 진짜 오빠 품에 폭 안겨 자고 싶어요!”

“어? 지금 몇 시야?”

“7시 반이요.”

“미치겠네, 진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고 서둘러 연습장에 나온 필상의 얼굴은 환해졌다. 배고픈 건 문제가 아니었다.

어젯밤에 염려하던 최악의 컨디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으하하하! 됐어!”

“뭐가요?”

“그런 게 있어. 갑자기 자신감이 쑥쑥 오르네!”

필상의 32강전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탄야콘 크롱파였다.

태국 출신이며 166cm 단신이지만 이 대회에 강점을 지닌 상대를 매치시킨 것은 험난한 여정을 예고했다.

그러나 컨디션을 회복한 필상은 펄펄 날았다.

스코어를 낮추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상대보다 잘 치는 것이 목표인 경기인데, 처음 겪는 방식임에도 타고난 듯 상대를 압도했다.

408야드 파4인 1번 홀에서 아너로 나선 크롱파는 티샷이 우측으로 밀려 크로스 벙커에 들어가면서 악몽이 시작되었다.

쉬익!

필상은 부드러운 티샷을 구사해 페어웨이 정중앙에 공을 떨어뜨렸다. 내리막을 제대로 구른 공은 293야드에 멈췄다.

그린까지는 오르막이지만 남은 거리는 118야드, 갭 웨지로 넉넉하게 붙일 거리였는데, 크롱파의 벙커샷이 나뭇가지에 걸려 A그린 좌측의 가드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오늘은 핀이 우측의 B그린에 꽂혔기에 30야드가 넘는 벙커샷을 해야만 했다. 한결 편해진 필상은 가볍게 온 그린에 성공했고 2퍼팅만 해도 충분한 상황을 맞이했다.

상대의 벙커샷이 터무니없이 짧아 공을 그린에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4온에 남은 보기 퍼팅도 애매한 3.5m, 필상은 무리하지 않고 핀에 붙여 컨시드(Concede- 매치게임에서 원 퍼팅이 가능한 근접 거리에 붙였을 때, 홀인을 인정하는 행위)를 받았다.

“겁먹은 것 같아요.”

“의욕이 너무 앞선 거지.”

“찾아보니까 로열 컵에 출전했더라고요. 그때 대기록을 작성한 프로님의 경기를 본 것 같아요.”

“매치 플레이, 이거 재미있네!”

2번 홀은 220야드의 파3 홀이다.

전장이 길어서인지 지저분한 벙커는 대부분 전면과 좌우에 위치했고 정확한 거리가 담보되는 샷만 할 수 있다면 그린에서의 플레이는 무난한 홀이었다.

필상은 7번 유틸리티를 잡고 부드럽게 휘둘렀다. 다소 길었지만 그래도 4m의 퍼팅은 버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퍽!

자질을 의심케 하는 샷이 나왔다.

220야드가 부담스럽다면 우드나 유틸리티를 잡으면 되는데, 크롱파는 아이언을 잡았다. 4번 아이언 같은데, 아마도 올 스퀘어를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려면 필상보다 더 붙여야 하는데, 그건 결코 쉽지 않다. 그런 마음이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는지 티에 놓고 때리는 샷인데도 뒤땅이 나오고 말았다.

데굴데굴 굴러 150야드 가량 나갔지만 웅성거리는 갤러리들의 실망 섞인 음성은 그를 나락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70야드 세컨샷도 터무니없이 짧아 퍼팅도 그가 먼저 해야 했다. 잘 붙이기는 했으나 그의 스코어는 더블보기, 오케이를 부르자 그도 쿨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크롱파 선수가 초반에 너무 무너지는 것 아닌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단신이지만 지난해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는 36위였고 평균 퍼팅수도 1.75로 최상위권입니다. 그린 적중률이 낮은 편이지만 작년에 이 대회를 우승한 뒤로 한층 기량이 향상되었는데,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경기를 펼치네요.

-퍼펙트 콩이 부담스러운 건 아닐까요?

-글쎄요. 그렇게 볼 수밖에 없지 않나 싶지만 아직 특별히 공 프로가 잘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좀 더 지켜보시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데뷔 이후 4연승, 이거 정말 대단한 기록 아닌가요?

-엄밀히 말해 2연승이지요. 중간에 아시안 투어 우승과 한국 투어 우승은 카운트가 되지 않습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말이다.

해설자는 단지 JGTO 우승만을 강조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데뷔전 우승을 포함해 연승한 선수는 손에 꽂을 정도다.

만약 일본 선수가 그런 대기록을 세웠다면 침이 튀어라 찬사를 보탰을 것이다. 그런 편협하고 배타적인 해설이 언제 호의적으로 바뀔지 기대하기 힘들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골프팬들은 바보가 아니다.

필상이 작성한 기록들은 그런다고 지워지지도 않으며 옹졸한 골프계의 민낯을 드러내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이미 팬들의 응원은 더 뜨거웠다.

강자지만 강자로 대우받지 못하는 현실을 부정하는 시각이 경기를 직접 지켜본 이들의 눈에는 감동이었던 것이다.

“곧 끝나겠네요.”

“매치 플레이에서 방심은 금물이야. 확실하게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도망갈 곳을 주면 안 돼!”

“그래도 이건 좀…….”

전반을 끝낸 현재 무려 6UP이다.

절반은 환상적인 샷으로 만들었지만 나머지는 상대가 자멸한 결과라고 해도 무방했다. 때문에 미사키도 풀이 죽은 크롱파를 안됐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물론 필상도 자신이 아는 태국 표현을 쓰고 싶었다.

‘짜이 옌옌!’ 마음을 진정시키라는 말이다. 하지만 괜히 자극하는 것처럼 비칠까 봐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다음 편에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