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68화 (68/354)

068. 매치 플레이

“필상아. 얼른 일어나 밥 먹어!”

“누나가 아침부터 웬 일이야?”

“너 때문에 왔지. 인간아.”

피곤하기는 피곤했나 보다.

누나가 깨워 눈을 뜬 시간은 아침 7시였다.

새벽 5시만 되면 알람처럼 자동으로 떠지던 눈이 제 역할을 망각한 걸 보면 집이 편해서일지도 모른다.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씻으러 나가려던 필상에게 큰누나는 어제 엄마와 나눴던 얘기들을 해 줬다.

필상이 선산을 사라고 거금을 줬다는 말에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마냥 울기만 하셨다는 대목에 가슴이 먹먹했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엄마. 저 일하러 갈 건데 괜찮죠?”

“그래.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 열심히 하기만 해.”

“그럼요. 절대 무리하지는 않을 거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네?”

“아무렴.”

아들과 함께 있는 걸 그 무엇보다 좋아하신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앞길을 막으실 분도 아니라는 것도 안다. 어디서 무얼 하든지 떳떳하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집을 나서는 것이 못내 죄송했다.

***

J&L 빌딩은 남서울CC 인근의 판교에 위치했다.

계약한 지 꽤 지났지만 필상이 사무실을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5층짜리 주상 복합 빌딩의 3개 층을 쓸 정도로 큰 회사라는 것은 도착한 후에야 알았다.

하기야 골프 매니지먼트만 하는 회사가 아니다.

다양한 종목의 선수들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10여 개의 퍼블릭 골프장의 위탁 경영까지 맡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다양한 사업을 한다는 사실은 사무실 명패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 물론 필상의 관심은 거기까지 닿지 않았지만.

“공 프로님!”

“아, 네.”

“대표님이 지금 한창 계약 관련한 논의 중이시라 제가 모시러 나왔어요.”

“네. 괜찮습니다.”

이 대표를 수행하는 서 비서가 현관까지 마중을 나왔다.

필상은 그녀의 안내를 받아 5층에 위치한 대표이사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고상한 품격이 묻어나는 인테리어는 편안한 느낌을 선사했다.

실내장식을 둘러보던 필상의 시야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회의실의 광경이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머리숱이 거의 없는 느끼한 인상을 지닌 중년 남자의 얼굴이 정면으로 비쳤다.

방에 들어설 때 누군가의 언성이 꽤나 높았는데 그 작자였던 것 같다. 언제나 친절한 이 대표가 직접 마중 나오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인 듯, 느낌이 좀 불길했다.

그런데 필상을 확인한 그가 대화를 멈추고 손짓을 했다.

‘나더러 들어오라는 건가?’

초면인 남자가 보인 첫 행동도 묘하게 거부감이 일었다.

언제 봤다고 오라 가라 하는 건지, 건방이 몸에 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대할 때 편견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아는데도 이상하게 거슬리는 자였다.

그래도 일단 회의실로 들어서자 이 대표가 반갑게 맞아 주었는데,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난감해한다는 사실을.

“미처 마중도 못 나가 미안해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전 괜찮으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끝나지 않은 논의부터 하세요.”

필상이 눈을 찡긋하는 걸 본 이 대표는 비로소 활짝 웃었다. 순식간에 회의실이 확 밝아진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아직 서로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은 중년인은 전혀 엉뚱한 접근을 개시했다.

“공 프로. 그러지 말고 같이 앉아서 합의를 보는 게 어때?”

“저는 공필상이라고 합니다.”

“아! 나이키 한국지사의 홍보 이사 장영국이오.”

“그런데 언제 봤다고 하대를 하십니까?”

“크으음!”

장 이사라는 자의 난감한 표정, 정말 볼만 했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지긋지긋하게 봤다.

꼴난 지위를 믿고 아랫사람들을 일단 무시하는 게 본분인 양 믿고 행동하는 부류, 실은 전권을 가진 오너도 아니다.

위임 받은 권한을 하늘이 내린 권리로 여기는 이런 자들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하는 내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던가.

참고 견디려 했지만 남은 것은 지독한 패배 의식뿐이었다.

먼저 손을 내밀었던 이 대표의 선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도 이런 작자가 만들어 낸 편견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상황을 맞이하자, 마주 보는 것도 역겹고 거북하기 그지없었다.

“미안하게 됐소이다. 그런 의도는 전혀 없는데…….”

“저는 모든 권한을 이 대표님께 일임했지만 그래도 좀 거북하군요. 이 대표님, 나이키 말고 계약할 회사가 없나요?”

“아니죠. 없기는 왜 없겠어요. 필상 씨가 온다는 오늘과 어제했던 말이 달라 짜증이 나던 차였어요.”

“그럼 그만두시고 저랑 점심이나 하러 가시죠. 좀 이른 시간이지만 공항 가기 전에 얼큰한 한국 음식이 당기네요.”

“이, 이봐! 젊은 친구가 예의가 전혀 없구먼!”

보다 못한 장 이사가 발끈했다.

아마도 기선을 제압당했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나서려는 이 대표를 제지한 필상이 그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189cm의 신장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필상이 위압적으로 다가오자 그는 깜짝 놀라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예의? 당신이 나서면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나이키와는 계약하지 않아. 지금도! 나중에도!”

잔뜩 겁먹은 그 작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설마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차갑게 변한 필상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공포심을 자아냈다. 까딱하다간 한 대 맞는 것에 그치지 않을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물론 필상은 무력을 행사할 의사가 전혀 없다. 하지만 이런 작자들에게는 이보다 효과적인 대응이 없는 것도 알고 있다.

게다가 되지도 않는 작자와 계약하며 을이 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차라리 스폰서가 없는 한이 있어도.

“가시죠. 대표님.”

“그래요.”

그래도 찾아온 손님이니 한 마디 인사라도 건넬 것 같았지만 이 대표 역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나섰다.

오너와 오너가 아닌 자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그 대신 서 비서에게 지시했다.

“아영아. 손님 가시면 소금 뿌려!”

“네. 대표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지만 스폰서랍시고 선수를 상품처럼 여기는 그런 자가 나서는 회사와 맺어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골프계에서 나이키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 않지만 인연이 아니라면 굳이 탐할 의사가 없었다.

“괜히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게 해서 미안해요.”

“다 저를 위해 수고하시는 거라는 걸 아는데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그 대신 오늘 밥 사시면 됩니다.”

“그건 어렵지 않죠. 호호호.”

깨끗하게 잊고 식사를 함께 나눴다.

하지만 이 대표는 여전히 나이키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아니면 그들이 줄 수 있는 것이 워낙 커서 그런지 계약 관련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장 이사를 배제하고 다시 논의를 해 볼게요.”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번 시즌은 이미 절반 이상이 지나갔으니까, 내년까지만 후원할 국내 기업을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역시 이 대표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나이키든 어디든 일단 필상이 후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접근했을 것이다. 하지만 필상이 구상한 목표를 무난하게 이룬다면 지금과 2021시즌은 또 다를 것이다.

덜컥 장기 계약을 맺는 것은 안정적이라는 장점도 있지만 도리어 평가절하를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서로 공감했다.

내년까지는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안 투어에 전념할 생각이라서 굳이 글로벌 기업의 후원까지는 불필요하다는 것이 필상의 생각이었다.

기왕이면 한국 기업의 후원이 편할 것 같다는 뜻도 전달했다. 관련 논의를 마친 필상은 한 가지 부탁을 추가했다.

김성호를 전속 캐디로 고용하고 싶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김성호의 능력이 괜찮은가요?”

“일단 제가 신뢰합니다. 모모코도 전속 캐디가 필요하니까 이참에 미사키를 그녀에게 붙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세미프로인데 캐디를 하려고 할까요?”

“제가 얼핏 의사를 타진했는데 말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어차피 캐디 계약은 1년 단위로 하면 되니까 일단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러면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공항까지 따라온 이 대표는 한 가지 사실을 귀띔했다.

이미 짐작했지만 두 여자의 관계를 고려해 묻지 않았던 내용은 바로 모모코가 한국에 왔다 갔다는 것이다.

‘왔으면 얼굴이나 보고 가지!’

***

“오빠!”

“공항까지 뭐 하러 나왔어.”

“우승 축하해 주려고 왔죠.”

“그건 우승한 날 직접 했어야지.”

“전화했잖아요?”

그녀는 자신의 한국행이 완벽했다고 철석같이 믿는 것 같았다. 그냥 속아 줄까 하다가 추후 그런 일이 또 생기면 곤란할 것 같아 낚싯밥을 던졌다.

“통화음에 공항 안내 방송이 들렸어.”

“네?”

“인천공항이었잖아.”

“으!”

대충 넘겨짚었는데 덜컥 걸려들었다.

통화한 시간을 되짚어 본 필상은 그녀가 공항에서 출국을 기다리며 전화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정확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들킨 뒤에 하는 짓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더는 채근하지 못했다. 안아 주고 싶은 걸 참느라 힘들 뿐.

“숙제는 다 했어?”

“그럼요.”

“확인해 보면 알지.”

“진짜 너무해요.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얘기나 할 거에요?”

“사람들 모이는 거 안 보여?”

필상도 이제는 제법 얼굴이 알려졌다. 하지만 차림새가 평범해 신경 쓰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필상을 만나러 공항까지 달려온 모모코는 연예인이 따로 없었다. 한껏 멋을 살린 핫팬츠에 양말 스타킹, 핑크빛 얼룩무늬 티셔츠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이 없다.

마치 나를 알아본 사람들 다 모이라고 광고하는 것 같았다.

“얼른 가요!”

“그래. 미사키. 그동안 잘 지냈어?”

“네. 저도 우승 축하드려요.”

“오케이. 밥 거하게 살게. 하하하.”

미사키도 함께 마중을 나왔다.

그래서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공항을 벗어났다. 다만 필상과 함께 뒷자리에 앉은 모모코는 미사키를 의식하지 않고 품에 폭 안겨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째 점점 더 농도가 짙어지는 것 같지만 억지로 떼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미사키는 둘의 관계를 알고 있어 부끄러울 뿐, 남이라고 생각은 들지 않아 다행이었다.

“전 며칠 쉬고 올 줄 알았어요.”

“그러려고 했는데, 대회가 잡혔어.”

“설마 ISPS 한다 매치 플레이?”

“응.”

“와아!”

모모코가 탄성을 터트린 이유는 한다 매치 플레이의 독특한 경기 방식 때문이다. 이미 7월에 2라운드의 예선이 치러졌는데, 참가하지 못한 필상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

힘들게 예선을 거쳐 올라온 16명과 시드를 받은 16명이 32강부터 5일간 매치 플레이를 펼치는 특급 대회이기 때문이다.

상금 총액도 2억 3천만 엔으로 가장 많고 JGTO 유일의 매치 플레이 경기라서 시드를 받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 직접 연락이 왔다.

“4연승이 확실히 효과가 있나 봐요!”

“그건 아닐 거야.”

“왜요?”

“스트로크 플레이와 매치 플레이는 다르잖아. 5일간 혈투를 펼치다 보면 의외의 변수가 많거든.”

“아! 재작년에 가타야마 신고가 우승했었죠.”

모모코도 기억하는 걸 보면 확실히 이변이었다.

가타야마는 통산 31승을 거둔 신화적인 선수지만 당시 나이가 44세였다. 쟁쟁한 젊은 선수들을 누르고 5천만 엔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전문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때문에 JGTO를 뒤흔들 가능성이 높은 필상에게 패배의 기억을 남기고 싶은 자들의 배려가 아닌 함정일지도 모른다.

우승만이 최선이라는 그릇된 생각이 낳은 기형적인 사고지만 필상은 자신을 시드에 넣어 준 것만으로 감사했다.

“저도 사이타마에 같이 가요.”

“한 주 쉬었잖아. 더 쉬는 건 안 돼!”

“다음 주에 JLPGA 챔피언십이 열리는데요?”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이 미안했지만 하필 다음 주에 메이저 대회인 일본여자골프선수권대회가 개최된다. 당연히 모모코는 그 대회에 출전해야 하고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멋진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컨디션 조절을 명목으로 이번 주 대회 출전을 종용하려고 했지만 그나마도 적절치 않았다. 골프5 레이디스 골프 토너먼트는 6천만 엔의 소규모 대회이고 이미 출전하지 않는다고 주최 측에 통보했다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착실하게 연습할 거지?”

“오빠 경기는 봐야죠.”

“그건 인정하지만 놀러 가는 것은 아니라는 걸 명심해.”

“아! 아저씨!”

“뭐?”

“오빠 나이면 그렇게 부른다던데요?”

아저씨는 한국말을 어디서 배운 것 같았다.

듣기 불편할뿐더러 정나미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싶지만 관뒀다.

괜히 싫은 내색을 하면 장난기가 가득한 모모코는 수시로 그 표현을 사용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ISPS 한다 매치 플레이가 열리는 하토야마CC는 도쿄와 인접한 사이타마 현에 위치해 차로 이동해도 1시간 거리였다.

이동하는 사이, 필상은 코스 관련 정보를 학습했다. 사이타마 현에만 무려 83개의 골프장이 있다는 사실에 먼저 놀랐다. 정말 골프 인구가 많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 준 대목이다.

주목할 점은 하토야마CC가 그중에서도 가장 럭셔리하고 난이도가 높은 코스로 정평이 나 있다는 것인데, 은근한 기대와 걱정이 교차했다.

스트로크 플레이가 아니기 때문에 타수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흥미롭지만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경기 방식은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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