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67화 (67/354)

067. 고지식해도 좋다.

-아! 진짜 아깝네요. 어떻게든 지켰어야 하는데…….

-누구든 당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김경태 프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봐도 됩니다. 때문에 고개 숙이지 말고 당당하게 남은 홀들을 공략하면 좋겠습니다.

-와우! 말씀 드리는 순간, 퍼펙트한 공 프로의 버디가!

-이로써 졸지에 선두가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5개 홀이 남았기 때문에 승부를 예단한다면 누구든 그 대가를 치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두 선수의 매치 플레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죠?

-그렇습니다. 스캇은 이미 무너졌고 앞 조에서 맹렬히 추격하던 안 프로도 지뢰밭을 건너며 타수를 잃어 결국 승부는 둘의 맞대결로 압축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공필상 -19/ 김경태 -18/ 안병훈 -14]

허 해설위원은 아직 승부가 끝나지 않았다고 했지만 가장 치명적인 14번 홀의 세컨샷이 끝나자 해설 방향이 바뀌었다.

지뢰밭 구성의 마지막 14번 홀은 말레이시아 롱GC의 5번 홀을 그대로 옮겨 놓은 시그너처 홀로, 이전 대회에서는 마지막 홀로 플레이되던 594야드의 파5 홀이다.

수많은 선수들이 이 홀에서 절망의 순간을 경험했다. 심지어 공식 투어 대회에서 12타를 친 선수도 나왔다.

마지막 홀에서 어떻게든 타수를 줄여 보려는 과욕이 부른 평정심을 잃은 결과였지만, 그만큼 우측을 타고 흐르는 호수가 주는 부담이 크게 작용하는 홀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또다시 306야드를 기록한 필상의 스트레이트 구질의 티샷이 페어웨이 정중앙에 떨어지자 동반자들은 흔들렸다.

김 프로의 티샷은 좌측 헤비 러프에, 스캇의 공은 호수로 직행하고 말았다. 그래도 침착하게 3온, 4온을 노리고 세컨샷을 했지만 필상의 3번 우드는 동반자들의 의욕을 불태워 버렸다.

-와우! 스텐손이 한국에 왔나요?

-해설이 필요한 상황이군요. ‘3번 우드맨’이라는 별명을 가진 스웨덴 출신 헨릭 스텐손은 한 인터뷰에서 아내보다 3번 우드가 더 좋다고 말했던 선수입니다.

-간이 큰 친구로군요. 하하하!

-프로 통산 20승을 거둔 강자입니다. 하지만 지금 공 프로의 우드 샷은 그의 장기에 버금가는 아주 멋진 샷이었습니다.

그런 평가가 무색하지 않은 것이 291야드가 남았던 필상의 세컨샷이 그린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물론 필상은 올릴 의도까지는 없었다. 거리보다는 정확한 방향과 구질에만 신경 쓴 샷이었는데,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대략 285야드 정도 나온 것 같아요.”

“그린에서 굴러서 그렇지. 280야드라고 보는 게 맞겠어.”

“도대체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든든한 캐디.”

“하하하. 빈말이라도 듣기 좋습니다.”

기분 좋은 말을 남겼지만 사실 필상은 뜨끔했다.

왜냐면 자신이 원한 방향은 그린이 아닌 좌측 페어웨이였기 때문이다. 우측으로 길쭉한 벙커와 호수가 있어 아예 넉넉한 좌측을 봤는데 클럽 페이스가 살짝 열려 맞은 결과였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때린 우드가 생각만큼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남은 홀에서 우드를 잡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지뢰밭이 내게는 꽃밭이 되었네!”

11m 퍼팅을 안전하게 핀에 붙인 필상은 힘겹게 파를 기록한 김 프로와의 타수를 2타 차로 벌렸다. 1타 뒤지다 2타를 앞섰으니 그리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값진 결과였다.

그런데 곁에 있던 성호의 대답은 필상을 만족시켰다.

“그럼 이제 ‘BEAR’S LANDMINE‘이 아니라 ’FLOWER BED’로 바꿔야겠네요.”

“FLOWER GARDEN이 정확한 표현 아냐?”

“왜 이러십니까! 제가 한때는 PGA진출까지 염두에 두고 조기교육을 받은 영재였다니까요!”

“베드라는 표현은 잘 떠오르지 않는데?”

“그렇게 쓴다니까요! 걔들은.”

필상도 영어라면 부족하지 않다.

유학을 간 적이 없어 한국식 영어라는 것이 단점인데, 공부와는 담을 쌓았을 것 같은 성호는 의외로 실전 영어에 강했다.

어릴 때부터 외국 투어 진출을 염두에 둔 부모님의 후원이 만든 자신감은 비록 투어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배낭 하나만 메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닐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영어라면 겁부터 먹는 미사키보다 성호가 더 PGA에 어울리는 캐디라는 것이 증명되는 일면이었다.

필상은 남은 4홀을 안전하게 운용했다. 우승을 위한 승부를 한 타이밍 빨리 펼쳤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가벼운 마음은 15번 홀에서 김 프로와 더불어 버디를 만들었고 이후 3홀의 진행에는 특별할 게 없었다.

-2타 차 단독 선두, 공필상 프로가 그린에 올라오고 있습니다. 뜨거운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는 무의미했다.

세컨샷이 그린에 오르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열렬한 환호와 박수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6m 남짓한 버디 퍼팅, 김경태 프로가 4m 버디 퍼팅을 성공하더라도 필상은 3퍼팅만 하지 않으면 우승이다.

퍼펙트 콩이라는 닉네임이 말해 주듯, 필상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강철 멘탈의 사나이였다. 아마추어 신분으로 일본 투어에 첫 승을 신고했고 72홀 최저타 기록을 세울 때도 그에게 긴장감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골퍼에게 이보다 큰 무기는 없다.

모자를 벗고 손을 흔들어 보이는 여유까지 갖춘 필상은 인사를 핑계로 주변 갤러리들을 쭉 둘러봤다.

‘가족들은 있는데, 요 녀석은 대체 어딜 간 거지?’

아무리 눈이 좋아도 수천 명이 넘는 인파에서 모모코를 찾을 수는 없다. 이미 위치를 파악한 가족들과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과 큰 무리를 이룬 그 틈에는 없었다.

비록 한 번 스쳐본 것에 불과하지만 필상은 모모코가 여기 온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이곳 청라GC가 인천공항에서 30분이면 닿는 거리고 그녀가 다음 주 대회를 위해 머물고 있는 도쿄에서 출발하면 3시간도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 의심을 더 부추겼다.

“누굴 찾으세요?”

“모모코. 아무래도 여기 온 것 같아.”

“……그래요?”

멈칫한 대답이 시원찮을 걸 보고 필상의 확신은 굳어졌다.

성호의 애매한 입장을 고려해 캐묻지는 않았지만, 경기에 집중이 필요한 필상과는 달리 성호가 여유 있을 때 모모코가 신호를 보낸 것 같았다.

그녀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은 도움이 되면 되었지 싫지 않았기에 경기부터 끝내고 생각하기로 결정한 필상은 일단 라이를 살폈다.

우승 퍼팅이 될 수도 있어 천천히 하라는 김 프로의 배려가 있었지만 필상은 속이 쓰릴지도 모를 그를 위해 먼저 어드레스를 취했다.

텅!

붙이는 것에 만족하려 했는데 홀컵 옆에 멈춰 섰던 공이 까딱까딱 하더니 갑자기 뚝 떨어졌다.

결국 필상의 최종 스코어는 -22, 지난해 신들린 샷을 터트려 우승했던 박상현 프로와 타이스코어 우승이었다.

괜히 배려를 사양했던 필상은 환호하는 팬들에게 꾸뻑 인사하고 손을 들어 잠시 조용해 달라는 부탁을 해야만 했다.

김경태 프로의 마지막 퍼팅이 남았기 때문이다.

엄청난 스트레스가 될 퍼팅이었지만 노련한 그는 좀처럼 침착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버디를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그러고는 가장 먼저 필상에게 다가와 포옹했다. 진정 어린 축하에 팬들의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온 것은 당연했다.

“얼른 가 봐. 어머니 기다리시잖아.”

“네.”

누나들이 등을 떠밀고 있었지만 엄마는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계셨다. 아마도 시골 할머니처럼 생각한 팬들이 흉이라도 볼까 봐 걱정하시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서 단숨에 달려가 와락 안아 드렸고 번쩍 안은 채로 그린에 돌아와 사람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며 승리를 만끽했다.

우승이 처음도 아니지만 감격은 남달랐다.

“엄마. 고개 드시고 손 좀 흔들어 주세요.”

“얼른 놔. 창피하잖아.”

“하하하. 난 엄마가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이 못난 아들을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안 되겠다 싶어 누나들을 손짓해 불렀다.

누나들이야 얼싸 좋다며 다가왔고 누나들이 그린에 올라온 뒤에야 엄마도 고개를 들고 다 같이 팬들에게 인사했다.

물론 열렬한 박수는 끊이지 않고 필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이어졌다. 아마도 그동안 쌓였던 응어리가 많이 풀리시지 않았나 싶었다.

난생 처음 효도를 하게 된 것 같아 필상도 꿈만 같았다.

후쿠시마 오픈 개막일이 6월 27일이었다. 신한동해오픈이 8월 29일에 개막되었으니 필상은 10주 동안에 무려 4승을 거둔 것이다.

도중에 모모코의 우승이 2번, 그중에 한 번은 동반 우승으로 겹쳤지만 기적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대위업이었다.

[퍼펙트 콩, KPGA도 점령!]

[신한동해오픈, 슈퍼 루키의 등장을 알린 무대가 되다]

[공 프로 -22언더 우승, 더 이상 감동적인 드라마는 없다]

[일본 투어, 아시안 투어, 한국 투어 연속 우승! 누가 감히 그를 루키라고 하겠는가!]

[세계가 주목하는 퍼펙트 콩. 그의 질주는 어디까지?]

[-18, -33, -31, -22. 16번의 라운드 스코어 합산 -104. 라운드 평균 -6.5! 말이 필요 없다!]

한국 언론만 떠들썩한 게 아니었다. 일본은 물론 골프를 즐기는 아시아 각국의 반응도 뜨거웠다.

퍼펙트 콩에게 아시아 무대는 너무 좁지 않느냐는 성급한 평가가 주를 이뤘고 애써 무시하는 논조만 보이던 유럽과 미국 언론들도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곧 유러피언 투어나 PGA의 초청이 있을 것이라는 섣부른 예상과 썩 유쾌하지 않은 분석도 섞여 있었다.

-앞으로 KPGA에 전념하실 의사는 없으십니까?

“저는 한국인입니다. 당연히 한국 투어는 최우선적으로 출전할 생각입니다. 다만 프로인 저로서는 보다 큰 도전을 위한 피치 못할 여정이 있어, 그 점은 넓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곧 PGA에 도전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신인에 불과한 제가 PGA에 도전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일단 사전에 계획한 일정을 차분하게 소화할 생각입니다.”

-혹시 초청이 된다면 출전할 의사는 있다는 말씀이군요?

“단정적으로 말씀드리기는 곤란합니다. 이미 어렵게 출전 기회를 허락한 주최 측을 실망시키는 것은 프로의 도리가 아닌지라 무리한 출전은 지양할 생각입니다. 또한 연승을 거뒀으나 아직 준비가 미비한 것도 사실이고요.”

-준비가 부족하다는 말씀은 인정하기 힘들지만 퀄리파잉을 통한 도전은 아직 계획에 없으시다는 거군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아시안 투어부터 착실하게 출전하면서 보다 많은 경험을 쌓고 기량을 닦아야 할 시기라고 판단합니다.”

우승 인터뷰에서 밝힌 필상의 의지는 결연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국 투어 출전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고 했지만 피치 못할 여정이 있다는 말에 함정이 있다.

올해 17개의 대회가 치러지는 KPGA는 상금 규모가 여자 대회보다도 작은 것이 무려 8개나 된다. 프로 선수가 보다 큰 상금이 걸린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필이면 한국보다 일본 투어 시드를 먼저 받아 확인이 필요하지만 긍정적으로 판단해도 올해 KPGA의 남은 대회 중에 필상의 출전이 예상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상금 규모 10억 원인 최경주 인비테이셔널, 하지만 같은 기간에 펼쳐지는 ZOZO 챔피언십은 JGTO에서 상금 규모가 작은 대회인데도 10억 엔이 걸려 있다.

게다가 필상의 출전이 예상되는 상금 규모 20억 엔인 일본오픈이 1주 전에 열리기 때문에 ‘무리한 출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

“며칠 쉬지 그래요.”

“아닙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사무실에서 뵙죠.”

“그럼 시간 맞춰 준비할게요.”

인터뷰까지 마친 필상은 집에 가기 전에 이 대표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녀가 이틀 후에 메인 스폰서와의 계약을 추진할 거라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이틀이나 허비할 의사가 없었다. 어련히 이 대표가 알아서 잘하지 않았을까 판단해 내일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에 만나자고 밝혔고 이 대표는 동의했다.

메인 스폰서 계약은 매우 중요하지만 당장 벌어들인 상금도 평생 만져 보지 못한 거액이라 돈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부당한 대우는 참을 생각이 없지만 서둘러서 좋을 것도 없다는 게 필상의 생각이었다.

“뭐? 내일 아침에 간다고?”

“응. 놀면 뭐해.”

“노는 게 아니고 쉬는 거잖아.”

“쉴 만큼 힘들지 않아. 그래도 엄마가 섭섭해할지 모르니까 누나가 좀 도와줘.”

“내 동생이지만 정말 무섭다, 무서워.”

엄마와 작은누나들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먼저 돌아갔고 기다린 큰 누나는 필상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바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오늘 가족들에게 큰 감동을 안겼지만 쉴 새도 없이 다시 출국한다는 말에 큰누나는 기가 막힌다는 투였다.

그러나 필상이 내민 통장을 얼른 열어 본 누나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았다. 3억 원이라는 거액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거로 일단 계약해.”

“계약?”

“선산.”

“별것도 없는 그 산은 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모신 산은 되찾아 와야 할 거 아냐!”

“알았어.”

누나는 뜬금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탕진한 재산 중에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선산이었다.

어릴 적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선산까지 판 걸 아신 엄마가 아버지랑 심하게 싸웠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 생생했다.

다른 말은 몰라도 죽어서 누울 자리 하나 없는 게 너무도 원통하다고 한탄하시던 울분을 듣고 자신이 커서 성공하면 그 소원은 꼭 들어 드리겠다고 다짐했었다.

요즘 세대는 사후 육신의 처리에 대한 관념이 달라지는 추세지만 적어도 엄마는 그리 생각하시는 분이다. 그런 모습을 봐서 그런지 필상도 그 점에 대해서는 고지식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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