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지뢰밭
3라운드에서 과거의 명성을 되새기게 만드는 최고의 경기를 펼쳤지만 김경태의 예선 기록은 필상과 다르지 않았다.
2타 차 공동 선두, 상위권의 변화도 심해 지난 이틀간 선두를 유지하던 선수 중에 가장 눈에 띠는 선수는 스캇 빈센트였다.
아시안 투어 시드로 출전한 그는 묘하게도 이 대회와 인연이 깊다. 짐바브웨 국적인 그는 1992년생이고 2015년에 프로 데뷔를 했지만 아직 우승이 없다.
그런데도 신한동해오픈에서는 3년 연속 2, 3, 2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KPGA의 메이저 대회이건만 유독 강한 그는 올해도 믿기 어려운 경기력을 보이며 공동 선두에 위치했다.
때문에 필상의 저녁 식사 반찬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6, -4, -4이라면 굉장히 안정적인 경기력이네요.”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가 300야드에 육박한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내일은 제대로 임자를 만나지 않을까?”
“공동 선두인 형이 책임지세요.”
“내가? 난 내 경기에만 집중할 건데?”
“그럼 걔를 책임질 임자가 저라는 겁니까?”
“하하하!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그렇게 될 거야.”
김 프로의 장담은 거짓말처럼 맞아떨어졌다.
하필이면 송곳 샷의 대가인 두 선수와 한 조를 이룬 것이 그의 불행이었다. 티샷을 멀리 보내고도 먼저 그린에 쩍쩍 올리는 광경에 어께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스캇 빈센트가 왜 저러죠?
-장타자의 함정에 빠진 겁니다. 김경태와 공필상 프로는 마치 누가 더 짧게 날리는지 내기하는 것처럼 먼저 세컨 샷을 한 선수가 핀에 더 가까이 붙여 버리잖습니까!
-티샷을 30야드 이상 더 날리고도 번번이 온 그린마저 실패하는 것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거군요.
-아주 미치고 환장할 노릇일 겁니다.
티샷을 멀리 보내는 것은 골퍼의 영원한 로망이다.
1야드만 더 보내도 세컨 샷 지점에 가면 뿌듯한데, 문제는 한참 뒤에서 치는 선수가 먼저 핀에 붙여 버리면 오히려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연속 두 홀에서 받은 충격이 너무 컸나 봅니다.”
“찌질하다면 너무 심한 말일까?”
“그럼요. 당한 사람은 아마 죽을 맛일 겁니다.”
1번 홀에서 필상이 146야드의 세컨 샷을 2m에 붙이자 이에 질세라 김경태가 142야드 세컨 샷을 3m에 떨구며 응수했다.
그러자 119야드를 남긴 스캇은 아예 그린에 올리지도 못했고 어프로치마저 터무니없이 짧아 3온 2퍼팅으로 졸지에 버디를 기록한 필상과 동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2번 홀에서는 아예 역전이 됐다.
김경태와 필상은 나란히 3온 작전을 구사해 어프로치를 핀에 붙인 뒤, 버디를 잡았다. 하지만 2온을 노렸던 스캇은 세컨 샷이 그린을 훌쩍 넘어 가드 벙커에 굴러들어 갔다.
그나마 철퍼덕대다가 겨우 2번에 빠져나와 파 퍼팅을 성공한 것도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그러더니 온갖 함정으로 도배가 된 222야드의 난잡한 파3 홀에서는 급기야 티샷마저 흔들리고 말았다.
-첫 두 홀 빼고는 코스 세팅이 상당히 어렵군요.
-네.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고약한 세팅인 것 같습니다. 결국 매치 플레이처럼 되었는데 누가 먼저 무너지는지 그걸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습니다.
-관록과 패기의 대결이라고 봐야 하나요?
-글쎄요. 아직은 둘 다 차분한 운영을 하고 있는데, 이대로 끝나면 패배가 될 공 프로가 먼저 칼을 빼 들 것 같습니다.
[김경태 -17/ 공필상-15/ 안병훈 -13/ 스캇 빈센트 -12]
전반을 마친 리더 보드는 김경태의 관록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증거였다. 허 해설의 지적대로 필상은 전략 수정이 불가피한 상태였다.
김경태가 도무지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팽팽한 경기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공격의 시작은 의외로 10번 홀이었다.
“드로우를 걸 거야.”
“‘공격 앞으로!’입니까?”
“응. 에이밍을 확인해 줘.”
“네.”
파타야에 위치한 람차방CC 밸리 코스 6번 홀을 그대로 옮겨 놓은 535야드의 10번 홀은 평상시 파5로 플레이가 된다.
하지만 프로에게는 난이도가 낮고, 전장이 길어지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492야드의 파4로 탈바꿈시켜 진행된다.
프로들에게도 결코 만만치 않은 상당히 긴 홀이다.
김경태는 정석대로 페어웨이 좌측을 보고 286야드를 공략했다. 남은 거리가 210야드를 조금 넘지만 유틸리티로 안전한 공략을 하면 적어도 타수를 잃을 가능성은 낮다.
쉬이잉!
필상이 빈 스윙을 하자 김경태의 눈빛이 빛났다. 평소 보지 못한 강력한 스윙이었기 때문이지만 곧 평온을 되찾았다.
추격해야 하는 필상의 입장을 이해한 것인데, 우측을 심하게 보는 스탠스를 취할 때는 오히려 이마에 주름살이 잡혔다.
평소 구사하지 않는 샷을 하는 것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자칫 위험지역으로 가면 추격은커녕 반전을 노리는 경쟁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필상의 생각은 달랐다.
김 프로가 공략한 좌측이 좋은 이유는 그린을 공략할 때 장애물이 없어서 방향만 신경 쓰면 되지만, 만약 컨트롤이 가능한 190야드 안에 공을 보낼 수만 있다면 가로가 넓고 폭이 좁아도 얼마든지 그린에 공을 세울 자신이 있었다.
까앙!
-어? 저건 뭐죠?
-강력한 드로우 샷을 구사한 것 같습니다.
-공 프로에게 저런 샷이 있었나요?
-지난번 로열 컵에서 대기록을 작성할 때 기억나십니까? 마지막 홀에서 한 번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
-아! 엄청난 드로우를 날린 뒤 핀에 붙여 버디, 그래서 33언더를 만들었죠!
-그런데 그때보다 훨씬 강력한 것 같습니다.
한참 중계진이 대화를 나눠도 아직 공은 하강하지 않았다. 너무 체공 시간이 길어 정말 깊은 숲으로 들어가 OB가 나는 게 아니지 걱정스러웠다.
“와아아아!”
“기가 막힌 드로우네!”
최고점을 앞두고 서서히 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하강할 때는 마치 롱훅을 건 볼링공처럼 급격하게 좌측으로 휘었다.
울창한 숲을 벗어났고 크로스 벙커가 도사리고 있는 헤비 러프도 지나더니 급기야 퍼스트 컷에 떨어진 공은 다시 미친 듯이 굴렀다.
캐리만 301야드, 런도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이게 대체 뭐지?”
“하하하. 퍼펙트 드로우 샷이죠!”
“공 프로한테 저런 샷이 있었나?”
“드물게 드로우 샷을 연습하긴 했지만 이렇게 세게 때리는 건 저도 본 적이 없어요.”
“우와! 330야드를 넘은 거 아냐?”
“그런 거 같은데요!”
필상이 날린 드라이버 비거리는 334야드로 측정되었다.
물론 장타자들이 작정하고 때리면 충분히 낼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평온한 상황이 아니잖은가!
게다가 지금처럼 드로우 구질로 페어웨이 중앙을 노리려면 홀의 우측 경계보다 더 오른쪽을 봐야 하는데, 그게 어디 살 떨려서 시도나 할 수 있겠나?
그런데 필상은 과감히 시도했고 모두가 깜짝 놀랄 기대 이상의 훌륭한 결과를 얻어내고야 말았다.
세컨 샷 지점에 도착해 남은 거리를 확인한 성호는 싱글벙글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반면 필상의 표정은 차가운 얼음처럼 아무런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로지 세컨 샷을 핀에 붙일 최적의 방도만 생각한 것이다.
“더도 말고 160야드 남았네요.”
“162야드야. 정신 차려!”
“네!”
아마추어들의 흔한 실수 중에 하나가 바로 드라이버 샷을 잘 날린 뒤, 온 그린 할 욕심에 세컨 샷 미스가 많다는 거다.
프로라고 다르지 않다.
오늘 초반부에 스캇이 보여 줬듯이 뒤에 있는 선수들이 굿 샷을 날리거나 지나치게 흥분하면 의도치 않은 샷이 나올 수 있기에, 필상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성호도 필상의 마음가짐을 금방 깨닫고 얼른 집중하며 샷을 위한 여러 조건들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따악!
김경태는 유틸리티를 잡지 않고 4번 아이언을 선택했다.
그에게 남은 거리는 212야드, 적어도 방향은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의 반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도 굳건하던 그의 아이언 샷이 흔들렸다.
아무리 담담하려고 애써도 필상의 비밀 병기를 확인한 것이 심적인 동요를 불러온 것 같았다.
“넘어가겠는데요?”
“응. 너무 힘이 들어가 펀치 샷처럼 됐어.”
“우와! 경태 형도 사람이었네요.”
“상대적인 거니까!”
필상은 예측이 들어맞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드로우 샷이 지금처럼 완벽한 자리에 오지 않더라도 웬만하면 김 프로의 세컨 샷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봤다.
스캇이 장타를 때리는 것은 예측 가능했지만 필상의 장타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충격은 더 컸을 것이다.
게다가 160야드를 남긴 필상이 핀에 붙인다는 생각을 하면 더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게 현실이 되고 말았다.
탄도가 낮았던 공은 그린 앞부분 프린지에 맞았지만 심하게 굴러 그린을 오버했다. 문제는 그 뒤에 그린 벙커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인데, 거기까지 굴러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지점을 바라보던 필상은 눈을 껌뻑인 뒤, 재차 한 지점을 확인했다. 헛것을 봤다고 생각되지만 방금 전에 보였던 낯익은 여자 둘은 그새 사라졌다.
‘설마?’
가족들이 라운드를 따라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초대했고 혹시 부담을 줄까 염려했는지 가족들은 멀찍이 서서 최대한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애썼다.
그런데 자신이 봤던 두 여인은 얼핏 모녀처럼 보이지만 출중한 미모의 중년 여인은 이보영 대표 같았고, 그 곁에 서서 공이 벙커에 들어갔다는 사인을 보낸 어린 여자애는 아무래도 모모코 같았던 것이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까지 낀 위장한 모습이 더 의심스러웠다. 분명히 직접 공항까지 배웅하고 보내지 않았던가!
물론 한국 투어에 전념하느라 지쳤고 우승했으니 이번 주는 휴식을 취하면서 최소한의 연습만 하라고 스케줄까지 짜 줬다.
“형!”
“아! 그래.”
하필이면 가장 집중해야 할 때에 의심스러운 장면을 보다니, 굉장히 찜찜했지만 의외로 연습 스윙은 가벼웠다.
8번 아이언을 잡고 컨트롤 샷을 할 건데, 단번에 이미지가 맺혔다. 이번 대회 들어서 좀처럼 깨끗한 이미지가 맺히지 않아 불안했던 필상은 비로소 샷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찼다.
얼마나 정확하게 임팩트가 이뤄졌는지 공이 맞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가뿐히 떠낸 벤트글라스가 좌측으로 날았지만 시선은 자신이 만든 예쁜 디봇에 박혀 있었다.
오로지 팬들의 함성 소리만 귀가 따갑게 울릴 뿐이었다.
-퍼펙트! 퍼펙트 공! 이보다 완벽할 수 있나요?
-그럼요. 샷 이글이 나오면 더 완벽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건 정말 너무한 말씀입니다. 30cm도 되지 않을 탭인 버디 기회를 얻었는데, 뭘 더 바랍니까!
-지금까지 버디가 10개나 나왔습니다. 417번의 시도에서 11개면 대략 2.4%에 불과하지만 이만큼 가까이 붙었던 적은 없었지요. 니어 리스트를 뽑는다면 그건 공 프로의 차지가 되겠네요. 하하하.
-그 버디들과는 상황이 다르잖습니까!
-그도 그렇군요.
이 어려운 홀에서 버디가 10개나 나온 것도 대단하지만 그건 대부분 선두권이 아닌 도전적인 시도가 필요했던 선수들의 모험적인 샷이 만들어 낸 결과다.
그것도 대부분 롱 퍼팅이 들어간 것이고 장타를 날려 미들 아이언으로 핀에 붙여 버디를 낚은 경우는 2번뿐이었다.
더욱이 우승 경쟁을 하는 선수라면 절대 감행하기 어려운 시도를 감행했고 그 결과 또한 어느 때보다 의미가 깊었다.
필상이 버디 기회를 잡자 벙커샷을 하는 김 프로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시 그는 괴물이었다.
텅!
그 강한 압박 속에서도 그는 그림 같은 벙커샷을 선보였고 기가 막히게도 튀어 오른 공은 홀컵에 빨려 들어갈 뻔했다.
깃대를 정통으로 맞춘 공을 1m 남짓한 거리에 세운 김 프로는 침착하게 파를 기록하며 아직 우승을 넘보기에는 멀었다는 강렬한 신호를 보냈다.
필상도 침착하게 버디를 잡으며 1타 차의 추격을 개시했다.
결국 승부의 향방은 ‘BEAR’S LANDMINE(지뢰밭)’이라는 팻말이 적힌 12, 13, 14번 홀에서 결정될 것 같았다.
팻말에 당당히 이르기를, 미국에 ‘BEAR TRAP’이 있다면 한국에는 ‘BEAR’S LANDMINE‘이 있다며 공개 협박을 했다.
하지만 그런 위협도 무색하게 어제까지의 핸디캡은 그저 중상위에 머물렀다. 대부분의 선수가 이 홀들의 공략에 대해 연구하고 대비한 결과인데, 프로 선수의 기량이 어떤지를 극명하게 보여 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은 이 지뢰밭의 진가를 보일 것이라고 밝힌 상황이라서 필상으로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최 측에서 지뢰를 심어 놨다고 장담하던데, 오늘 스코어가 지난 3일과는 확연히 다르게 나오고 있죠?”
-그렇습니다. 다만 안전한 공략을 하면 파는 크게 어렵지 않은데, 기이하게도 타수를 잃은 선수들이 많습니다.
-타수를 줄이려다 당한 거겠죠? 천하의 박성현도 트리플보기를 하는 바람에 우승을 놓칠 뻔했던 홀이 지금 14번 홀이었죠?
-그렇습니다. 당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우승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들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자 거리도 좀 늘리고 핀의 위치도 까다롭게 했다는데, 과연 선두권은 어떤 공략을 할지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평소에는 16, 17, 18번 홀인데, 순서를 바꿨다.
지뢰밭에서 크게 망가져도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중간에 넣은 것은 그나마 배려 같지만 1타가 소중한 선두권 경쟁은 여기서 판가름이 난다고 보는 것이 합당했다.
여러 생각이 겹치는 가운데 파3, 12번 홀에 들어섰다.
“192야드입니다.”
“9야드 내리막이니까 183야드를 보면 되나?”
“네. 약간의 뒷바람이 있습니다.”
“그럼 181야드?”
“네. 핀이 앞에서 4야드, 우측에서 5야드입니다.”
“스트레이트! 8번 아이언으로 가자.”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