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64화 (64/354)

064. 배수의 진

“무게 중심이 너무 뒤에 남아 있는 거 아닌가요?”

“오케이! 가르치는 보람이 있네.”

“제가 드디어 하나 잡아낸 겁니까? 하하하.”

골프의 모든 스윙은, 하다못해 어프로치도 몸통이 회전하지 않은 채 팔로만 채를 휘두르면 실수가 유발되게 마련이다.

몸통의 회전은 무게 중심의 이동과 연동되며 컨트롤 샷을 할 경우에도 중심 이동의 차이는 결과적으로 현격한 차이를 발생시킨다.

흔히 연습장에서 만나는 대다수의 아마추어들은 팔의 궤적이나 클럽헤드의 경로에 집착하지만 보다 면밀히 살펴야 하는 것이 바로 체중 이동이다.

연습 스윙은 완벽하지만 실전 스윙이 엉망인 이유는 자연스럽지 않은 체중 이동에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탓이다.

“이 코스에서 어떻게 8언더를 쳤지?”

“아! 지난해 박상현 프로 말입니까?”

“응. 절대 쉽지 않은 코스잖아.”

“신이 내렸던 거죠. 하하하.”

지난해 같은 코스에서 펼쳐진 신한동해오픈 우승자는 통산 8승의 강자, 박상현이다. 그런데 연습 라운드를 진행한 결과 그가 만든 -22라는 스코어는 믿기지 않았다.

잭니클라우스가 설계한 청라GC는 세계 최고의 27개 홀을 골라 구성한 코스인데, 절대 만만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2라운드에서 보기 2개를 기록했지만 남은 3일은 보기 없는 무결점 플레이를 펼쳤으며 최종 라운드는 무려 -8을 쳤다.

“미리 와서 연습 라운드를 했어야 하는데…….”

일요일에 모모코의 대회가 끝났고 월요일에는 공항까지 배웅을 하느라 본격적인 연습은 이틀밖에 하지 못했다.

보다 일찍 준비했어야 하고 귀국한 첫 주에 시간을 내 연습 라운드라도 왔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미처 의식하지 못했지만 대회에 임하는 자신의 마음가짐이 느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모코의 대회가 먼저라서 거기에 집중하느라 정작 자신의 대회 준비는 미비했던 것이다.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전한 대회마다 우승하며 주가를 올리고 있지만 KPGA는 시드도 없는 아시안 투어 우승자 자격이라는 것을 망각했다.

“일정상 어쩔 수 없었잖아요.”

“그건 핑계가 될 수 없지!”

“그래도 잘할 수 있을 겁니다.”

필상도 성호의 그 말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필상의 국내 데뷔 무대는 실망스러웠다. 물론 몇몇 전문가들은 가능성을 봤다는 호평도 내렸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날 저녁 심히 술이 고팠다.

버디를 6개나 잡은 것은 나무랄 데 없었다. 그러나 보기 2개와 13번 홀에서의 더블보기는 처음 경험한 악몽이었다.

도전적인 세컨 샷이 살짝 밀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경사지에 맞고 호수에 빠진 이후 상황은 아마추어나 다름이 없었다.

“실망시켜 송구합니다.”

“공 프로의 실력과 근성을 아는데, 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아닙니다. 너무 자만했습니다. 방대한 자료를 주셨는데 정작 코스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경기에 나서다니,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이 대표가 식사 자리에 동석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으나 투어 대회에 나선 이후 최악의 하루였다.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기에 통렬한 자기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 대표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필상에 대한 신뢰의 징표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미안했다.

“신고식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업 앤 다운이 너무 심했습니다. 한 번 꼬이니까 과욕이 앞선 것도 사실이고.”

“이제 하루 지났을 뿐이에요. 한 단계씩 올라서면서 역전 우승을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래야지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역전 우승이라니!

-2는 현재 공동 19위였다.

안병훈이 -6으로 단독 선두에 나선 뒤로 -5가 6명이나 된다. 층층이 쌓인 선수들의 면면을 보노라면 언제 이들을 다 제킬 수 있을지 답답했다.

“공 프로. 여기 있었군!”

“아! 네. 이제 끝나셨나 보군요.”

“흑돈아! 형님 왔다.”

“아, 진짜! 제 나이가 몇 개인데 계속 그 별명을…….”

“한 번 동생은 영원한 동생! 고로 흑돈이라는 아름다운 별명도 영원해야지. 장가가서 아들이라도 낳는다면 모를까!”

일이 바쁜 이 대표가 나가자마자 김경태 프로가 찾아왔다.

경기가 늦게 끝난 터라 곧바로 달려왔다는데, 이미 화요일에 만난 뒤로 이렇게 늘 함께 연습도 하고 밥도 먹었다.

기존 투어프로들과 안면이 거의 없어 서먹서먹할 수도 있을 상황인데, 그의 존재가 필상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성호가 지금처럼 양념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어 보였다.

“오늘 경기가 잘 안 풀린 모양이데?”

“네. 제가 과욕을 부렸나 봅니다.”

“과욕? 샷에 이상이 있었던 거야?”

“딱히 그렇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너무 신경 쓰지 마. 스윙이 무너진 것도 아니면 그냥 잘 치고 싶은 마음이 좀 과했던 거잖아. 그건 다 그래.”

김 프로는 오늘 결과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조언했다. 잘 치는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는데, 못한 것만 너무 집착하다 보면 좋은 샷에 대한 감각마저 잃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차라리 깨끗하게 잊고 다시 시작하라는 말은 지금의 필상에게 아주 적절했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조언이기에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퍼펙트! 샷의 일관성은 정말 최고로군요!

-그렇습니다. 오늘은 특히 홀마다 전략을 달리하는 것이 아주 인상 깊습니다. 버디를 잡을 홀과 지키는 홀을 사전에 구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원한다고 되는 건가요?

-지금까지는 잘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마음은 급했지만 2라운드는 전략적으로 운용했다. -2는 만족할 스코어가 아니지만 선두와 5타 차는 아직 우승 경쟁에 뛰어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차분하게 순위를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그 와중에 코스에 대한 적응도 마칠 요량으로.

경기 내내 무서울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한 결과 전반에 3타, 후반에 2타를 줄이며 무보기 플레이를 완성했다.

-퍼펙트 공, 오늘은 자신의 닉네임에 어울리는 경기를 펼쳤다고 봐야 하나요?

-물론입니다. 첫날부터 늘 선두에 나서 빈틈없는 경기를 펼쳐 최종 라운드가 되면 아예 경쟁자들이 쫓아올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이전 세 대회의 기록과 비교하면 실망스러울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골프가 늘 마음처럼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이겨 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 고국에서의 경기가 오히려 부담이 된 걸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아시안 투어나 JGTO의 경쟁력이 KPGA보다 낮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현격한 기량 차이를 보이며 3승을 거뒀습니다. 항간의 평가와는 달리 그의 천재적인 역량은 이미 입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대회도 역시 강력한 우승 후보라고 봐야 하나요?

필상의 예선 성적은 -7로 공동 8위였다.

선두와는 4타 차,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 하지만 기회는 모든 선수에게 동일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여전히 우승 후보라고 말하기에는 좀 부족했다.

그러나 허 해설은 굉장히 긍정적인 전망을 내 놨다.

어제보다 오늘 경기 내용이 좋았고 보기 없는 무결점 플레이를 펼친 것을 높이 평가했다. 일부 팬들은 지나친 호평이라고 반박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기대감을 드러냈다.

왜냐면 한국 남자 골프에도 이제 영웅이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경주, 양용은의 뒤를 이어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 히어로의 탄생을 바랐지만 될 듯 될 듯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런 와중에 혜성처럼 나타나 전무후무한 최저타 기록을 세워 퍼펙트 콩이라는 닉네임까지 얻은 선수가 나타났으니 그 기대가 지나침은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밥 먹으러 가야지.”

“멀리 가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소풍 가시죠.”

무슨 말인가 했더니 큰 누나가 음식을 잔뜩 싸 들고 왔다.

성호와 미리 연락을 주고받은 누나는 이미 콘도 정원에 여러 사람을 초대해 성대한 식탁을 마련해 둔 상태였다.

이 대표는 물론 먼저 경기를 끝낸 김 프로와 그의 캐디까지 와 있었다. 여주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아침부터 일어나 동생에게 먹일 음식을 준비한 누나는 행복한 얼굴이었다.

“사 먹으면 되는데 번거롭게…….”

“엄마 등쌀에 나도 오늘 하루 공쳤거든!”

“엄마도 모시고 오지 그랬어.”

“괜히 부담 주는 것 같아 싫으시대. 골프 룰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네 경기는 눈이 빠져라 보면서.”

사 먹는 게 저렴하고 편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는 고생하는 아들에게 당신이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으셨던 거다. 늘 노력했던 아들이 실직하고 낙향해 술에 찌들어 사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애가 마르셨을까?

엄마에게는 요즘 하루하루가 너무도 소중하고 자랑스러우신 것 같았다. 경기가 중계되는 시간에 음식을 잔뜩 차려 동네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신단다.

“누나. 일요일에는 엄마랑 친구 분들 다 모시고 와.”

“정말?”

“비용은 내가 다 댈게. 동네 사람들도 오시겠다는 분들 많으면 아예 버스 대절해서 와.”

“그러다……. 알았어!”

필상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아직은 우승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하지만 이건 배수의 진이었다.

설사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우승 경쟁을 펼치면 팬들의 응원은 따를 것이라서 체면은 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로지 우승, 나를 위하는 일이지만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엄마를 위해 승리를 바치겠노라 다짐했다.

“굿 샷!”

1번 홀은 431야드의 파4 홀이다.

지난 이틀 평균 타수는 4.11로 타수 난이도는 5위지만 첫 홀의 부담감이 작용한 결과일 뿐, 직선으로 쭉 뻗은 코스는 페어웨이만 지키면 무난히 파를 잡을 수 있는 홀이다.

하지만 필상의 티샷은 보기 드물게 289야드를 찍었고 페어웨이를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팬들은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별 반응이 없던 팬들도 143야드를 공략한 세컨 샷에서는 일제히 함성이 터졌다.

전체 홀의 크기에 비하면 손바닥처럼 작아 보이는 그린을 향한 공이 높고 정확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갔기 때문이다.

-와우! 붙었습니다. 2m도 되지 않는 버디 찬스네요!

-티샷을 페어웨이 좌측으로 보낸 걸 보면 애초에 핀을 바로 공략하기 위한 절차로 보입니다. 이 홀은 TPC 미시간 9번 홀을 그대로 옮겨 놓은 홀로 어려운 점은 페어웨이의 언듈레이션이 보기보다 심하다는 것과 그린이 작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저 샷은 굉장한 샷이로군요.

-물론입니다. 다운 힐 라이라도 걸리면 저런 과감한 샷은 불가능하죠. 그린의 진입 폭이 좁고 자칫 길게 치면 뒤편의 잡목이 우거진 러프에서의 숏 게임이 무척 어렵습니다.

-그럼 최적의 지점을 미리 확인하고 그리 보냈다는 건가요? 드라이브 티샷으로 그런 컨트롤이 가능한 겁니까?

-평소보다 훨씬 긴 티샷을 구사한 것이 그 증거가 아닌가 싶습니다.

해설위원의 분석은 정확했다.

물론 한 지점을 찍은 것은 아니지만 페어웨이 좌측의 290야드 부근이 세컨 샷을 그린에 올리기에 가장 안정적인 라이라고 판단했고 그곳으로 정확한 티샷을 보냈다.

중간에 위치한 크로스 벙커를 넘기는 부담이 있어 알고도 잘 공략하지 못하지만 필상은 그걸 해내는 순간, 핀에 붙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자신의 공략을 버디로 연결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어진 2번 홀이 지난 이틀간 가장 쉽게 플레이된 파5 홀이라서 이글에 대한 욕심도 없지 않았지만 필상은 무리하지 않고 3온 1퍼팅으로 연속 버디를 잡는 데 성공했다.

“아! 정말 아깝네요!”

“붙인 게 다행이야. 조금만 길었으면 경사를 타고 한참 굴렀을 거야.”

222야드의 파3 홀에서도 온 그린에 성공했다.

벙커 반, 러프 반에 페어웨이는 쪼끔인 난잡한 코스 설계를 무시할 수 없어 필상은 아예 그린 중앙을 공략했다.

7m 남짓한 옆 라이에서 시도한 퍼팅이 홀컵을 스치며 지나가자 성호는 주먹을 불끈 쥐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필상은 홀컵에 붙인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 홀은 무빙데이를 자신의 날로 만들고 싶은 흥분한 선수들을 유혹하기에 더없이 좋은 세팅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핀이 꽂힌 지점은 온 그린하고도 3퍼팅을 부르는 위치였다.

-더없이 좋은 플레이를 펼쳤고, 오늘만 5타를 줄인 스코어도 굉장했는데, 왜 많이 아쉽다는 느낌이 드는 거죠?

-오늘따라 아까운 퍼팅이 많았습니다. 2, 3개 정도는 더 떨어질 수 있었는데, 하여튼 -12로 공동 3위잖습니까!

-데일리 베스트를 기록하며 7타를 줄인 김경태 프로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강한 건가요? 김 프로는 괴물이라는 별명이 떠오르게 만드는 멋진 하루였던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원숙한 플레이가 돋보였던 경기였습니다. 일본에서 같이 활동해서 그런지 공 프로와 상당히 친해 함께 연습을 한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후배의 무서운 질주를 보면서 큰 자극을 받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 상승효과를 낸다면 그것도 무척 유익한 만남이 아닌가 싶네요. 이로써 우승 경쟁도 더 흥미로워질 것 같고요.

[김경태 -14/ 스캇 빈센트 -14/ 공필상-12/ 안병훈 -12]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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