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63화 (63/354)

063. 아부 말고 지적

‘이 홀만 잡으면 승부는 끝인데!’

18번 홀이 핸디캡 1번, 17번 홀이 핸디캡 2번이다.

하지만 버디를 노릴 경우에는 타수를 잃을 수도 있으나 파를 하고자 한다면 그건 어렵지 않다는 게 필상의 판단이다.

2위와 1타 차, 3위와 2타 차로 벌어진 상황이기에 이 홀에서 파만 해도 일단은 무난하지만 버디라도 잡는다면 승부는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날씨 탓인지 티 박스에서 바라본 홀의 전경은 삭막했다.

중간에 놓인 긴 연못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좌측의 라이트 뒤로는 벼랑이고 우측은 가파른 산등성이였다. 고로 바람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거세게 불어 누구라도 우측을 볼 것이다.

깡!

모모코의 유틸리티가 공이 깨져라 때려 댔다.

필상이 요구한 대로 낮게 깔린 공이 무서운 속도로 그린을 향해 쏘아졌다. 워낙 낮은 탄도라 거센 바람도 소용이 없었다.

다만 너무 정직한 방향이 아닌지 염려되었는데, 혹여 운 나쁘게 좌측으로 튀면 가드 벙커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린 앞에 둔덕에 맞은 공은 파편을 날리며 그린에 튀어 올라갔다. 아쉬운 것은 튀는 각도가 작아 그린을 오버할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공은 생각만큼 구르지 않았고 절묘하게도 핀이 꽂힌 좌측을 향해 기형적으로 굴렀다.

“흙!”

그렇다. 둔덕에 맞으며 공에 흙이 잔뜩 묻어 런을 저지한 것이다. 그 더러운 공이 홀컵 1m 안팎에 멈추자 비명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예기치 않은 행운인데, 팬들은 그게 다 의도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 같았다. 티 박스를 내려오는 모모코의 얼굴에도 웃음이 활짝 폈다.

“오빠!”

“으…….”

일본에서는 ‘오빠’라고 불러도 된다.

하지만 여기는 그 단어에 대한 수많은 해석을 낳을 수 있는 한국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그 대신 웅성거림이 홀을 집어삼켰다.

아마도 당분간 그 단어는 모모코 팬들의 심심찮은 안주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주 대못을 박는 환상적인 샷이군요!

-럭키 샷! 그린을 훌쩍 넘기면 내리막 어프로치가 남아 파를 보장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악전고투를 펼친 모모코에게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짓는 것 같습니다.

-아직 경쟁자들의 티샷이 남았는데, 너무 단정적으로 말씀하셔서 안 프로, 배 프로의 팬들이 속상해 할 것 같네요.

-아! 제가 좀 심했나요? 하지만 정확한 정보를 드리는 것이 전문가인 저의 역할이라는 것을 고려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하하.

-모모코가 이 난해한 홀에서 저렇게 바짝 붙여 버리면 경쟁자들은 힘이 빠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도 힘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바람은 거센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그린 앞 가드 벙커에 공을 빠뜨리고 높은 턱을 단번에 넘기지 못한 채 3온 2퍼팅을 한 선수는 졸지에 우승과 멀어졌다.

또한 탄도를 높여 정상적인 샷을 구사한 선수는 훅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그린 좌측 벙커에서 2온 2퍼팅, 유유히 버디를 기록한 모모코와 3타 차로 벌어졌다.

평소 같으면 승부처에서 버디를 기록한 모모코가 펄쩍 뛰며 기쁨을 만끽할 텐데, 오늘은 잠잠하게 다음 홀로 이동했다.

“만세를 부르며 폴짝 뛰지 못해 어쩌지?”

“우승을 확정 짓고 할 거에요. 저 안아 줄 거죠?”

“그건 좀 참지?”

“정말 이럴 거예요? 어떻게 만들고 있는 우승인데!”

“일단 남은 두 홀에 집중하자.”

17번 홀은 파로 막았지만 453야드의 파4, 18번 홀은 온 그린을 노리지 않았는데도 어프로치를 붙이지 못해 아쉬운 보기를 기록하고 말았다.

하지만 우승에는 지장이 없었다.

6m 파 퍼팅이 들어갔다면 훨씬 극적이었겠으나 보기로 마무리해 다소 아쉽기는 했지만, 우승을 확정 지은 모모코는 장담한 대로 필상을 향해 달려오며 폴짝 뛰었다.

두 팔을 치켜든 채, 활짝 웃는 그녀의 그런 행동은 트레이드마크가 된지 오래였다. 이미 수차례 기사화된 장면을 봤던 팬들은 뜨거운 환호와 박수로 그녀의 우승을 축하했다.

‘아! 미치겠네.’

우승한 선수가 가장 먼저 기쁨을 나누는 상대는 캐디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길 수도 있지만 이미 퍼진 소문이 문제다.

안 그래도 안마 때문에 시선이 따가운데 확 끌어안기까지 한다면 팬보다 훨씬 많은 안티 팬이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달려드는 그녀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 자칫 다칠지도 모를 만큼 격렬하게 달려온 터라 피할 수도 없었다.

폭 안겨 버린 그녀의 몸이 느껴질 새도 없이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안긴 모모코가 두 다리까지 필상의 허리에 두르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로맨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야한 장면이 그린에서 펼쳐지는 순간, 갤리리들도 깜짝 놀랐는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행이라면 모모코가 평소처럼 꽉 끼는 핫팬츠를 입지 않고 헐렁한 긴 바지를 입었다는 사실이다.

“와아아아!”

“결혼해! 결혼해!”

누군가 장난처럼 던진 말이 순식간에 번졌다.

얼굴이 새빨개진 필상과는 달리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모모코는 필상이 손을 놓자 마지못해 내려서며 팬들을 향해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마치 그들의 외침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행동처럼 보였다. 그런데 동반자들과 인사하던 모모코가 갑자기 어딘가로 뛰어갔다.

혹시 그녀의 부친이 온 건 아닌지, 아니면 이 대표라도 온 건지, 그녀가 부둥켜안은 사람들을 확인한 필상의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4명의 여인네들, 아주 낯익은 얼굴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와요!”

모모코는 필상을 향해 손짓까지 했다.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눈 이들은 다름 아닌 필상의 엄마와 누나들이었던 것이다.

“누나! 도대체 여긴 왜?”

“모모코가 우리 초대했어. 동생도 하지 않는 이쁜 짓을 하잖아. 그런데 어째 네 표정이 떨떠름한 것 같다?”

“아! 말릴 수가 없네.”

포기한 필상은 일단 엄마와 누나들을 다독여 클럽하우스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부탁하고 모모코를 데리고 스코어 카드를 제출하러 이동했다.

“모모코. 몸은 괜찮아?”

“그럼요! 15번 홀을 끝냈을 때부터는 아주 멀쩡했어요.”

“그런데도 안마를 받았다 이거지?”

“에이. 결혼하라는 말 못 들었어요?”

“뭐? 그 말을 알아들은 거야?”

“여자라면 누구나 평생 가장 듣고 싶은 말이 그건데, 그것도 모를까 봐서요!”

“그걸 알고도 손을 흔들어 줬단 말이야?”

“치! 그만해요.”

모모코가 원한 것은 이게 아닌 모양이다.

그녀의 날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냥 넘어갈 상황은 아니다. 본인도 그녀에 대해 아주 그윽한 마음을 품고 있지만 그렇게 얼렁뚱땅 진도를 나갈 생각은 없었다.

-믿기지가 않네요. 일본 선수가 KLPGA를 우승하다니요!

-모모코는 우승할 충분한 자격을 갖췄습니다. 이런 말씀이 어떨지는 몰라도 저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니, 안방에서 일본 선수에게 우승을 내줬는데, 골프팬들의 성난 비난이 마구 쏟아지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1년에 십여 차례나 일본 투어에서 우승하는 한국 선수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정확한 지적이었다.

사실 골프는 개인 스포츠다. 때문에 국적이나 출신을 따지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접근은 아니다. 게다가 이미 일본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이 수많은 상금을 벌지 않는가.

그런 측면을 고려하면 모모코의 한국 투어 우승을 축하하는 것은 대인배의 면모이자 모두를 위해서 좋은 결과인 것이다.

[모모코, 시즌 5승째는 한국에서!]

[미야 모모코, 한국 투어 접수!]

[실력과 투혼에서 모두 앞선 승리, 한국의 골프팬들에게 열렬한 축하를 받은 모모코의 모습은 역시 아름다웠다]

[아시아 골프 종주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준 모모코, 한국 골프팬들도 그녀의 매력에 푹 빠졌다.]

한국 언론도 모모코의 우승 소식을 다뤘지만 일본 언론은 아주 난리가 났다. KLPGA 투어는 한 번도 중계하지 않았던 일본 골프 채널이 최종일 경기를 생중계했으며 모모코의 고군분투하는 장면들을 모아 지겹게 반복적으로 내보냈다.

상금 규모의 격차가 커서 KLPGA에 출전하는 일본 선수는 드물지만 그래도 우승 기록은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기 절정의 모모코가 한국에 가는 것을 두고 설왕설래했던 것이다. 혹시 컷이라도 당한다면 망신이니까.

하지만 모모코의 우승이 확정되자 기다렸다는 듯 찬미하며 각종 편파적인 기사들을 쏟아 냈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지만 앞으로 JGTO에서 활약하게 될 필상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

다음 날 오후, 모모코를 일본에 먼저 보냈다.

싫다고 결사 항전하는 그녀를 보내기 위해 아껴 둔 소원 하나를 써야만 했다. 의외로 순순히 따르는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필상은 받아 주지 않았다.

너무 급하게 돌아가는 지금의 상황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왜 필상이라고 아름다운 그런 상상을 해 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속도는 감당할 수 없었다. 자신은 물론 모모코도 꿈을 위해 정진해야 할 시기이기에.

좋아하는 감정마저 억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결혼은 즉흥적인 감정과는 구분해야 할 일생일대의 과제가 아니던가.

“모모코가 상처를 받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이겨 내야지요. 좋아한다고 당장 결혼할 수는 없잖아요.”

“안 되는 이유는 뭐죠?”

공항까지 배웅 나온 이 대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돌아온 싱글이지만 결혼해 본 그녀가 이렇게 다그치는 모습은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그래도 필상은 솔직하게 답을 했다.

“제가 좀 구식이라서요.”

“연애와 결혼은 별개라는 건가요?”

“아니요. 완벽하게 일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늘 곁에 있어서 제가 없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지만,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은 그녀에게 홀로서기를 강요하게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일찍 결혼하는 것도 좋지 않겠나?

그 말을 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애써 그 말은 삼켰다.

남녀 문제는 철저히 둘만의 스토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든지 결국 서로의 마음이 닿아야 결실이 맺히고 지속가능하다. 필상의 생각도 틀리다 할 수 없기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은 주제 넘는 행위였다.

그래도 못내 아쉬웠는지 청라GC로 향하던 차 안에서 약간의 측면 사격을 곁들이기는 했다.

“어머니도 누나들도 다 좋아하는 것 같던데요?”

“그래야죠. 국적도 다른데 식구들까지 미워하면 어쩌겠어요. 그 점은 모모코가 참 어른스럽게 잘한 것 같아요.”

결국 필상도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다만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닐뿐더러 지나치게 빠른 진도는 서로에게 깊은 후회를 남길 수 있어 절제한 것이다.

본시 남녀 사이는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게 마련인데,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 필상의 생각이 정답에 더 가까운 것은 확실했다.

만약 필상도 모모코처럼 감정에 따라 즉흥적으로 행동하면 둘은 이미 연인 사이를 공개하고 곧 결혼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필상은 당분간 일본에 머물며 자신의 미래를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새롭게 재구성해야만 한다. 도전이 절실한 필상에게 한계가 생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모모코가 얌전히 내조할 스타일도 아니고 그러라고 강요하기에는 그녀가 지닌 재능이 너무 아깝지 않겠나.

“이번 대회 끝나면 만날 사람이 있어요.”

“스폰서의 윤곽이 대충 나왔나 보군요.”

“기왕이면 좋은 성적을 내야 해요. 협상하는 데 좋은 성적만큼 중요한 잣대는 없거든요.”

“하하하! 말만 들어도 기대가 됩니다.”

필상은 이미 좋은 결과를 냈고 상당한 지명도도 얻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차일피일 미루는 것처럼 보일 만큼 늦췄다.

만약 대충 결정할 것 같았으면 진즉에 스폰서를 물어 왔을 것이다. 그래서 대어를 낚기 위한 정지 작업이라는 생각했다.

상당히 기분 좋은 소식이지만 그로 인해 다가올 대회에 영향을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 일단 이 대표의 제안은 그녀에게 온전히 맡기고 대회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오셨습니까?”

“내가 직장 상사야? 딱딱한 소리는 그만하고 편하게 가자.”

“형에게서 느껴지는 포스가 이전과 확 달라진 거 아세요?”

“포스?”

“후광이 비치는 거 같다니까요. 괜히 주눅 들게 하는.”

“성호야. 일단 주린 배부터 채우면서 코스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체크해 보자.”

“네. 그런데 한두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서류 가방에 하나 가득 청라GC에 대한 자료들이 가득했다. J&L에서 보내 준 상세한 자료였다.

하우스 캐디 중에 경력이 많고 유능한 사람을 골라 야디지 북 복사본을 아예 3개나 사 버렸다. 또한 영업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코스 설계도까지 구해 온 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

***

“어려서부터 코치님들한테 수없이 들었던 말들이 형의 샷을 보면 너무도 쉽게 이해가 되요.”

“시합 중에는 격려하는 캐디가 필요하지만 연습 때는 아니야. 아부 말고 지적을 하란 말이야. 뭐가 이상한지!”

“이상한 게 없어요.”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좋은 캐디는 될 수 없어. 어떻게 사람의 스윙이 항상 일정할 수가 있냐고.”

“알았어요.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게요.”

캐디의 생명은 정확한 눈에 있다.

거리를 재고 라이를 읽고 선수의 스윙을 체크하는 것이 가장 기본 임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골프를 해 온 성호는 그만의 타성에 젖어 있었다.

필상은 그걸 깨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캐디로 거듭나게 하려면 자신이 지나온 과정과 생각을 그에게 일일이 전수해야만 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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