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62화 (62/354)

062. 나쁜 손

“같이 밥 먹으러 가자.”

결국 경기는 내일로 순연되었다.

오늘 못 다 치른 홀이 많아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마지막 날인 내일 남은 일정을 모두 소화하는 것은 무리로 보였다.

그래서 더는 대기할 필요가 없어 각자 흩어질 상황이었으나 필상은 성호와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어 식사를 권했다.

“제 선수는요?”

“괜찮다면 같이 데려와.”

“난리가 나겠네요! 우리 아연이는 형의 골수팬이거든요. 저기 좀 보세요.”

성호가 손끝이 가리키는 지점의 끝에는 아주 깜찍한 여자애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골프 시사에 밝은 필상은 상대가 누군지 곧바로 알아봤다.

“슈퍼 루키, 조아연 프로잖아!”

“어? 아연이를 아세요?”

“응. 올 시즌 가장 기대되는 유망주로 소개된 기사를 봤지. 장타에 송곳 아이언이 자랑이라며?”

“크! 일단 데려올게요.”

KLPGA의 ‘슈퍼 루키’ 계보를 이을 신인 조아연은 아마추어 시절에 참가한 20개 프로 대회에서 17차례나 본선에 진출했다.

기본이 아주 튼실하고 긍정적이며 도전적인 마인드도 돋보여 프로 데뷔와 함께 든든한 후원사도 붙은 루키였다.

게다가 2000년생이라 모모코보다도 한 살이 어리다.

“오빠. 누구에요?”

“내 캐디.”

“저 덩치 좋은 남자가 오빠 캐디를 할 건가요?”

“응. 세미프로인데 아주 성격도 좋고 믿음직한 친구야.”

“근데……. 저 여자애는요?”

“미리 말하지만 샘 내지 마. 내게는 너뿐이니까!”

그 한마디의 효과는 대단했다.

하다못해 한참 누나인 이 대표도 견제하던 모모코는 예쁘장한 외모의 어린 조아연 프로를 반기기까지 했다.

얼굴 가득 호감을 내비쳤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악수를 청하며 함께 식사를 하러 가자며 나설 정도였다.

***

짓궂게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일요일 오후에 다시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예정되어 경기위원회는 결단을 내렸다.

어제 못 다 끝낸 3라운드를 아침 일찍 재개해 오전 내로 모든 경기를 끝냄으로써 우승자를 가린다는 발표가 나왔다.

모모코에게는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7개 홀만 잘 처리하면 끝나.”

“부담스러워요.”

“해낼 수 있을 거야. 이건 네게 찾아온 행운이거든.”

“근데 오빠. 저 열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열이 있다고?”

필상은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어제 비를 너무 많이 맞아 이불을 꼭 덮고 자라고 했는데, 이럴 것 같았으면 종합 감기약이라도 먹일 걸 괜히 부작용을 염려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모모코의 이마를 짚어 본 필상은 몸살 증세임을 확인했다. 그렇다고 곧 경기에 나설 선수에게 약을 먹일 수도 없고 실로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 이게 다 내 책임인데!”

“아니에요. 어제 오빠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제가 고집을 부렸잖아요.”

일찍 일어나 경기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효율적일지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오빠. 전 따뜻한 국물 먹으면 다 나을 것 같아요.”

“국물?”

“네. 얼큰한 거 좋아하거든요.”

“그럼 나가자.”

스윙을 점검해도 시원찮을 상황이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 필상은 고한 읍내로 향했고 적당한 식당을 찾아 헤맸다.

새벽 5시 반에 문을 연 식당은 없었고 버스터미널 앞에서 불을 일부만 켜고 재료를 다듬는 정육 식당을 하나 발견했다.

“아줌마. 밥 좀 먹을 수 있을까요?”

“아직 재료 준비가 하나도 안 됐어. 10시에 문 열어.”

“죄송한데 오늘 골프 경기를 치를 선수가 몸살 기운이 있어서 그래요. 육개장을 한 그릇 꼭 먹이고 싶은데 어떻게 좀 부탁드릴 수 없을까요?”

퉁명스럽던 아줌마는 필상의 뒤에 잔뜩 움츠리고 서 있는 모모코를 보더니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한껏 귀찮은 표정이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반찬은 대충 있는 것만 줄 거야. 얼른 들어와.”

“김치만 있으면 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여자 친구가 아주 예쁘네. 후딱 만들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얼큰하게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요즘 세상에 강원도라고 순박함을 연상하는 것은 무리다. 더욱이 이곳 정선은 카지노가 있는 곳이라서 닳고 닳은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만난 식당 아주머니는 생색내지도 않고 속마음도 표정에 그대로 드러냈지만 결국 얼큰한 육개장을 뚝딱 끓여 내오는 깊은 인정을 베풀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배려에 마음이 푸근했다. 그 정성이 작용했는지 육개장을 먹은 모모코는 덮치던 한기는 물리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빠 저 안마 좀 해 주실래요?”

“안마?”

“네. 전에도 마사지 효과를 톡톡히 봤잖아요.”

“그래. 그게 뭐 어렵겠어.”

한기는 가셨지만 몸이 욱신거렸던 모모코는 필상의 손길이 닿자 한결 편안한 안색을 보였다.

조금 더 시간이 허락되면 좋겠건만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이 오늘처럼 아쉬운 적이 없었다. 결국 연습을 못 하고 11번 홀로 향했다.

긴 바지에 바람막이까지 입은 모모코의 등장에 팬들은 아쉬운 표정을 보였다. 속을 알 수 없으니 이해는 됐다.

“모모코 아픈 거야?”

“네. 몸살 기운이 있어요.”

“그러게 좀 포근하게 안아 주지 그랬어.”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알았어. 부디 행운을 빌어.”

안 프로의 그 말은 건성이 아니었다.

경쟁하는 사이지만 정당한 대결로 승부하고자 하는 그녀의 근성은 익히 아는 바라 필상은 경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무리해서 우측 페어로 보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럼 호수 앞 러프로 보낼까요?”

“바짝 붙으면 160야드가 남지만 혹시 모르니까 너무 붙일 생각은 하지 마. 정 안 되면 4온 1퍼팅으로 가도 되니까.”

“알았어요.”

11번 홀 벙커에서 다시 경기가 이어졌다.

물에 젖은 모래에 절반가량 잠겼던 상황은 해제되었다. 피치 못하게 공을 집었고 비가 그 자국을 이미 메워 줬다.

어제보다 훨씬 좋아진 상황이지만 끊어진 우측 페어웨이로 보내는 것은 역시 쉽지 않았다. 남은 거리가 짧지 않을뿐더러 아직도 벙커의 모래가 무거워 행여 두껍게 맞으면 최악의 상황도 맞이할 수 있다.

-너무 안전한 선택이 아닌가요?

-제 생각에도 다소 의외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죠?

-모모코의 복장입니다. 늘 팬들에게 사랑스러운 패션을 자랑하던 그녀가 아닙니까! 제 말은 그녀의 복장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어제 비가 많이 내려 기온이 낮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중무장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혹시 몸이 불편한 거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선수 본인으로서는 아주 안타까운 상황인 거죠. 그 점에 대해서는 코치인 공 프로의 책임이 가볍다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사이 모모코의 벙커 샷이 이뤄졌다.

크로스 벙커에서의 샷은 모래를 의식해 퍼 올리려는 의도를 가지면 오히려 너무 두껍게 맞아 거리의 손실을 보게 된다.

그걸 정확히 파악한 모모코의 스윙은 피니시를 길게 가져가는 정석을 그대로 재현한 훌륭한 샷이었다.

“굿 샷!”

“얼마나 남았을까요?”

“165야드. 일단 라이부터 보고 결정하자.”

언제나 한 샷 한 샷이 중요했다.

하지만 컨디션이 좋지 못한 지금은 더더욱 많은 것을 체크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공의 위치를 확인한 필상은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모모코의 어께를 주물렀다.

-뭐죠?

-모모코의 몸에 이상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아! 그런 건가요?

엉뚱한 생각을 했던 것일까?

허 해설의 정확한 판단이 내려지자 캐스터는 약간 당황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하기야 염문이 있는 관계라 카메라가 비치는 가운데 필상이 모모코의 어께를 주무르는 모습은 자극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필상도 그걸 모르지 않지만 그런 시선 따위가 중요하지 않았다. 모모코가 안마를 통해 보다 편안한 스윙을 할 수만 있다면 그까짓 오해는 얼마든지 감당할 의사가 있었다.

따악!

165야드, 평소라면 7번 아이언이면 충분한 거리다.

하지만 6번 아이언을 잡은 모모코는 힘을 아끼지 않고 과감한 스윙을 날렸다. 커다란 호수를 건너야 하며 러프의 저항도 극복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무 강하지 않나 싶었으나 결과는 예상을 벗어났다. 그린을 넘기기는커녕 그린 앞의 러프에 맞은 공은 그린에 올라서지 못하고 겨우 물에 빠지는 것을 모면했을 뿐이다.

“우우우우…….”

팬들의 아쉬운 탄식이 필상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뒤로 굴러 내려오는 게 아닌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모모코에게 던진 말은 그와 달랐다.

“좋았어. 모모코.”

“러프가 생각보다 질겼어요.”

“그러니까. 지난 샷은 신경 쓰지 말고 이제는 칩인 버디 한 번 노려 보자.”

“……알았어요.”

“대답에 왜 힘이 하나도 없어. 티샷이나 아이언은 몰라도 숏 게임은 컨디션과 상관이 없어. 행여 넣지 못해도 붙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용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다행히 몸살 기운은 도지지 않았지만 이미 전신의 근육이 뻐근한 상태였기에 의도한 만큼 정확한 힘 조절과 임팩트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23야드야. 러닝 어프로치로 가자. 몇 번이 편할 것 같아?”

“7번이 나을 것 같아요.”

“그럼 6번으로 가자. 생각한 만큼 거리가 나오지 않을 거야. 물론 넌 신경 쓰지 말고 평소처럼 그대로 치면 돼.”

“알았어요.”

역할을 정확히 구분하자 모모코는 한결 편해 보였다.

방금 전에 아이언 샷을 하며 자신의 힘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기에 모든 스윙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필상은 대안을 제시했다. 교정은 자신의 몫, 모모코는 평소처럼 치면 된다는 말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작정한 그녀는 침착하게 러닝 어프로치를 시도했다.

“인 더 홀!”

“버디! 버디!”

공이 출발하자마자 팬들의 열렬한 응원 소리가 터졌다.

그들도 모모코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더욱 뜨거운 함성으로 힘을 보탰다. 표정 하나, 패션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열성 팬이라면 지금 상황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것 같았다.

힘 조절은 필상의 예상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방향이 좋지 못해 공이 홀컵 우측 20cm에 멈춰 섰을 뿐.

물론 모모코는 탭인 파로 11번 홀을 넘어갔다. 그러나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은 경쟁자들은 버디로 맞받아쳤다.

-공동 선두가 3명이 되는 군요!

-그렇습니다. 어제 잠시 주춤한 안수현 프로와 배선우 프로, 결코 호락호락한 선수들이 아니죠. 경기가 단축된 것은 아쉽지만 그걸 보상할 멋진 승부를 기대해 봅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추격을 허용한 모모코가 불리하다.

게다가 컨디션까지 엉망이지 않은가!

그러나 오르막이 심한 12번 홀에서 모모코의 세컨 샷이 핀에 붙으며 승부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렸다. 사실 필상이나 모모코는 동반자들의 성적은 아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주어진 상황에서 한 샷 한 샷 최선의 다하고 승부는 하늘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357야드 파4, 12번 홀-오르막 티샷 244야드 페어웨이 공략, 115야드 세컨 샷 핀 2.1m에 붙여 버디]

[331야드 파4, 13번 홀-내리막 티샷 7번 유틸리티로 212야드 공략, 121야드 핀 3.4m에 붙여 버디]

[168야드 파3, 14번 홀-내리막 감안해 6번 아이언 공략, 그린 앞에 5.1m 지점에 온 그린, 2퍼팅 파]

[496야드 파5, 15번 홀-오르막 티샷 243야드 페어웨이 공략, 6번 아이언으로 156야드 페어웨이 공략, 114야드 서드 샷 핀 3.8m에 붙여 버디]

정말 무서운 기세였다.

몸살 때문에 아침부터 난리 법석을 떨었던 선수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압도적 기량으로 다시 단독 선두에 나섰다.

-바람이 강해져 정상적인 컨트롤이 힘든 상황에 모모코 선수 홀로 질주를 하는 비결이 대체 뭐죠?

-제가 볼 때, 정확한 판단에 의한 안전한 공략입니다. 한 클럽, 또는 두 클럽을 짧게 잡고 컨트롤을 하는데 바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낮은 탄도의 펀치 샷을 한 까닭입니다.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면 아직도 컨디션은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하군요.

-저런 판단은 선수보다는 캐디의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몸이 안 좋은 상황에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코치가 곁을 지키고 있으니 오로지 샷에만 집중할 수가 있는 겁니다.

“바람이 더 거세졌어요.”

“바람? 우린 그놈이 쫓아오지 못할 경기 운용을 하고 있잖아. 보자, 172야드인데 오르막이 11야드니까 7번 유틸리티 어때?”

“너무 크지 않을까요?”

“아니야. 그린 앞이 오르막 경사라서 낮은 탄도로 거기에 맞으면 오히려 짧을지도 몰라.”

“이번에도 깔아서 치는 건가요?”

“응. 피니시를 낮고 길게, 오케이?”

“네.”

“그리고 기왕이면 좌타보다는 우타가 나아.”

“치! 전 똑바로 칠 건데요!”

“그러면 나야 더 바랄 게 없지.”

중요한 것은 공략 방법을 의논하는 사이, 필상은 계속 모모코의 팔과 어께를 주무르거나 등을 두드렸다.

오늘 경기 내내 지속해 온 행동이라 이제 팬들도 별 감흥이 없을 것 같았지만 시선은 온통 필상의 손에 가 있었다.

혹시 ‘나쁜 손’이 되는 건 아닌지 감시라도 하는 듯.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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