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61화 (61/354)

061. 모모코를 위해서라면

3라운드는 아침부터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급기야 9시부터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국이 늦여름 더위에 찌들어 가을을 재촉하는 단비라고 다들 반기지만 경기에 나서는 이들의 해석은 제각각이었다.

일단 선두권은 의외의 변수가 달가울 리 없었고 역전을 노리는 선수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볼 수도 있다.

10:30, 모모코가 속한 마지막 조가 출발할 때는 이런 상태로 과연 경기가 정상적으로 끝날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비바람이 거셌다.

“시원해서 좋네요.”

“춥지는 않아?”

“네. 추우면 말할 게요.”

비에 젖은 상태에서 바람을 맞으면 체온이 떨어질 수 있어 바람막이라도 입기를 권했지만 모모코는 괜찮다며 뿌리쳤다.

혹시 예쁘게 차려입은 연분홍 패션 때문은 아닌지 의아했지만 싫다는 걸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어 그대로 경기에 임했다.

초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무리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하에 안전한 공략을 선택했고 착실하게 파 세이브 해 나갔다. 동반자들도 마찬가지 전략이었으나 실수는 동반자들에게서 먼저 나왔다.

-비에 젖은 러프, 프로들에게도 쉽지 않군요!

-그렇습니다.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클럽 페이스가 푹푹 박혀서 정확한 임팩트가 필수입니다.

-그렇다면 굴리는 어프로치가 더 나은 건가요?

-공이 놓인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아무래도 띄우는 샷보다는 굴리는 샷이 미스를 줄일 수 있습니다. 일단 클럽이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절정의 기량을 갖춘 선수들에게도 우중 경기는 역시 부담스러운가 봐요. 안 프로나 배 프로가 저런 실수를 할 선수들이 아니잖아요!

-이럴 때는 캐디의 적절한 조언이 필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현역 선수인 공 프로가 곁을 지키는 모모코가 유리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중 경기는 안전이 우선이라 레귤러 온(regular on-투 퍼팅을 하면 파를 기록할 수 있는 온 그린)이 쉽지 않다.

젖은 벙커가 가장 두렵고 비로 인한 거리 손실을 얼마나 계산해야 하는지 애매해 대체적으로 짧게 쳐 1퍼팅 거리에 붙이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런데 어프로치 미스가 생긴다면 결국 타수를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반을 마칠 때, 타수가 그대로인 모모코도 공동 선두에 합류한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해설위원의 분석에 따르면 필상은 반 애국적인 인사가 되고 만다. 대부분의 골프 팬들은 국적보다는 출중한 기량에 주목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너무 티 나요!”

“뭐가?”

“좋아하는 게.”

“그게 뭐 어때서? 내 선수가 잘하고 경쟁자들이 내려앉는 걸 바라는 건 당연한 거 아냐?”

“여긴 한국이잖아요.”

“별걸 다…….”

필상도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프로 선수는 오로지 승리에만 열중하면 된다고 믿기에 일찌감치 그런 감정은 떨쳐 냈다.

하지만 모모코가 오히려 그런 것을 신경 썼다. 아무래도 본인이 처한 애매한 입장과 맞물린다고 생각한 듯.

그러나 경기 중인 선수로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는 판단에 필상은 그에 대한 분명한 선을 그어야만 했다.

“모모코. 팬들은 국적이나 사상 때문에 스타에게 열광하는 게 아니야. 프로가 갖추어야 할 월등한 기량을 존중하고 좋아하는 것이지.”

“그렇긴 하죠.”

“거꾸로 생각해 봐. 앞으로 내가 주로 JGTO에서 활약할 건데, 그런 국수적인 태도를 지닌다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이미 대단한 결과를 얻었는데도 기대 이하의 평가를 하고 있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다고 봐. 아직은 팬들의 마음을 확고하게 잡지 못한 내가 부족한 거지, 팬들이나 전문가들을 탓할 수는 없어. 그리고 내가 계속 잘한다면 결국 누구든 인정하게 될 거야. 그렇게 될 거라고 믿고.”

“알았어요. 잡념은 버릴 게요.”

기분이 전환되어서 그런지 모모코는 지난 이틀에 이어 또다시 10번 홀에서 버디 기회를 만들었다.

101야드를 남겼지만 갭 웨지로 홀컵을 바로 공략해 3m 남짓한 거리에 붙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옆 라이라는 것인데, 비에 젖었고 비가 내리는 와중이라 경사를 적게 보고 과감한 퍼팅을 감행했다.

탕!

홀컵 뒷벽을 때린 공이 그대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우산을 들고 따라다니던 고마운 팬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버디였기 때문이다.

“모모코! 모모코!”

전에도 그녀의 팬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눈부신 성적을 거두며 언론 노출이 많아진 덕분에 이미 팬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게다가 지난 이틀 동안 적잖은 팬들을 추가한 모모코가 결국 자력으로 선두에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게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는지, 예상과 달리 경기 내내 말이 없던 안 프로가 가시 돋친 한 마디를 쏟아 냈다.

“좋겠다!”

“하하하.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아닌데 좋긴 뭐가 좋아요.”

“네 여자잖아.”

“에이 진짜!”

이미 공개적으로 밝혔다.

연인 사이는 아니라고.

하지만 안 프로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여자의 감은 무섭다는 생각을 했지만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를 속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인정하는 순간, 모모코와의 적절한 경계가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곁에 있던 모모코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을 텐데도 빙긋이 웃었다.

대화의 행간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필상은 안 프로에게 뭔가를 더 이야기했다. 모모코의 눈빛이 사나워졌는데, 필상으로서도 참고 참았던 말이다.

“누나. 어드레스 할 때, 체중이 너무 뒤에 쏠리는 것 같아.”

“그래?”

“체중이 는 것 같지도 않은데, 비에 젖어서 무거운 거야?”

“그만해. 네 여친 눈빛이 사나워지고 있어.”

“윽!”

마음의 빚이 있다.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안 프로의 캐디를 한 번 봐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러지 못했다.

필상의 상황을 잘 아는 그녀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필상으로서는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안 프로와의 인연 또한 가볍다고 생각지는 않기 때문이다.

연습 때도 그러지 않았는데, 오늘 따라 힘을 못 쓰는 이유를 살피던 필상은 나름의 원인을 찾았고 입이 근질거렸다.

그래도 이적행위 같아 꾹 참았는데, 모모코가 선두에 나선 마당이라 한 마디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

11번 홀은 547야드의 파5 홀이다.

아주 대단한 장타가 나온다면 워터해저드를 가로지르는 2온을 노릴 수도 있지만 오늘처럼 비 내리는 날은 어림없다.

하지만 3온 1퍼팅을 노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생각을 했는데, 모모코는 돌연 인정사정없는 티샷을 날렸다.

공이 멀리 간다손 치더라도 해저드에 막창이 날 염려는 없지만 과도하게 때린 티샷은 역시 원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끝에서 우측으로 급격히 휜 공은 페어웨이 우측의 크로스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빗줄기가 더 굵어진 상황이라 아무리 턱이 낮아도 벙커에서의 샷은 부담스러웠다.

본인도 좋지 못한 결과에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티 그라운드에서 내려왔다.

“모모코.”

“바람막이 줘요.”

“추워?”

“아주 많이 추워요.”

뭐라고 한마디 하려던 필상은 애써 삼켰다.

예상치 못했던 그 강한 티샷은 자신의 오버에 대한 항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어를 모르는 모모코가 정확한 상황을 인지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유난히 샘이 많은 그녀의 감은 섬뜩할 만큼 정확했다.

물론 아무리 마음이 상했더라도 그런 샷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그녀를 탓하기보다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바람막이를 꺼낸 필상은 그녀가 입는 걸 도왔다.

‘모모코를 위해서라면 뭐가 문제겠어!’

캐디의 역할이기도 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마음 한구석을 메우고 있는 그녀가 아니던가!

아무리 별것 아니라고 우기고 싶어도 프로의 근성을 논했던 자신이 프로답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사적인 친분과 직업적 책임을 혼동한 것을 반성이라도 하듯이 동반자들이 샷을 하는 내내 필상은 모모코의 어께를 주물러 줬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었다.

모모코가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무슨 남자가 겨우 그런 행동이나 하냐고 타박해도 상관없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행동이고 둘만이 공유한 각별한 감정이 주는 만족감이 더 컸기에.

“흐으으……. 그만해요. 간지러워요.”

“그나저나 벙커에 빠진 공은 어쩌지?”

“어쩌긴요. 잘 꺼내면 되죠.”

그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일단 가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세컨 샷 지점으로 향하던 일행에게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애애애애앵!

빗줄기도 이미 경기에 방해가 되고 코스 곳곳이 흠뻑 젖어 정상적인 플레이가 어려웠다. 그래도 유난히 악천후로 단축 일정이 많았던 대회였기 때문인지 주최 측은 다소 무리해서라도 경기를 진행하고자 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낙뢰 주의보는 무시할 수가 없다.

“천둥번개가 다가오나 봐요.”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공의 위치를 확인하고 마크부터 해요.”

안전을 위한 선수 이동용 카트가 다가오는 사이, 일단 벙커로 달려가 마크부터 했다. 그런데 공이 놓인 상태는 심각했다.

고인 물에 잠기기라도 했다면 드롭이 가능하지만 모모코의 공은 젖은 모래에 반쯤 잠겨 있었고 벙커 턱에서도 가까웠다.

그런 상황에서 끊어져 있는 우측의 페어웨이로 공을 날리는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일지 고심할 상태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 상황이 유보된 것이다.

“착하게 사는 보람을 느껴요.”

“뭐?”

“누가 봐도 오늘 다시 경기가 속개될 것 같지는 않잖아요.”

“하하하! 벼락은 피하는 게 상책이지.”

제로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번개를 맞았던 필상은 착하게 살지 못해 그랬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모모코의 언어 센스에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여하튼 속개 여부는 경기위원회의 소관이다. 하지만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위험한 결정은 내릴 수가 없을 것이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바람도 강한데 번개까지 다가온다면 일단 대기하겠지만 젖은 모래를 다시 만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누가 봐도 오늘 경기가 속개되기는 어려워 보이기에.

‘잘하면 행운이 따를지도 모르겠어.’

서로 말을 나누지는 않지만 이 비가 내일까지 이어져 경기가 펼쳐지지 못한다면 현재 순위가 바로 최종 성적이 된다.

그 확률은 낮지만 행복한 상상이 저 홀로 나래를 펴는 이유는 마침 모모코가 단독 선두에 나섰기 때문이다.

동시에 모든 홀에서 플레이하던 선수들이 대기실로 돌아왔기에 시끌벅적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단독 선두에 나선 모모코에게 몰렸고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갔다.

그다지 긍정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에게 모모코는 자신의 순위를 낮출 이방인일 뿐이니까.

그래서인지 먼저 다가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선수는 없었다. 하지만 필상에게는 가끔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러다 깜짝 놀랄 사람을 마주하게 되었다.

“필상 형.”

“어? 이게 누구야?”

“진즉에 인사를 드리려 했는데 그게 좀 괜히 쪽팔리는 일 같아서요.”

“흑돈! 너 이건 아니다 싶은데?”

“아 진짜, 제 어릴 적 별명은 어떻게 아셨어요?”

“김경태 프로님한테 들었지. 하하하.”

다름 아닌 김성호였다.

얼마 전 김 프로와 그에 대한 얘기를 나눴는데 한국에 들어와서도 미처 연락은 하지 못했다. 바쁜 일정에 만날 기약도 못하면서 먼저 연락하는 것이 이상했고 자랑질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인데, 하이원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레슨은 어쩌고 캐디 일을 하는 거야?”

“형을 좀 따라 해 보려고요. 경기 감각도 익힐 겸.”

“이렇게 네 얼굴을 보니 좋네.”

“한국 남자 골프의 희망으로 떠오른 퍼펙트 프로님이 저를 알아봐 주시니 제 기분은 어떻겠습니까. 하하하.”

필상이 이렇게 반길 줄은 몰랐는지 성호는 한껏 고무되어 이것저것을 물었다. 하지만 필상은 그의 주변을 물어봤다.

그는 현재 챌린지 투어에 참가하고 있는데, 생각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아 일반 레슨은 접고 기량 향상을 위해 다각도로 훈련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캐디 제안이 들어왔고 그는 기꺼이 프로 캐디로 일을 하면서 필상의 흔적을 쫓고 있다고 말했다.

“성호야. 나 좀 도와줄래?”

“제가요?”

“응. 다음 주 신한동해오픈이 열리잖아.”

“아! 형이 거기 출전한다는 기사는 봤어요.”

“그래서 말인데, 회사에서 자료를 왕창 준비한다지만 네가 미리 직접 청라GC로 가서 코스 파악과 공략 방법을 면밀하게 살폈으면 좋겠어.”

“제가 형님 백을 메는 겁니까?”

“해 줄래?”

“으아! 당연하죠. 제가 감히 형님 부탁을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하하하.”

안 그래도 한국에 오면서 미사키를 데려오지 않은 것이 찜찜했다. 하지만 이 대표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여러 요소를 감안한 판단이라 여겨 믿고 기다렸다.

그런데 김성호를 보는 순간, 필상은 그가 적임자라는 판단을 내렸다. 실력도 갖췄거니와 신뢰할 수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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