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마사지 효과
-한여름인데 그리 덥지는 않죠?
-그렇습니다. 이곳 하이원CC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KLPGA 대회 기간에는 오히려 흐리고 비가 흩뿌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중 경기의 운용이 승부의 관건이 되겠군요.
-두고 봐야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합니다. 주최 측은 최대한 공정한 환경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승리의 여신이 누구에게 미소를 지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특히나 올해 대회는 또 다른 관심을 낳고 있습니다.
-올 시즌 무서운 기세로 4승을 거둔 일본 여자 투어의 신성, 미야 모모코 선수의 출전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올해 특별히 외국 선수의 초청이 5명이나 추가되어 127명이 자웅을 겨루게 되었습니다.
“첫 홀은 안전하게 가야 하는 거 알지?”
“네.”
하이원 코스는 난이도가 높기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나 시작 홀과 마지막 두 홀의 기록이 성적을 좌우할 만큼 어렵게 시작하고 실망을 가득 안은 채 경기를 마친다.
4라운드로 치러지는 이 대회의 예년 우승 스코어는 대개 10언더 안팎에서 결정되었는데, 올해는 더 길고 어렵게 세팅을 하겠노라 이미 선언한 상태다.
“357야드 파4, 무리하지 말고 방향성에만 집중해.”
“네.”
1번 홀은 엄청난 내리막이다.
티샷이 떨어지는 IP지점은 티그라운드에서 25야드, 또다시 그린은 33야드 저지대에 위치해 거리가 주는 부담은 없지만 티 박스에 서면 페어웨이가 아주 좁아 보인다.
주변이 온통 높다란 산이어서 페어웨이가 마치 좁다란 골짜기처럼 보이고 실제 코스의 설계도 만만치가 않다.
좌측은 아예 벼랑이고 우측이 높은 지형이라 자연스럽게 훅 바람이 불어 조금이라도 티샷이 당겨지면 여지없이 해저드에 빠진다.
그나마 우측의 법면이 가팔라 조금은 밀려도 공이 굴러 내려오지만 우측에서 그린을 공략하자면 2개의 벙커와 그 사이에 심어 놓은 나무를 통과해야 한다.
까앙!
시원한 드라이브 티샷이 이뤄졌다.
그린이 살짝 우측으로 휘는 도그렉 홀이지만 대부분의 코스가 그렇듯 첫 홀은 골퍼에게 편안함을 주는데, 블루티보다 뒤로 30야드를 뺀 결과 아주 난해한 홀로 바뀌었다.
그러나 모모코의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는 올 시즌 262야드로 JLPGA 2위에 올라 있다. 작년에 비해 무려 15야드나 늘었는데, 필상이 딱히 지도한 것도 아니건만 불안감을 떨치자 거리는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이번 홀의 내리막을 고려하면 가볍게 쳐도 270야드는 나가기 때문에 방향만 집중하라고 했던 것이다.
“좋아!”
좁은 페어웨이를 시원하게 꿰뚫은 공은 우측의 크로스 벙커를 훌쩍 지나 도그렉이 끝나는 좌측 전면의 벙커에 굴러들어 갈 뻔했다.
거기까지는 무려 305야드라서 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저 느낌만 그러했을 뿐, 폭이 넓어진 페어웨이 정중앙에 멈춰선 공은 핀까지 남은 거리가 82야드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1번 홀 공략의 표본을 보여 줬다고 해도 무방할 아주 깔끔한 티샷이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자 티 박스를 내려오던 모모코는 손을 흔들며 감사를 표했다.
“제 인기 봤죠?”
“침이나 닦아.”
“에이 진짜!”
구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입가를 훔치는 모모코, 집중하면서도 팬들에게 미소를 보일 수 있는 배포가 부러웠다.
어려서부터 주목 받던 유망주였기에 저절로 터득한 여유였는데, 필상으로서는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할 위엄이었다.
프로는 역시 나이로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오로지 실력과 인기로 평가 받는다는 것이 확인되자 동반자들의 티샷이 흔들렸다. 부러움과 승부욕이 결합된 성급한 결과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제 첫 홀인데, 확실히 포스가 남다르군요. 모모코.
-작년과 비교해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분석한 전문가의 기사가 있는데, 아주 흥미롭더군요.
-우리 퍼펙트 콩의 역할이 크지 않았나요?
-누가 봐도 그렇죠. 캐디뿐만 아니라 스윙코치까지 겸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기이하게도 공 프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더군요.
-그것 참 이상하네요.
-당사자인 모모코는 이미 수차례 언급을 했습니다. 2주 전에 펼쳐진 메이지 컵에서 우승할 때는 공 프로가 백을 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우승 인터뷰에서 정확히 밝혔습니다. 스윙코치의 든든한 가르침 덕분이라고 말입니다.
아주 묘한 분위기가 작용한 결과다.
한국 선수들이 JLPGA를 장악하다시피 눈부신 성적을 거두는 상황은 보수적인 전문가들의 눈에 너무도 거슬렸다.
LPGA의 상황도 그러하건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골프계 인사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준 선수가 바로 모모코다.
단숨에 인기 절정에 다다른 그녀를 일본 여자 골프의 상징처럼 떠받드는 것도 일본 골프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모모코의 뒤에 한국인 코치가 있는 것은 감추고 싶은 진실이었다. 그들이 염려하는 것은 기득권의 상실이다.
훌륭한 선수의 뒤에는 좋은 교육과 스승이 있게 마련, 양궁이나 쇼트트랙처럼 한국 지도자들이 일본까지 진출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60도 웨지 주세요.”
“오케이. 부담 갖지 말고 넉넉하게 쳐.”
“네.”
모모코의 웨지 샷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린 스피드가 빨라 런이 발생하면 가늠이 되지 않아 높은 탄도의 샷을 구사했고 핀을 살짝 지나친 공은 강한 백스핀을 먹고 쭉 빨려 왔다.
아쉽게 홀컵 방향은 아니었으나 거리감이 좋았던 샷 결과는 1.5m의 버디 퍼팅을 남기게 되었다.
침착하게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은 모모코는 핸디캡 3번 홀에서 타수를 줄이며 개운한 시작을 알렸다.
“5언더면 나쁘지 않아.”
“보기를 2개나 했는데 괜찮아요?”
“그건 괜찮지 않지. 얼른 씻고 나와. 허기부터 지우자.”
“얼른 밥 먹고 연습하러 가자는 거죠?”
“뭐 다른 거 할 거 있어?”
“끄응!”
출발은 좋았으나 결정적인 실수도 몇 번 나왔다.
168야드 파3, 6번 홀에서 앞에 꽂힌 핀을 직접 노리다가 비치 벙커에 공을 빠뜨린 6번 아이언샷은 컨트롤 미스였다.
또한 마지막 홀에서 티샷이 푸시가 나 카트 도로 우측까지 공이 튀어 나간 장면은 집중력이 흩어진 결과였다.
자신감이 자만으로 번졌다고 판단한 필상은 연습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제가 잘못했다고요!”
“컨디션이 나빠 실수하는 것은 탓할 수가 없어. 하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진 샷은 프로의 자질을 의심케 하지.”
“뭘 그렇게까지…….”
“우승하고 싶지?”
“당연하죠.”
“여긴 네 안방이 아니야. 한국이라고. 조금의 빈틈만 보여도 치고 올라올 선수들이 즐비한!”
실제 결과도 그러했다.
모모코는 6언더 정도면 선두에 나설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마지막 홀 티샷 미스가 그런 마음가짐에서 비롯되었고.
하지만 이날 선두는 8언더였다.
[김지영2 -8/ 배선우 -7/ 나희원 -7]
올 시즌 최고의 활약을 보이고 있는 최혜진과 안수현도 -6으로 공동 4위에 올랐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선수들도 2명이나 더 있어 -5를 기록한 모모코는 공동 8위에 불과했다.
코스 세팅이 어렵다는 주최 측의 선언이 있었고 실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한국 투어의 경쟁력은 무시무시했다.
이 투어를 통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선수들이 비로소 미국이나 일본으로 진출하기 때문에 칼을 벼르는 살벌한 전쟁터라고 해도 무방했다.
마음을 다잡은 모모코는 군소리 없이 연습에 전념했고 이날도 가장 늦게 연습장을 빠져나왔다.
***
“괜찮아! 천천히 가자.”
웬만해서는 필상의 입에서 그런 나약한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2라운드에 나선 모모코는 어제의 각오가 무색할 만큼 심각한 샷 컨디션 난조를 보였다.
스스로 집중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어제 너무 심하게 몰아친 게 후회될 정도였다.
안쓰러운 그녀가 자신감이 떨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최대한 마음 편하게 라운드를 진행시키고자 했지만, 전반을 1오버로 마치자 필상도 더는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모모코. 힘 좀 내!”
“그럼 제 어께 좀 주물러 줘요.”
“왜? 어께가 결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필상이 얼른 다가와 그녀의 어께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뒤에 선 필상은 볼 수 없었지만 모모코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답답해 그냥 부탁했을 뿐, 정말로 어께를 주물러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그 손길이 너무도 따스하게 느껴진 것 같았다.
마사지를 받은 그녀의 샷은 신기하게도 후반에 폭발하기 시작했다. 반전의 시작은 351야드 파4, 10번 홀이었다.
쉬익!
바람을 가르는 클럽헤드의 소리부터 시원했다.
티 그라운드에서는 좌측의 능선에 가려 페어웨이 우측 일부와 그린 경계선만 겨우 보인다. 또한 지형 특성상 슬라이스 바람이 불어 까딱 방심하면 우측의 해저드에 잡아먹힌다.
하지만 과감한 모모코의 티샷은 아주 멋진 비거리는 물론 적절한 드로우 구질을 보이며 페어웨이에 안착했다.
“271야드야. 갑자기 왜 이래?”
“마사지 효과에요.”
“또 해 줘?”
“됐어요. 흐흐흐…….”
특유의 웃음소리를 듣자 묘하게도 필상은 안심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프런트 나인에서는 그 소리를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던 필상은 결국 자신과 모모코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보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적절한 긴장과 각오는 좋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부담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와의 관계가 변화했듯이 자신의 지도 방법도 그에 따라 달라질 필요를 절감한 날이었다.
“더도 말고 80야드네.”
“짧게 쳐야겠죠?”
“핀 뒤로는 내리막 경사지만 그래도 과감하게!”
“좋아요.”
샌드웨지로 날린 컨트롤 샷의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생각보다 런이 많았지만 오르막 퍼팅을 남겨 괜찮았다.
라이가 거의 없는 오르막 퍼팅을 과감하게 홀컵에 구겨 넣은 모모코는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지그재그로 굽은 파5, 11번 홀에서 다시 정확한 샷으로 연속 버디를 낚은 그녀의 얼굴에 급기야 활짝 핀 미소가 되돌아왔다.
다음 홀로 이동하던 모모코가 힐끗 곁눈질을 하더니 갑자기 옆구리를 꾹 찔러 필상은 깜짝 놀랐다.
“왜?”
“어제 일 후회했죠?”
“무슨 소리야?”
“오늘 저보다 오빠가 더 긴장한 것 같았어요.”
“내가 언제?”
“흐흐흐……. 알았어요. 긴장은 하지 않은 거로!”
서로의 입장이 바뀌어 왠지 끌려 다니는 느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게 바로 모모코의 빠른 변화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외모만큼이나 앳되고 순진무구 덩어리였는데, 이젠 때때로 자신을 당혹스럽게 만들지 않는가!
이성간에는 띠 동갑이라는 나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건지, 허탈하면서도 기분이 묘한 자신의 심정을 어찌 해석해야 좋을지 헷갈릴 뿐이었다.
-와우! 정말 부드러운 스윙입니다.
-전반에는 심한 컨디션 난조를 보이더니 후반 들어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아요. 대체 왜 그런 거죠?
-캐디이자 코치인 공 프로가 적절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경기 중인 선수는 캐디 외에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대한민국이 가장 주목하는 프로 골퍼를 캐디로 쓰고 있으니 무서울 것이 없지 않을까요? 하하하.
허 해설위원의 판단은 적절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이번 경우는 모모코가 스스로 극복한 면도 없지 않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애간장을 태우는 필상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
든든한 필상이 곁에 있는데, 허무하게 무너지고 싶지는 않아 어떻게든 집중하려고 노력하던 중, 우연히 해법을 찾았다.
필상의 손길이 어께에 닿는 순간, 신기하게도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졌고 축 가라앉았던 마음도 진정되었다.
그저 내 남자의 손길을 느끼고 싶었을 뿐인데!
“아주 좋아!”
10번 홀에서 시작된 버디 행진은 13번 홀까지 이어졌고 졸지에 -3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파3, 14번 홀에서 샌드 세이브에 성공한 뒤 15번 홀에서 다시 1타를 줄였고 남은 어려운 홀들은 차분하게 지켜 냈다.
어제보다 저조한 기록이지만 성적은 상대적인 법, 7:35에 출발한 모모코와는 달리 늦게 출발한 선수들은 흩뿌리는 비로 인해 대체적으로 기록이 좋지 못했다.
그 결과 모모코는 예선을 -9언더, 단독 3위로 통과하며 우승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 일본에서처럼 압도적인 경기를 펼치지는 못했으나 악전고투를 겪은 터라 남은 이틀이 더 기대되었다.
“내일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긴장되는 게 아니고?”
“한국 최고의 선수들과 맞붙잖아요. 전 자신 있어요!”
2타 차 공동 선두는 디펜딩 챔피언인 배선우와 숙명의 라이벌처럼 느껴지는 안수현이다.
그 둘과 챔피언 조에 편성된 것이 긴장할 만도 하건만 오히려 긍정적인 자신감을 피력하는 모모코를 보며 이날 저녁은 정선 시내에 나가 평창 한우를 먹었다.
선전한 그녀에게 상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보다 편하게 경기에 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때로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