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울돌목을 지키는 장수
혼자 잔다고 과연 무서워할까?
앳된 외모는 남자의 보호 본능을 일깨우지만 승부에 임하는 모모코의 강단 어린 모습을 봤다면 의구심이 일 것이다.
하지만 소녀 같은 감성도 아직 생생하기에 거짓말로 들리지는 않았고 타국에 온 모모코를 혼자 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랜만에 귀국한 자신이 집을 놔두고 그녀와 함께 콘도에 머물 수는 없지 않겠나.
결국 운전하다 말고 전화를 넣어야만 했다.
건넛방 좀 치워 놓으라고.
엄마와의 통화를 들은 모모코는 한국어를 알지 못하는데도 실실 웃었다. 특유의 이상한 웃음소리를 참지 못하며.
그녀가 바라는 대로 이뤄진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아들!”
“저 왔어요.”
정말 그리웠던 엄마, 그리고 누나들까지 다 만났다.
그런데 환하게 웃으며 아들을 맞이하던 엄마는 물론 누나들까지 필상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이게 누구야! 모모코? 모모코 맞지?”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국어가 되지 않아도 자신을 반기는 네 여인네의 마음을 느꼈는지 모모코는 처음 보는 우리 식구들과 포옹까지 했다.
“나 배고파!”
필상이 지를 수 있는 소리는 그것뿐이었다.
가족들이 모모코를 반기는 장면은 묘하게 가슴이 뭉클했다. 함께 오리라 생각 못했던 모모코의 등장이 무척이나 반갑고 좋았던 것 같다.
살짝 불안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서 그런지 식구들의 환영식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필상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는 가족들의 입장,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미리 차려 놓은 엄마의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은 여섯 명, 남자가 자신뿐이라는 것이 영 껄끄러웠지만 엄마가 정성껏 차린 음식이 필상을 불렀다.
“실물은 더 깜찍하네!”
“재주도 좋아. 내 동생.”
“얘가 순순히 따라온 걸 보면 너 설마?”
“아니! 아 아줌마들이 진짜!”
엄마와 누나들의 온갖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하지만 필상은 모처럼 맞이한 엄마의 밥상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떻게 말하든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지 않았고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느긋했다.
그런데 맛있는 음식이 체할 것 같은 상황은 모모코가 기다렸다는 듯 일본어 번역 앱을 사용하면서부터였다.
“여기 정말 오고 싶었어요. 어머니.”
“어머, 어머! 몇 살이야?”
“스무 살이요. 한국 나이로는 스물두 살이에요.”
“예쁘기도 하지. 너희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
“저 여기에 살고 싶어요.”
그 대목에 식구들은 비명을 질렀다.
필상도 모모코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작정한 듯 필상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을 마구 던졌다. 자신은 오빠를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감정이 메마른 사람 같다는 둥, 여자 마음을 하나도 몰라준다는 둥, 결국 필상은 얼른 밥을 먹고 샤워하러 들어간다며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말려도 들을 인간은 한 명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방에 들어온 필상은 일단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초특급 호텔 침대도 주지 못했던 안락함이 느껴졌다.
“한국에 오자고 한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네!”
KLPGA 참가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오늘의 만남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왠지 뒤통수가 자꾸 가려웠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다.
자신과 이 집에 남아 있던 과거 속의 한 여인의 흔적을 이제는 깨끗하게 지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치한 생각이지만 성희가 자신의 최근 소식을 들었을지 궁금했다. 들은들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사람의 심리는 이럴 때 아주 얄팍해도 상관없다며 자위했다.
인생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지 않을뿐더러 당당히 성공의 길을 가는 것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다.
떠올리기만 하면 절로 치밀던 원망과 한탄은 이제 그만둬도 될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차츰차츰 잊혀 갔지만.
“오빠!”
방문을 빼꼼히 연 모모코가 고개를 쏙 들이밀더니 급기야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무척 흥분했는지 얼굴에 홍조가 가득 피었다.
“아주 물 만났네!”
“너무 좋아요. 어머니도 언니들도.”
“적당히 해. 너무 과한 기대는 되레 짐이 될 수도 있잖아.”
“싫어요. 오빠가 생각을 바꾸세요.”
“뭘? 어떻게?”
“몰라요!”
갑자기 침대에 기댄 필상에게 확 안겨 왔다.
처음은 아니지만 장소가 장소이기 때문인지, 느낌이 달랐다. 아주 많이.
“모모코. 누나들이 지금 방문 앞에 있어. 아마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걸?”
“알아요.”
“…….”
알고 있다니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그녀를 안은 채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한 번 꼭 안아 주고 머리를 쓰다듬은 필상은 그녀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정말로 문 앞에 모여 앉아 있던 누나들이 까르르 웃으며 도망쳤고 필상은 모모코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동네를 한 바퀴 도는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모모코를 알아보고는 아는 체를 하는 바람에 난감했다.
소문은 발보다 빠르다더니, 그걸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는 날이었다.
***
일어나 보니 영웅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걸 실감했다.
모모코가 참가할 하이원리조트 여자 오픈까지는 아직 한 주의 여유가 있었기에 연습을 위해 페럼CC를 찾았다.
그런데 입구에 붙은 플래카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점동면의 자랑, 공필상 프로의 금의환향을 환영합니다! - 페럼CC 직원 일동]
그걸 보던 필상은 골프장 입구 경비 초소 앞에 차를 세웠다.
낯익은 정씨 아저씨가 부리나케 뛰어나와 경직된 자세로 경례를 붙였다. 썬팅 때문에 차 내부가 보이지 않았고 고급 세단이 갑자기 서자 살짝 긴장하신 것 같았다.
“아저씨. 저에요!”
“어?”
“필상이라고요.”
차문을 열고 나선 필상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그제야 알아본 정씨 아저씨는 두 손을 꼭 붙들고 반가워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쳤던 동네 어른으로 필상이 졸업한 초등학교 ‘소사 아저씨’셨다.
어릴 때 아무 생각 없이 불렀던 ‘소사(召使)’는 일본어로, 학교에서 여러 가지 잡무를 처리해 주시는 분의 호칭이었고 이제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표현 중에 하나다.
퇴직하고 골프장 경비로 취직하셨는데, 필상이 캐디 일을 시작할 무렵 그 똑똑하던 녀석이 어찌 이런 험한 일을 하느냐며 걱정하셨던 분이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나야 늘 그렇지. 그보다 너 정말 엄청나게 성공했다면서?”
“엄청난 건 아니고 이제 기반을 마련한 정도에요.”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정씨 아저씨의 시선은 필상이 타고 온 고급 세단에 꽂혀 있었고 마치 당신의 아들이 성공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하셨다.
늘 이렇게 따스한 마음을 지니신 분이셨기에 동네에서 아저씨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나 강천 초등학교 출신은 선생님들은 기억 못 해도 아저씨는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염려해 주시던 그분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고, 기대한 것처럼 기뻐해 주시는 모습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안녕하세요?”
“아, 네.”
모모코도 차에서 내려 인사했는데, 아저씨는 모모코의 국적을 단번에 알아보셨다. 골프팬이 아닌데도 눈썰미는 좋으셨다.
그런데 인사를 드리고 가려던 필상에게 다가와 은근한 어조로 보태신 한마디에 빵 터진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저 처자 일본 애지?”
“네.”
“조심해. 일본 애들은 늘 겉과 속이 다르잖아. 예쁘장해도 그게 다 덕지덕지 바른 화장발일 거야.”
“네. 아저씨.”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분들이 많은 세대셨다.
그래도 순박한 그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정도라면 아픈 기억이 있지 않나 싶다. 자세히 물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데 모모코의 눈치는 역시 십 단이었다.
“그 아저씨가 저에 대해 뭐라고 하셨어요?”
“엄청나게 예쁘다고 하셨어.”
“거짓말!”
“아니야. 정말이야. 얼마나 좋으신 분인데.”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한일 간에는 이렇게 드러낼 수 없는 과거의 아픔이 남아 있다. 피해자에게는 아직도 엄연한 현실인데, 시간이 약이라고 여기며 역지사지 못 하는 가해자의 어리석음은 안타깝고 때로 분노를 자아낸다.
“필상아!”
“필상이 뭐야? 프로님이라고 불러야지.”
“퍼펙트 콩이라잖아. 퍼펙트! 이 무지한 아줌마들아.”
“왜들 이러세요? 저 필상이라고요. 256번 캐디 공필상.”
필상은 최 이사를 만나러 가기 전에 캐디 휴게실부터 찾았다. 물론 엄청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다시는 이곳에 들르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들 했기에 누구보다 격렬하게 반기는 것 같았다. 모모코와 함께 아줌마 캐디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잠시 그녀들의 수다에 맞장구를 쳐 줬다.
아무리 시간이 금쪽같아도 자신이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자양분을 허락한 이 장소를 평생 잊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목 빠지는 줄 알았다. 공 프로.”
“하하하. 반가운 분들이 한둘이 아니라서요.”
“다들 좋아하지?”
“네. 좀 쑥스럽더라고요.”
필상과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최 이사는 모모코에게 얼마나 잘해 주는지 직접 연습장까지 안내하며 인증 샷까지 같이 찍었다.
어딜 가나 그런 대우를 받기는 하지만 그날 하루는 연습에 집중하기 어려울 만큼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필상의 애인이라는 수군거림이 귀에 거슬렸지만 나서면 더 이상할 것 같아 모른 척 연습에 임했다.
***
“와! 멋져요!”
“투자도 많이 했고 관리도 잘하니까!”
“그래도 사방이 확 트인 시야는 단연 압권인 것 같아요.”
드디어 모모코가 출전할 하이원 리조트에 도착했다.
골프관 련 시설은 세계 어느 골프 코스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하이원CC의 자랑 중에 하나가 바로 세상을 굽어보듯이 시원하게 트인 시야와 한여름에도 서늘한 날씨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태백산맥을 마주한 고원에서의 골프는 장타자에게 더 큰 즐거움을 선사하며 모든 홀의 모양이 티 그라운드에서 잘 보인다는 장점도 지녔다.
연습 라운드에 임한 모모코는 첫 라운드인데도 금방 코스에 적응하는 좋은 샷 감각을 보였다.
“마음먹은 대로 쭉쭉 날아가는 것 같아요.”
“공기저항이 적은 고원지대라서 비거리가 더 나와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들 거야.”
“그럼 비거리 체크를 보다 세밀하게 해야겠어요.”
“심한 언듈레이션에 대한 샷 적응도 필요해.”
고지대라서 도심과 가까운 골프 코스에서는 재현할 수 없는 자연적인 지형지물을 활용한 위험 요소가 곳곳에 산재했다.
특히나 업 다운이 심한 페어웨이에서의 샷도 적응이 필요했다. 컨디션이 좋은데도 모모코의 연습 라운드 성적이 3오버파였으니 적절한 긴장감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야!”
“어? 안 프로님.”
“너 정말 너무하는 거 아냐?”
“그러게요. 제가 너무 무심했습니다. 하하하.”
안 프로와의 만남은 각별한 인연이라 생각한다.
실제 굉장히 좋아하는 선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과 엇박자가 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일본 진출을 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멜 골프백은 그녀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에 들어온 뒤, 차일피일 미루다 연락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녀가 화를 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커피 뽑아 올까요?”
“됐어!”
“에이……. 좀 봐줘요.”
“내 샷을 점검해 준다면 용서해 줄게.”
“그거야 당연하죠.”
필상은 직접 나서 그녀의 골프백을 모모코의 타석 바로 옆에 풀었다. 모모코가 암고양이 눈빛을 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한참 언니인 안 프로가 모모코에게 먼저 인사를 청하며 연습 분위기를 평화롭게 이끌어 간다는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자신은 필상의 친누나나 다름이 없다는 선언 같은 말을 던진 뒤, 둘은 오히려 필상을 따돌리고 자매처럼 친해 보였다.
‘정전협정에 이은 평화연대협정인가?’
하지만 연습 라운드에 돌입하면 두 프로는 완벽한 경쟁 모드에 돌입했다. 미소를 띤 표정은 언제든 꺼내 보일 수 있는 장식일 뿐, 샷 루틴에 들어서면 한기가 풀풀 날렸다.
필상은 아주 긍정적이라고 판단했다.
모모코는 이미 올 시즌 최고의 기량과 결과를 선보였으며 안 프로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최근 주춤하고 있지만 모모코의 날카로운 실력을 확인한 뒤, 그녀는 마치 울돌목을 지켰던 장수처럼 전의를 불태웠다.
모르긴 몰라도 둘의 경쟁에서 이긴 자가 그린재킷을 입을 확률이 아주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퍼펙트 콩. 넌 연습 안 해?”
“보는 것도 아주 좋은 연습입니다.”
“남자들은 스윙 템포 자체가 다르잖아.”
남자 프로들의 스윙 템포는 여자들보다 훨씬 빠르다. 근력이 강하고 큰 스윙 아크가 가능해 장타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필상의 스윙 템포는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느린 편이다. 특히나 컨트롤 샷의 경우는 모모코와 거의 차이가 없다.
그걸 기반으로 추론 가능한 사실은 스윙 템포를 빠르게 가져가면 자연스럽게 비거리 향상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필상은 아직 봉인을 풀 이유도, 의지도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