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무섭단 말이에요!
-한국 투어에는 왜 가려는 거죠?
우승 인터뷰의 분위기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심한 업 다운을 보였다. 우승 소감과 축하 인사가 오갈 때만 해도 화기애애했는데, 갑자기 공격적인 질문이 쏟아졌다.
사실 확인이나 격려의 말은 없었고 JLPGA 대회를 자꾸 거르는 것에 대한 질타 섞인 질문이라고 봐도 무방한 기자의 태도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모모코는 미소를 잃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요.”
-그 말은 KLPGA가 JLPGA보다 한 수 위라는 의미인가요?
한층 공격적인 질문이었으나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운 모모코는 질문한 기자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모두가 깜짝 놀랄 말을 꺼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세계가 인정하는 객관적인 사실을 외면하고 싶으세요?”
너무 정곡을 곧바로 찌른 대답이었기 때문일까?
나무라듯 질문을 던지던 기자는 대꾸하지 못한 채 얼굴만 붉혔다. 흔치 않은 장면인데 모모코는 사족을 달지 않고 그냥 일어섰다.
그러자 다른 기자가 따라붙으며 추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한국 투어에 가는 이유가 한 수 배우기 위해서라는 말입니까?
“아니요. 저는 우승하러 가요.”
마지막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모모코는 굉장히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내용을 전해들은 필상은 추가 질문을 던진 기자가 너무도 고마웠다.
한국보다 빨리 골프를 받아들인 일본은 아시아 최강이라고 자부해 왔다. 실제 오랫동안 그런 결과를 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의 여자 골퍼들이 미국은 물론 일본 투어도 장악한 지 한참이 지났다. 세계가 인정하는 사실이건만 그걸 애써 외면해 온 것이 일본 골프계다.
그런데 일본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모모코가 불편한 진실을 입에 담았으니, 역풍을 맞을 확률이 농후했다.
그러나 우승하러 간다는 말은 꿈을 깨기 싫어하는 이들의 귀에는 마치 평정하러 간다는 말처럼 들렸을 것이다.
“미사키. 좀 밟으면 안 될까?”
“모모코가 그렇게 보고 싶으세요?”
“할 말이 있어서. 너도 봤잖아. 모모코 우승 인터뷰.”
“잘 마무리된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좀 불안해서…….”
사실 모모코가 대회를 치른 장소는 필상이 있던 곳과 멀지 않다. 같은 홋카이도의 다른 도시였을 뿐이다.
그래도 다른 공항을 이용하는 지역이라 내일 도쿄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필상은 지금 그녀를 만나기 위해 밤길을 달려 삿포로 국제CC가 있는 기타히로시마로 가는 중이었다.
“오빠!”
미리 알리지 않고 불쑥 나타난 필상을 보자 모모코는 폴짝 뛰어올라 품에 안겼다. 함께 도착한 미사키가 도리어 당황해 자리를 먼저 피했다.
만남의 감동도 잠시, 필상은 마음에 뒀던 말을 꺼냈다.
“용감한 거야? 무식한 거야?”
“무슨 말이 그래요!”
“걱정이 돼서 그러지.”
모모코도 필상이 무엇을 짚는 것인지 단번에 알아들은 듯.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단호했다.
“전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불편해도 그건 불편해하는 사람들의 몫이죠.”
“불편해하는 사람들의 몫이라…….”
“그리고 저는 자신 있어요!”
모모코의 당당한 태도에 그걸 탓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일본 정치인들이 가관이라고 일본 골프팬들도 다 그러할 것이라고 예단한 것은 심각한 오류일지도 모른다.
걱정한 사태가 벌어지면 모모코의 진로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서 올바른 그녀의 자세를 무식하다고 표현한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생각이 짧았어.”
“저를 위하는 오빠의 마음을 잘 아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 지금 오빠를 꼭 껴안고 싶은 걸 참는 게 더 힘들어요.”
“모모코…….”
그녀가 변했다. 마냥 어리광만 부리던 소녀 같던 모모코가 갑자기 훌쩍 커 버린 느낌에 가슴이 뭉클했다.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하지만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둘은 마침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태국에 다녀온 뒤, 2주간 모든 힘을 쏟아부었고 한국의 일정은 여유가 있기 때문에 하루쯤 쉬어도 좋을 것 같은데, 모모코는 이미 비행기 표를 예약해 뒀다.
“이 대표님!”
“모모코, 우승 축하해요!”
“흐흐흐……. 우리 둘이 같이 우승했잖아요.”
공항 출국 게이트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이 대표를 만났다. 그녀가 안에까지 마중을 나온 이유는 이미 통보를 받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국에는 오랜만에 돌아온 거죠?”
“엄청난 일이 있었지만 사실 4달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요?”
“그 4달이 4년처럼 느껴지기는 했죠. 하하하.”
태국에서 만난 것도 겨우 2주가 지났을 뿐인데, 마치 헤어진 연인이라도 만난 듯이 다들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인터뷰는 괜찮겠어요?”
“예상 질문지까지 미리 받았는데,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국내 언론의 공식 인터뷰는 처음이잖아요?”
“그래도 아마 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것 같아요. 호호호.”
필상은 아직 국내 투어에는 참가한 적도 없다.
하지만 공항에서 인터뷰를 해야 할 만큼 확실한 인지도가 생겼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매니지먼트를 맡은 이 대표의 역량이 각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실제 피부에 와닿은 적이 없어서 그렇지, 필상은 국내 골프팬들에게 이미 스타였다.
“기자들이 인터뷰 부스에서 공 프로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거예요.”
“일단 가시죠.”
부스에 들어서자 카메라 플래시에 눈이 부셨다.
이 대표와 필상, 그리고 모모코가 나란히 단상에 준비된 의자에 착석했다. 기자들이 족히 100명은 되는 것 조금 놀랐다.
아마도 모모코의 인기도 반영된 게 아닌가 싶었다.
이 대표에게 인터뷰를 잡았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 감흥이 없었는데, 막상 수많은 기자들의 시선과 카메라가 자신에게로 향하자 은근히 부담스럽기는 했다.
필상과 시선을 마주친 이 대표가 환한 미소를 보인 뒤, 능수능란하게 인터뷰를 직접 진행하기 시작했다.
-금의환향하신 소감부터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금의환향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 겨우 투어에 발을 디딘 신인에 불과할 뿐이지요. 운이 좋아 과분한 결과를 얻었지만 아직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많습니다.”
-너무 겸손하시네요. 공 프로가 세운 대기록을 모두들 위대하다고들 하는데, 정작 본인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그저 겸손하다고 봐주면 될 것을, 기자 특유의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질문이었다. 또한 예상에 없던 질문인지라 진행자인 이 대표의 이마에 깊은 주름살이 잡혔다.
하지만 이미 터진 질문을 되돌릴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이었으나 필상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저를 좋게 봐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스코어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버파로 우승한다고 그 우승이 가벼운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기록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경쟁에서 이겨 우승했고, 그로 인해 너무도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JGTO에 이어 아시안 투어 시드도 확보했는데, KPGA투어에 참가하실 의향은 없으신가요?
순식간에 침묵이 흘렀고 기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미 출전이 잡혔지만 발표는 당사자가 직접 하기로 주최 측과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기자들도 필상이 신한동해오픈 출전 자격을 갖췄음을 알고 있었다.
때마침 대회가 열리기 3주 전에 한국에 들어왔기에 뭔가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감사하게도 기회를 얻었습니다.”
-혹시 신한동해오픈에 출전합니까?
“그렇습니다. 너무도 바라던 일이 이뤄져 꿈만 같습니다. 주신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팬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경기를 펼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선수였기에 보다 자신감을 피력해도 좋을 것 같았지만 필상이 내내 유지한 기조는 겸손이었다.
전인미답의 엄청난 결실을 맺은 선수의 이런 태도는 기자들의 날카로운 발톱마저도 움츠리게 만들었다.
-단기간에 눈부신 결과를 만들었는데, 늦게 시작하고도 훌륭한 기량을 갖춘 비법이 있다면 소개 좀 해 주시죠?
“저는 정말 골프가 좋습니다. 그저 먹고 사는 것에 지쳐 골프는 언감생심 해 볼 생각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제가 다시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골프입니다. 그러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 캐디로 일을 하면서 골프를 접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저도 편견을 가졌던 일이었는데, 캐디 일을 하면서 모든 것이 잘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일할 기회를 주시고 다방면으로 지원해 주신 페럼CC 경영진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오늘도 손님들을 위해 수고하는 동료 캐디 여러분에게 힘내시라는 격려하고 싶습니다.”
그 후에도 필상은 캐디라는 직업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많은 골퍼들이 가볍게 여기나 서비스 정신이 필요한 전문직임을 어필했으며 보다 존중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했다.
열악한 근무 조건이나 편견에 대해서는 기자들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필상의 말에 상당 부분 공감했다. 그런 공감이 기사에 반영되어 보다 성숙한 골프 문화가 형성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봤다.
그밖에도 많은 질문이 있었으나 필상은 비교적 담담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런데 끝마칠 무렵, 드디어 잠자고 있던 화약고가 터졌다.
-함께 온 모모코와는 어떤 사이신가요?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연인이라는 말도 있던데, 궁금증을 풀어 주시죠.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저는 그녀의 전속 캐디이자 스윙코치 일을 하는 것에 아주 만족합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고 3승을 거둔 투어프로라면 캐디는 이제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모모코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그녀의 캐디를 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또한 캐디를 하면 경기 운영에 대해 보다 폭넓게 공부할 수 있기에 당분간 그 일을 그만둘 의사는 없습니다.”
-일전에 모모코가 공개적인 인터뷰에서 공 프로님을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모모코를 아주 좋아합니다. 하지만 연인으로 발전할 관계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서로의 목표가 분명한 지금, 그 길을 향해 정진할 때입니다. 부탁드리는데, 프로로서 제가 만들어 갈 골프에만 주목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끝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주 좋은 가십거리를 마주한 기자들은 필상이 빗장을 닫아걸자 돌연 총구를 모모코에게로 재조준했다.
말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일본어에 능통한 기자가 바로 그녀에게 인사말부터 던졌다.
-모모코. 시즌 4승을 축하드리고 한국 방문을 환영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올 시즌 퍼펙트 콩과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데, 그 비결이 대체 뭐죠?
그 대목에서 필상의 당황한 표정을 확인한 그녀가 방긋 웃어 보인 뒤, 아주 천연덕스럽게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야 당연히 제가 좋은 코치님을 만났기 때문이죠. 아시다시피 절대 실력을 갖춘 공 코치님이 라운드까지 도와주시니 저로서는 힘이 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일전에 인터뷰에서 밝혔던 사적인 감정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 제가 코치님을 좋아하는 마음은 오히려 그때보다 더 커졌어요. 어느 여인이 저렇게 멋지고 능력 있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무슨 말인지는 아는데, 제가 코치님의 앞길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이루고 싶은 것이 많고요.”
덜컥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아닐지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모모코는 과거의 이력은 물론 기자들의 상상력까지 단숨에 무너뜨렸다. 진심도 섞여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절묘하게 일반화시킨 대목은 필상도 감탄했다.
물론 서로가 조금은 설레는 사이가 된 뒤였기 때문에 스스로도 자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 자신이 바라던 바였는데, 묘하게도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 대표가 나서서 예정보다 길어진 인터뷰를 마무리했고 필상은 모모코와 함께 기자들을 위한 포토타임을 가졌다.
왜 비행기에서 내리던 모모코가 외모에 바짝 신경 쓰나 했더니 인터뷰 뒤에 이런 시간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국내에 머무는 동안에는 이 차를 이용하세요.”
주차장에 서 있는 검정색 고급 세단 앞에 멈춰선 이 대표가 차 열쇠를 건네며 던진 말이다. 외제차는 아니고 국내 최고가의 차량을 타라고 하자 순간 기분은 좋았다.
“제가 타기에는 너무 좋은데요?”
“그럴 리가요! 오늘은 이동하느라 피곤할 테니 우리 직원이 집에까지 운전을 해 드릴 거예요.”
“아닙니다. 비행기 얼마나 탔다고, 제가 운전해도 됩니다.”
이 대표가 데려온 직원들이 트렁크에 짐을 실었다.
그런데 이 대표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모모코가 조수석에 먼저 올라탔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모모코의 숙소는 어디죠?”
“안 잡았어요. 잡을 필요 없다던데요?”
그 말을 하는 이 대표가 눈을 찡끗했다.
금방 알아들었지만 미리 대비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대표는 연락하겠다며 먼저 자리를 피했다.
하는 수 없이 운전석에 올라탄 필상은 일단 출발했다.
그러고는 애써 침착한 척,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우리 동네에 그럴싸한 호텔은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당분간 연습할 페럼CC에 있는 좋은 콘도를 얻어 줄게.”
“싫어요. 무섭단 말이에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