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그의 버릇은 연승!
나가타는 JGTO의 전설이라 불리는 프로 골퍼 출신이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실전적이고 날카로운 해설을 하는 전문가인데, 이렇게 흥분한 어조로 길게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만큼 그가 받은 충격이 컸다는 것인데, 평소 그의 해설은 굉장히 짧고 담백하다. 대부분의 경우, 선수들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편이며 웬만해서는 칭찬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갑자기 필상에 대해 더없는 극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치 소중하게 키운 아들을 자랑하는 아버지 같았다.
참고 참았던 마음의 문을 연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자기 확신에 넘치는 정확한 샷을 보유한 선수가 물러서지 않는 도전 정신까지 갖춘 것이 그를 감동시킨 것이다.
‘인중지룡’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튀어 나간 공이 프린지에서 멈췄어요!”
“내가 건 스핀은 어딜 간 거야?”
“홀컵에 맞은 충격이 다 잡아먹은 것 같아요.”
차라리 근처에 떨어진 것만 못한 결과에 좀 허탈했다.
하지만 프린지에서 시도한 7m 롱 퍼팅이 홀컵에 빨려 들어가면서 갤러리들의 흥분은 마지막 홀까지 이어졌다.
560야드로 설정된 파5, 18번 홀에서 서드 샷을 핀에 붙여 탭인 버디를 기록한 필상에게 쏟아진 반응은 정말 뜨거웠다.
아직 다른 선수들의 성적은 나오지 않았지만 필상이 거둔 1라운드 성적, -9는 이 코스의 공식 대회 레코드였다.
“배고프다.”
“버디를 그렇게 많이 먹고도 허기가 지세요?”
“얼른 씻고 나와. 10분.”
“너무해요.”
“미사키는 생얼이 더 나아.”
그럴 리가 있겠나?
하지만 정말 10분 만에 나타난 미사키는 BB크림만 바른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다.
시선 둘 곳을 찾기 어려웠으나 격려의 말은 아끼지 않았다.
용감하다고.
식사를 마친 필상은 어김없이 연습장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공을 한 무더기 잡더니 벙커 연습장에 박혀 나오지 않았다.
“1라운드 성적 나왔어요.”
“몇 타 차야?”
“3타 차인데, 공동 2위가 무려 5명이에요.”
“읊어 봐.”
“이케다, 타츠노리가, 가와무라, 이와타, 숀 모리스에요.”
“어? 한국 선수는 없어?”
“제일 위에 있잖아요.”
올 시즌 한국 선수들이 선전하고 있었다.
관록의 양용은, 최호성이 앞에서 이끌었고 황중곤, 이상희, 김형성, 한승수, 류현우 선수 등이 상위권 바로 밑을 떠받치고 있어 선두권에 이름이 없는 것은 이상했다.
하지만 2라운드를 마치면 달라질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실제로 한국 선수가 치고 올라왔다. 예상과는 다른 선수였지만.
“오늘 9언더를 친 선수가 나왔어요.”
“누구?”
필상은 6언더에 만족했다.
결선의 길목인 2라운드는 코스 세팅이 만만치 않았고 컨디션도 썩 좋지는 않아 안정적인 경기 운용에 포커스를 맞췄다.
그런데 어려웠던 둘째 날의 9언더는 필상도 깜짝 놀랄 성적이기에 누군지 정말 궁금했다.
“김경태 프로에요.”
“김경태 프로?”
정확하고 부드러운 스윙의 대명사, 필상이 개인적으로 가장 닮고 싶었던 선수가 바로 그다.
“김 프로의 2라운드 종합 성적은?”
“12언더로 단독 2위에요.”
“그럼 동반 라운드를 하는 건가?”
“네. 그렇겠죠.”
2006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경태는 2007년 KPGA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데뷔전 우승을 시작으로 루키 시즌에 3승을 거둔 그는 ‘괴물’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듬해 바로 JGTO로 무대를 옮긴 그는 2010년 3승, 2015년 5승, 2016년 3승으로 JGTO 통산 13승을 쓸어 담았다.
화려하지 않지만 3차례나 상금왕을 차지한 그는 지난 2년간 잠시 주춤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평균 타수는 여전히 투어 최고 수준이었다. 언제든 우승 가시권이라는 말이다.
그와의 동반 플레이를 생각하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
-모모코가 다시 펄펄 날고 있습니다!
-지난주 대회에서 예열을 마쳤기 때문에 이번 주는 우승을 기대해 볼 만합니다. 다부진 각오도 밝히지 않았습니까!
-일각에서는 너무 건방지다는 말도 나오던데, 우승을 꼭 하겠다는 모모코의 사전 인터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어느 선수가 우승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입 밖에 내는 것을 주저할 뿐, 오히려 당당히 밝혀 스스로에게 강한 동기부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기야 올 시즌 대부분의 지표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모모코가 첫날부터 단독 선두에 나섰으니, 자신의 말을 지켜 가고 있는 셈이네요.
홋카이도 메이지 컵에 나선 모모코는 우승을 하겠노라 당당한 각오를 밝혔다. 곁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필상도 그녀의 다짐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는데, 언론의 반응은 엇갈렸다.
경기 중인 선수가 웃는 것도 그다지 곱게 보지 않는 일본 골프계의 케케묵은 성향을 고수하는 몇몇 전문가들은 모모코의 교만이 문제라는 보수적인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홋카이도는 모모코에게 약속의 땅이었다.
마치 지난주의 과오를 반성이라도 하듯, 첫날부터 침착한 경기 운영을 보여 주더니 급기야 단독 선두로 나섰다.
보기 2개가 아쉽지만 버디를 6개나 낚았고 2온에 성공한 파5 홀에서 6m 퍼팅을 성공한 장면은 이날의 베스트 샷으로 선정되었다.
‘우리 둘 다 선두에요!’
“난 절반을 치렀지만 넌 이제 겨우 3라운드 경기의 첫날이 끝난 거잖아. 그렇게 마구 비교하는 건 좀 그런데?”
‘치사하게 왜 이래요!’
잠들기 전에 모모코와 한참 수다를 떨었다.
본래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지만 혼자 고군분투하는 그녀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객쩍은 농담도 몇 마디 보탰다.
시즌 4승에 도전하는 그녀에게 행운을 빈 필상은 다음날 이어진 3라운드를 정말 기분 좋은 마음으로 나섰다.
자신이 교과서처럼 여기던 김경태 프로와의 동반 라운드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하는 거 아냐?”
“왜 이러십니까! 더 붙일 거면서.”
연습장에서 인사를 나눌 때만 해도 서먹서먹했다. 경기에 나서기 전에는 가급적 마음을 다잡기 위해 불필요한 행동을 자제하는 습관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고 경쟁의 불꽃이 튀기 시작하자 오히려 부쩍 친해졌다.
1번 홀에서 152야드 세컨 샷을 멋지게 핀에 붙이는 순간, 그의 ‘나이스 샷!’ 소리가 나온 뒤부터였다.
서로 격려하며 때로는 부담 가지 않는 범위에서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선의의 경쟁을 나누기 시작했다.
-용호상박이라고 해야 하나요?
-비슷한 스타일을 가진 두 선수가 서로 기선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팬들에게 골프의 묘미를 한껏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서로를 의식하고 강하게 압박하기 위해 신경전을 펼치는 것 아닌가요?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말이 통해서 그런지 서로 격려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지만 승부는 상대가 아닌 자기 자신과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두 선수는 성공적인 라운드를 펼친다고 볼 수 있겠네요. 하하하.
무빙 데이다.
대다수의 선수들이 공격적인 경기를 운용하기에 3라운드 코스 세팅은 비교적 까다롭게 한다.
하지만 주거니 받거니 타수를 줄여 나간 필상과 김경태는 급기야 3위와의 격차를 따돌리고 마치 매치 플레이를 하는 것 같았다.
“졌다, 졌어!”
“하하하. 왜 약한 모습을 보이고 그러십니까! 그렇다고 제가 대충 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어림도 없지. 나도 같은 상황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테니까!”
필상은 8언더, 김경태는 6언더를 기록했다.
[공필상 -24, 김경태 -18, 이와타 -13]
동반 플레이를 했던 타츠노리가는 아예 톱10에서 사라졌다. 두 선수의 기에 눌려 오늘 2오버를 쳤기 때문이다.
그의 추락 때문인지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앞둔 필상에 대해 대대적인 기사를 낸 신문은 많지 않았다.
안방에서 벌어진 한국 선수들의 경쟁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한국 골프팬들은 흥분했다.
왜 생중계를 하지 않느냐는 팬들의 성화에 급기야 SBC 골프 채널이 최종 라운드 중계를 약속했다.
“식사하러 가자.”
“식사요?”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캐디가 기다릴 것 같아서요.”
“같이 데리고 가면 되잖아.”
김경태가 필상과 미사키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이미 일본 생활 10년차를 넘긴 그와 많은 대화가 오갔는데, 주로 골프에 대한 이야기였다. 보다 사적인 관계를 맺고 싶었으나 필상의 진지한 태도를 받아들인 그는 투어프로로 살아가는 여러 팁을 가르쳐줬다.
실제 한국 선수들과 안면은 있어도 이렇게 개인적인 친분을 맺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더 소중한 시간이었다.
“너한테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말씀해 보세요.”
“모모코와는 잘돼 가고 있는 거야?”
“하하하. 잘되고 말고 할 게 없어요.”
“소문은 그냥 소문일 뿐이라는 건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 드릴게요. 아직은 그냥 좋게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음……. 아주 근거가 없는 풍문은 아니라는 거네.”
“아직 어리잖아요.”
갑자기 한국말로 대화가 오가자 미사키와 김경태 프로의 캐디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혹시 뒷담화인가 싶었는지.
“프로님. 혹시 김성호라고 아세요?”
“김성호?”
“네. 속초에 살고 어려서부터 골프를…….”
“아! 성호? 흑돈 말하는 거구나!”
“흑돈(黑豚)이요? 피부가 좀 검지만 돼지는 아니던데요?”
“크면서 살이 빠져서 그렇지. 어릴 때는 아주 통통했거든. 하도 귀여워서 같이 연습하던 애들이 다 그렇게 불렀어.”
자신이 아는 김성호의 고향이 그와 동향이고 잘 안다고 했던 말이 문득 떠올라 물어봤는데, 김 프로는 뜻밖에도 그리움이 가득 담긴 눈빛을 보였다.
어려서 같이 운동을 했기에 정이 남달랐던 듯, 귀엽다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나이 차이가 제법 있는 김 프로에게는 과거의 꼬마로 기억되는 것 같았다.
-정말 대단하네요. 이 대회 최저타 기록이 얼마나 되죠?
-21언더니까 그건 이미 어저께 넘어섰습니다. 그보다 지난달에 자신이 세운 72홀 최저타 기록을 깨지 못하는 것이 좀 아쉽습니다.
-현재 -29, 3홀을 남긴 상황인데 불가능할까요?
-버디, 버디, 이글을 잡는다면 가능하죠. 하지만 그걸 의식할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긴 태국이 아니니까요.
또다시 빛바랜 자부심을 드러냈으나 16번 홀에서 필상이 버디를 잡아내자 갑자기 분위기는 묘하게 흘렀다.
태국에서 기록한 것은 인정하기 어렵지만 JGTO에서 기록한다면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언급도 했다.
그러나 17번 홀에서 필상이 세컨 샷을 그린에 올리지 못하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하필 디봇 자리에 공이 놓여 컨트롤 되지 않은 공이 그린을 넘어간 것이다.
“대회 끝나고 저 한국 갑니다.”
“그래? 좋겠다!”
“형도 같이 가시죠?”
“난 네가 없을 때 부지런히 벌어 놔야지.”
“신한동해오픈에 안 오십니까?”
“가지. 다음 주에 한 대회 더 치르고 넘어갈 거야. 그러고 보니 너도 출전하는구나?”
“네. 그럴 것 같습니다. 아직 비밀이지만.”
“네가 출전한다면 기필코 가야지. 복수전 해야 하잖아!”
“하하하. 언제든 환영입니다.”
18번 홀 티샷을 잘 보내 놓은 필상과 김경태는 세컨 샷 지점으로 이동하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이미 승부는 기울었고 만나자 곧 헤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무척 아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2주 뒤에 만날 것을 확인했기에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기로 했다.
필상으로서는 영광이다.
그의 스윙 동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 봤는지 이루 셀 수가 없을 정도였던 자신이 그와 어께를 나란히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김 프로도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그 또한 필상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알아봤던 것이다.
3온 1퍼팅, 마지막 홀을 버디로 장식한 필상의 최종 스코어는 무려 -31이었다. 자신이 세운 최저타 기록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JGTO 최저타 기록이라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
[3연승, 믿기지 않는 단독 질주!]
[새로운 강자의 출현! JGTO를 뒤흔든 퍼펙트 콩!]
[31언더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 그의 버릇은 연승!]
[정교한 샷! 강한 집념! 과감한 공략! 퍼펙트 콩에게 부족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
스포츠 언론마다 필상의 우승 소식을 다뤘다.
하지만 번듯한 헤드라인과는 달리 기록 달성이나 상세한 설명은 부족했는데, 볼 만한 것은 기사 내용이 아니라 밑에 달린 댓글들이었다.
-이제 JGTO도 한국 선수들이 판을 치겠군!
-일본 프로들은 각성하라!
-각성? 차라리 자결해라!
-너무들 하시네……. 퍼펙트 콩을 보고 더 정진하기를!
***
같은 날, 삿포로 국제 컨트리클럽에서도 우승자가 나왔다.
첫날 -6을 기록한 뒤, 굉장히 안정적인 기량을 선보인 모모코는 최종 스코어 -17로 대회 최저타 기록까지 갈아치웠다.
시즌 4승 달성에 성공한 것이다.
아직 8월이기에 그녀가 얼마나 많은 승수를 쌓을지 기대 어린 전문가들의 칭찬과 찬사에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즐거운 날, 시상식 뒤에 이뤄진 우승 인터뷰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