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56화 (56/354)

056. 달라지는 평가

“어제 이글 성공하고 뭐라고 주문을 외운 거예요?”

“주문?”

“두 팔을 한껏 치켜들고 뭐라고 중얼거렸잖아요.”

“아! 그거…….”

자세히도 봤다.

하지만 막상 내용을 밝히자니 좀 애매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실성했다고 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궁금하게 왜 뜸을 들여요?”

“안 웃을 거지?”

“웃긴 말이에요?”

“그냥 감사를 표했을 뿐이야.”

“아닌 것 같은데? 안 웃을 테니까 말해 줘요.”

걸음을 멈춘 그녀가 필상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때마침 그녀의 뒤로 붉은 노을빛이 드리운 탓에 안 그래도 예쁜 모모코의 모습이 한층 더 눈부셨다. 돌연 뜨거운 감정에 사로잡힌 필상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필상의 적극적인 행동에 화들짝 놀란 모모코가 움찔했으나 이내 필상의 품을 파고들었다.

우연찮은 키스를 했던 그날 이후, 처음 서로의 마음을 다시 확인한 순간이다. 하지만 달콤했던 분위기는 금방 깨졌다.

필상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사실대로 말했기 때문이다.

“다시 벼락을 맞아도 괜찮을 만큼 감사하다고 기도했어.”

“네에?”

필상이 일전에 벼락을 맞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저 슬쩍 감전된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을 뿐, 다시 벼락을 맞아도 괜찮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벼락을 맞겠다는 말은 곧 죽겠다는 말로 인식된 것이다.

웃을 줄 알았던 모모코가 정색하자 필상은 그녀의 어께를 포근히 감싼 채 걸음을 떼며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비밀을 꺼내 놨다.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빙긋 웃던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는 진지해졌다. 안 그래도 필상의 능력이 각별하고 신비롭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 벼락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잖아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 난 정말 골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거든. 하지만 지금 내가 그 짧은 시간에 이룬 것들을 돌아보면 그게 정말 노력만으로 가능했는지 스스로 의문이 들어.”

“오빠는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늦게 발견했을 뿐이에요. 아무리 신체 능력이 뛰어나도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가짐이잖아요.”

“어우! 내가 아는 모모코는 어딜 간 거야?”

“치! 그게 다 오빠가 가르쳐 준 거잖아요. 인간의 육체는 결국 마음을 따라온다고.”

그런 말을 하긴 했다.

승부의 순간에 모모코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조언한 것인데, 그 말을 자신에게 되돌려 줄 줄은 몰랐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나 자신에게 찾아온 것은 행운이라고 믿고 싶었다. 평생 지겹게 따라다니던 불운에서 벗어나 이젠 정말 운이 좋은 삶을 산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넘치는 행운을 누릴 뿐만 아니라 주변에 나눠줄 수만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삶은 없지 않겠나!

다음 날부터 다시 고된 행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힘들지 않았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주어진다면 그 어떤 고난도 기꺼이 헤쳐 나갈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

[8월 첫째 주 이헤야넷 레이디스 단독 3위.]

유난히 모모코의 컨디션 기복이 심했던 대회다.

첫날 샷이 좋았는데도 -3에 머문 것이 아쉬웠는지 2라운드 초반에 잔뜩 힘이 들어가 스윙 밸런스가 흔들렸다.

이제껏 필상이 캐디백을 멘 경기에서 이렇게까지 샷 난조를 보인 적이 없기에 난감하고 당황스러웠다.

적시에 긴급 처방을 하며 힘든 라운드를 마친 결과, 둘이 함께 참가한 대회에서 처음으로 오버파를 기록했다.

하지만 모모코의 예선 성적은 -1, 공동 19위로 가볍게 예선은 통과했다. 그러나 디펜딩 챔피언 황아름과 하라 에리카가 무섭게 질주한 상황은 쉽게 뒤집기 어려웠다.

3라운드부터 무섭게 치고 올라갔지만 모모코의 최종 성적은 -10, 우승자와 2타 차 단독 3위였다.

“좀 아쉽네.”

“전 만족해요.”

“경기를 즐기는 것은 좋지만 결과에 너무 쉽게 만족하면 안 돼. 지는 것이 습관이 되게 할 수는 없잖아.”

“지지 않았어요.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지만 저는 제 자신과의 승부에서 이겼어요.”

“할 말이 없네.”

사실이었다.

3, 4라운드 성적만 본다면 모모코가 가장 뛰어났다. 다만 둘째 날 단추를 잘못 꿴 것이 결국 발목을 잡았을 뿐이다.

***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멋지게 우승을 했더라면 보다 편했을 텐데, 아쉬움이 잔뜩 남은 대회가 끝나자마자 야속하게 제 갈 길을 고집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필상은 세가새미 컵에 참가하기 위해 삿포로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만 했다. 괜히 미안해하는 필상에게 모모코는 잘할 수 있다며 큰 소리를 쳤다.

필상에게 꼭 우승하라는 응원까지 보탰다. 이번 대회 출전이 필상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녀도 잘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익숙해졌어야 했고 앞으로도 이런 시간들은 또 다가올 것이기에 마음에 담아 둔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다.

“공 프로님!”

“미사키.”

삿포로 지역은 난생 처음이라 신치토세 공항을 나서던 필상은 마중 나온 미사키를 보자 너무도 반가웠다.

어느새 그녀가 없는 투어는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큰 버팀목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이 변했다.

맨땅에 헤딩을 각오하고 건너온 일본에서 필상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단기간에 거뒀고, 공식 대회에 참가할 자격까지 얻었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삶이라는 섣부른 만족감도 느꼈다.

또한 달라진 자신의 위상도 체감할 수 있었다. 필상을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숙소는 컨트리클럽 내에 있는 콘도를 잡아 놨어요.”

“미사키는?”

“바로 옆에 붙은 객실을 하나 더 얻었어요.”

“좋아. 그럼 가 볼까?”

굳이 그걸 먼저 확인한 이유는 모모코의 지령 때문이다.

다른 것은 다 괜찮아도 미사키와 숙소를 같이 쓰는 것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자신도 필상과 아무런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부터 한 공간에 머물지 않았던가.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모코가 자신이 내린 지령을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필상도 스스로 경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군소리 없이 따랐다.

“여기도 무척 멋진 코스네.”

“언듈레이션(undulation-골프 코스의 높고 낮은 기복 또는 굴곡)은 거의 없지만 물이 좀 많아요.”

“미리 코스를 살펴본 거야.”

“네. 저는 4일 전에 왔어요. 놀고먹지는 않았죠!”

“좋네. 그럼 일단 짐 풀고 같이 산책하면서 살펴보자.”

“네.”

마음이 든든했다.

미사키를 자신의 캐디뿐만 아니라 전담 매니저로 활용하겠다는 말은 진즉에 들었다. 하지만 태국에서 돌아온 그녀가 지난주부터 보이지 않더니 다 알아서 미리 움직였던 것이다.

“총 전장이 7,200야드에요.”

“짧지는 않군. 아무래도 고저가 거의 없는 지형이라서 일단 거리를 충분하게 설정한 코스인가 보네.”

“그 대신 벙커와 워터해저드가 많아요.”

정확한 샷을 구사하는 필상에게는 장애물이 많은 것이 오히려 유리하다. 그걸 아는 미사키는 표정이 밝았다.

“잔디는 정말 기가 막히네.”

기존 일본의 명문 골프 코스에 비하면 나무가 적은 편이다.

개장한 지 30년이 되었다는데, 짧은 역사는 아니지만 코스에 조성된 나무들이 충분히 자라 울창한 숲을 형성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기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잔디의 관리 상태는 매우 훌륭했다.

“아쉽지만 연습 라운드는 2번밖에 못할 것 같아요.”

“2번이면 충분하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연습 라운드다.

분명히 이 대표가 백방으로 손을 썼을 텐데도 연습 라운드가 2번밖에 잡히지 않은 것을 알기에 듣기 좋게 대답했다.

직전 대회의 우승자임에도 한 번의 연습이 더 주어지는 프로암 대회에 초청받지도 못한 것은 JGTO가 필상을 어떻게 인지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로열 컵 우승 과정에서 대기록을 작성했지만 일본 언론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독하게 마음먹고 결과를 보여 주는 수밖에.

-퍼펙트 콩! 퍽 잘 지은 애칭인 것 같습니다.

-확실히 샷의 정확도가 높아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초반이니까 좀 더 지켜보시죠.

첫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마음가짐은 남달랐지만 경기에 임하는 필상의 표정은 그 어떤 감정도 잃을 수 없는 포커 페이스였다. 혹자는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나 여길 만큼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280야드 내외의 드라이버 티샷은 어김없이 페어웨이 정중앙을 지켰고 부드럽게 컨트롤한 아이언은 매번 그린에 꽂혔다.

전반에 무려 5타를 줄이며 단독 선두에 나섰지만 중계를 맡은 일본 골프 채널 중계진은 애써 말을 아꼈다.

하지만 좋은 플레이에 대한 평가는 갤러리들이 대신했다.

“퍼펙트 콩. 파이팅!”

“힘내세요!”

아웃코스를 돌고 인코스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클럽하우스 앞을 지나야 한다. 그런데 한두 사람이 시작한 응원의 함성이 밀물처럼 쏟아졌다.

모자를 벗어 든 필상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라운드 시작 이래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옅으나마 미소가 그려진 것이다.

최근 더 까맣게 탄 얼굴빛은 과거처럼 호감을 주는 조각 미남과는 멀어지게 만들었지만 한층 더해진 건강미와 강인한 인상은 프로 골퍼로서 퍽 어울리는 모습이 아닐지.

“첫 조라서 갤러리들이 거의 없을 줄 알았어요.”

“다들 고맙네.”

“대신 프로님이 멋진 플레이로 보답하고 있으시잖아요.”

“첫 날이라서 그런지 코스 세팅이 평이해.”

“평이하다고요? 하기야 로열 컵에 비하면 쉬운 건 맞네요.”

필상은 7:10에 티오프했다. 이번 대회 출전 선수는 3명씩 출발하는 50개 팀, 무려 150명이 우승을 향한 경쟁을 시작했다.

고르게 티타임이 편성되지만 가급적 피하고 싶은 시간대가 있는데, 첫날 첫 티오프가 그중에 제일이 아닌가 싶다.

밤새 내린 서리가 다 걷히지 않아서 플레이에 지장을 받기 때문에 다들 8시 이전에 출발하는 것은 피하고 싶어 한다.

동반자들이 오버파로 헐떡이는 가운데 필상 홀로 5타를 줄였으니 갤러리들의 함성이 더 많은 팬들을 불러 모은 셈이다.

이 날의 필상의 하이라이트는 16번 홀이었다.

“184야드, 핀의 위치는 뒤에서 7야드, 우측에서 5야드에요.”

“유혹인가?”

“무리하지 말라는 거죠!”

“7번 아이언.”

16번은 아일랜드 홀이다.

들어가고 나오는 다리만 연결되었을 뿐, 연못에 완벽하게 둘러싸인 그린은 주변의 여유 공간이 거의 없다.

게다가 그린의 경사는 중앙을 정점으로 온통 내리막이고 우측으로 살짝 기운 세로형 타원의 끄트머리에 핀을 꽂은 오늘은 과욕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어?’

클럽을 건네받은 필상은 빈 스윙을 하며 이미지를 완성했다. 그런데 에이밍이 그린 중앙이 아니었다.

뒤에서 그걸 확인한 미사키는 말리고 싶었다. 7언더까지 확보한 상황이라서 굳이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필상이 씩 웃어 보이자 조용히 사선으로 물러났다. 도전적인 시도지만 자신이 없다면 결코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런데도 떨리는 가슴을 애써 꾹 누르고 지켜봐야만 했다.

쉭!

미사키는 필상의 스윙이 평소보다 조금 강하다고 느꼈다.

그 이유는 높이 치솟은 탄도에 있었다.

내리막에 꽂힌 핀을 생각하면 스핀을 먹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6번 아이언보다는 7번이 띄우기에 좋았고 문제는 힘 조절인데, 그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어야 말이지.

하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공이 정확히 핀 하이로 떨어지는 장면에서 요란한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홀인원! 홀인원!”

“와아아아!”

팬들의 함성 소리만으로는 정말 홀인원이라도 한 줄 알았다.

하지만 사실은 그와 좀 달랐다.

엄청난 탄도를 보인 공이 떨어진 지점은 홀컵이 맞다. 갤러리들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른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러나 홀컵 주둥이 일부를 일그러뜨리며 요란한 소리까지 만들었던 공은 홀컵 바닥을 때리고 다시 튀어 나왔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희귀한 장면이었다.

수많이 많은 낙하지점 중에 하필 홀컵이라니!

-아! 저런 진귀한 장면은 난생 처음 봅니다!

-평생 골프를 하신 나가타 해설위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더더욱 대단한 능력처럼 보이네요. 인간이 어떻게 저 먼 거리에서 때린 공을 홀컵에 바로 떨어뜨릴 수가 있나요!

-퍼펙트 콩, 이제부터 우리 골프계도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직 출발하지 않은 선수들도 있지만 그는 이미 당당한 단독 선두 -7이었습니다. 유리한 그 상황에 어느 선수가 이런 위험한 홀에서 핀을 바로 공략한단 말입니까?

-자신이 넘쳐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에게 7언더는 만족스럽지 않았던 겁니다. 투어에 참가한 모든 선수들이 한 번쯤은 깊이 고민해 봐야 할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런 탁월한 선수와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는다면 절대, 절대 이길 수는 없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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