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전인미답
딱!
정말 가볍게 때린 것 같지만 그런 부드러운 스윙은 절대 쉽지가 않다. 수없이 반복된 연습을 통해 테이크백을 어디로 얼마나 해야만 하는지, 헤드의 무게를 그대로 살려 밀어주듯이 치는 스윙은 그린에 떨어진 공의 런까지 조절해야 한다.
어차피 무게 중심은 대부분 왼발에 실렸기 때문에 벙커에 떨어질 듯이 잡은 스탠스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러프에서 탈출한 공이 생각보다 길게 떨어졌다.
이대로 구른다면 홀컵을 훌쩍 지날 것 같았지만 구르는 공은 스핀을 잔뜩 품고 있었다. 시야에 잡히지는 않으나 지면에 닿을 때마다 강한 백스핀이 걸린 공은 오히려 홀컵 바로 앞에서 멈춰 버렸다.
-기가 막히는군요!
-저런 스핀을 걸기 위해 클럽 페이스에 그루브가 있는 거죠. 그 묘용을 이해한다면 적어도 초보자는 벗어난 겁니다.
-그러고 보면 골프는 참으로 과학적인 스포츠인 것 같습니다. 장비의 발전과 더불어 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된 것도 그런 과학적인 이론의 발전과 훈련 때문이라고 봐야죠?
-그렇습니다. 무조건 죽어라고 연습한다고 실력이 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최근 성적을 내는 선수들은 하나같이 전문가들이 짜 준 프로그램을 통해 최적의 근육과 체력을 관리하며 자신에게 꼭 필요한 훈련을 소화하며 약점을 보완하기 때문에 철인에 가까운 결과를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스포츠가 과학과 결합해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추세라고 봐야겠군요.
그걸 알기에 필상은 더 많은 학습과 연습량을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다.
최고의 자리를 위해 노력하는 수없이 많은 유망주들도 필상 못지않은 훈련과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주신 선천적인 재능을 부정할 수 없지만 벼락을 맞은 그날 이후 자신이 가고자 한 길이 보다 명확하게 보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실수의 빈도가 확연히 줄었고 더 신기한 것은 아무리 지치고 힘이 들어도 좀처럼 피곤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 홀인가?”
“네.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대회였어요.”
“그래도 아주 잘했어. 미사키, 네가 없었다면 나도 힘들었을 거야.”
“정말이세요?”
“그럼! 마지막 홀은 마음껏 때려 볼 거야!”
“네?”
17번 홀을 파로 잘 막아 낸 필상이 마지막 홀에서 뜻하지 않은 말을 던지자 미사키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현재 스코어는 -32.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지만 72홀 최저타 기록을 위해서라면 마지막 홀의 운용은 안전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쉬이익! 쉬익!
그런데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선 필상의 연습 스윙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무지막지한 헤드 스피드를 보였다.
스윙 크기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백스윙 탑이 조금 더 치켜 올라간 정도의 차이만 느껴질 뿐인데, 다운 블로우는 확연하게 달랐다.
작정하고 인에서 아웃으로 강하게 당긴 결과는 임팩트 시의 헤드 스피드를 확연하게 높이는 결과로 나타났다.
컨트롤 샷과 정확성으로 무장된 전사(戰士)라고 생각했던 필상이 이런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연습장에서 단 한 번도 300야드를 넘기는 스윙을 본 적이 없어 농담이라고 치부했는데, 갑자기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어?”
“모모코도 공 프로의 저런 스윙을 본 적이 없나요?”
“네.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평소에 연습하지 않은 스윙을 한다는 건데, 그게 될까요?”
“안 될 걸 꺼낼 사람이 아니잖아요!”
모모코도 배신감을 느낀 것 같았다.
거의 24시간을 같이 있었다고 믿었기에 그녀가 받은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필상은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고심했으며 가시적인 성과를 이뤄 냈다.
빈틈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완벽히 홀로 있을 때, 이를 악물고 칼날을 갈아 왔다.
‘비밀 병기는 비밀이 지켜질 때 의미가 있는 법!’
아직은 무엇이든 벨 수 있을 만큼 완벽한 무기는 아니다.
더욱 날카롭게 벼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18번 홀로 이동하던 필상은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감춰 둔 비장의 무기를 드러내 보일 적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기록이 걸린 긴박한 순간이라는 것이 오히려 호승심을 불러 일으켰을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에게 향한 부정적인 시각에 더욱 큰 의문부호를 달아 주고 싶었다.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
풀스윙이 가능했다면 이런 고민과 노력은 필요치 않았겠으나, 주어진 한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고심하던 과정은 자신의 스윙 메커니즘을 보다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가시적인 성과를 일궈 냈다.
과앙!
사실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타구음이었다.
하지만 마치 폭발물이 터지는 것 같은 환청이 들린 것은 쉽게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헤드 스피드 때문이었다.
필상의 티샷 에이밍은 페어웨이 우측 끝도 아니었다. 아예 페어웨이 벙커를 넘어 카트 도로 방향을 바라봤기에 필상의 드로우 샷을 바라보는 지인들의 표정도 밝지는 않았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치솟았는지 시야에서 사라졌던 공이 마치 공중에서 마법처럼 뽕 하고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런데 공의 위치를 확인한 사람들의 입에서는 비명부터 터졌다. 이대로 뻗어 나가면 공은 OB지역으로 넘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드로우 샷이죠?
-네. 일단은 주체할 수 없는 힘을 머금어 직진하고 있지만 곧 휘어질 겁니다.
-무시무시한 헤드 스피드 아니었나요?
-아시안 투어에서는 관련 통계를 제시하지 않아 아쉽지만 지난해 PGA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 1위를 차지한 신예, 카메론 챔프의 헤드 스피드는 평균 130마일(시속 209km)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제가 볼 때 공 프로의 이번 티샷도 거의 그것에 근접한 스피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캐스터는 그 말을 받지 않았다.
그새 드로우를 먹은 타구가 지면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중계 화면에 표시된 캐리는 298야드였다. 러프에 떨어져 런이 적었지만 페어웨이로 굴러들어 온 공의 최종 비거리는 318야드였다.
-말씀하신 만큼 비거리가 나오지는 않았네요.
-러프에 떨어져 10야드 이상 손실을 봐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공 프로의 이번 스윙이 여전히 쓰리쿼터였다는 겁니다.
-아! 그거군요.
-카메론 챔프에게 쓰리쿼터 스윙으로 이 거리를 낼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하하하. 황당해하지 않을까요?
중계진은 나름의 성과를 찾아냈지만 필상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자신이 원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력한 훅이 걸렸지만 필상은 그보다 더 휠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적어도 페어웨이 우측에 떨어져 좌측 중앙까지 구르기를 원했는데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환상적인 드로우였어요.”
“확실히 좋은 샷은 아니었어. 연습이 부족했던 거지.”
“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
“내 비밀 병기였거든. 이제 비밀이랄 것도 없겠지만.”
훨씬 더 강력한 샷이 터져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고자 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평소의 샷을 너무도 잘 아는 미사키나 모모코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필상이 작정하고 선을 보였다는 것은 곧 실전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필상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알 수 없지만.
“84야드 남았어요.”
“60도 웨지.”
핀이 좌측에 쏠려 있었지만 기왕 멋진 샷을 보여 주기로 작정한 바, 과감한 시도를 결정했다.
웬만하면 그린 중앙을 보고 적당히 굴려 핀에 붙이는 것이 적절했지만 필상은 핀을 바로 공략했다.
그리고 그린을 넘길 듯 후면에 떨어뜨린 뒤, 쭉 빨려 오는 환상적인 백스핀을 선보였다.
다만 우측으로 기운 경사를 타고 핀 방향으로 곧장 달려오지 않은 점은 아쉬웠다. 그래도 2.8m 버디 기회.
-11홀 연속 버디, 18홀 최저타 기록, 그리고 72홀 최저타 대기록을 눈앞에 둔 퍼펙트 콩이 지금 그린에 들어섭니다. 뜨거운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와아아아!”
“퍼펙트 콩! 퍼펙트 콩!”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지만 그린 주변을 물 샐 틈 없이 가득 메운 관중들의 뜨거운 응원의 함성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모자를 벗어 겨드랑이에 낀 필상은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아 자신의 별명을 연호하는 팬들에게 일일이 화답했다.
지난 대회 우승 때는 현실감이 없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승리의 순간을 만끽했다.
“인 더 홀!”
“우와아아아!”
필상의 퍼팅한 공이 홀컵을 타고 사라지는 순간, 필상은 주먹을 불끈 쥐고 승리의 포효를 터트렸다.
그야말로 새로운 스타의 탄생이었다.
프로 데뷔전에서 우승한 선수는 적지 않다.
하지만 오픈대회 예선부터 참가해 JGTO 시드를 확보한 선수가 곧바로 아시안 투어 대회에 참가해 우승한 적은 없다.
아주 특이한 케이스지만 2번의 우승이 모두 완벽한 경기력이었다는 점, 그리고 전인미답의 기록까지 작성하면서 성과 이상의 대단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나 한국 골프계는 굉장한 결실로 평가했다.
***
“그럼 저희는 8월 25일에 넘어가겠습니다.”
“아니에요. 8월 17일, NEC 가루이자와 72 골프 토너먼트 끝내고 바로 가요.”
“모모코!”
필상과 모모코의 한국 투어 일정이 빨리 잡혔다.
8월 29일부터 열리는 하이원리조트 여자오픈에 모모코가 참가하고 이어진 9월 5일부터 개최되는 신한동해오픈에 필상의 출전이 확정된 것이다.
그래서 8월 초부터 시작되는 3개 대회를 마친 뒤 한국으로 가겠다는 일정을 이 대표에게 전했는데, 모모코가 불쑥 끼어든 것이다.
하지만 나름의 이유는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3주 연속 뛰고 지친 상태로 한국에 가고 싶지는 않아요.”
“대신 지난주에 한 주 더 쉬었잖아.”
“그래도 3주 연속은 싫어요. 오빠가 출전할 나가시마 시게오 초청 대회도 17일에 끝나고 한 주 일정이 비잖아요.”
모모코가 KLPGA 대회에서 성과를 내고 싶어 하는 것은 필상도 이해할 수 있다. 작년에 한국을 다녀온 것이 그녀에게는 아주 각별했다고 말했고 자신과의 인연을 고려하면 더더욱 좋은 결과를 내고 싶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국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2주나 투어를 비우는 것은 일본 골프팬들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녀가 우기면 다른 도리는 없으나 그래도 설득해 보려 했지만 이 대표가 뜻밖에도 모모코의 편을 들고 나섰다.
“8월 셋째 주 JLPGA 대회가 비교적 작은 대회네요.”
“이 대표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한국 대회에 참가할 모모코의 컨디션을 생각해 한 주 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미리 하이원에 가서 연습도 하고 우승을 목표로 준비해 봐요.”
결국 필상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모모코 몰래 눈을 찡긋거린 이 대표에게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지못해 동의했지만 활짝 웃으며 필상에게 매달리는 모모코의 천진난만한 행동에 필상은 두 손 두 발을 들어야만 했다.
“한국에 들어가는 대로 후원사 검토해서 연락할게요.”
“제게도 드디어 스폰서가 붙는 겁니까?”
“요즘 제 전화가 바빠요. 다 공 프로를 후원하겠다는 연락이죠. 하지만 서두르지는 않으려고요.”
“그건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그 자신감, 아주 좋아요.”
필상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아는 이 대표는 그날 밤 한국으로 떠났고 필상 일행은 다음 날 아침 일본으로 건너왔다.
나름 큰 성과를 이뤘기에 필상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차피 2주 뒤에 일정이 잡혀 아쉬움을 뒤로할 수밖에 없었다.
***
“나루사와는 멋진 곳이군!”
“시골이죠.”
이헤야넷 레이디스 대회가 열리는 야마니시 현은 도쿄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위치한 현이다. 후지산 자락이라서 공기가 맑고 시원해 여름의 더위마저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모처럼 필상과 둘만 동행해서 그런지 모모코는 마치 여행을 온 것처럼 내내 들뜬 얼굴이었다.
아쉬운 점은 대회가 열리는 나루사와 GC에 숙박 시설이 없어 시내 호텔에 묵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방을 2개 잡자.”
“이미 스위트룸 예약했어요.”
“우리 말고 다른 선수들도 이 호텔에 많이 머물 것 같은데? 그중에 기자들도 있을 테고.”
“난 괜찮은데…….”
필상이 직접 프런트에서 스위트룸을 취소하고 바로 붙은 디럭스 룸 2개를 얻었다. 그런데 묘한 것이 2개의 객실은 문 하나만 개방하면 바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물론 서로 모르는 사이라면 개방할 이유가 없지만 그 사실을 확인한 모모코는 아예 첫날부터 그 문을 열어 고정시켰다.
“가자.”
“오늘은 그냥 쉬면 안돼요?”
“그럼 일단 코스를 구경이라도 하지 뭐.”
이미 오후 6시였고 장거리 이동으로 지친 필상도 동의했다. 그런데 대회가 열리는 나루사와 GC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마침 석양이 기울고 있어 예쁘게 단장을 마친 코스는 마치 그림엽서에 나오는 한 장면을 연상시킬 만큼 신비한 느낌마저 담뿍 선사했다.
둘은 자연스럽게 코스로 향했고 아무 생각 없이 산책을 시작했다. 마치 양탄자를 밟는 것처럼 푹신푹신한 잔디 위를 걷노라니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