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54화 (54/354)

054. 모모코의 소원

“저 한국 가고 싶어요!”

“한국?”

은근히 설렜던 필상은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늘 도발적이던 모모코가 당황스러운 소원을 말하면 어쩌나 싶으면서도 은근히 야한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왜 한국에는 가겠다는 것인지.

“제 회사에도 얘기하겠지만 이 대표님도 도와주신다고 했어요.”

“뭘?”

“제가 KLPGA 대회에 초청받는 거요.”

“그럼 일본 대회는 빠져야 하잖아?”

“괜찮아요.”

인기 절정의 모모코가 빠지면 주최 측은 난리가 날 것이다.

LPGA라면 모를까, KLPGA 대회 참가를 위해 출전을 포기하면 안 좋은 이미지가 쌓일 수도 있다. 그래서 꼭 가고 싶다면 일정이 겹치지 않는 주간을 택하자고 권했지만 소용없었다.

9월 넷째 주가 대회 일정이 없지만 그때는 KLPGA도 쉬는 주간이었고 너무 멀다는 말에 결국 일단 동의했다.

그러자 폴짝 목에 매달리더니 볼에 뽀뽀를 하고 나갔다.

왜 굳이 한국 투어에 참가하고 싶은지 영문을 모르겠으나 차차 물어보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 얘기를 듣자 필상도 집이 그리워졌다.

작은 성공이지만 아들을 반길 엄마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고 싶었다.

***

-버디! 드디어 30언더에 진입했습니다!

-남은 홀이 5개, 2타만 더 줄일 수만 있다면 전무후무한 대기록이 달성되는 겁니다. 한국 남자 골프의 신기원을 여는 순간이 멀지 않았습니다!

-전반에 1타밖에 줄이지 못할 때는 정말 불안했는데, 후반 들어 우리 ‘퍼펙트 콩 프로’가 서서히 힘을 내고 있죠?

-방금 전에 보여 준 귀신같은 샷 감각이라면 대기록 달성도 어렵지는 않을 듯 보입니다. 전반에는 몸이 굉장히 무거워 보였거든요.

-대기록 달성을 의식해 너무 긴장한 것일까요?

-우승은 이미 확정지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오히려 긴장감이 좀 떨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필상은 성적과는 상관없이 진지하게 경기에 임하고 있다. 한 홀 한 홀 공략해 나가는 하루의 라운드가 한 편의 인생 드라마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았던 고비가 찾아와 시련도 겪고 그것을 극복하며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기도 한다.

프로라면 당연히 모든 것이 완벽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애칭처럼 퍼펙트하다면 오히려 골프는 지겨울 것이다.

수없이 많은 장면에서 소소한 실수가 쌓이고 그것을 리커버리 해 나가는 과정이 아마추어보다 상대적으로 익숙할 뿐, 조금만 집중력이 떨어지면 우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

“오늘은 바람이 좀 있네.”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 태국의 날씨는 해가 쨍쨍 떴을 때는 거의 바람이 없지만 그늘에는 바람이 제법 있거든.”

그 말을 던진 필상이 하늘을 쳐다봤다.

비가 올 구름은 아니지만 제법 두터운 뭉게구름이 해를 가려 얼굴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선선하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일전에 방문했던 치앙마이는 내륙이라 끈적끈적하지 않은 반면, 해안에 위치한 파타야는 약간 짜증스러운 더위였다.

하지만 오늘은 공 치기 정말 좋은 기후였다.

그런데도 아웃코스 플레이는 수월하지 않았다. 버디를 2개 잡았지만 어설픈 실수가 나와 보기를 기록하기도 했다.

애써 신기록을 신경 쓰지 않고 한 홀 한 홀 집중하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먹은 것처럼 되지 않았다. 후반 들어 겨우 감을 찾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려나.

까앙!

깔끔한 티샷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날아갔다.

하지만 하강할 때부터 살짝 우측으로 휘었다. 공에 회전이 걸린 것이 아니고 필상이 언급한 바람의 영향이었다.

“정말 바람을 타네요?”

“예측한 범위 안이라서 괜찮아.”

말은 그리했지만 실제 그린을 공략할 때는 아쉬웠다. 89야드 남은 거리를 샌드웨지로 공략했는데 바람 탓에 버디 거리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14번 홀이 만만했는데 파로 지나가자 씁쓸했다. 이 홀과 16번 홀이 버디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었기 때문이다.

-15번 홀은 안전하게 가는 것이 좋겠네요. 오늘 이 홀의 평균 타수가 4.28인 걸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송곳 같은 아이언 샷이 있으니 한 번 기대를 걸어 보시죠.

423야드 전장을 드라이버로 285야드를 공략했는데, 티샷이 살짝 밀린 탓에 143야드를 남겼다.

그린 주변이 지저분하지만 피칭을 잡은 필상은 과감하게 핀을 바로 공략했는데, 2단 그린의 고개를 넘지 못했다.

무리하지 않고 핀에 붙인 필상은 파 세이브로 만족했다.

하지만 파5, 16번 홀에 들어선 필상은 이번 대회 들어 가장 강한 드라이버 샷을 때렸다. 어차피 2위와의 격차가 벌어져 타수를 주르르 잃어도 우승에는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와아아아!”

스윙의 크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거리를 내기 위해 에이밍을 페어웨이 우측 경계선에 맞추고 강력한 드로우 샷 드라이브를 걸었다.

인에서 아웃으로 밀어 치면서 자연스럽게 가속이 더해진 타구는 강한 회전이 걸리며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렸다.

좀처럼 휘어지는 구질을 보이지 않던 필상이 드로우 샷을 구사해 평소와 다른 비거리를 내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도전하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그들도 필상이 타수를 줄이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00야드를 넘긴 것 같아요!”

“다행이네.”

“이렇게 칠 수 있는데 그동안 왜 참았던 거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미사키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무리수를 두지 않고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결과를 만들어 내는데, 굳이 멀리 보내려고 애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최저타 기록이라는 목표가 없었다면 이번에도 필상은 거리 욕심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번 홀 공략 방법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 2온을 노리는 건가요?”

“일단 가서 공의 상태부터 확인하고.”

전에도 이 홀에서 2온을 성공해 이글을 기록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은 보다 가능성이 높은 티샷을 했다.

훅 구질이 걸린 공은 페어웨이 좌측에 치우쳤지만 그 자리는 나무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는 위치였다. 그걸 의식해 승부수를 던졌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199야드에요.”

“5번 아이언.”

남은 홀에서 1타만 더 줄여도 일단 최저타 기록과 타이를 이룬다. 하지만 17, 18번 홀이 만만치 않아 적어도 이번 홀에서 확실한 결과를 얻어야만 했다.

-굿 임팩트!

-일단 나무를 깔끔하게 넘겼습니다. 방향도 훌륭하고요.

-구르나요? 아! 저게 왜 멈추죠?

-5번 아이언으로도 스핀을 먹인 것 같습니다.

의도적으로 스핀을 먹인 것은 아니다.

행여 나무 잎사귀에라도 맞을까 저어해 탄도를 높인 것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온 그린에 성공했지만 낙하지점은 세로로 길게 늘어선 그린 앞부분이었다.

그러나 롱 아이언을 잡았기에 당연히 런이 발생할 줄 알았다. 백스핀이라도 걸린 건지 가다 말고 공이 서 버릴 줄은 몰랐다.

“백스핀 자랑을 하시는 건가요?”

“구태여 고 탄도를 구사할 필요는 없었는데, 많이 아쉽네.”

“퍼팅을 넣으면 되죠.”

“11m인데?”

“그럼 붙여서 파로 막을 건가요?”

“그건 아니지.”

필상의 스코어는 타수에 비해 이글의 수가 적다.

첫날 워낙 미친 스코어를 기록한 덕에 무리해서 2온을 노릴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이 코스에는 파5 홀이 전반에는 아예 없고 후반에만 2개가 있어 언더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

그 와중에 버디만 대체 몇 개나 한 것인지…….

‘우측 3컵?’

사실 11m 퍼팅은 방향보다 거리에 역점을 둬야 한다.

하지만 이글이 절실한 필상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 위해 라이를 보다 면밀하게 살폈다.

물론 각 선수에게 주어지는 시간의 한계는 규정되어 있다. ‘40초 룰’이라고 하는데, 지연 플레이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티샷, 어프로치, 치핑, 퍼팅 모두 적용되며 가장 먼저 플레이하는 선수에게는 50초까지 허용되지만 어길 경우 경고와 벌타가 적용되는데, 초시계를 가지고 재는 것은 아니다.

앞 팀과의 간격이 너무 벌어지면 경기위원이 나서 권고를 하는데 마지막 라운드 챔피언 조에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글을 꼭 잡으려는 것 같아요.”

“성공하면 남은 두 홀은 편하니까요.”

“저거 넣으면 다들 뒤로 넘어갈 텐데요. 흐흐흐.”

“모모코. 직원들한테 알아보라고 했는데 잘될 것 같아요.”

“벌써요?”

“모모코니까 그렇죠. 어느 대회 주최 측이 일본 최고의 선수가 온다는데 그걸 거부하겠어요. 정식으로 초청에 필요한 절차와 비용을 추계해 협상하라고 지시했어요.”

“이제 오빠도 KPGA 투어 상당수를 참가할 수 있겠죠?”

“물론이죠. 아시안 투어와 병행해서 치러지는 대회는 다 참가할 수 있어요. 모두 메이저 대회죠.”

한국오픈, 매경오픈, 신한 동해오픈에 참가 자격이 주어진다. 상금 순위에 따라 인원은 제한되지만 이번 대회 우승을 하면 그 조건은 충족되고도 남는다.

게다가 한국 선수이고 꿈의 56타를 기록한 주인공이니 주최 측이 오히려 출전을 강력하게 원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왕이면 제가 나갈 대회랑 연속된 주간이면 좋겠어요.”

“아! 그게 좋겠네요.”

이 대표는 모모코가 무엇을 원하는지 단번에 알아봤다.

여인의 감성에 무딘 필상은 당사자에게 묻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모모코가 필상과 보다 깊은 인연을 만들기 위해 한국에 간다는 것을 눈치챘다.

가족을 만나 친해질 기회를 얻을 것이고 일본에서처럼 언론에 폭탄 발언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필상에게 코치를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스윽!

20m가 넘는 오르막 퍼팅은 어프로치를 하듯이 공을 때리지만, 빠른 그린에서의 이 정도 퍼팅은 절대 때리면 안 된다.

길게 밀어야 한다.

때리는 것이나 세게 미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때리는 퍼팅은 거리를 조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필상은 정확한 방향으로 원하는 만큼 밀었다.

퍼팅 시 헤드업은 퍼터 페이스의 변화를 주기 때문에 퍼팅을 끝낸 필상의 고개는 공이 있던 그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갤러리들의 비명 사이로 간절히 원하는 소리가 들리기를 바라던 필상의 고개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홀컵을 향한 순간, 새하얀 공은 지표면에서 사라졌다.

텅! 텅텅텅텅텅…….

긴 잔음을 남긴 청명한 소리, 아무리 팬들의 함성이 시끄러워도 이글을 증명하는 그 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고 마치 제를 올리는 제사장처럼 하늘을 향해 무언가 중얼거렸지만 팬들의 비명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지만 축제 분위기였다.

퍼팅을 앞둔 동반자들은 황당했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대회를 전 세계 골프팬에게 알린 필상이 또 다시 대기록을 작성할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흥분한 것일까?

-어우! 공이 그린을 넘어가네요?

-탄도가 좀 낮았던 것이 문제로 보입니다. 천하의 퍼펙트 콩도 이런 미스 샷을 다 하네요.

-설마 파를 놓치지는 않겠지요?

-그렇게 믿습니다. 그의 기록 달성을 바란다면 팬들도 흥분을 좀 자제하는 게 좋은데, 그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골프 관전에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할 매너가 있다.

특히나 선수가 어드레스를 취하면 절대 방해가 될 소음을 내거나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16번 홀 롱퍼팅이 들어간 뒤, 갤러리들의 소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경기 보조원들이 조용히 해 달라는 팻말을 들고 자제를 부탁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너인 필상은 하는 수 없이 귀를 닫고 티샷을 했다.

파3인 17번 홀은 타수를 잡아먹는 홀이기에 신중을 기했으나 타구의 비거리는 자신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스윙 템포가 좀 빨랐어!”

“벙커에 빠지지 않았다는 진행요원의 신호가 왔어요.”

“다행이네.”

그린 뒤에는 턱이 높은 벙커가 자리해 샌드 세이브는 쉽지 않다. 하지만 막상 그린에 도착해 확인한 공의 위치는 만만치가 않았다.

러프에 살짝 잠기기도 했지만 부담스러운 것은 스탠스였다. 겨우 자세는 나오지만 절벽의 끝에 선 것처럼 위험한 경계선에 바짝 붙은 채로 스윙을 해야만 했다.

업힐 라이라서 공을 오른발 앞에 둘 필요가 없건만 그곳에 둘 수밖에 없는 난해한 자세였다.

“피칭.”

“굴리려고요?”

“응.”

공을 정확히 때리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평소보다 공의 위치가 우측이기에 클럽 페이스를 살짝 닫을 수밖에 없었다.

빈 스윙을 몇 번 휘두른 필상이 벙커 끝에 매달린 자세를 취하자 또다시 팬들의 웅성거림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매너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 다수 있는 듯, 하지만 흥미로운 일이 발생해 필상은 어드레스를 풀 수밖에 없었다.

한 노년의 신사가 앞으로 나서더니 제발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의 말을 꺼낸 것이다. 그게 당연한 매너라는 걸 강조했다.

대회 관계자들도 나서지 않은 가운데 평범한 태국의 한 골프 팬이 간곡히 부탁하는 모습은 흐뭇한 미소를 자아냈다.

모르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나선 뒤로 쥐 죽은 듯 조용해진 것을 보며 지식과 교육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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