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군계일학
“이 홀은 심해도 너무 심한 것 같아요.”
파3, 17번 홀에 들어선 미사키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202야드의 거리는 별 문제가 아닌데 홀의 구조가 심상치 않다. 티 박스 우측에서 시작된 워터해저드가 그린 옆까지 이어져 부담스럽고 그린을 호위라도 하듯이 빙 둘러진 벙커가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쭉 붙은 하나의 벙커가 아니라 잘게 3개로 찢어져 있고 턱도 높아 자칫 스탠스가 나오지 않는 위협까지 더한다.
그래서 필상은 지난 이틀 동안 이 홀을 안전하게 파로 세이브를 해 왔다. 그런데 오늘은 핀의 위치까지 아슬아슬했다.
“앞에서 5야드, 좌측에서 4야드에요.”
“짧아도, 길어도 벙커라는 건가?”
턱이 높은 벙커가 주는 위압감은 상상 이상이다.
그렇다면 안전한 선택이 필수인데, 다른 선수들은 왜 타수를 잃은 것일까?
적어도 프로 선수라면 202야드 정도는 얼마든지 롱 아이언으로 그린 중앙을 공략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텐데.
그 이유는 바로 티를 꽂는 말뚝의 위치에 있었다.
평소에는 좌측의 무성한 나뭇가지들이 방해되지 않는 위치에 박아 두는데, 오늘은 왼쪽에 바짝 치우치게 세웠던 것이다.
“드로우 샷을 강요해요!”
“정말 그럴까?”
“혹시라도 공이 나뭇가지에라도 맞으면…….”
미사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캐디로서 불길한 말을 입에 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상은 그게 바로 시각적인 위협일 뿐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200야드를 보내려면 적어도 롱 아이언이나 유틸리티를 잡을 텐데, 골프공에 담긴 힘을 고려하면 그깟 나뭇잎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뭇가지에 맞는 것을 걱정하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잎사귀만 무성할 뿐, 그 확률은 아주 희박하며 설사 맞더라도 타구에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적다.
물론 필상은 낮은 확률도 무시할 의사는 없었다.
“6번 아이언.”
“6번이요?”
“응. 가지에 맞을 확률이 전혀 없는 궤적을 만들려고.”
공식 대회에서 그린이 개방되지 않는 지점에 티 박스를 설치하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조건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선수들이 드로우 샷을 구사하려다 낭패를 봤을 것이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았다. 나무를 완전히 피하려면 상당한 커브를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필상도 드로우 샷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질을 컨트롤하는 것보다 볼의 궤적을 조정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고 수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괜찮을까요?”
“골프공의 속도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
“전에 어떤 선수의 티샷한 공이 전화번호부를 꿰뚫는 영상은 본 적이 있어요.”
“메이저리그 강속구 투수의 공보다, 테니스 선수의 서브보다 훨씬 빠르지. 게다가 골프공이 가장 딱딱하잖아. 저런 활엽수 나뭇잎이 내 공의 궤적을 방해할 수는 없어.”
필상이 그린 타구의 궤적은 나무를 완전히 넘기거나 적어도 가지가 없는 나뭇잎만 무성한 상단부를 노렸다.
바람의 영향만 없다면 얼마든지 높은 탄도의 샷으로도 그린까지 보낼 수 있어 그린 중앙을 보고 과감한 샷을 날렸다.
-뭐죠? 그냥 나무를 뚫는 샷인가요?
-아예 나무를 넘기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6번 아이언으로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탄도가 높기는 했지만 공이 나뭇잎에 맞는 소리는 주변에 설치한 마이크에도 똑똑히 잡혔다.
-걸렸어요! 타구가.
-공의 궤적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와우! 온 그린이 될 것 같은데요?
중계진도 필상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이미 앞선 선수들이 대부분 드로우 샷을 구사했었기 때문이다. 개중에 극소수가 온 그린에 성공했지만 훨씬 많은 선수들이 낭패를 봤다.
드로우가 걸리지 않아 공을 호수에 빠뜨린 경우도 봤고 너무 강하게 훅이 걸려 벙커에서 생고생을 한 선수들도 봤다.
때문에 필상의 드로우 샷 컨트롤 능력을 보고자 했다. 그런데 에이밍부터 너무 좌측이 아닌가 싶더니, 급기야 나무를 향해 날아가는 공을 보며 깜짝 놀랐다.
마침 뭔가에 부딪치는 소리까지 났으니 조마조마할 수밖에. 하지만 나뭇잎 몇 개를 부숴 버린 공은 보란 듯이 그린에 떨어졌다.
“핀까지 5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요.”
“딱 그만큼 거리 손실을 본 거네.”
“방향은 틀어지지 않았나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뭇잎에 맞아 핀 방향으로 더 붙었지. 하하하.”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필상은 자신과 같은 시도를 했던 선수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의외였다.
경험이 부족한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 대목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아마도 프로들은 기술적인 샷에 대한 자신감이 지닌 기량을 넘어서는 것 같았다.
“설마 버디를 하지는 않겠죠?”
“모모코. 공 프로는 이걸 넣으면 -6로 합계 -27이 되요. 최저타 기록에 4타 차로 바짝 붙는다고요.”
“지금 못 하면 나중에 하면 되죠. 우승을 못 할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전 이 홀 버디 반대해요. 반대!”
누구보다 필상의 성공을 바란다는 것을 알기에 넘길 수 있었다. 또한 둘이 나누는 대화가 일본어이기 망정이지, 팬들이나 기자들이 알아들으면 논란이 될 게 분명했다.
내기를 한 것이 중요한 사람은 오로지 모모코뿐일 테니까.
스무 살의 풋풋한 솔직함이 그리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대체 그 내기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몰라도.
텅!
공이 홀컵에 떨어지는 소리보다 더 반가운 게 또 있을까?
쉽지 않은 S자 라이였지만 필상은 오르막 퍼팅을 과감하게 밀었고 오늘 이 홀에서 버디를 기록한 2명 중에 포함되었다.
마지막 홀로 이동하던 필상은 이 대표와 함께 있는 모모코를 보고는 씩 웃어 보였다. 마치 내기를 염두에 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은 모모코뿐이었다.
코스 세팅이 지나칠 만큼 어렵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그 와중에도 6타를 줄인 자신이 자랑스럽고 뿌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혀를 빼꼼 내미는 모모코를 보자 기억났다.
오늘도 내기가 걸렸다는 것을.
“버디를 의식해야 하나?”
“네?”
“아니야. 모모코가 약을 올려서. 하하하.”
“근데 모모코가 요즘 살이 좀 붙은 것 같은데 괜찮은가요?”
“조금 더 살집이 붙는 것도 괜찮을 거야. 연습을 게을리하는 건 아니니까.”
“팬들은 싫어할 텐데요.”
“아닐 걸!”
“혹시 프로님이 통통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요?”
“왜 이래?”
“부러워서 그래요! 다음부터는 제 숙소 따로 잡을 거예요.”
그 말에 말문이 꽉 막혔다.
큰일 날 죄를 지은 것도 아니건만 괜히 찔렸던 것이다.
필상이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는 것이 미안했는지 드라이브를 건네는 미사키가 한마디 더 보탰다.
“전 입이 무거우니까 걱정은 하지 마세요.”
“무슨 걱정?”
“둘이 소파에서 뽀뽀한 거 다 봤다고요.”
“요즘 다이어트 해?”
“네?”
“눈이 침침한가 봐. 뽀뽀한 적이 없는데 봤다니까 그러지.”
워낙 당당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기는 것을 불쌍히 여긴 것일까?
미사키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캐디로서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가는 자기 선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없었을 뿐인데, 필상은 달리 해석했다.
진실이 이겼다고.
그건 뽀뽀가 아니라 걸쭉한 키스였기 때문이다.
혹자는 경기 중인 선수가 이런 잡다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필상은 경기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는 것보다는 차라리 잡담이 낫다고 생각했다.
언제든 스윙 루틴에 들어서면 깔끔하게 잊을 수 있는 소소한 대화는 정신 건강에 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안 돼!”
필상의 드라이버 티샷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만 도전적이었던 세컨 샷은 모모코의 외침이 통하기라도 했는지 제주도를 연상케 하는 위치에 떨어졌다.
그린에는 올랐지만 핀과는 반대편 9m 지점, 안전한 선택을 하느니만 못한 결과에 필상도 실망스러웠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백스윙 탑에서 예기치 못한 소음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건 모모코의 외침이 아니라 카메라 셔터 소리였다.
뒤를 이어 터진 대화도 황당했다.
“어머!”
“빨리 이리 와!”
본인의 행동이 필상의 스윙에 영향을 미친 것을 알았는지 다급히 인파에 묻힌 그 소리는 분명 한국어였다.
하지만 필상은 소리의 근원지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화가 치밀었지만 끝난 결과를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답답한 것은 그런 어이없는 상황에 자신이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미 벌어진 현상이지만 한국 골프팬들의 관전 매너는 이렇지 않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골프 용품 시장으로 성장한 한국의 골프 문화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는데, 믿고 싶지 않았다.
-이건, 이건 아니죠!
-진행 요원들이 있지만 일일이 갤러리들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심판이 없는 유일한 스포츠로서 선수는 물론 관전하시는 분들도 매너를 지켜야 하는데, 아직도 태국의 골프 문화는 성숙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중계진도 샷 상황에서의 소음은 인지한 것 같았다.
하지만 뒤를 이은 한국말은 듣지 못했기에 엉뚱한 태국의 골프 문화에 대해 언급했다. 사실이 오도되었으나 필드에 있는 필상은 알지 못했다.
파타야에 관광을 왔다가 인근에서 한국 선수가 우승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한국인, 그래도 감사해야 할 팬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그나마 평온을 위해 낫다고 생각했다.
“우우우우!”
롱 퍼팅이었고 라이도 내리막 뒤에 다시 오르막이라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경사를 꼼꼼히 살핀 퍼팅은 들어갈 뻔했다.
공이 아슬아슬하게 홀컵 끝을 스치며 지나가자 팬들의 아쉬운 반응이 그린을 가라앉힐 듯 무겁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활짝 웃으며 필상을 반기는 이도 있었다.
“오빠! 힘들었죠?”
“재미있었어. 근데 그새 옷을 갈아입은 거야?”
“너무 더워 땀이 좀 나서요. 그보다 오늘은 제가 이겼죠?”
“그래. 이기려고 기를 썼는데 쉽지가 않네! 하하하.”
“히히히…….”
-14, -7, -6.
3라운드를 마친 필상의 현재 성적은 -27이었다.
같은 장소에서 열린 지난 대회 우승 스코어가 -14였던 것을 생각하면 압도적인 스코어였으며 단독 2위의 성적이 -11에 머물렀기에 딱히 이번 대회 세팅이 쉬웠다고 말할 수도 없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 할 만했다.
생중계를 했던 한국 골프팬의 반응이 뜨거운 가운데 필상이 곧 아시안 투어 시드를 확보해 다양한 대회에서 폭발적인 결실을 만들 것이라는 팬들의 기대감은 대단했다.
또한 72홀 최저타 기록에 한 발 더 다가선 것에 대한 외신의 반응은 기형적인 코스 세팅과 맞물려 큰 화제를 낳았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으나 적어도 ‘퍼펙트 콩’이라는 이름 하나만큼은 확실히 각인시킨 게 분명했다.
[최악의 세팅, 하지만 오늘도 6언더! 진정한 실력자인가?]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퍼펙트 콩이라는 별명이 부끄럽지 않은 활약! 한국은 아시아 골프의 최강국인가?]
[눈부신 활약, 하지만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는 278야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고 볼 수 있을까?]
여러 측면에서 필상의 성적을 조명한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부정적인 기사의 대부분은 아시안 투어가 세계적인 추세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기반을 뒀다.
웬만한 PGA선수들의 드라이버 티샷 비거리가 300야드에 육박하고 있지만 아시아 국가들의 코스는 지나치게 짧아 우물 안 개구리라는 논조였다.
“아픈 부분을 사정없이 찌르는군!”
“잘못된 판단이죠.”
필상은 일부 인정했지만 그런 태도를 본 이보영 대표는 오히려 강하게 반박 의견을 제시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 중에도 40여 명은 미국과 호주는 물론 유럽에서도 활약하고 있는 프로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서양 선수들이 아시안 투어를 장악해야 옳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을 근거로 댔다.
하지만 차분하게 그 말을 듣던 필상은 담담하게 말했다.
“비거리를 늘리지 않으면 불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대신 필상 씨에게는 그들이 비교할 수 없는 정확성이 있잖아요?”
“장타에 정확성까지 더해지면 더 좋겠죠. 하하하.”
애매모호한 입장을 밝히며 웃음으로 마무리를 한 것은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장의 길이가 대단한 차이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장타자들의 성적이 상대적으로 우월하다는 통계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때는 장타만 날리고 성적은 못내는 선수들이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으나 적어도 이젠 그렇지가 않다. 상금 순위 상위에 포진된 상당수의 골퍼들이 300야드 이상을 보낸다.
마치 장타자들만의 리그처럼 보인다는 점을 좌시할 수 없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지만 필상은 묵묵히 받아들였다. 대안이라도 있는지.
“오빠. 할 말이 있어요.”
“내 방까지 쳐들어와서 불안하게 왜 이래?”
“소원 들어줘요!”
“소원?”
“오늘 제가 이겼잖아요.”
“나도 2번 이겼잖아. 한 번씩 제하면 오히려 내가 하나를 요구해야 하는데?”
“제하기 싫어요. 오빠 원하는 거 2개 들어줄 거니까 내 소원부터 들어줘요.”
어이없었지만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궁금했다. 대체 무엇을 바라는지.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