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52화 (52/354)

052. 자기 확신

“101야드에요.”

“샌드웨지.”

“핀 뒤로 내리막인 것은 아시죠.”

“물론.”

아주 길지만 않으면 해저드에 빠질 일은 없다.

하지만 탄도가 낮은 샷의 경우에는 그린에 맞고도 물까지 굴러갈 수 있어 띄우는 샷은 당연했다.

하지만 물이 주는 공포로 인해 대다수의 결과는 짧았다. 아예 그린에 올리지 못한 경우도 있었으며 그린 3분의 2 지점에 형성된 언덕을 넘지 못한 공이 백스핀까지 걸려 다시 그린 앞까지 굴러 내려온 선수도 숱했다.

쉭!

시퍼런 호수가 페어웨이 좌측에서 그린 뒤까지 이어져 물 냄새가 진동을 하건만 필상의 샷은 여지없이 강력했다.

맞는 순간의 임팩트만 보자면 아예 해저드에 빠뜨리려고 작정을 한 사람 같았다.

그러나 공의 탄도가 각별했다.

56도 샌드웨지의 통상적인 로프트를 훨씬 넘어선 탄도는 마치 수직으로 쏘아 올린 로켓처럼 순식간에 치솟았다.

그런데도 공은 핀을 넘어 위험한 경사에 떨어졌다. 여유 공간이 좁고 내리막이라 팬들의 이마에는 진땀이 흘렀다.

그러나 또다시 믿기 힘든 장면이 연출되었다.

-어? 저게 말이 되나요?

-말이 되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린에 떨어진 공에 걸린 백스핀이 워낙 강력해 경사를 이긴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대단합니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기량이 아닐 수 없네요. 골프를 배운 지 1년 남짓한 사람이 맞나요?

-처음부터 작정한 것 같은데,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아무리 기량이 뛰어나도 저런 샷을 감행하는 것은 쉽지 않거든요.

-넉넉하게 벌어 놓은 타수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저라면 오히려 안전한 선택을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기형적으로 어렵게 세워 놓은 핀에 짜증이 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허 해설위원의 예상은 일정 부분 일치했다.

꿋꿋하게 파 세이브를 지켜 온 필상은 어느 순간 짜증이 일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난이도를 높인 코스 세팅이 골프의 진정한 즐거움을 빼앗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것이 프로들의 향연이라고 하더라도 버디가 나오지 않을 세팅은 선수는 물론 갤러리들의 흥미를 삭감시킨다.

하지만 5번 홀에서 도전적인 시도를 성공하며 첫 버디를 낚은 필상은 이후 자신에게 주어진 위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기량이 받쳐 주지 않으면 모를까, 정확한 샷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이 있었기에 입이 쩍 벌어질 아이언 샷과 웨지 샷으로 보란 듯이 타수를 줄여 나갔다.

“전반에 3타를 줄였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무모해 보이지만 사실 최악의 상황은 감안한 샷 같아요.”

“여우같아요!”

“모모코, 혹시 오늘도 내기를 했나요?”

“네. 오늘 코스 세팅이 어려울 거라고 하더라고요.”

“어려운 것은 사실이죠. 쥐어 짜낸 게 문제지만.”

“설마 7언더 이상을 치는 건 아니겠죠?”

“잘하면 모모코가 이길 수도 있겠네요. 이틀 간 기록을 보면 후반이 훨씬 타수가 높았거든요.”

“응원이고 뭐고 한 번이라도 이겨 봤으면 좋겠어요!”

이미 두 번의 빚이 있다.

어떤 걸 요구할지 모르지만 자신이 이긴다면 상상하기도 힘든 것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에 빚에 대한 부담도 컸다.

오늘 이긴다면 한 번을 제하는 게 아니라 두 번의 소원을 들어주더라도 자신의 바람을 강요할 생각이다.

초반 네 홀에서 타수를 줄이지 못하자 이번에는 이길 것 같았는데 이후 다섯 홀에서 3타를 줄이자 슬슬 불안해졌다.

항상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든 필상의 능력은 단순히 월등한 기량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서운 집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은 닮고 싶지만 그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한없이 부러울 뿐이었다.

“이런!”

도전적인 시도가 항상 먹히는 것은 아니다.

퍼펙트 콩이라는 애칭이 붙었지만 컴퓨터 같은 정확한 샷을 구사한다는 것이지, 샷 머신은 아니었다.

556야드인 파5, 11번 홀에서 세컨 샷이 페어웨이를 오버했다. 어차피 남은 거리가 280야드였기에 2온을 노리지 않았다.

페어웨이가 끊어지는 경계까지 220야드를 날릴 생각으로 7번 유틸리티로 가볍게 때렸는데 요놈이 데굴데굴 굴러 러프까지 기어들어 간 것이다.

“이걸 어쩌죠?”

“어쩌긴 잘 쳐야지. 하하하.”

웃어 넘겼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의도했던 컨트롤을 벗어난 타구가 처음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평소 연습한 샷의 범위를 벗어난 새로운 컨디션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상은 했지만 이제 겨우 11번 홀이다. 너무 빨리 시험이 찾아온 것이 반가울 리가 없다.

게다가 서드 샷 지점에 도착해 공의 위치를 확인해 보니 하필이면 역결인 러프에 공도 생각보다 깊이 잠겨 있었다.

“48야드 남았어요.”

“피칭.”

“러닝 어프로치를 하시려고요?”

“응. 웨지로는 러프를 이기기 쉽지 않을 것 같아.”

정확한 판단이었다.

여러 기술적인 샷을 고려하고 구사할 자신도 있지만 트러블 상황에서 가장 좋은 샷은 역시 실수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때문에 피칭을 잡은 필상은 적당히 띄워 굴리는 샷을 염두에 두고 이미지 스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미지가 잘 맺혀지지 않았다.

너무 좌측으로 당겨지는 느낌, 그리고 그린 앞 러프에서 그린까지 치고 올라가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9번 아이언!”

“네.”

-러닝 어프로치를 구사할 것 같아요.

-현명한 선택입니다. 러프가 클럽 페이스의 진행에 방해가 될 것 같다면 묵직한 클럽으로 정확히 때리는 게 우선입니다.

-저는 무서워서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연습이 충분치 않아서 그런 겁니다. 기본적으로 러닝 어프로치는 백스윙의 크기를 조절해 가며 치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백스윙이 습관적으로 커지게 됩니다.

-불안하니까요!

-그런데 몸은 알죠. 이렇게 치면 너무 강하다는 것을. 그래서 갑자기 힘을 줄이려다 보면 뒤땅을 치거나 토핑이 나게 되는 겁니다.

-아! 역시 연습이 중요한 거군요.

-러닝 어프로치의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 더 짚자면 팔로만 샷을 하는 게 아니라 상체의 어깨 회전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습이 많이 필요한 이유죠.

필상의 연습 스윙이 다소 길었던 차에 허 해설위원의 러닝 어프로치 강좌가 잠시 진행되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비교적 그립을 단단히 잡아야 하며 임팩트 시에 손목이 접히지 않도록 유념해야 하고 클럽헤드가 공 밑으로 낮게 깔린 팔로우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미 연습이 충분했던 필상은 러닝 어프로치의 표본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깔끔한 샷을 보여 줬다.

하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짧아 공이 그린 앞의 경사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채 겨우 프린지에 올랐을 뿐이었다.

-왜 짧았을까요? 교과서적인 샷 아니었던가요?

-그래서 골프가 어려운 겁니다.

캐스터는 할 말을 잃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도, 또한 샷을 한 선수가 숏 게임에 능통한 프로였음에도 좋지 못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니.

이성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쩌면 해설위원이 말한 골프라는 운동이 정말 어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쁜 결과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법, 필상의 샷 장면이 슬로우 동작으로 다시 비춰지자 급기야 정답이 나왔다.

-탄도가 의도한 것 이상으로 높았군요. 다시 말하면 클럽헤드가 너무 깊이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공 프로는 보다 낮은 탄도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아! 이제야 답답한 것이 좀 풀리네요.

-아주 미세한 차이에도 샷은 수만 가지 결과를 보입니다. 밥 먹고 하는 일이 골프인데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0.1mm만 달리 맞아도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골프를 쳐 본 사람이라면 안다.

아마추어들은 더더욱 잘 알 수밖에 없는 것이 지난 홀과 똑같은 스윙을 한 것 같은데도 거리는 물론 방향성까지 달라지는 경험을 숱하게 겪어 봤기 때문이다.

결국은 똑같은 스윙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 치고 싶네!”

“멀리건(Mulligan-샷이 잘못되었을 때 벌타 없이 주어지는 샷 기회. 친선을 위한 골프에서나 가능) 드려요?”

“하하하. 골프 참 어렵네!”

“‘퍼펙트 콩’ 님이 그런 말을 하니까 좀 이상해요.”

“그러고 보면 티샷이나 평평한 페어웨이에서의 샷을 제외하면 세상에 똑같은 조건의 샷 기회는 거의 없는 거네!”

“정말 그러네요. 비슷한 상황을 상정하고 연습할 수는 있지만 정확히 일치하는 상황은 오직 한 번뿐이네요.”

“그래서 티샷이나 페어웨이에서의 샷은 더더욱 실수를 하면 안 될 것 같아.”

필상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왜 연습하지 않았겠는가!

피칭이나 숏 아이언으로 수없이 러닝 어프로치를 연습했다. 지금과 동일한 상황도 설정한 적이 있었고 적절한 이미지가 맺혔기에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만 컨디션 변화에 따라 너무 강하게 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우려가 있었고 그게 자신도 모르게 탄도를 띄우는 스윙 궤도를 만들었다고 밖에는 해석되지 않았다.

이번 샷을 통해 필상은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었다.

영원할 것 같던 천하의 타이거 우즈도 결국은 오랜 침체기를 겪었고 건강에 이상이 없는데도 좀처럼 과거의 화려한 기량이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확신!’

프로 골퍼로 성공하는 제일의 덕목이 샷의 일관성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보태 강인한 정신력, 즉 경기에 몰입하는 집중력의 차이가 결과를 가른다고 믿었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최고가 되기 위해 하나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기 확신’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기량을 믿고 흔들림 없는 스윙을 구사할 수 있었던 타이거 우즈는 최고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실패를 마음 한구석에 담아 둔 지금의 그는 과거의 세계 최고였던 우즈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투어에 뛰어든 프로 선수라면 그 말은 의미가 없다.

필상은 아직 실전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실패를 마음에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최고의 길을 걷고 싶다면 실패 따위는 한 방에 날려 버리고 오로지 최고의 퍼포먼스를 만들어 내기 위해 전력을 쏟는 게 옳다는 걸 깨달았다.

골프에 대한 자기 학습이 한 단계 성장한 필상은 12m가 남은 프린지에서 퍼터를 잡았고 환상적인 버디 퍼팅을 잡아냈다.

새로 바뀐 규정 때문에 핀을 꽂아 놓고 퍼팅을 하는 선수들이 많지만 거리감이 좋은 필상은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프린지에 공이 놓인 이번에도 핀을 뽑았고 라이보다는 거리감에 더 집중했는데, 자신이 읽은 라이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홀컵에 빨려 드는 공을 보며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대표님.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이 대표도 필상의 기가 막힌 롱퍼팅이 들어가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모모코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혹시 화장실을 급히 가는 게 오줌을 찔끔 지리지 않았나 싶었지만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엉거주춤한 모모코의 걸음이 확신으로 굳어졌지만.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 극적인 결과가 터지면 선수에게 반할 수밖에 없고 존중을 넘어 존경의 마음까지 품게 된다.

첫날 필상과 함께 18홀을 돌며 신기록 작성을 직접 목격했던 이들은 이미 필상의 팬이 되었고 오늘 또 다시 격한 감동을 받았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타고난 승부사라고 해야 하나요?

-프린지에서 퍼터를 잡으면서도 핀을 뽑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웬만하면 깃대에 맞아 떨어지는 행운도 기대하는데, 얼마나 거리에 자신이 있으면 저럴 수가 있는지……. 우리는 어쩌면 차세대 최고의 골퍼가 될 그의 경기를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앞 조 선수들 중에 언더파가 몇 명이나 되죠?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지만 현재까지 언더파를 친 선수는 4명뿐입니다. 71명 중에 단 4명, 그것도 -1이 2명이고 -2가 2명인데 지금 공 프로는 무려 4타를 줄였습니다.

-오늘도 데일리 베스트를 기록하는 건가요?

필상의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우승은 이미 정해진 것처럼 단정을 지은 중계진은 방송 초반에 언급했던 72홀 최저타 기록 달성 가능성에 대한 언급을 이어 갔다.

하나만 나와도 난리가 날 대기록이 과연 이번 대회에서 또다시 작성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코스 세팅에 대한 언급이 나왔고 여러 정황들을 고려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직접 경기를 풀어내고 있는 필상의 기세가 무섭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인코스는 지난 라운드처럼 선수들을 괴롭혔다.

보기와 더블보기가 우수수 나오는 가운데 파를 지켜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받았다.

“흐흐흐……. 오늘은 내가 이겼어요.”

“아직 3홀이 남았는데요?”

“이거 좀 보세요.”

모모코가 내민 것은 스마트폰이다. 실시간으로 선수들의 기록을 알려 주는 대회 홈페이지를 띄워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모모코가 승리를 확신할 만도 했다.

남아 있는 파5, 파3, 파4 홀의 오늘 평균 타수가 5.01, 3.47, 4.39였다. 그나마 16번 홀이 파 확률이 높을 뿐, 마지막 두 홀은 파를 지키기에도 쉽지 않은 데이터였던 것이다.

하지만 필상이 파5 홀에서 3온 1퍼팅으로 손쉽게 버디를 잡아내자 모모코의 표정은 살짝 굳어지기 시작했다.

대체 그녀는 누구의 편이란 말인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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