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퍼펙트 콩
“오빠!”
그린을 벗어나는 필상에게 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해맑은 음성을 터트린 여인, 갤러리들도 익히 아는 일본 최고의 미녀 골퍼 모모코였다.
이번 대회 관련 기사 중에 가장 눈에 띈 인물이 그녀라고 할 만큼 깜찍한 외모를 지닌 모모코가 나타나자 호기심 가득찬 시선과 카메라 세례가 몰려들었다.
그녀가 받은 감동은 이해하지만 격정에 못 이겨 품안으로 달려드는 모모코를 말 몇 마디로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순간, 그럴 듯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모모코. 조심해!”
서둘러 나오던 그녀가 뭔가에 걸려 와당탕 넘어질 뻔했다. 재빨리 그녀를 부축한 광경은 지극히 자연스러웠고 매너 좋은 행동으로 비쳤는지 사방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여하튼 품에 폭 안긴 모모코의 등을 쓰다듬어 준 필상은 어색한 미소를 띠우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보는 눈이 많다고.
이 한 컷은 그녀의 부친 미야도, 여주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도 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진땀이 흘렀다.
다행이라면 상황파악이 빠른 이 대표가 얼른 다가왔다는 것이다.
“정말 수고 많았어요.”
“다 대표님의 든든한 지원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할 텐데, 어떡하죠?”
“대회가 끝난 뒤로 미루시죠.”
“네. 그렇게 조치할게요.”
이 대표와의 대화중에 자연스럽게 곁으로 물러선 모모코가 팔짱을 꼈고 그녀와 함께 스코어 카드를 제출하러 움직였다.
사방에서 사인 요청이 쇄도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엄두가 나지 않을 엄청난 인파가 일시에 몰려 주최 측 진행 요원들도 애를 먹고 있을 지경이라 어쩔 수 없었다.
“저라도 사인해 줄게요.”
“고마워. 모모코.”
보다 못한 모모코가 필상을 대신해 사인해 주려고 나섰다. 팬들도 기꺼이 그녀의 주변으로 몰리는 바람에 필상은 겨우 인파를 헤치고 이동할 수 있었다.
뜨거운 관심은 고맙지만 이제 겨우 1라운드를 치렀을 뿐이다. 최저타 기록도, 연속 버디 기록도 우승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만 했다.
보통 신기록을 달성한 선수들은 대회 성적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통계도 나태한 마음을 부여잡게끔 했다.
***
‘너 내 동생 맞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인터넷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이다.
저녁을 먹고 연습장으로 향하던 필상은 큰 누나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다짜고짜 이상한 말부터 꺼낸 누나의 음성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새 필상의 소식이 한국 방송을 탄 모양이다.
후쿠시마 오픈을 우승했을 때는 골프 채널에서 단편으로 다루고 말았지만 오늘은 모든 방송사의 뉴스에서 필상의 대기록이 경기 장면과 함께 한 꼭지로 다뤄진 것 같았다.
뭐든 최고를 좋아하는 우리 민족이 아니던가!
‘엄마 바꿔 줄게.’
“누나!”
엄마의 음성을 듣고 싶지만 굳이 바꿔 준다고 하니 어색해 누나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수화기 저편에는 그리운 분이 계신 것 같았다.
“엄마?”
‘고생이 많지?’
“고생은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그년 보란 듯이 잘해.’
“…….”
엄마의 입에서 설마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년’이라니…….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던 성희가 필상은 물론 엄마의 심장에도 큰 대못을 박았다는 것이 새삼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하기야 좌절을 겪고 고향에 내려온 아들을 팽개치고 치과의사에게 시집간 것은 단순히 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좁은 시골 동네에서 둘 사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결혼에 다녀온 이웃들이 엄마에게 위로하고 격려한 말들이 모두 가슴에 한이 되어 쌓였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너무도 죄송스러웠다.
‘내가 주책없이 괜한 말을 해서…….’
“아니야 엄마. 엄마 아들 뉴스에 나올 정도로 잘됐고 앞으로 더 잘될 거니까 동네 사람들 다 모아서 잔치해요. 돈 걱정은 하지 말고.”
‘그래. 떡 벌어지게 차려서 동네 잔치할게.’
“엄마.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엄마 아들이 얼마나 잘되는지 볼 거 아니에요. 병원 가는 거 거르지 말고 물리치료도 꾸준하게 꼭 해요. 응?”
‘그래. 그럴 게.’
“누나 좀 바꿔 줘요.”
‘잠깐!’
“왜요?”
‘그 색시는 언제 데려올 거야?’
“누구요?”
‘그 예쁘장한 일본 여자애. 네 누나들이 다 그러데? 걔가 널 엄청 좋아한다고.’
드디어 올 것이 왔나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게 아닌데, 엄마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냥 서로 좋게 생각하는 사이야. 나이도 이제 겨우 스물이고 제가 캐디도 하고 코치도 하는 프로 선수니까 너무 이상하게는 생각하지 마세요.”
‘남녀 사이에 나이가 다 뭔데?’
“에이, 띠 동갑이라니까요.”
‘TV에 다 봤어.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너한테 얼싸 좋다고 안기는 게 좀 헤픈 애처럼 보이지만, 네가 좋다면 엄마는 괜찮으니까 데려 와.’
헤픈 애라니?
뒤통수가 뻐근했다.
연예인들도 울고 갈 인기를 누리는 일본 최고의 미녀 골퍼가 엄마에게는 그저 예쁘장하고 가벼워 보인 모양이다.
누나들은 모모코가 어떤 선수인지 알 만도 한데, 왜 엄마에게 그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았는지 따져야 했다.
“알았어요. 근데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애도 젊을 때 낳아야 건강하대잖아…….’
“엄마. 누나 바꿔 줘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막아야만 했다.
곁에서 엄마의 통화를 듣고 있던 누나들의 웃음소리가 들린 걸 보면 그녀들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제발 엄마한테 똑바로 설명 드리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도리어 잘해 보라고 격려까지 하는 걸 보면.
“누구에요?”
“우리 가족들.”
“아! 한국에도 오빠 신기록 소식이 전해졌나 봐요!”
“그런가 봐. 상금도 없는 쓸데없는 기록인데.”
“흐흐흐……. 순진한 척할 거예요?”
“왜?”
“우승하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이제 스폰서가 팍팍 붙을 걸요?”
“그런가?”
왜 기대하지 않았겠는가!
유명 프로 선수는 상금보다 훨씬 거대한 수입을 과외로 번다는 것을 필상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한 자신은 신기록을 세워도 과연 시장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긍정적이라는 모모코의 말을 듣자 힘이 솟았다.
‘우승! 우승을 하자!’
프로는 성적으로 말해야 한다.
1라운드 -14언더는 7타 차 단독 선두였다.
이미 후쿠시마 오픈에서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경험해 봤기에 긴장하거나 떨리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필상은 연습장 문을 닫을 때까지 지독하게 연습을 감행했고 그걸 지켜본 모모코와 미사키는 질렸다.
하지만 그 노력과 집념은 2라운드에 결과로 드러났다.
7언더, 어제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이날도 데일리 베스트를 기록한 필상의 예선 성적은 이로서 21언더가 되었다.
2위와의 타수 차는 11타 차로 벌어져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
-저희 SBC골프 채널이 아시안 투어 경기를 중계하는 것은 처음이죠?
-국내에서 열리는 경기 중계는 많았습니다만 외국에서 열리는 경기를 생중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게 다 데뷔하자마자 ‘퍼펙트 콩’이라는 애칭을 얻은 공필상 프로 때문이겠죠?
-그렇습니다. 세계 골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14언더, 그리고 11개 홀 연속 버디는 최근 주춤한 한국 남자 골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경주, 양용은 프로에 이어 적잖은 젊은 선수들이 분전하고 있지만 퍼펙트 콩의 등장은 확실히 판타스틱 했지요.
최저타 기록에 대한 한국의 반응은 뜨거웠다.
없던 중계 일정이 갑자기 잡힐 만큼 골프팬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여자 골프에 비해 너무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어서 마치 누군가 치고 나오기를 기다린 것만 같았다.
그런데 등장부터 너무 드라마틱했다.
30대 이상이 주를 이루는 골프팬들은 늦깎이 골퍼의 성공적인 데뷔에 마치 자신을 투영하듯이 열렬한 반응을 보여 대부분의 포털 실시간 검색 순위 최상단을 차지했다.
게다가 이미 국내에 적잖은 팬을 확보한 모모코의 연인이라는 소문 같지 않은 기사들이 검색되며 필상에 대한 관심은 식을 줄을 몰랐다.
-공이라고 읽어야 하는데 KONG을 외국인들은 그냥 콩이라고 읽는 모양입니다.
-더 정겹지 않나요? 전 공이든 콩이든 그가 이번 로열 컵에서 확실하게 우승을 거뒀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저희가 중계를 하니까 더더욱.
-그보다 저는 다른 신기록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다른 신기록이라니요?
-작년에 우리 김세영 선수가 LPGA 72홀 최저타 기록을 갱신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죠. 남자 투어는 최저타가 어떻게 되죠?
-김세영 선수가 기록한 -31과 같습니다. 2001년 어니 엘스가 메르세데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던 기록입니다.
-첫날 -14, 어제 -7로 현재 -21이니까 10타를 줄이면 타이 기록이고 11타를 줄이면 또 다시 신기록 작성이로군요!
지난 이틀처럼만 친다면 40언더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첫날 -14를 기록한 뒤에 말이 많았다.
특히나 아시안 투어보다 더 높은 위상을 지녔다고 자평하는 몇몇 투어에서는 코스가 너무 쉬웠다는 지적이 나왔다.
다른 해에 비해 선수들의 평균 타수가 0.32타 줄었을 뿐이라는 주최 측의 반론이 있었지만 깨끗하게 무시되었다.
그 때문에 코스 세팅을 어렵게 조정해서 예년에 비해 0.63타가 늘어난 2라운드에서도 필상은 7언더를 때렸다.
그만하면 실력을 인정해야 하건만 ‘그것 봐라! 코스가 어려워지니 버디가 확 줄지 않았냐!’는 해석이 나오며 굳이 평가절하 하려는 분석들이 쏟아졌다.
“오늘 세팅은 그야말로 최악이에요!”
“신기록 작성이 주최 측에서는 반갑지 않은 모양이지.”
“그렇지 않을 걸요? 자연스럽게 홍보가 되는데 얼마나 좋겠어요. 제가 볼 때 문제는 아시안 투어 관계자들 같아요.”
“그들이 왜?”
“코스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거죠.”
그것도 정답은 아닌 것 같았다.
이미 대기록이 2개나 작성된 마당에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는데, PGA와 유러피언 투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안 투어는 아직 약자였기에 그들이 고춧가루를 뿌리면 난처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필상 -21, 시리타나쿤샥 -10, 하딩 -10]
리더 보드를 확인한 필상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챔피언 조로 나선 세 선수의 기록이 너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11타 차, 자칫 마음을 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필상은 애써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최대한 전장을 늘리고 핀을 가장자리에 붙인 3라운드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예선을 통과한 선수는 71명이었지만 중계 화면의 70%는 오로지 한 선수의 플레이에 집중되었다.
마치 전성기의 타이거 우즈 경기 중계처럼 필상이 이동하는 시간에만 다른 선수의 플레이를 볼 수 있었다.
-신기하네요!
-무슨 말씀이시죠?
-쓰리쿼터 스윙을 하고도 어떻게 거리를 내는 거죠?
-백스윙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장타를 내려면 충분한 몸통의 꼬임이 필요하지만 공 프로는 굳이 거리를 내려고 애쓰지 않고 정확한 임팩트로 필요한 거리만 확보하는 안정된 스윙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이미 결과로 확인됩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세계적인 추세를 거스르면서까지 풀스윙을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가 치른 지난 2번의 대회 영상을 샅샅이 뒤져봤는데, 제가 내린 결론이 좀 기이합니다. 본인의 확인이 필요할 만큼.
-더 궁금해지네요.
캐스터 배기원은 전문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고덕후 해설위원은 국내 골프계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다.
투어프로 경험도 있으며 대학에서 골프 과정을 지도했고 실제 다수의 프로와 국가대표를 배출한 골프 아카데미를 지금도 운영하고 있어 시청자들도 그의 분석을 궁금해 했다.
그런데 입을 쉽게 떼지 못했다. 재차 캐스터가 채근을 하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는데 시청자들은 믿기지 않았다.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선수가 18홀 경기에서 14언더를 칩니까?
-그래서 더 대단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묘한 반전이었다.
새로 떠오른 스타 골퍼에게 신체적인 문제가 있다는 분석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성적을 냈다는 것이 더 신비롭게 비쳐진 것이다.
필상은 억지로 코스 세팅을 꼬아 놓은 홀들을 차분하게 파 세이브를 하며 지나갔다. 파를 하고도 팬들의 호응을 끌어내지 못하는 홀이 쌓여 갈 무렵, 드디어 진가를 보여 준 샷이 작렬했다.
342야드의 오르막 파4, 5번 홀이었다.
오르막이 심한 이 홀에서 앞선 선수들이 버디를 잡지 못한 이유는 그린 뒤에 호수가 맞닿아 있는데, 잔인하게도 뒤에서 4야드 지점에 핀을 꽂아 놨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