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50화 (50/354)

050. 씹씨 언더

신뢰가 가득 담긴 이 대표의 말도 긴장감을 낮추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는지 모모코의 표정은 붉게 상기되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설레고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 스윙을 그려 본 필상은 자신감을 얻었다. 탄도를 높여 나뭇가지를 피하고 방향만 담보된다면 설사 거리가 조금 짧아도 괜찮다는 점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버리고 최선과 차선까지 고려한 필상은 기분 좋은 긴장감을 즐기며 과감한 샷을 날렸다.

공에 강력한 힘이 실렸지만 디봇이 생기면 거리의 손실이 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에 아주 깔끔한 샷이 들어갔다.

“와아아아!”

필상의 5번 아이언 샷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하얀 구름에 파묻힌 공이 잠시 시야에서 사라지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나뭇가지들을 훌쩍 넘긴 멋진 탄도였다.

함성은 그때부터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골프를 쳐 본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중력을 무시한 듯 날아간 공은 필상이 의도한 비거리를 훨씬 지나 그린을 넘어갈 것만 같았다.

마치 멀리뛰기 선수가 이단 점프를 한 것처럼 한 번 더 치솟은 놀라운 결과였는데 공의 하강 궤도는 더욱 멋들어졌다.

마치 그린을 겨냥한 레이더라도 달린 미사일처럼 급격하게 자유낙하로 궤도를 바꾼 공이 그린 중앙을 폭격했던 것이다.

퍽!

높이 튀어 오른 공이 전진도 후진도 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움푹 파인 자국에 다시 멈춰 설 때는 다들 소름이 돋았다.

연속 버디 신기록을 세운 필상이 잠시 멈칫하는 것 같더니 다시 볼 수 없는 진기명기를 모두에게 선사한 것이다.

얼른 다가온 미사키가 말까지 더듬었다.

“어, 어떻게 5번 아이언 샷이 저렇게 멈출 수가 있죠?”

“높은 곳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맞바람이 있었나 봐.”

“아니에요. 백스핀이 걸린 것 같아요.”

“공중에서도 백스핀이 먹나? 힘이 다 빠진 공이 중력의 이끌림을 거부할 수 없었던 거지.”

클럽헤드에 맞은 공은 비대칭의 포물선 궤도를 그린다.

하지만 이번 필상의 아이언 샷은 통상적인 곡선 궤도를 따르지 않았다. 마치 탄도 높은 웨지 샷이 맞바람 때문에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 같은 기묘한 자유낙하를 보여 준 것이다.

워낙 장거리를 날아간 공의 궤도가 통상적인 기대를 벗어나 다소 과장된 측면도 있지만 독특했던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필상은 그걸 분석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간절히 원했던 2온에 성공했기에 이제는 이글 퍼팅을 머리에 담아야 할 차례였기 때문이다.

핀과의 거리는 6.2m, 오르막 뒤에 다시 내리막을 타며 전체적으로 슬라이스 라이였기에 절대 쉽지 않았다.

3퍼팅을 걱정할 수도 있으나 경사를 살피는 필상의 눈빛에는 한 점의 걱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일단 오르막의 꼭대기까지만 넘기면 될 것 같은데?’

내리막 경사가 심해 스트로크의 크기는 오르막의 정점까지만 보내면 된다. 문제는 몇 컵이나 좌측을 봐야 하느냐는 것인데, 자신이 느낀 것보다 반 컵을 더 보기로 결정했다.

내리막 경사인 경우, 힘이 빠진 홀컵 앞에서 항상 라이가 더 급격히 먹었던 것을 감안한 판단이었다.

공의 라인을 맞춘 필상은 퍼팅 라인을 노려보며 빈 스트로크를 통해 거리감을 잡았고 급기야 어드레스에 들어갔다.

차분하게 퍼터를 공의 라인에 정렬하고 편안한 스탠스를 취했다. 남들이 볼 때는 너무 일어선 뻣뻣한 자세였으나 필상은 그게 더 편했다.

“인 더 홀!”

망설이지 않고 강하게 밀었다.

내리막 걱정 때문에 오르막을 제대로 밀지 못하면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트로크를 마친 필상의 시선이 공을 바라봤을 때는 막 최고점을 지날 때였다. 그런데 섣부른 확신이 왔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데, 자신이 봤던 그 라이를 정확히 타고 구른 공은 홀컵 바로 앞에서 급격히 휘더니 자취를 감췄다.

이글, 과감한 결정으로 소중한 2타를 번 것이다.

워낙 절묘했던 라이 탓인지 어퍼컷을 날리는 필상에게 갤러리들의 뜨거운 박수가 끊이질 않았다.

“13언더에요. 13언더.”

“최저타 타이 기록이네요. 더도 말고 1타만 더 줄인다면 폭발적인 지원이 쏟아질 텐데.”

“그러니까요!”

“남은 2홀이 파3와 파4죠?”

“네. 198야드 파3는 버디가 어려워도 18번 홀은 가능할 거예요. 실제 연습 라운드에서 버디를 잡기도 했고요.”

아시안 투어는 사실 그리 주목을 받는 투어는 아니다.

하지만 -14를 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마추어 신분으로 참가한 후쿠시마 대회에서의 우승으로 이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비록 일본 언론들은 애써 의미를 부여하기를 주저하지만 필상의 연승은 충분한 스토리가 된다.

31살에 시작한 골프, 32살에 JGTO시드를 확보했고 아시안 투어에 초청받은 첫날 신기록까지 달성한다면 이건 기적이다.

“5번 아이언.”

“이게 복덩이네요.”

“흥분을 자제시켜야지. 캐디가.”

“전혀 흥분한 사람 같지 않은데요?”

“그런가? 현실감이 전혀 없거든. 하하하.”

솔직한 심정이었다.

11개의 연속 버디도, 4개의 파에 이은 이글도 꿈만 같았다.

제주도에서 벼락을 맞은 뒤, 또다시 꿈이 좌절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벼락은 풀스윙이 불가능하게 되는 큰 좌절을 안겼지만 그에 못지않은 특이한 능력을 부여했다.

죽어라고 연습한 결과라고 우기고 싶지만 그건 아니다. 그날 이후 샷의 일관성이 몰라보게 좋아졌고 이미지 스윙이 실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확률도 높아졌다.

“왜 그림이 안 나오지?”

몇 번의 연습 스윙에도 적정한 이미지가 맺히지 않았다.

클럽을 바꿀까 싶었지만 선두라고 유난을 떠는 것 같아 필상은 연습한 대로 스윙을 편하게 가져갔다.

그런데 불안했던 일말의 마음은 그대로 결과로 나타났다. 평소 연습한 스윙의 크기를 유지했다고 생각했지만 공은 그린을 훌쩍 넘어 뒤편의 헤비 러프에 빠지고 말았다.

다른 선수들이 티샷을 하는 동안 6번 아이언을 잡은 필상은 빈 스윙을 해 보며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단번에 이미지가 맺혔다.

분명히 평소 연습한 그대로였는데 힘이 펄펄 넘쳐 난 지금은 한 클럽이 더 날아간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지가 맺히지 않으면 클럽을 바꿔야 하는구나!’

논리적으로는 해석되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 5번 아이언 샷이 210야드를 날아갔으니까.

이건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놀라운 발견이었다.

연습하고 난 뒤 바로 경기에 나서면 문제가 없지만 경기가 이어지는 동안에 다른 이유로 신체의 컨디션이 변할 수 있다.

그건 거리는 물론 방향성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적어도 거리 하나만큼은 이미지 스윙을 통해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 고마운 능력도 벼락이 가져다 준 행운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7번 아이언.”

“피치 앤 런(Pitch and run-평상시보다 볼을 낮게 띄워서 더 많이 굴러가도록 의도한 어프로치 샷)인가요?”

“응. 러프가 제법 질기고 오르막 라이잖아.”

“좋아요.”

그린의 스피드가 빨라 로브 샷(lob shot-공을 높이 띄워 치는 어프로치 샷)으로 거리를 맞추는 것보다는 굴리는 어프로치가 핀에 붙일 확률이 더 높다고 판단했다.

다만 너무 강하게 때려 내리막 퍼팅을 남기는 것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필상의 피치 샷은 과감하게 들어갔다.

러프에서 주저한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러프가 생각보다 훨씬 질겼던지 샷의 결과는 짧았다.

하지만 2.5m 오르막 퍼팅을 놓칠 필상이 아니다. 차분하게 홀컵에 구겨 넣은 필상은 미사키와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신기록 달성이 눈앞에 있는 걸 모르는 걸까요?”

“공 프로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죠.”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어쩜 파를 하고도 저렇게 좋아할 수가 있죠?”

“쉽게 흥분하는 성격도 아닌 것 같아요. 차라리 지금처럼 저런 태도가 기록 달성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요?”

“미사키랑 시시덕거리니까 그러죠!”

“캐디잖아요. 오늘 제 역할을 잘하고 있는.”

“에이, 내가 그냥 캐디를 하고 싶었는데…….”

맞장구를 쳐 주고 싶었으나 이 대표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괜히 동조했다가 정말로 캐디를 하겠다고 나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필상이 말리겠지만 그건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서로 다른 달란트가 있다는 것을 알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분명한 것은 자신이 사람을 아주 잘 봤다는 것이다. 그녀는 필상이 이렇게 빨리 치고 올라설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JGTO의 휴식기가 너무 길어 생색을 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첫날부터 골프 채널을 장악할 희대의 사건을 만들 줄은 예상치 못했다.

“401야드 파4 홀이에요.”

“120야드를 남겨서 갭 웨지를 잡자.”

드라이버 티샷을 페어웨이에 보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세컨 샷 거리까지 염두에 둔 필상, 미사키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확신에 가득 찬 필상의 공략에 말이 필요 없었다.

또한 실제로 가볍게 때린 티샷은 장담한 거리를 남겼다. 하지만 세컨 샷 지점에 도착한 필상의 말은 더 어이가 없었다.

“116야드잖아? 확실히 힘이 좋아졌어!”

“마지막 홀에 와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런가?”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18홀을 돌고나면 대부분의 선수들은 눈에 띄게 체력 저하를 느낀다.

걷거나 샷을 하는 것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4, 5시간을 버티면 심신이 녹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상은 컨디션이 저하되기는커녕 오히려 힘이 좋아져 가볍게 쳤는데도 비거리가 더 나왔다지 않은가?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성적이 좋으면 피곤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정신적인 문제일 뿐, 인간이라면 저하된 체력은 속일 수 없건만 참으로 괴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인간 같지가 않아서요.”

“칭찬처럼 들리지 않는데?”

“어떻게 마지막 홀에 와서 더 힘이 날 수가 있어요?”

“성적이 좋아서 그렇겠지. 하하하.”

“그러면 힘 조절을 더 신경 쓰셔야 할 것 같아요.”

“음……. 그래야지.”

갭 웨지를 잡고 이미지를 그리던 필상은 얼른 샌드웨지로 바꿨다. 어차피 컨트롤 샷을 할 건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사키는 그림 같은 필상의 웨지 샷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임팩트가 이뤄지는 순간, 감이 왔다.

쩍 붙을 것이라고.

“와아아아!”

“씹씨 언더! 씹씨 언더!”

핀을 한참 지나 떨어졌지만 강한 백스핀이 걸린 공은 쭉 당겨지더니 홀컵 우측 1.2m 지점에 우뚝 멈춰 섰다.

어느새 까마득하게 몰려든 태국 갤러리들이 외치는 함성은 얼핏 들으면 욕설을 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태국어를 조금 배운 필상은 ‘씹씨’가 14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국어와 영어의 기묘한 콜라보레이션을 들은 필상은 자신을 뜨겁게 응원하는 팬들을 향해 모자를 벗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코쿤 막 캅!”

태국 팬들은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히 감사하다는 태국어 음성을 직접 들은 사람은 당연했지만 멀리서도 볼 수 있었던 태국인들의 정중한 인사법을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와이(wai)라고 부르는 합장(合掌)은 태국 생활 문화의 기본적인 규범이자 존경과 고마움을 표시하는 인사법이었다.

수많은 외국인이 찾는 대표적인 관광의 나라인 태국은 외국인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대회를 위해 참석한 유명 골퍼 중에 이렇게 공손한 태도를 보인 이는 아직 없었다.

치앙마이에 머물렀던 필상이 그들의 문화와 예절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이런 열렬한 환대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왜 저렇게 난리죠?”

“글쎄요.”

“오빠가 완전히 태국 스타일인가?”

“공손한 태도 때문이 아닐까요?”

“작년 겨울에 치앙마이에 두 달 있었다더니 태국인들의 마음을 얻는 걸 배웠나 봐요.”

“스타가 겸손하면 더 열광하게 되어 있죠.”

“나도 배워야지!”

“저도 좀 배워야겠네요. 골프 인프라가 잘 갖춰진 태국은 앞으로 골프 시장이 엄청나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거든요.”

“으! 넣었어요! 정말 14언더를 해냈다고요!”

필상은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버디를 잡아냈다.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엄청난 박수와 갈채가 쏟아졌는데, 골프를 조금이라도 아는 팬이라면 14언더가 어떤 의미인지를 익히 알기 때문이다.

대회를 주최한 아시안 투어 관계자가 나와 축하를 건넸을 뿐만 아니라 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모든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마구 터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필상이 세운 공식 기록은 무려 56타였다.

비록 파 70코스지만 공식 투어 대회 최저타 기록을 갱신한 필상에게 몰려든 관심은 너무도 당연했다.

세계 최고의 투어인 PGA는 애써 의미를 축소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아시안 투어에 참가하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서는 오늘을 기념할 만한 대기록이 작성된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