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컨트롤 샷의 대가
“네 개 홀에 4언더. 정말 피도 눈물도 없네요.”
“이 대회를 우승하면 앞으로 한국 투어에도 참가할 기회가 생기기 때문에 공 프로에게는 절실할 거예요.”
“아! 그러네요.”
실제 KPGA의 굵직굵직한 대회는 아시안 투어와 병행 개최된다. 보다 넓은 시장을 얻기 위한 피치 못할 선택이다.
때문에 한국 1부 투어 시드가 없는 필상으로서는 한정적이나마 국내 대회 출전의 기회를 얻는 것이 중요했다.
한국 국적을 지녔기에 국내 후원이 기본이기 때문이고, 최근 한국 남자 프로들의 성적이 눈에 띄지 않아 필상의 선전은 한국 투어 활성화에도 플러스 요인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 확실히 가자!’
시작과 함께 연이어 4개의 버디를 기록한 필상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최고의 컨디션이었다.
‘생각하는 그대로 꽂히는 아이언 샷’이 있는데 두려워할 이유도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스스로 흥분하지만 않는다면 매 홀 버디를 잡을 것 같았고, 실제 한 홀 한 홀 환상적인 샷으로 기적 같은 결과를 만들어 갔다.
파5 홀이지만 대부분의 프로들이 워터해저드를 가로질러 때리기 때문에 파4 홀로 조정된 6번 홀에서마저 181야드를 7번 아이언으로 그린에 올린 뒤, 5.5m 버디 퍼팅을 성공했을 때는 흥분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모모코가 지겠는데요?”
“전 이미 포기했어요. 9홀 타수가 25타, 이게 말이 되나요?”
“파5가 없는 파 34코스라서 25라는 숫자가 더 크게 보이는 것 같아요. 아시안 투어 9홀 신기록이겠죠?”
“이러다 정말 ‘꿈의 59타’를 깨는 것 아닐까요? 아니지, 파 70 코스니까 57타를 쳐야 난리가 날까요?”
최저타 기록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둘 다 헷갈리는 것 같았다. 실제 파 72코스의 최저타 기록은 -13, 59타가 맞다.
믿기지 않는 58타를 기록한 짐 퓨릭과 이시카와 료가 있지만 그들도 -12, 파 70코스에서 세운 기록이라서 진정한 최저타 기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더도 말고 후반에 4타만 더 줄이면 좋겠어요.”
인코스로 넘어가던 미사키도 최저타 기록을 의식한 언급을 꺼냈다. 경기 중인 선수에게 금기시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에둘러 표현했을 뿐인데, 필상의 대답은 분명했다.
“만족 못 해. 5타를 줄여야 신기록이잖아.”
“어? 최저타 기록을 신경 쓰고 있었어요?”
“당연하지. 기왕이면 파 72코스가 좋은데, 그게 좀 아쉽네.”
“으으으……. -13만 되도 난리가 날 걸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하하하!”
전반의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은 필상은 금기시하는 그런 말을 한다고 주어진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실제로 후반 시작과 함께 403야드 파4 홀에서 버디를 잡았고 554야드의 파5 홀에서도 3온 1퍼팅 작전이 그대로 먹혔다.
“아아아!”
내리막이 꽤나 심하지만 그래도 12번 홀은 446야드의 긴 전장을 지닌 쉽지 않은 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들린 필상의 아이언샷은 또다시 기적 같은 결과를 일궈 냈다.
핀을 향해 구를 것 같던 공이 핀 앞 3m 거리에 멈춰선 것이 아쉬웠다. 그런데 이어진 버디 퍼팅에서 경사를 타고 잘 흐르던 공이 컵에 떨어질 듯 흔들대다가 그냥 지나가 버렸다.
갤러리들의 한숨 소리에 땅이 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압박감이 슬슬 가중되던 필상은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탭인 파를 집어넣었다.
마침내 연속 버디가 11개 홀에서 끝을 고한 것이다.
경기를 중계하는 태국 골프 채널의 중계진도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이것은 지구촌 골프계의 신기록이었다.
대부분의 신기록을 보유한 PGA, LPGA의 연속 버디 기록은 지금까지 9개 홀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늘이 시기하나 봐요.”
“하하하. 후련한데 뭘.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11언더, 충분히 감사한 스코어였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지만 하필 13번 홀은 199야드의 파3 홀이었다. 호수와 벙커가 눈을 어지럽히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긴 전장에 그린의 경사가 복잡하다는 것이 문제였고 그런데도 그린에 올려 6m 오르막을 남긴 필상은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홀컵은 공을 외면했다.
물론 필상은 실망하지 않았다. 연습 라운드에서도 이 홀에서는 한 번도 버디를 잡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건 뭐지?”
두 홀을 파로 지나쳤지만 14번 홀은 버디를 노렸다.
356야드의 좌측으로 휘는 도그렉 홀로 티샷만 무난하면 웨지 거리가 남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그렉을 의식했는지 공 끝이 살짝 좌측으로 돌았다.
다행히 벙커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퍼스트 컷과 세컨드 컷 경계에 걸린 공의 위치가 좀 께름칙했다.
그래도 남은 거리는 79야드, 샌드웨지 컨트롤로 충분히 핀에 붙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이번 샷도 기이하게 공이 좌측으로 돌았다. 드로우를 걸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 결과 공은 온 그린에 성공했지만 핀과는 10m이상 떨어졌고 쓰리 퍼팅을 조심해야 할 부담스러운 라이였다.
“공이 발보다 낮았는데?”
“바람이 부는 걸까요?”
“해가 저리도 쨍쨍 내리쬐는데?”
필상의 스트레이트 구질을 너무도 잘 알기에 불안하기는 미사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린까지 걸어가며 반납하지 않은 웨지로 빈 스윙을 반복하며 원인이 뭔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 없는 결과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린에 올라설 때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분명 스윙 궤도는 아무 문제가 감지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때는 슬로우 비디오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당치 않은 상상이지만.
“프로님. 퍼팅 라이 살펴야죠.”
“응. 집중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의문이 가시지 않은 탓인지 필상이 퍼팅한 공은 홀컵에 한참 못 미쳐 멈췄다.
2m, 황당함이 전신을 휘감았지만 라이를 다시 한 번 살핀 필상은 이를 악물었다. 타수를 줄이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너무도 쉬운 게 골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퍼팅을 놓치면 남은 홀들을 정상적으로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위기의식도 집중력을 높여야 할 이유였다.
평지에 홀컵 우측 안쪽을 봐야 할 비교적 쉬운 퍼팅이었으나 공이 홀컵에 떨어지는 순간의 쾌감은 이전의 버디들보다 훨씬 큰 감흥을 선사했다.
‘이제 4홀 남았는데…….’
15번 홀로 넘어가는 필상은 일단 안전한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1은 이미 충분히 좋은 스코어였고 드러난 문제점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시 티샷의 끝이 살짝 말렸다.
15번 홀은 423야드 파4 홀로 페어웨이가 좁아 이번에도 필상의 공은 러프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나마 퍼스트 컷이라 세컨 샷에 대한 부담은 적었지만 뒤통수가 뻐근했다.
핀이 그린 우측에 치우쳐 꽂힌 탓에 세컨 샷에 대한 부담이 컸다. 좌측에 꽂혔다면 그린 중앙을 보고 여유 있게 칠 수 있지만 드로우 구질을 감안해 우측 끝을 보는 것은 위험했다.
“머리 아프네.”
“그럼 그린 중앙을 보고 페이드를 걸면 안 될까요?”
“아! 그래야겠네.”
까짓 꺼, 안 되면 벙커 샷을 하면 되지 않겠나?
너무 혼란스러워 스윙이 위축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합리적인 판단을 스스로 내리지 못한 것도 사고가 경직된 결과라는 생각에 미치자 필상은 불현듯 왜 이러나 싶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 번 응시한 시선은 무심코 지나쳤던 갤러리들에게로 향했다. 족히 수백 명이 몰렸지만 그래도 한눈에 띄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모모코, 하얀 손을 흔드는 그녀의 환한 미소를 확인한 필상도 마주 웃었다. 그리고 당당히 페이드 샷을 감행했다.
“굿 샷!”
자연스러운 드로우 구질이 아직도 작용하는지 생각만큼 많이 휘지는 않았다. 하지만 페이드 구질은 확연해 공은 그린 중앙에서 홀컵과 가까운 지점에 멈췄다.
게다가 핀 방향으로 흐른 탓에 4m 버디 퍼팅을 남겼다. 다시 버디 기회를 맞이하자 그린으로 향하는 필상에게 뜨거운 응원의 함성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홀컵은 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 대로 흘렀고 정확해 보였지만 홀컵 앞에서 살짝 라이를 더 먹은 공은 애석하게도 반 바퀴 돌고 다시 튀어나왔다.
“아깝네!”
“하지만 응급조치는 됐잖아요.”
“그렇지.”
미사키의 존재가 반가웠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자부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그녀의 조언이 도움이 됐다.
캐디로서의 본분을 다한 그녀와 다음 홀을 향해 걸으며 다시 한 번 드로우가 먹는 이유에 대해 의논했다.
골프는 아주 민감한 운동이다.
손이나 발이 아닌 긴 도구를 이용해 100m, 200m가 넘는 타깃을 공략하기 때문에 아주 미세한 변화에도 반응한다.
본인은 분명히 동일한 스윙을 한 것 같지만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그건 자신의 스윙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자신감이 클럽 페이스 끝에 조금 더 실리는 것 같아요.”
“자신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차분하게 그 의미를 해석해 보자면 대충 이해할 수는 있다. 샷마다 쩍쩍 붙다 보니 그걸 너무 의식해 팔로우 스로우를 조금 더 길게 가져갔던 것이 사실이다.
방향성을 담보하기 위한 의지의 반영인데, 인아웃 스윙으로 인해 걸렸던 회전이 쭉쭉 뻗어 나가던 공에 힘이 빠지면 어쩔 수 없이 작용했던 것이다.
“스윙을 좀 더 간결하게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역시 선수 출신이라 다르네.”
“지금 저를 인정해 주시는 건가요?”
“그럼! 일단 샷 조정부터 해 보고.”
마침 16번 홀은 501야드 파5홀이다.
약간의 미스가 나와도 리커버리가 가능한 롱홀이기에 필상은 연습 스윙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의 샷을 점검했고 첫 홀에 들어섰다는 기분으로 간결한 티샷을 날렸다.
테이크백과 팔로우 스로우가 거의 완벽한 밸런스를 이룬 깔끔한 스윙이 이뤄졌고 그 결과는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신기할 만큼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 나간 공은 페어웨이 정중앙에 하얀 공의 자태를 드러냈다. 늘 당연시하던 결과지만 지금 필상의 눈에는 새롭게 보였다.
“라운드를 진행하는 도중에도 스윙이 변할 수 있구나!”
실전 경험이 일천한 필상에게는 아주 소중한 소득이었다.
아마추어들은 전반과 후반이 다르고, 때때로 홀마다 다른 스윙을 휘두르기도 한다. 하지만 프로가 프로인 것은 샷의 일관성이 담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거푸 환상적인 샷을 하던 프로도 어느 한 순간 스윙이 달라질 수 있고 원인을 찾지 못하면 어렵게 쌓은 성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음을 몸소 체득했다.
좋은 캐디가 왜 필요한 것인지 확인된 순간이기도 했다. 티 박스를 내려온 필상은 미사키와 격렬한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대체 왜 저럴까?”
세컨 샷 지점에 도착한 필상은 동반자의 무모한 2온 시도를 유심히 지켜보며 안타까운 음성을 토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16번 홀은 우측으로 휘는 도그렉이 극심해서 티샷이 페어웨이를 잘 지킬 경우, 2온을 노릴 수 있는 홀이다. 워터해저드와 숲을 가로지르면 핀까지의 거리가 220야드 안팎에 불과한 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티샷한 공이 페어웨이 좌측 러프에 빠졌다면 참아야 하건만 우드를 잡고 2온을 노리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다. 샷의 결과 또한 필상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절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175야드를 넘으면 벙커에요.”
“핀까지 직선거리는?”
“……215야드요.”
마시키의 대답이 멈칫한 뒤에 나온 이유는 필상이 연습 라운드를 통해 2온을 애써 자제했었기 때문이다.
물을 넘기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높이 치솟은 나무의 잔가지들이 공의 궤도를 방해하고 설사 넘긴다고 하더라도 세로로 놓인 그린에 올리는 것은 확률이 희박하다고 판단했었다.
좌측은 턱이 높은 벙커였고 우측은 러프가 길고 경사가 다운 힐 라이라서 자칫 그린을 놓칠 경우, 3온을 노리는 것보다 핀에 붙일 가능성이 급격히 떨어진다.
“5번 아이언.”
“5번이요?”
“응. 탄도를 띄우고 조금 더 강하게 치면 가능할 것 같아.”
“좋아요!”
부정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필상이 결정한 순간부터 모든 기운을 긍정적으로 가져가는 것이 캐디인 그녀의 몫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 필상의 5번 아이언은 200야드에 맞춰져 있다. 215야드를 공략하려면 4번 아이언이 더 적절했지만 필상의 선택을 존중한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에이밍을 확인했다.
필상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5번 아이언으로 215야드를 공략하려면 이제껏 실전에서 한 번도 내지 않았던 자신이 가용한 힘의 90%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쉬익! 쉭!
강한 임팩트를 만들어 내기 위한 빈 스윙은 소리부터가 남달랐다. 특유의 느린 테이크 백에서 어떻게 그런 강력한 다운 블로우(Down blow-백스윙을 했던 클럽헤드가 공을 치기 위해 내려오는 스윙의 단계)가 가능한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갤러리들 사이에 유난히 눈에 띄던 두 미녀, 누가 보면 엄마와 딸처럼 보일 모모코와 이 대표의 눈도 부릅떠졌다.
“2온을 노리나 봐요?”
“저렇게 세게 때리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늘 붙어 다닌 모모코도 본 적이 없는 강한 샷을 지금 실전에서 감행한다는 건가요?”
“네. 오빠는 컨트롤 샷의 대가잖아요. 연습 라운드 때도 이 홀은 늘 3온 작전이었는데, 좀 이상해요.”
“그래도 한 번 믿음을 가지고 지켜보죠. 공 프로는 절대 무모한 공략은 하지 않는 스타일이잖아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