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호박이 덩쿨째
“굿 샷!”
필상의 백스윙은 일반적이지 않다.
보통 270도를 정상이라고 보지만 파워풀한 프로들은 300도 가까이 넘어가기도 하고 오버 스윙을 하는 선수들도 많다.
하지만 필상의 백스윙 탑은 머리를 살짝 지날 뿐이다. 200도가량 회전될까 싶다. 그것은 곧 몸통의 뒤틀림이 적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충분한 파워가 나올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지난 후쿠시마 오픈에서 집계된 필상의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는 276야드였다. 생각만큼 짧지가 않다.
그것을 덮고도 남을 장점이 확연했는데, 페어웨이 안착률이 무려 94.6%였다. 56번의 티샷에 단 3번만 페어웨이를 놓쳤다.
거기에 컴퓨터처럼 정확한 아이언샷이 더해졌으니 기록은 좋을 수밖에 없다.
“정확히 74야드 남았어요.”
“60도 웨지.”
“띄우시려고요?”
“그래야 할 것 같아. 오전에는 그린이 너무 빨라서 런을 조절하기가 힘들더라고.”
연습은 충분히 했다.
또한 반복적인 연습 라운드를 통해 코스를 면밀히 파악했고 특히나 빠른 그린에 적응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그 어느 코스보다 빠른 그린이 당황스러웠지만 연습을 반복하며 그게 더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다.
라이를 정확히 읽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흐르는 퍼팅이 신기했고 짜릿함을 선사했던 것이다.
쉬익!
이미지를 그린 대로 정확한 스윙이 이뤄졌다.
클럽 페이스에 공이 긁히는 느낌도 아주 좋았다. 맞는 순간부터 까마득하게 떠오른 공은 여지없이 그린을 향해 날았다.
중요한 것은 방향인데, 피니시를 마친 필상이 시선을 돌렸을 때는 이미 하강하는 중이었다.
‘방향은 기가 막힌데 좀 컸나?’
보통 웨지 샷은 짧은 경우가 많아 충분하게 쳤다.
하지만 홀컵을 3m가량 오버해서 떨어진 공은 한 번 튄 뒤, 여지없이 백스핀이 걸려 쭉 빨려 왔다.
“와아아아!”
갤러리들의 함성이 터진 이유는 백스핀을 먹은 공이 핀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그냥 떨어지면 더없이 좋은데 살짝 빗나가 홀컵 바로 옆에 섰다.
첫 홀부터 탭인 버디 찬스를 잡은 것이다.
“우리 오빠, 멋지죠?”
“네. 날이 갈수록 더 정확해지는 것 같아요.”
“다 죽었어!”
“호호호……. 모모코도 기량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오빠 덕분이죠. 항상 잘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거든요.”
“아!”
필상에게 훌륭한 코치를 받아서 좋아졌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던 이보영 대표는 할 말을 잃었다.
인터뷰에 폭탄선언을 할 때부터 독특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녀가 보기에 모모코는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는 소녀다.
필상을 만나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을 받았지만 핑크빛 감정을 공개할 만한 감정을 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곁에서 지켜본 모모코의 증상은 짐작한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필상의 매니지먼트를 하는데 그녀가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할 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다.
남녀 관계란 타인이 쉬이 알 수 없기에 추후 계획을 위해서라도 한층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모코. 둘이 한 숙소에서 지내는 거 괜찮나요?”
“그 말씀은 무슨 의미죠?”
“성인 남녀가 한공간에 머물면 불편하기도 하고 때로는 묘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하잖아요.”
“불편하지는 않아요. 묘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건 제가 바라는 거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갑자기 곁에 바짝 다가와 소곤소곤 며칠 전 밤에 일어났던 일을 얘기하는 모모코, 이 대표는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얘가 푼수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둘이 정말 좋은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한 이보영은 왜 모모코가 그 말을 자신에게 말했는지 이해했다.
‘일도 일이지만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의미?’
어리다고만 봤던 모모코의 ‘영역 표시’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이미 침을 발랐으니 딴 마음은 품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된 것 같은데, 기가 막히면서도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그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연인이라면 상관없지만 모모코는 이미 인정받는 프로 골퍼의 반열에 올랐고 일본 골프계에서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자신보다 필상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은 여자인 것도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은근슬쩍 꺼낸 지금 이 말도 미리 준비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뭔가 찜찜했는데 한술 더 떴다.
“오빠가 경험이 쌓이면 일본에 오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건 아주 먼 이야기 같은데요?”
“아닐 거예요. 원 샷 원 킬이잖아요. 만약 오빠가 미국 진출을 하게 되면 저도 LPGA에 도전하고 싶어요.”
“아!”
“그때 저도 좀 도와주세요.”
“저야 언제든 환영이죠.”
이보영은 일본 최고의 상품성을 지닌 모모코의 소속사가 어딘지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녀의 연승으로 대박을 치기 때문에 동종 업계에서는 이미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곳이다.
하지만 아네사는 일본 국내의 매니지먼트 사업에만 주력하는 신생 회사라는 것도 알고 있다. 만약 모모코가 미국 진출을 노린다면 당연히 세계적인 회사들이 달려들 것이다.
‘지금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 온 건가?’
믿기지 않았으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자신의 능력보다 필상과 함께 움직이고 싶은 모모코의 의지가 만들어 낸 기회였지만 거부할 이유가 없는 대박이다.
이후 둘은 친자매처럼 붙어 다니며 필상의 플레이에 대해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과는 별개로 필상은 무서운 기세로 타수를 줄여 나갔다.
1번 홀 탭인 버디에 이어 샷 홀인 172야드 2번 홀에서의 7번 아이언 티샷도 보는 이들의 등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공이 홀컵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오른쪽 2컵 반.”
3m 남짓한 거리에 26cm의 오조준을 한다는 것은 라이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특히나 내리막이 살짝 있어 까딱 강하게 밀면 다시 애매한 거리가 남을 수도 있다. 1온에 3퍼팅,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걸 피하려면 경사를 제대로 태워야만 했다.
지나치게 신중한 것 같았지만 부드러운 스트로크의 결과가 홀컵 앞에서 확 휘어 홀컵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본 갤러리들은 비명밖에 지를 게 없었다.
읽은 대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필상도 주먹을 불끈 쥐고 어퍼컷을 날렸다. 그 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줄버디네요?”
“작년에도 1라운드에서 선두권에 나선 선수들 중에 1, 2, 3번 홀을 모두 버디로 잡은 선수가 3명이나 되더라고.”
“별걸 다 아시네요.”
“1라운드 세팅이 쉽다는 거지.”
“1라운드 선두 스코어는 얼마였는데요?”
“7언더.”
“그 정도는 프로님이 늘 기록할 수 있는 성적 아닌가요?”
“이거 큰일이네. 캐디가 너무 눈이 높아.”
3번 홀은 358야드 파4 홀이다.
오르막이고 좌측으로는 호수를 끼고 있으며 카트 도로가 있는 우측은 나무가 우거져 들어가면 고생길이 훤하다.
그런데도 선수들의 스코어가 좋은 것은 드라이버 티샷 랜딩 지역의 페어웨이가 제법 넓기 때문이다.
방향만 담보된다면 대부분 웨지 거리가 남아 파 세이브를 하는 것도 아쉬운 핸디캡 17번 홀이었다.
“깡!”
청명한 소음을 터트린 티샷이 깔끔한 결과까지 만들었다.
비거리는 280야드, 오르막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간 결과에 필상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왜요?”
“조절되지 않는 비거리, 난 정말 싫거든!”
“드라이브 비거리까지 어떻게 조절을 해요.”
“해야 해. 장타가 아닌 내 장점이 바로 그건데, 그걸 놓치고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게 더 문제지.”
다른 클럽들은 거리에 맞춰 치면 된다.
하지만 드라이버 티샷은 마음껏 때리는 것이 보통이다. 컨트롤이 되는 한 최대한 멀리 보내고자 하는 것은 골퍼의 숙명이다.
세게 때리면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마추어는 물론 프로들도 거리에 목을 매는 이들이 숱하다.
그러나 필상은 드라이버라도 거리에 민감했다. 스스로 밝힌 바, 그게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미쳤어!”
“들어가지 않은 게 더 이상하네요.”
“이글이요? 안 돼요. 저랑 내기했단 말이에요.”
“내기? 무슨 내기를 했는데요?”
“두 자리 언더를 치면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했단 말이에요. 이미 빚이 하나 있어서 그것부터 까야 하는데 더 쌓을 수는 없다고요.”
“모모코가 훨씬 유리한 내기인데, 그걸 정말 했나요?”
“오늘은 코스 세팅이 쉬울 거라고 예측하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너무 쉽잖아요. 벙커나 해저드에 바짝 바짝 붙여 놔야 하는데 핀이 모두 가운데나 뒤에 꽂혔잖아요.”
누구보다 필상을 응원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은 듯.
하지만 내기의 승패와 무관하게 좋지 못한 플레이가 나오면 모모코의 태도는 달라질 것이라는 것은 짐작 가능했다.
다만 워낙 무서운 기세로 연속 버디를 낚고 있어 못 칠 것 같다는 걱정 따위는 훨훨 날아간 게 아닌가 싶었다.
세 번 연속 홀컵 근처에 떨궜던 필상은 핸디캡 1번인 4번 홀에서도 환상적인 아이언 샷을 작렬시켰다.
413야드의 파4 홀이라면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홀이 답답한 이유는 페어웨이 정중앙 240야드 지점에 커다란 나무가 심어져 선수들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유틸.”
“다들 깜짝 놀라겠네요.”
“다른 선수들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잖아. 다만 아너인 내가 드라이버를 잡지 않는 걸 보고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는 두고 보자고.”
필상의 공략은 간단했다.
드라이버를 잡고 나무의 좌우를 노리는 것은 페어웨이에 안착할 확률이 너무 낮고 나무를 넘기는 것은 더 위험하다.
하강 탄도의 거리에 높이 치솟은 나뭇가지에 걸리면 공이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240야드에 적응된 5번 유틸리티를 잡았다. 티에 올려놓고 치면 10야드 이상 더 날아가기 때문에 최적의 선택이었다.
쩌엉!
드라이버가 아니라서 부담이 없었던 필상은 마음껏 때렸다. 곧게 뻗어 나간 공은 225야드 지점에 떨어진 뒤, 미친 듯이 굴러 나무를 훌쩍 지났다.
사방으로 퍼진 가지들은 풍성하지만 나무 밑동은 폭이 1m 남짓이라 맞추고 싶어도 그게 훨씬 어려웠다.
그 정도 거리만 확보된다면 255야드 지점에 멈춘 공의 세컨 샷 거리는 160야드도 남지 않아 온 그린에 어려움도 없다.
그런데도 동반자들은 드라이버를 잡았다. 안타깝게도 두 명 모두 나무를 넘기려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했다.
드라이브 비거리가 300야드를 넘는다면 못할 이유는 없으나 작정하고 때리면 장타는 나오지 않고 오히려 방향성만 잃는다.
“어이구!”
두 번째 선수는 악성 슬라이스가 걸려 공이 우측 나무숲으로 날아갔다. 하필 카트 도로에 맞은 공은 레이 업이나 가능할지 의심스러웠다.
그 장면을 봤다면 다음 선수는 전략을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씩 웃으며 티 그라운드에 올라선 선수는 강력한 드라이버 티샷을 날렸다.
슬라이스 구질은 아니었지만 그의 공은 앞선 선수와 반대로 훅이 강하게 걸려 좌측 워터해저드 지역으로 넘어갔다.
1라운드를 도전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좋지만 안전이 담보된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만 한다. 적어도 우승을 원하는 프로라면 지를 때와 버틸 때를 취사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감과 만용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골프를 직업으로 선택한 것이야말로 패착일 수밖에 없다. 순탄하지 못한 투어 생활을 하다가 결국 하위 투어를 맴돌고 그러다 은퇴할 것이다.
“이 좋은 필드에 나와서 한 사람은 등산, 한 사람은 낚시를 하는군!”
“덕분에 한숨 돌리고 좋잖아요.”
“완전히 망가지는 것은 그다지 좋은 현상이 아니야. 본래 나쁜 샷은 종종 전염이 되거든.”
“그거야 병약한 사람한테나 통하죠. 프로님은 씨알도 안 먹히잖아요. 오히려 상대가 무너지면 더 펄펄 날던데요?”
“그런가?”
미사키가 지적했듯이 필상은 좀처럼 타인의 플레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투어프로로서 아주 바람직한 성격이다.
가끔 동반자들과 신경전을 펼치다 다투기도 하고 경기를 망치는 선수들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8번 아이언.”
“좌에서 우로 흐르는 라이는 아시죠?”
“물론!”
실제 남은 거리는 161야드였다.
9번 아이언이 적당하지만 한 클럽 더 길게 잡은 필상은 마치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처럼 아주 부드러운 컨트롤 샷을 선보였다.
이미 아이언 샷의 정확성을 여러 번 보여 줬기에 갤러리들도 집중하고 필상의 세컨 샷을 지켜봤다.
마치 웨지를 친 것처럼 높게 떠오른 공이 홀컵을 향해 꽂힐 듯 떨어졌고 핀 바로 앞 1m 지점에 그대로 멈춰 섰다. 또 다시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진짜 아깝네요.”
“그린이 작아서 탄도를 띄웠나 봐요.”
“네. 8번 아이언으로 백스핀을 먹이는 선수는 몇 되지 않을 거예요. 저런 걸 배워야 하는데.”
“여자들은 힘이 부족해서 좀 어렵죠?”
“저도 가끔 백스핀이 먹기는 해요. 하지만 기본적인 근력이 받쳐 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웨이트트레이닝을 할 수도 없고.”
모모코는 정답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근력을 높이는 운동은 쉽지 않을뿐더러 필상도 적극 추천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유지해 온 근력에 변화를 주는 것은 얻는 것만큼 다른 것을 잃을 가능성이 높으며, 더욱이 시즌 중에는 너무 위험한 시도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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