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로열 컵
[7월 첫째 주 시세이도 아네사 레이디스 오픈 우승.]
[7월 둘째 주 니폰 햄 레이디스 클래식 공동 3위.]
일본 열도는 모모코 신드롬에 빠졌다.
2019년 JLPGA는 36개의 대회를 개최하는데, 지금까지 17개 대회의 우승자가 가려졌다. 하지만 다승은 단 2명뿐이다.
2승을 거둔 선수도 대단했지만 홀로 3승을 거뒀고 탑 10에 8번이나 들어 벌써 상금왕을 예약했다는 말이 흘러나오는 선수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다.
홀로 우뚝 선 선수는 바로 미야 모모코였다.
7월의 시작과 함께 2주간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결과는 실로 눈부셨다. 니폰 햄 클래식 3라운드에서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연승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아쉬운 평가도 기사화되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모모코는 시상식이 끝나기 무섭게 공항으로 달렸고 태국으로 향하는 밤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정말 쉬고 싶어요!”
“나도.”
“그러니까 눈 딱 감고 이틀만, 아니 3일만 놀아요.”
“그래. 그 좋다는 파타야로 가고 있잖아.”
“설레요. 저 태국은 처음이거든요.”
뜬금없이 파타야로 향하게 된 것은 이보영 대표가 노력한 결과다. 막상 투어시드를 확보했지만 JGTO는 여름 휴식기를 맞아 필상이 참가할 대회는 8월 셋째 주에나 열린다.
그래서 연습도 병행할 수 있는 모모코의 캐디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필상의 입장을 파악한 이 대표는 J&L과의 계약을 기념할 멋진 선물을 가져왔다.
[로열 컵: 7/ 25 - 7/ 28, 파타야 피닉스 GC]
아시안 투어 대회의 초청을 받아 낸 것이다.
필상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적이 있는 아시안 투어는 절대 만만한 투어가 아니다.
전 세계 골프를 즐기는 나라의 선수들은 다 모였다. PGA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 미국, 유럽, 아시아 전역의 선수들이 모였고 한국의 유명 선수들도 아시안 투어에 참가한다.
국내시장이 너무 비좁고 열악하기 때문인데, 생각만큼 좋은 성적은 거두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안 투어는 한국, 일본을 비롯해 호주, 태국, 말레이시아 등 그야말로 아시아를 아우르는 투어로 성장 중이었다.
“손목 좀 줘 봐.”
“며칠 쉬면 좋아질 거예요.”
“그래도 붓기는 많이 가라앉았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말해. 태국에도 좋은 병원은 있으니까.”
“병원 갈 정도는 아니라니까요.”
골프 선수들은 부상을 달고 산다.
고된 훈련에 일정이 빡빡한 투어를 소화하다 보면 피치 못한 일이다. 그래도 경기 중에 갑자기 퉁퉁 부어오른 손목을 보고 필상은 대회를 포기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었다.
하지만 모모코는 한사코 거부했고 검사 결과 별다른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더 큰 부상을 염려해 찜질과 마사지를 병행하며 대회를 무사히 끝마쳤다.
어차피 그 대회를 끝으로 한 주간 휴식에 들어갈 예정이어서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만류하지 못했다.
“오빠. 저기 좀 봐요.”
“벌써 도착했어?”
“네. 곧 착륙한대요.”
방콕 수완나폼 공항에서 파타야로 향하는 비행기로 갈아탔다. 수화물이 연결되고 바로 이어진 항공편이 있어 자가용이 아닌 비행기를 이용했다.
피곤하기는 했는지 1시간도 걸리지 않는 짧은 비행에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모모코가 깨워 창 너머 펼쳐진 바다의 풍경을 보노라니 쌓인 피로가 다 날아간 듯 시원했다.
해변에 위치한 특급 호텔에 여장을 푼 둘은 바로 바다로 달려갔다. 섬 투어를 나가 스노클링도 즐기고 수상 스포츠도 즐기며 골프로부터의 해방을 마음껏 즐겼다.
“안녕하십니까?”
“휴양지에서 만나서 그런지 더 반갑네요.”
“모모코. 정식으로 인사해. J&L 이보영 대표님이야.”
“안녕하세요? 미야 모모코에요.”
“일본 최고의 미녀 골퍼를 제가 몰라볼 리가 있나요. 지난 2주간 펼친 멋진 경기들 정말 잘 봤어요.”
“제가 아니라 오빠를 본 거겠죠?”
“아뇨. 사람들은 종종 착각하지만 제가 그래도 나름 전문가잖아요. 빼어난 외모 때문에 오히려 모모코의 기량이 저평가 받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참 안타까워요.”
“고맙습니다.”
사람은 칭찬에 약하다. 특히나 모모코는.
어림도 없는 생각이지만 사십 대 중반인 이 대표를 의식했던 모모코는 그녀의 말 몇 마디에 무장이 해제되었다.
“미사키도 왔네요?”
“네. 캐디는 필요하잖아요.”
“물론이죠.”
“내가 하려고 했는데…….”
“됐네요.”
자신이 캐디를 하려고 했다는 모모코의 말에 다들 웃었다.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진심이라는 것을 필상은 알고 있다.
이미 슬쩍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필상이 자신에게 해 주듯, 자신도 캐디를 해 주겠다는데 그건 능력 밖의 일이다. 체력이 좋다고, 골프를 잘 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닉스 GC에 숙소를 잡아 놨어요.”
“내일 아침에 짐을 옮기고 바로 연습에 들어가겠습니다.”
“연습 라운드나 여타의 스케줄은 필상 씨의 전담 매니저가 된 미사키가 도와줄 거예요.”
“미사키가 회사를 옮기기라도 했나요?”
“네. 제가 AGM 유코 회장에게 부탁해 그렇게 조치했어요.”
그냥 한 번 던져 본 말인데, 이 대표의 일처리가 깔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필상의 시선은 조용히 앉아 있는 미사키에게 향했다. 행여 자신 때문에 직장을 옮긴 게 괜찮은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괜찮나요?”
“그럼요. 프로님과 함께 경기를 하는 것은 제게도 아주 보람된 일이거든요.”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네요.”
사흘 동안 정말 편하게 쉬었다.
필상도 지쳤지만 함께 온 모모코에게도 휴식이 절실했기에 쉬는 동안 바쁘게 지내 왔던 시간들을 정리하며 또한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엄마와 누나들에게도 모처럼 안부를 전했고 자신을 응원하지만 서운해하는 안수현 프로의 불만도 잠재웠다.
그녀는 이번 시즌 세간의 기대를 깨고 상승 무드를 타고 있었다.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아 필상도 기뻤다.
“싸왓디 캅!”
피닉스 GC는 태국이 자랑하는 명문 골프장 중에 하나다.
일찍이 치앙마이를 경험했던 필상은 태국이 낯설지 않았다. 어딜 가나 순박한 눈빛으로 반기는 사람들에게 필상도 친절하게 대하며 연습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주타누간 자매로 인해 태국은 골프 붐이 일었는데, 적잖은 이들이 모모코를 알아본 것이다. 그녀의 출중한 미모는 모자를 눌러쓰고 편한 복장을 걸쳐도 잘 가려지지 않는 듯.
다행이라면 멀리서 구경만 할 뿐, 번거롭게 다가오지는 않는 예의 바른 태도였다. 태국인들은 남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자제하는 것에 익숙했던 것이다.
“모모코. 연습 라운드 같이 안 나갈래?”
“갤러리로 따라만 다닐게요.”
“손목이 아직 안 좋아?”
“괜찮지만 풀스윙은 자제하려고요.”
이미 그녀도 연습을 시작했다.
하지만 웨지를 이용한 숏 게임에만 집중했는데, 필상이 판단컨대 정상적인 스윙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우드나 아이언은 거의 잡지 않더니 연습 라운드까지 거부했다. 그렇다면 한 주 거르고 다음 주에 예정된 대회도 참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노부키한테 연락을 해 봐야겠네.’
뭔가 찜찜했는데 연습 라운드 중에 잠시 짬을 내 통화한 노부키는 역시 필상의 예상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전해 줬다.
그녀가 이미 3일 전에 연락해 다음 주에 열리는 센츄리21 레이디스 골프 토너먼트 불참을 통보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물론 모모코의 부상은 언론에도 알려졌기에 주최 측도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부상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태국에 머물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그게 염려된 것이다.
그래서 그날 저녁 은근슬쩍 떠 봤다.
“모모코. 손목도 안 좋은데 다음 주 대회는 건너뛰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려고요.”
“그럼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어차피 대회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다음 주부터는 저도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해야지요. 여기는 날씨도 좋잖아요.”
“더운 여기보다 일본이 훨씬 나은데?”
“싫어요. 난 여기서 할래요.”
“그냥 털어 놓지?”
“뭘요?”
“꾀병.”
“흐…….”
영악하지 못한 모모코는 부정하지 못한 채 묘한 웃음만 흘렸다. 거짓말은 차마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본래 혼을 낼 사안은 아니었지만 귀여운 모습을 보니 더 이상 닦달할 수도 없었다. 하기야 그녀는 충분히 쉴 만한 자격을 갖췄다.
온전하지 못한 손목으로 무리하는 것보다는 한 주 더 쉬면서 마음의 평화부터 찾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참에 숏 게임을 좀 더 가다듬자.”
“나 가지 않아도 되는 거죠?”
“널 감히 누가 말려?”
“오빠가 가라면 가야죠.”
“아니야. 넌 한 주 정도 더 쉴 자격이 차고 넘치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 얘기도 망설이지 말고 다 해.”
“우와!”
갑자기 확 달려들어 안기는 바람에 중심을 잃은 필상은 모모코와 부둥켜안은 채 소파에서 뒹굴었다.
뭉클한 느낌이 전신의 감각을 모두 마비시키는 것 같은 착각이 이는 가운데 우연찮게 그녀와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눈이 마주친 그녀가 돌연 눈을 꼭 감았다.
떨리는 속눈썹, 심장의 고동이 고스란히 느껴진 필상은 그녀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아니, 본인이 더 간절히 바랐던 순간일지도.
이런 우연찮은 기회가 찾아오기를.
그래서 필상도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본능에 모든 것을 맡겼다.
‘아!’
달콤했다.
세상 어떤 과일이 이보다 달달할 수가 있을까?
그 달콤함에 얼마나 오래 젖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그녀의 몸을 더듬고 있는 자신의 손을 의식한 필상은 모든 동작을 멈추고 그녀의 입술에서 멀어졌다.
숫총각은 아니다.
필상에게도 죽고 못 살던 연인이 있었고 피임도 했었다.
또한 결혼하지 않은 청춘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애정을 표현하는 행위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뜨끔한 것은 아직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능에 충실한 행위 도중에 갑자기 행동을 멈춘 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기에 그것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제야 눈을 살포시 뜬 모모코가 다시 한 번 필상의 품으로 폭 안겨 왔다.
“오빠.”
“응.”
“좋았어요. 우리 딱 거기까지만.”
“그, 그래. 피곤한데 이제 자야지?”
“네. 저 제 침대로 데려다 줘요.”
“뭐?”
“오빠가 안아서 데려다 달라고요.”
새침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부탁을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다만 당혹스러운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모모코를 침대에 뉘이고 돌아 나오던 필상은 바로 그 때, 방문을 열고 나오는 미사키와 마주쳤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그녀가 조금 전 거실에서 있었던 장면을 훤히 아는 것만 같았다.
‘숙소를 따로 얻는다는 걸 내가 왜 말렸던 거지?’
모모코와 한공간에 머무는 것은 익숙해 아무렇지도 않다. 또한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미사키에게 굳이 다른 숙소를 구하지 말고 침실이 3개인 큰 숙소를 구하자고 말했던 사람이 바로 필상이었다.
제 발등을 제가 찍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침실로 들어선 필상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젠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게 아닌가!
묘한 것은 그게 싫거나 되돌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샤워를 끝내고도 양치를 하지 않았다.
***
-일본 투어 후쿠시마 오픈 우승자, 공필상 프로입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는 영어와 태국어로 2번 이뤄졌다.
아시안 투어는 다국적 선수들이 출전하기 때문인데, 그 느낌이 한국이나 일본 투어와는 사뭇 달랐다.
보다 개방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다소 어수선한 가운데 소개받은 필상이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자 생각지도 않았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아시안 투어에 아무런 기록도 없는 선수인데도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아마도 모모코 때문일 확률이 높다.
동반한 태국 선수가 특별하지도 않은데 유난히 갤러리들이 많은 것은 이 대표와 함께 서 있는 그녀 때문인 것 같았다.
‘360야드 파4 홀, 놓칠 수 없지.’
스타트 홀이라 그런지 코스는 짧고 단순했다.
다만 그린이 작고 그린 주변이 벙커 2개와 키가 작은 나무들이 지저분하게 자리해 세컨 샷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드라이브를 잡은 필상은 부드러운 스윙을 보였다.
처음 보는 이들은 마치 드라이버마저 컨트롤 샷을 하나 싶었지만 날아가 떨어진 공의 비거리는 286야드, 짧지 않았다.
230야드부터 삼각주처럼 점점 좁아지는 페어웨이였지만 폭이 좁은 것과는 무관하게 공은 페어웨이 정중앙에 떨어졌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