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생각하는 골프
“누군데?”
“제 매니지먼트 회사인 아네사 전무님이 오빠를 만나고 싶다던데요?”
“나를 왜?”
“뻔한 거 아닌가요?”
“대표도 아닌 사람을 내가 왜 만나.”
“아! 혹시?”
“맞아. J&L 이 대표와 매니지먼트 계약할 거야. 모모코, 난 일본 사람이 아니잖아.”
“일본 사람이 아니어도 일본 투어에서 활약하려면…….”
말하다 말고 뭔가 생각난 것이 있는지 모모코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필상은 즉시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제는 그녀가 남처럼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모코. 난 아직 누구에게도 내 구상을 얘기해 본 적이 없어. 하지만 네게는 해야 할 것 같아.”
“PGA 진출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래. 아직은 터무니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도전해 보고 싶어. 그러기 위해 일본 투어에서 내 가능성을 마음껏 시험해 볼 거고.”
“좋아요. 저도 더 열심히 노력해서 미국으로 갈 거예요. 그러니까 매니지먼트는 오빠가 원하는 대로 하세요.”
늘 귀여운 악마처럼 필상을 들들 볶더니 모모코가 왠지 고분고분해진 것 같다. 그 태도의 변화가 필상이 마음의 문을 조금이나마 연 것과 무관치 않은 듯.
하지만 본격적으로 그녀와 연애 모드를 시작할 의사는 없다. 이제 겨우 자격을 취득한 것에 불과한데, 그 정도로 태도가 바뀌는 것도 우습고 얄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만 이전처럼 마음의 벽을 애써 세울 생각은 없다.
감정에 충실하게, 또 그녀가 아직 어리다는 것을 감안하고 둘 다 나아갈 길을 함께 걸어가는 데 한 치의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는 분명히 할 것이다.
“우승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노부키.”
“일단 숙소에 짐부터 푸시죠.”
대회가 열리는 토츠카 컨트리클럽에 도착했다.
시내 한가운데 이런 명문 골프장이 자리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벚꽃이 만발할 때는 마치 신천지를 연상시켜 골퍼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라운드하고 싶은 코스로 꼽힌다.
클럽하우스 앞에 택시가 서자 곧바로 낯익은 얼굴이 마중을 나왔다. 그녀의 후원사에서 붙여 준 매니저, 노부키다.
이전에는 경계의 눈빛을 보였던 그가 한결 공손해진 것이 눈에 띄었다. 역시 프로는 결과가 있어야 대접을 받는 듯.
“노부키. 숙소 잘못 잡은 거 아니에요?”
“저 그게…….”
“당장 제가 원한 대로 바꿔 주세요. 아닐 것 같으면 우린 그냥 시내에 있는 호텔로 갈게요.”
“아, 아닙니다. 일단 들어가서 좀 쉬고 계세요. 제가 바로 보고하고 조치할 게요.”
모모코가 핏대를 올린 이유는 작은 콘도를 2개 얻어 놨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처럼 침실이 2개인 큰 숙소를 요청했는데 아무래도 위에서 그런 지시가 내려온 것 같다.
아마도 둘의 염문설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듯. 하지만 모모코는 가차 없이 항의했고 제 뜻을 관철시켰다.
곁에 섰던 필상이 좀 난처할 만큼 확고한 태도에 얼른 밖으로 뛰어나가는 노부키에게 좀 미안했다.
“각자의 공간에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전 혼자 있기 싫어요. 무섭다고요!”
“알았어.”
처음에는 그녀와 한공간에 머무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어느새 익숙해져 별다른 감흥은 없었는데, 막상 이렇게 문제가 불거지자 낯빛도 덩달아 달아올랐다.
그녀와 가까이 머문다는 것이 더 각별하게 느껴진 것이다. 결국 노부키는 스위트룸으로 둘을 안내했다. 침실이 3개였고 넓은 거실과 테라스에서는 골프 코스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모모코의 인기는 더 오를 데가 없는 상종가였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줘야 할 입장이었던지 그날 저녁 담당 이사가 직접 찾아와 인사까지 했다.
“내일 프로암인데, 저녁 먹고 연습해야지?”
“그냥 하루 푹 쉬면 안 돼요?”
“안 돼. 난 몸이 근질거려.”
“어디가요? 제가 긁어 줄게요.”
“우리가 노부부냐? 왜 이래?”
“흐흐흐…….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다. 서로 등 긁어 주는 노부부…….”
“얼른 일어나.”
원래 애교가 팡팡 터지는 스타일이다.
귀여운 외모에 웃음도 많아 뭘 해도 깜찍한 모모코가 이젠 자신의 무기가 뭔지 파악한 것 같다. 입을 비쭉 내밀고 필상의 허리를 잡은 그녀가 뒤뚱거리며 따라오는데 돌아서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기 정말 힘들었다.
“제 스탠스가 너무 넓지 않나요?”
“왜? 좋기만 한데.”
“좀 조신해지고 싶어서요.”
그녀의 일명 ‘쩍벌 스탠스’는 지켜보는 이들을 아찔하게 만든다. 실제 필상도 매번 고개를 돌리곤 하는데, 그녀가 핫팬츠를 입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팬들의 관심과 시선을 즐기는 모모코도 뭇 남성 팬들이 자신의 어디를 주시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의 실종 패션만 아니면 괜찮아. 멋진 몸매를 가진 게 죄는 아니잖아.”
“흐흐흐……. 정말이죠?”
“그래. 네 파워 스윙이 바로 넓은 스탠스에서 나오잖아.”
“하지만 어떤 전문가들은 그것 때문에 샷의 일관성이 떨어진다고 하잖아요.”
자신에 대한 평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게 다 옳은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 필상은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만약 특별한 문제가 있다면 교정을 해야겠지. 하지만 요즘 네 샷은 파워풀하고 정교해. 뭐 하러 그런 걸 신경 써.”
“그런가? 여하튼 아이언 샷이나 웨지 샷 스탠스는 이미 전보다 좁아지기는 했어요. 오빠랑 같이 다니면서.”
“거리별로 타깃을 정하고 클럽 별로 10개씩. 웨지는 1m, 아이언은 2m 이내에 넣으면 철수할 거야.”
“아예 밤을 새라는 건가요?”
“나도 옆에서 똑같이 할 거니까 불평은 사절!”
“좋아요!”
프로라고 모든 샷이 타깃에 쩍쩍 붙는 것은 아니다. 거리와 방향까지 고려해 원 퍼팅 거리에 넣는 것은 쉽지 않다.
60도 웨지, 샌드웨지, 갭 웨지, 피칭웨지로 1m 안에 붙이는 것은 그나마 쉽다. 오랫동안 기계처럼 반복해 온 일이라.
하지만 아이언 길이가 길어지면 타깃 주변 2m 안에 넣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하지만 필상은 아무 의미 없는 스윙 연습보다 타깃을 정확히 공략하는 연습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목표가 없는 스윙은 괜히 자신의 스윙 폼을 자꾸 돌아보게 되고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데, 그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그냥 목표로 보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갖고 스윙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좋은 스윙 메커니즘이 만들어진다.
“완벽하면 좋지만 인간이 완벽할 수 있을까?”
“그래도 완벽한 샷을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평소 완벽한 샷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 루틴에 따라 어드레스한 뒤에도 그 완벽한 샷만 고집하다가 정작 타깃을 놓치는 경우를 허다하게 봤거든.”
“호호호. 그런가?”
나란히 타석에 선 둘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연습했다. 골프 얘기라서 샷을 할 때만큼은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기껏 에이밍을 잘하고 정작 어드레스는 엉뚱하게 서는 사람이 많아. 스탠스를 취한 뒤에 공만 노려보고 타깃을 보지 않은 채 스윙하는 사람도 많거든.”
“정말 그래요?”
“그렇다니까. 나도 예외가 아닌지 늘 확인해야 해.”
“큭!”
***
모모코의 후원사가 주최하는 대회였기에 그녀는 어딜 가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멀찍이 비켜섰지만 필상도 함께 찍힌 장면이 많았다. 모모코의 성적 못지않게 필상의 우승도 덩달아 조명이 되는 듯.
이틀 전에 파격적으로 투어 시드를 확보한 필상이 다시 모모코의 백을 메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다.
굳이 캐디를 왜 하는지부터 시작해 둘의 관계에 대한 소설을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도 아주 이상야릇한.
하지만 모모코는 물론 필상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모코가 더는 필상에 대한 엉뚱한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바람직했다.
“우리 목표가 뭐죠?”
“탑 10.”
“에이……. 진짜요?”
“탑 1을 원해?”
“그럼요.”
“그럼 열심히 해 봐. 네 뒤는 내가 든든하게 받쳐 줄 테니까.”
자신과 함께 연승을 거둔 뒤, 2위를 했다.
모모코는 결과에 만족했지만 필상은 그렇지가 않다. 이보미와 승부를 돌아본 필상은 자신이 캐디로서 적절한 역할을 다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남아 있었다.
사적인 감정이 얽매여 보다 냉철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고 앞으로 대회에 임할 때는 가급적 잡담을 줄이고 오로지 승부에 몰입하도록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일 필요를 느꼈다.
“와아! 코스가 너무 예쁘지 않아요?”
“1번 홀은 412야드. 좌측으로 휘는 도그렉 홀이야. 내리막이 많아서 정상적인 비거리보다 20야드는 더 나갈 거야.”
“프로암인데 좀 즐겁게 치면 안 돼요?”
“연습 라운드는 오늘과 내일 두 번뿐이야. 코스 적응부터 완벽하게 하는 게 우선이지. 즐기는 골프를 치고 싶다면 대회 끝나고 따로 해야지.”
“그래도…….”
“굳이 드로우를 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까딱 많이 휘면 헤어 나오기 힘든 숲이거든. 페어웨이 좌측 벙커를 넘기자.”
이제야 필상의 분위기 바뀐 것을 알아 봤다.
웬만하면 짓궂은 농담도 잘 받아 주던 사람이 뜬금없이 차갑게 나오자 모모코는 뾰로통했다. 대충 이해는 하지만 그건 생각일 뿐,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서였을까?
타석에 올라선 모모코는 보란 듯이 드로우 샷을 날렸다. 공이 그녀의 의도대로 잘 날아갔어도 문제지만 하필 필상이 우려한 대로 좌측 숲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캐리가 조금만 더 나왔다면 나무를 넘길 수도 있었는데, 잔가지에 맞은 공은 야속하게도 수림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얼굴이 홍당무가 된 모모코가 티 박스를 내려오며 필상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필상의 반응은 의외였다.
“스트레이트 구질로 치는 게 좋다는 건 확인이 된 셈이네.”
“잘할 게요.”
“트러블 샷 연습도 필요하니까.”
“오빠. 최고!”
단단히 혼이 날 줄 알았던 모모코는 필상이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자 금방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세컨 샷 지점으로 향하던 필상은 그녀의 잘못된 드로우 샷에 대한 장황한 대화의 창을 열어 젖혔다.
“훅이 네 의도보다 훨씬 많이 걸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클럽 페이스가 덮여 맞았어요.”
“그건 결과적 현상이고. 내가 볼 때는 드로우 샷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했던 것 같아.”
모모코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술적인 샷을 구사하는 사람이 그에 대한 의지를 갖지 않으면 대체 어떻게 원하는 샷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뭔가 중의적인 의미가 담긴 말 같지만 너무 복잡한 생각은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그럼 드로우 샷이 필요할 때 어떻게 치라는 거죠?”
“드로우 샷을 해야지. 다만 네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의 한계를 보다 명확히 알고 쳐야 한다는 거야.”
“너무 어려워요.”
“네가 원하면 넌 덕 훅(Duck hook-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심하게 곡선을 그리는 낮은 탄도의 샷)도 가능해.”
“그러니까 제가 너무 심하게 드로우를 걸었다는 거잖아요.”
“그래. 연습이 절실하다는 거지.”
실전에 필요한 다양한 기술을 모모코는 이미 익혔다.
하지만 필상은 조절되지 않는 기술의 위험성에 대해 주지시키기를 원했고 더 높은 곳을 향하기 위해서는 그나마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걸 언급한 것이다.
결국 연습을 통해 휘는 각도도 컨트롤해야만 한다.
모모코는 의도적으로 드로우 샷을 날리기 위해 오른발을 뒤로 10cm가량 뺐으며 인아웃 스윙까지 강력하게 걸었다.
본인은 클럽이 덮여 맞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악성 훅이 나왔는데, 필상이 보건데 그건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마치 모모코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극한의 드로우를 확인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했다.
“어디로 얼마나 칠 거야?”
“저 나무 사이로 50야드 보내면 되지 않을까요?”
그녀는 가급적 공을 앞으로 보내는 선택을 했다.
하지만 필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치면 핀까지 얼마나 남지?”
“80야드?”
“그럼 편하게 그냥 우측으로 25야드 레이 업을 하면?”
“그건 105야드 정도 남겠네요.”
“80야드와 105야드 네 웨지 샷의 온 그린 확률은?”
“둘 다 거의 90%는 넘지 않을까요?”
“나무나 잔가지에 맞지 않고 러프도 넘어 페어웨이까지 보낼 수 있는 확률은?”
“알았어요. 레이 업 할게요.”
필상이 곁에 없다면 그녀도 안전한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자신이 곁에 있어서 보다 도전적인 생각을 했을 수도 있지만 그게 면죄부는 될 수 없다.
스스로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면 캐디와 의견 충돌이 생기고 그로 인해 정확한 스윙에 나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만약 필상이 그냥 캐디였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긴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필상은 그녀의 스윙코치이기도 하다.
실전에서 맞이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직접 그녀와 상의함으로써 합리적인 경기 운영은 물론 생각하는 골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상의 목적이다.
자신이 누구를 가르칠 자격이 되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도 다시 한 번 깨닫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