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45화 (45/354)

045. 투어 시드

물기 때문에 경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인 상황이다. 하지만 굴리는 샷을 할 경우 런의 양을 확신하기 어려워 이케다는 로브 샷을 시도했다.

홀컵을 바로 공략한 과감한 시도였는데, 38야드를 띄워서 보내는 것은 예측하지 못한 다른 상황을 유발시켰다.

오르막을 남기려는 에이밍은 좋지만 핀과 프린지 사이의 비좁은 공간을 염두에 뒀던 공이 바람을 타고 말았다.

그래 봐야 1야드 가량 밀린 것에 불과했으나 프린지에 떨어진 공이 스핀을 먹고 그린 밖으로 튀어 슬금슬금 굴렀다.

벙커가 아가리를 벌린 곳으로.

“황당할 것 같아요.”

“파를 꼭 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작용한 것 같아.”

“퍼팅 라이는 안 보세요?”

“볼 게 뭐 있어. 그냥 바로 쳐야지.”

실은 우측으로 두 컵은 봐야 할 훅 라이다.

하지만 필상은 홀컵 끝을 보고 그냥 쭉 밀어 칠 생각이다. 거리나 잘 맞추면 만족할 6.5m 퍼팅이었기 때문이다.

미사키는 필상이 지나치게 마음을 놓는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럴 리가 없다. 필상은 들고 있는 퍼트를 휘휘 저으며 최적의 힘 조절을 가늠하고 있었다.

파악!

이케다의 벙커샷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다.

마른 모래였다면 그 벙커샷은 그린을 훌쩍 넘을 크기였다. 하지만 공은 턱을 넘어 겨우 프린지에 떨어졌고 공에 붙은 모래 때문에 런이 없어 힘겹게 그린에 올라왔을 뿐이다.

필상은 그의 공이 놓인 모래의 상태를 면밀히 확인했고 한 수 배웠다. 모래의 크기나 무게도 중요하지만 젖은 모래를 어떻게 퍼 올리는지 실전에서 확인했던 것이다.

고다이라의 반대편에 놓인 롱퍼팅에서 그린 스피드를 확인한 필상은 이번에도 심장 떨리는 강한 스트로크를 시도했다.

“와우! 너무 세지 않나요?”

“아닙니다.”

최 프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하게 굴러가던 공의 스피드가 줄었다. 홀컵 바로 앞에 우뚝 멈춰선 공은 떨어질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필상은 곧바로 다가와 탭인 파를 밀어 넣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세게 치고도 정지한 공이 얄미웠지만 더 이상 세게 칠 수는 없었기에 파로 막은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린 밖으로 물러났다.

악몽은 동반자들을 덮쳤다.

3.1m 파 퍼팅을 놓친 고다이라는 이제 한 자리 언더로 떨어졌고 2.7m 오르막 파 퍼팅이 짧았던 이케다는 큰 심적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19 공필상/ -15 이케다 유타/ -12 김경태]

비교적 비와 무관했던 날씨의 덕을 본 김경태가 오늘만 6언더를 몰아치며 3위까지 올라선 것은 반가웠다.

8개 홀이 남은 상황에 7타 차였기에 크게 부담스럽지 않아 그의 정교한 플레이를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했다.

현재 JGTO에서 활약하는 한국 프로의 수는 적지 않다. 해가 갈수록 확대되는 여자 투어와는 달리 KPGA의 대회 수와 상금 규모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 남자 투어의 규모가 훨씬 크다. 여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결과가 나쁘지 않기 때문이며 어쩌면 한국 여자들처럼 확실한 결과를 내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419야드 파4 홀인 11번에서 필상은 2온에 실패했다.

게다가 어프로치도 파가 보장될 거리에 붙이지 못했으나 이케다도 모처럼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잡지 못했다.

132야드의 세컨 샷을 온 그린에 실패했으며 칩샷은 필상보다 더 형편없어 결국 나란히 3온 2퍼팅으로 타수를 잃었다.

빈틈을 보일 것이라고 여겼던 필상이 굳건하게 버티자 오히려 이케다가 먼저 무너졌다. 유일한 위기였던 16번 홀에서 세컨 샷을 벙커에 빠뜨렸지만 2위와는 1타 더 벌어졌다.

힘차게 휘두른 이케다의 드라이버 티샷이 좌측으로 악성 훅이 나면서 해저드로 향했기 때문이다.

“끝났네요.”

“그러게요.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기적을 일궈 냈어요.”

“뭐 저런 괴물 같은 녀석이 다 있죠? 하하하.”

이번 홀에서 5타 차로 벌어지면 승부는 끝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미 승기를 잡은 필상이 실수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느새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마치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우승하는 필상을 축하라도 하듯이.

-18언더. 이 대회 베스트 스코어네요.

-코스 세팅이 쉽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악천후까지 이겨낸 공 프로는 우승은 물론 시드를 받을 자격이 차고 넘칩니다.

-새로운 강자의 출현인가요?

-그의 이번 대회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는 276야드에 불과했습니다. 순위에 들지도 못하죠. 하지만 2위와 이제 6타 차까지 벌린 채 우승 파 퍼팅만 남겨 두고 있습니다.

-그의 우승 비결은 역시 자로 잰 듯 정확한 아이언 샷이라고 봐야 하나요?

-아이언 샷은 물론 모든 스윙과 경기 운영이 탁월했습니다. 56번의 드라이브 티샷 중에 페어웨이를 놓친 경우는 단 3번뿐이니까요. 게다가 평균 퍼팅 수도 1.74로 1위입니다.

마지막 파5 홀에서 세 번째 샷을 그린에 올릴 때만 해도 침착했다. 꿈에 그리던 영광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그린에 올라서는 자신을 소개하는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와 18번 홀에 구름처럼 몰려든 갤러리들의 열렬한 환호성을 들은 뒤, 비로소 현실감이 느껴졌다.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너무도 심장이 심하게 요동쳐 비교적 쉬운 라이의 4m 버디 퍼팅도 성공하지 못했다.

옆에서 미리 축하를 건넨 미사키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끝났어요.”

“…….”

“프로님?”

“응? 뭐라고?”

“정신 차리세요. 첫 우승의 순간을 만끽하셔야죠!”

“그, 그래야지.”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었다.

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 순간 한 순간 너무도 간절했다. 모친과 누나들의 뼛골을 빼먹으며 좋다는 대학까지 나와 전공과는 상관도 없는 골프에 모든 관심이 빼앗길 때만 해도 이게 과연 옳은 길인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캐디 일을 통해 생활과 마음의 안정을 얻었고 골프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확신을 가진 뒤에도 수시로 떠오르는 수많은 번민 때문에 괴로웠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골퍼의 꿈은 접었을지도 모르지!’

캐디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꼈지만 뒤늦게 프로 골퍼가 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무리수였다.

그래서 더더욱 혼신을 힘을 다했고 생각보다 훨씬 빨리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실로 믿기지 않는 소중한 결실이다.

이게 꿈의 마지막은 아니지만 진정한 프로 골퍼가 된 사실은 자신이 이때까지 이뤄 왔던 그 무엇보다도 값진 결과였다.

자신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수없이 많은 시선을 받으며 우승 퍼팅을 집어넣은 필상은 두 팔을 높이 치켜들고 포효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졌고 샴페인을 들고 와 마구 뿌려 대는 동료는 없었지만 진심 어린 축하 인사가 이어졌다.

“공 프로. 축하해!”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2등하고 상금은 내가 챙겨 가니까.”

“하하하. 저는 그보다 훨씬 소중한 것을 얻었습니다.”

“아! 그렇군! 이제 얼굴 자주 볼 수 있겠네.”

“그러길 바랍니다.”

“기회 되면 언제 술 한잔하자고.”

“네.”

이케다는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넸다.

JGTO와의 인연이 훌륭한 마인드를 갖춘 그와 함께 이뤄진 것도 반가운 일이었다. 이럴 때 가족들이 함께였다면 더욱 의미가 깊었을 것 같았으나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축하해!”

“축하해요.”

“정말 오셨네요?”

“그럼 와야죠. 난 필상 씨가 우승할 줄 알았거든요.”

“말도 마십시오. 얼마나 버거웠는데요.”

“내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요?”

“고맙습니다. 일단 스코어 카드부터 제출하고 오겠습니다.”

이동하는 필상에게 팬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사인을 원하는 갤러리들에게는 정성껏 사인도 해 줬다. 유창한 일본어로 감사를 표하는 필상을 팬들은 신기해했다.

그들에게 필상은 낯선 외국 선수였던 것이다.

***

요란할 것 같았지만 필상의 우승 소식은 반짝이다 말았다.

보수적인 일본 골프계는 남자 투어마저 한국 선수들에게 잠식되는 것에 상당히 민감한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은 아쉽지 않았다.

일본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두 달 남짓인데, 기대 이상의 결실을 얻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이루지 못한 투어 시드를 확보했고 앞으로 2년간 자신의 가능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물론 이제부터는 순위에 따른 상금도 받을 수 있다.

‘축하해요!’

“너도 정말 잘했어.”

‘잘하긴 뭘 잘해요. 오빠가 있었다면 우승도 했을 건데!’

“그렇지 않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야.”

‘전 지금 공항으로 이동해요.’

“벌써 요코하마로 가는 거야?”

‘아뇨. 우리 거기로 가고 있어요.’

“여긴 왜?”

만류할 수 없었다. 이미 공항이라기에.

하는 수 없이 필상은 후쿠시마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고 멋진 공항 패션을 걸친 모모코와 재회했다.

“오빠!”

필상을 보자마자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는 모모코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공항에는 그녀를 알아볼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려와 안기는 그녀를 포근하게 안아 줬다.

필상도 너무 반갑고 묘한 감정에 휘말렸던 것이다. 사제지간이라고 포옹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여기저기서 스마트폰을 들이대는 사람들이 생기기 전에 얼른 자세를 푼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필상은 서둘러 모모코와 함께 공항을 벗어났다.

“왜 시무룩해?”

“치! 정말 우승하다니, 난 이제 어떡해요?”

“하하하. 뭘 어떡해. 달라진 것은 없어.”

“네?”

“대회 참가는 선별적으로 할 거야. 그리고 네 코치를 하는 것은 변함이 없을 거야. 매주 백을 멜 수는 없겠지만.”

“정말 앞으로도 제 캐디를 해 줄 거예요?”

“그것도 선별적으로.”

“오빠!”

택시 안이어서 품에 착 안기는 모모코를 오랫동안 안아 줬다.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쳐다보다 필상과 시선이 마주친 뒤로는 뒷좌석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필상의 눈빛이 꽤나 날카로웠던 듯.

“앞으로 7주간은 대회 일정이 전혀 없어.”

“아! 다음 주가 JPGA 챔피언십이죠?”

“응. 참가자가 이미 다 결정되었지. 게다가 셋째 주는 디 오픈이 열리고 여름 휴식기에 접어들거든.”

필상으로서는 아쉽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했다.

좋은 컨디션을 이어 갈 대회가 없는 것은 안타깝지만 본격적으로 투어에 참가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중에 가장 우선이 바로 매니지먼트 계약을 만료하는 것이다. 이 대표와 저녁 식사를 하며 긍정적인 의사를 밝혔고 그녀는 구체적인 계약서를 작성해 근일간 다시 오겠다고 했다.

“JLPGA는 7, 8월 내내 매주 대회가 있어요.”

“그렇더군. 상금 규모는 전체적으로 작지만 대회 수는 24:36으로 여자 투어가 훨씬 많더라고.”

“제게는 좋은 일이지만 정말 그래요?”

“응. 그러니까 조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일정을 잡자. 7월에 4개, 8월에 5개 대회인데, 참가 신청은 몇 개나 했어?”

“……다요. 처음에는 안 그랬어요. 그런데 자꾸 초청이 들어와 반가운 마음에 오케이를 했죠.”

이해할 수 있다.

퀄리파잉을 통과해 올라온 그녀에게 모든 대회에 참가 자격이 주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인기가 높아 20개 대회를 신청이 이뤄졌는데, 첫 우승을 거둔 뒤 상황이 달라졌다.

메이저 대회 우승을 거둬 출전권은 자동으로 부여되지만 이미 참가 자격을 주지 않았던 대회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모모코의 불참이 불러올 팬들의 성화가 두려워 대회 주최 측들이 매니지먼트사를 통해 적극적인 초청 의사를 밝혔다.

적잖은 초청 비용까지 제시하면서.

모모코는 그걸 넙죽 받아들인 것이고.

“날도 더워지는데 그런 강행군은 오히려 독이 될 거야.”

“그러니까 오빠가 정해 줘요. 회사에는 제가 말할 게요.”

“7월 셋째 주, 8월에는 둘째 주, 9월에는 첫 주를 쉬고 일본여자 프로골프 선수권대회에 출전하면 가장 나을 것 같아.”

“좋아요.”

필상의 선택은 절묘했다.

빠지는 대회는 묘하게도 상금이 적은 대회였다.

하지만 2주 출전하고 1주 쉬는 스케줄이기에 컨디션 조절을 위해서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빠지는 대회 주최 측에서는 난리가 나겠지만 그건 매니지먼트사의 몫이다.

다음 날 둘은 도쿄를 거쳐 요코하마 가나가와 현으로 향했다. 올 시즌 새롭게 신설된 시세이도 아네사 레이디스 오픈이 열리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근데 오빠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

“아빠는 아니니까 떨지 마요.”

“떨긴 누가 떤다고!”

“치! 이제 신임을 좀 얻었다 이건가요?”

“아니. 내가 아쉬울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뭐에요!”

사실이다.

일방적인 황당한 인터뷰를 한 당사자는 모모코다.

별 반응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팬들이 필상을 곱게 봐주는 것은 아니다. 국민 여신으로 추앙받는 그녀가 별 볼 일 없는 한국 출신 캐디에게 마음을 뺏긴 것을 안타까워한다.

물론 필상이 투어 시드를 확보하며 더 따가운 시선을 보낼 확률이 높지만 필상은 그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한 바가 없지 않던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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