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운이 좋군!
“어, 어?”
우승을 향한 시험은 6번 홀에서 시작되었다.
404야드의 우측 도그렉 홀인데, 페어웨이 우측 벙커를 넘기는 공략은 어렵지 않다. 250야드만 넘기면 댄스 플로어(Dance floor-티 그라운드와 그린 사이의 잔디가 잘 깎여진 지역)여서 무난하게 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하늘 높이 치솟던 공이 돌연 좌측으로 휘었다. 드로우 샷을 구사한 것도 아닌데, 하늘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하필 이 순간에 지상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훅 바람이 허공을 장악하고 있을 줄이야!
“바람까지 심해지고 있어요.”
“좌측 벙커에 빠졌지?”
“네. 그래도 160야드 정도밖에 남지 않아서 괜찮을 거예요.”
“일단 확인해 보자.”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되는 게 골프다.
특히나 주로 4인 플레이를 하는 아마추어들은 내기를 할 경우 그런 경향이 더욱 짙다. 물론 투어 대회는 130여 명 안팎이 순위를 다투기 때문에 무관한 것 같지만 다르지 않다.
일단 동반자들과의 경쟁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상대의 스윙 하나하나에 영향을 받는다. 당장 지금의 경우도 그랬다.
귀신처럼 스트레이트 구질을 때려 내던 필상의 공이 휘는 것을 본 동반자들은 페이드 샷을 구사해 페어웨이를 지켰다.
“고마워. 공 프로.”
“하하하! 다행입니다.”
필상의 대답이 애매모호하게 들렸는지 이케다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도발은 자신이 먼저 했으니 다행이라는 말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경쟁이 시작되면 사소한 것도 신경이 쓰여 가급적 상대를 건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받아들이기 나름일 뿐.
아무튼 세컨 샷 지점으로 향하던 필상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공이 놓인 위치가 정상적인 스윙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남은 거리는 162야드, 벙커 턱은 8번 아이언 탄도로 넘기는 데 무난했지만 스탠스가 나오지 않았다.
왼쪽 다리를 벙커 턱에 걸치기도, 밑에 두기도 어정쩡했다.
“샌드웨지.”
“레이 업 하시게요?”
“응. 억지로 힘든 샷을 구사할 필요가 없잖아.”
현재로서는 3온 1퍼팅이 정답이다. 창조적인 샷을 구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다.
아직 4타 차가 유지된 상태였고 비에 젖은 모래도, 하다못해 높이 띄운 아이언 샷이 바람을 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2온을 고집하다 미스 샷이 나오면 스스로 불운의 늪으로 기어들어 가는 꼴이 된다는 점을 상기했다.
하지만 너무도 쉽게 레이 업을 선택하는 필상을 보며 미사키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필상이라면 험난한 상황을 돌파해 좋은 샷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반면 무섭도록 차가운 판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리는 모습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퍽!
최선의 샷을 포기한 것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았던 걸까?
굳이 모래까지 퍼 올릴 필요가 없는데, 필상의 레이 업 샷은 젖은 모래를 사방에 날리며 겨우 벙커에서 벗어났다.
공이 페어웨이에도 이르지 못한 채 러프에 빠진 당혹스러운 결과에 필상은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벙커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감사하자.’
그리 생각하고 싶지만 그게 될 리가 없었다.
바람은 불가항력이었지만 지금 레이 업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믿었다면 다른 생각을 지웠어야 하건만 대체 왜 대충 때린 것인지 용납되지 않았다.
“146야드에요.”
“피칭.”
“…….”
“왜?”
“9번 아이언으로 컨트롤 샷을 하시죠?”
미사키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필상의 클럽 선택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필상의 심란한 마음을 읽고 한 타임 죽이고자 나선 것이다.
필상의 콧등에 깊은 주름이 잡혔지만 잠시 빗방울에 얼굴을 적신 그는 그녀가 내민 9번 아이언을 순순히 받아 들었다.
미사키의 판단이 더 적절했기 때문이다.
피칭웨지로 160야드까지 날릴 수 있지만 공이 질긴 러프에 잠겼고 비로 인한 거리 손실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탄도를 높일 경우, 바람의 영향까지 받을 가능성이 높다.
‘우측 한 클럽?’
더 우측을 봐야 할 것 같지만 필상의 의도는 펀치 샷(Punch shot-팔로우 스로우를 낮고 길게 유지해 피니시를 어깨까지만 올리는 샷, 낮은 탄도로 일직선으로 날아가면서도 백스핀이 걸려 멈추는 샷)이었다.
공을 허공에 띄워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람에 샷의 결과를 맡길 수는 없었다. 문제는 힘 조절인데 빈 스윙을 여러 번 해도 쉽게 이미지가 맺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늦장 플레이를 할 수도 없던 필상은 자신의 감각을 믿고 칠 수밖에 없었다.
“최 프로님. 어떨 거 같아요?”
“걱정 마십시오. 잠시 흔들릴 수는 있지만 금방 냉정을 되찾을 겁니다.”
“우천 취소 가능성은 없을까요?”
“이미 경기를 마친 선수가 있는데 그럴 수는 없죠. 비가 많이 오면 하루 순연은 될 수 있지만.”
“그냥 비나 펑펑 왔으면 좋겠네요.”
언급한 대로 이 대표와 최 프로가 경기를 관전 중이었다. 진즉에 도착했지만 멀찍이 지켜보며 응원만 보탰다.
집중해야 할 필상에게 그 어떤 방해도 되지 않기 위해.
따악!
필상의 경기 템포는 굉장히 빠른 편이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정확하기 때문인데, 처한 상황이 쉽지 않은 터라 이번에는 지나칠 만큼 여러 번 빈 스윙을 했다.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번 대회 내내 거의 완벽한 플레이를 이어 왔던 단독 선두가 아마추어와 같은 실수를 한 뒤였기에 지켜보는 갤러리들도 가슴을 졸이며 필상의 샷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원하는 스윙이 만들어졌다.
헤드업은 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공이 어떻게 날아가는지 궁금했던 필상은 피니시를 얼른 풀고 그린을 바라봤다.
“짧은가요?”
“아닙니다. 펀치 샷이라서 굴러서 올라갈 겁니다.”
최 프로의 판단은 정확했다. 하지만 공은 멈추지 않고 계속 굴러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장을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비에 젖은 풀에 대한 저항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쳤는데, 오히려 공이 물기를 타고 미끄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그린에 올라선 뒤 공의 스피드가 줄어 겨우 에이프런에 멈춘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3온 1퍼팅을 염두에 뒀던 필상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경험이 일천한 것이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급기야 공필상 선수의 보기를 보게 되나요?
-59개 홀을 보기 없이 진행한 것만 해도 이번 시즌 최고 기록입니다. 하지만 또 모르죠? 저 긴 퍼팅을 집어넣을지도.
-첫날 9m 퍼팅을 성공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죠. 그린이 젖었고 그답지 않은 플레이가 나온 뒤가 아닙니까?
-그답지 않은 플레이라……. 시드가 없는 선수가 우승하는 진풍경을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한국 골프의 기세가 등등하지만 사실 남자는 그게 아니었잖습니까!
-그렇지요. 여자에 비해 남자 선수들은 최근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는데, 시드도 없는 선수가 탑 랭커들을 압도하는 놀라운 기량을 보이는 모습은 기존 선수들은 물론 팬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줄 것 같습니다.
비가 불러온 불행은 아직 그치지 않았다.
필상은 그린 위의 물기를 감안해 충분히 길게 쳤는데도 공은 홀컵 1.5m 앞에 갑자기 서 버렸다.
니 낙커(Knee knocker-선수가 심리적 부담을 가지는 2∼4피트 떨어진 퍼팅) 상황에 갤러리들의 탄식이 먼저 터졌다.
퍼팅은 필상이 자신감을 가진 부문이다. 그런데 그 퍼팅마저 기대를 저버리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동반자들이 파 세이브를 거두며 홀 아웃을 하자 절로 한숨이 터졌다. 하지만 필상은 남은 퍼팅에 집중했다.
퍼팅 라인에 유독 물이 많아 다시 멈출 수도 있다고 판단한 필상은 과감한 스트로크로 정면 승부를 걸었다.
탕!
족히 5m는 굴러갈 스트로크였다.
만약 물기의 저항이 생각보다 적다면 홀컵을 지나 다시 애매한 거리가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기에 강한 퍼팅 스트로크를 끝낸 필상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다행히 공은 뒷벽을 때리는 청명한 소리를 남기고 홀컵 아래로 떨어졌다. 그 공을 집어 드는 필상에게 갤러리들의 뜨거운 응원이 쏟아졌다.
필상이 겪은 어려운 상황을 그들도 이해하고 있었고 결국 위기를 돌파해 보기로 잘 막아 낸 것에 찬사를 보낸 것이다.
아마추어들은 미스 샷이 나온 뒤부터 정상적인 스윙이 잘 되지 않는다. 대부분 실수를 연발하며 스스로 무너지는데, 실수를 인정하고 평정을 되찾으면 바로 그게 고수라 하겠다.
“3타 차면 아직은 여유가 있죠?”
“정상적인 환경이라면 그런데, 날씨가 하필이면…….”
최 프로도 감히 단언하지 못했다. 필상의 골프 여정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로서는 궂은 날씨가 원망스러웠다.
냉정하고 침착한 성품은 익히 알지만 골프가 참으로 묘한 것이 보기를 기록한 상황에서 경쟁자가 버디를 잡으면 2타는 금방 따라붙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타 차로 쫓기면 언제 경기가 뒤집어질지 모른다.
2009년 PGA챔피언십에서 연습장 공 줍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골프를 배운 양용은 프로가 모두가 만나기를 꺼려한 천하의 타이거 우즈를 상대로 역전승을 거둘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건 의지의 문제야!’
필상도 냉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본인의 경험이 일천한 것은 알지만 그게 플레이를 방해하는 것보다 그와 같은 불안한 생각이 스윙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적 문제라고 판단한 필상은 남은 전반 홀들을 꿋꿋하게 파로 막아 내며 팽팽한 승부를 이어 갔다.
어차피 주어진 조건은 동일하다.
기량의 고하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진 사람이 승부의 외나무다리에서 먼저 떨어진다는 생각은 이케다도 마찬가지였다.
비도 오고 바람도 강해져 이대로 경기를 진행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의문이 드는 가운데, 그야말로 피가 튀는 처절한 승부가 이어졌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네. 질척거릴 만큼 젖은 잔디 위에서 정상적인 샷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꾸역꾸역 파를 만들어 내네요.
-고다이라가 먼저 나가떨어진 것은 좀 아쉽네요.
-선두와 7타 차를 극복하기에는 버겁다고 본 거죠. 그런 마음이 드는 순간, 우승은 이미 그와 멀어졌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이케다와 공 프로의 매치플레이라고 봐도 되겠군요.
-이케다의 기량은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신인에 불과한 공 프로가 이런 상황에서도 좋은 경기를 펼치는 것은 참으로 대단해 보입니다.
-어? 지금 저 티샷은 너무 짧지 않나요?
10번 홀은 455야드의 파4 홀이다.
비교적 전장이 길지만 평소라면 프로 선수 누구라도 거리에 대한 부담은 크게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빗줄기가 거세고 맞바람까지 부는 상황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아너로 나선 이케다가 있는 힘껏 때리고도 280야드밖에 나가지 못했다. 평균 드라이버 비거리가 296야드인 그가 작정하고 때리면 330야드도 날린다는 것을 감안하면 필상으로서는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필상은 의도적인 플랫 스윙(Flat swing-스윙궤도를 옆으로 수평하게 가져가는 스윙)을 구사했다. 낮은 탄도를 만들어 바람의 영향을 최대한 줄이고 런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일부러 굴린 건가요?”
“응. 정말 많이 구르네.”
“왜 백스윙을 플랫하게 가져가나 했더니 이런 경우에는 나름 괜찮네요.”
“이 코스가 좀 특이한 경우지. 보통 비에 젖은 잔디는 런이 오히려 줄어든다는 게 통설이잖아.”
굳이 원인을 찾자면 잔디의 결이 그린 방향이라는 것이다. 평소 잔디를 깎을 때, 지그재그로 깎지만 하나 더 고려하자면 태양이 지나는 방향도 잔디의 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캐스터가 당황할 정도로 필상의 드라이브 티샷 캐리는 짧았지만 공이 선 위치는 이케다와 거의 비슷했다.
“운이 좋군!”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
평생 몇 번 들어 보지 못한 말을 이케다에게 듣게 될 줄이야! 하지만 그 한 마디를 들은 뒤, 신기하게도 필상의 심장 박동 수는 평상시처럼 고요함을 되찾았다.
176야드 남은 상황에 6번 아이언을 잡은 필상의 강력한 세컨 샷이 먼저 그린에 오르자 이케다의 눈동자는 흔들렸다.
빗줄기를 뚫고 당당히 그린 위에 멈춰 선 하얀 공이 그의 평정심에 불을 지른 것 같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아이언이 족히 30cm 가까운 잔디를 퍼냈고 공은 그린에 한참 모자란 곳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케다가 뒤땅을 다 치네요!
-차라리 유틸리티를 잡고 가볍게 쳤어야 하는데, 공 프로가 아이언으로 올리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보란 듯이 따라 한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맞바람에 비의 저항도 상당한데 6번 아이언으로 온 그린, 공 프로는 낮은 탄도의 샷을 정말 기가 막히게 구사하는군요.
-아이언샷 컨트롤은 가히 일품입니다. 필요에 따라 탄도를 조절하는 능력, 저건 절대 하루 이틀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량이 아닙니다. 그의 굉장한 장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케다도 잘 붙이면 되죠?
-핀이 그린 우측 끝에서 4야드 지점에 바짝 붙어 있고 라이도 벙커를 향해 내리막이라서 쉽지는 않을 겁니다.
[다음 편에 계속....]